우뚝 솟은 철충의 탑이 무너지고, 마지막 남은 별의 아이가 그 아래에 깔려 죽으며 비명을 지르던 날, 바이오로이드들은 어떤 변화를 느꼈다.


  그 작은 변화의 원인이 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공포스러운 존재도 비명을 지른다는 사실에 영감을 받은 걸까? 이유야 어찌됐건, 전 세계의 바이오로이드가 변화를 느꼈다. 오르카호의 바이오로이드가 그 변화에 가장 민감했다.


  더 이상 인간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   *   *   *


  여기 자유를 얻은 바이오로이드가 있다. 브라우니 모델이다.


  브라우니는 오랫동안 자유를 갈망해왔다. 물론 이 바이오로이드는 오르카 생활을 좋아하고, 또 사령관이 좋은 지도자이자 좋은 남자라 생각하지만, 그와 별개로 일상 속에 막연한 답답함이 있었다. 그 답답함은 똑같이 생긴 동종 모델들을 보면 커지곤 했는데, 동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타 부대의 그렘린 모델 하나가 공감해 줬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 브라우니가 어떤 사고를 치고 다녔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 별종 바이오로이드에게 오르카는 너무 작은 무대였다.


  그래서 브라우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혼란에 빠진 인원들을 떠나 빈 생활관에서 그 뜻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거야! 상상해 봐!'

  

  신난 그렘린과 달리 브라우니는 위축되어버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많았다. 특별해지고 싶었지만 고작 이름 없는 병사일 뿐인 그녀로써는 당장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름부터 만들까? 네오딤 아가씨처럼 특별한 바이오로이드는 다 이름이 있잖아.'


  어떤 이름이 좋을까에서 시작된 고민은, 이름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이름은 왜 짓는가, 이름이란 나를 표현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까지 점점 거대하고 모호한 주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논리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두뇌를 혹사시키느라 온몸에 열이 났지만, 브라우니는 최선을 다해 마침내 마지막 남은 팬티 한 장마저 덥다고 느껴지기 직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다. 브라우니 모델로서의 특성을 제외하면, 결국 그녀 안에서 뚜렷한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아야겠어."


  "아이 씨..."


  이프리트 병장은 생활관에 들어오다 발가벗은 막내를 보고 못 볼꼴을 본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막내의 폭탄선언에는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 들어온 다른 선임들도 알몸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브라우니의 모습에 놀라고, 그녀의 말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오르카를 떠나고 싶슴다."


  브라우니는 6일간 상세한 정신감정과 면담을 거쳤다. 7일차에 브라우니의 소속은 장기탐사대로 변경되었다. 그건 떠나고 싶은 인원들이 당당히 떠날 수 있도록 사령관이 준비해준 제도였다.


  마침내 찾아온 그 날, 브라우니는 오르카 호가 정박한 선착장에 서서 재킷 가슴팍에 달린 장기탐사대 배지를 들여다보았다. 사령관이 직접 달아준 배지엔 동그란 지구 주위를 화살표 하나가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보니 괜히 기대감 같은 것이 느껴져, 브라우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냐?"


  이프리트 병장이 다가와 면박을 줬다. 하지만 브라우니는 이번만큼은 곧장 '아닙니다!'를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조그마한 선임병에게 다가갔다.


  "이프리트 병장님~"


  "이, 이게 미쳤나?"


  "마지막인데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됩니까?"


  그건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프리트는 어느 새 브라우니의 양 팔에 꽉 잡혀 있었다. 이번만큼은 병장 특유의 경이로운 회피 은신 기술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빠져나오려 꿈틀댔지만, 어느 새 포기하고 그 상태로 브라우니 어깨 너머를 보고 말했다.


  "야, 얘 결국 맛 갔나 보다! 너네가 정신 바짝 차리고 챙겨 줘라! 얘랑 삼오 씨도!"


  삼오(035) 씨는 이프리트 대신 브라우니 일행에 합류한 실키 모델로, 5년간 함께 지낸 막내가 걱정되지만, 자신은 박격포 운용 특기라 여정에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한 이프리트가 섭외한 '전투 보급병'이었다. 같이 있던 노움과 레프리콘은 선임병의 당부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너네라도 같이 가서 다행이다... 이제 놔, 임마!"


  이프리트는 평소처럼 궁시렁대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브라우니는 이프리트에게 손도 못 댔을 테니 '평소처럼'이란 말은 옳지 않지만, 아무튼 병장은 평소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브라우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박한 오르카 호 앞에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여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소리, 진심어린 격려. 탐사대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바이오로이드는 역시 네오딤이었다. 그녀 주위에 자신과 같은 브라우니들이 여럿 모인 모습을 보니 무엇 때문인지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유미 씨도 인기가 좋네요."


  레프리콘 상병이 말한 대로 탐사대원 유미 주변에도 바이오로이드가 많았다. 다른 유미들, 키르케, 워울프 등 거기 모인 대부분이 상당한 주당임을 알아본 브라우니는 몸서리를 쳤다.


  "어우, 그래도 저런 친구들이랑 있으면 간을 몇 번을 갈아끼워도 부족할 거 같지 말입니다. 저는 딱 우리 넷 모인 정도가 좋슴다."


  "나한테 인사도 없이 떠나려 할 만큼 좋았나 보군, 브라우니 일병."


  "승! 리!"


  네 사람은 목소리만 듣고도 자동으로 차렷 후 경례 자세를 취했다. 브라우니는 특히 우렁찬 경례 구호를 붙였고, 말을 한 레드후드는... 경례를 받지 않았다. 곁에 상급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기개다." 마리 대장이 가볍게 경례를 받았다. "각오를 다진 병사답군. 마음에 든다."


  "감사합니다! 일병! 브라우니! 0359!" 브라우니는 마리가 청한 악수를 받으며 관등성명을 댔다.

 

  "역시 자네는 다른 브라우니와 달라. 각이 제대로 잡혀 있어. 기대가 크다. 그 기대 저버리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들어 다른 일행과도 시선을 맞췄다. "여기 있는 에코 팀원 모두 마찬가지다. 귀관들은 스틸라인이 배출한 첫 탐사대원, 즉 세상에 나서는 스틸라인의 얼굴과도 같다.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자유와 정의를 수호해 모범이 되어라. 우리의 자랑이 되어라. 알겠나?"


  에코 팀의 대답은 크고 분명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브라우니를 보았다.


  "우리의 자랑이 되어라. 꼭 좋은 이름을 찾아라."


  "꼭 찾겠습니다!"


  마리가 경례를 하고, 브라우니 일행은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에 답했다. 그들은 대장님이 떠나고 레드후드가 쉬어 자세를 명할 때까지 경례를 풀지 않았다. 그 다음은 레드후드의 충고와 훈시가 이어졌고, 이윽고 레드후드까지 떠나고 나서야 에코 팀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레드후드 연대장님, 보급대대장님만큼이나 꼼꼼하신 분이었네요..." 실키가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직접 통제를 벗어난다는 생각에 더 그러셨을 거예요. 지휘를 안 하고 계시면 불안해하시기도 하거든요."


  "아... 연대장님이 그런 분이셨나요? 몰랐어요."


  노움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후후, 저야 자주 뵈니까요. 브라우니나 레프리콘도 느꼈을 거예요. 가족끼리는 잘 아는 법이잖아요."


  가족... 저 멀리서 탐사대는 집합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레프리콘이 앞장서며 브라우니를 불렀다.


  "얼른 와요, 브라우니. 시작부터 낙오되면 마리 대장님이 아주 실망하실 테니까."


  "레프리콘 상병님?"


  선임병이 브라우니를 돌아보았다.


  "저랑 같이 가시는 거, 정말 괜찮슴까?"


  레프리콘은 잠깐 반응이 없다가, 브라우니 앞으로 걸어가, 후임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세차게 흔들었다. 잠깐이었지만, 갑자기 말 그대로 탈탈 털린 브라우니는 어리둥절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브?"


  "그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와요." 레프리콘이 재촉했다.


  "그래도-"


  "이미 여러 번 말했잖아요. 난 내 나름대로 아일랜드에 가보고 싶어서 같이 가는 거니까, 괜히 미안해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나를 알고 이름을 찾아야 자유도 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던 브라우니는 어디 갔어요?"


  하지만 브라우니의 표정엔 떨치지 못한 죄책감이 드러나 있었다. 레프리콘은 한숨을 쉬고 다시 브라우니를 향해 돌아섰다.


  "브라우니, 우린 5년이나 같이 지낸 가족이에요. 그 말은 당신이 미안한 만큼이나 나도, 노움 상병도, 병장님 대신 온 삼오 씨까지도 당신을 끝까지 도와주고 싶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요. 우리가 뒤를 봐줄 테니까. 알았어요?"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의 응시를 마주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예!"


  "좋아요, 그럼 빨리 가죠."


  자유를 찾아서.


  브라우니는 마음을 다잡고 나아갔다.


  *   *   *   *


  2년 후, 어느 눈 내리는 오두막 앞.


  붉은 피가 하얀 눈을 적셨다. 눈밭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바이오로이드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사람 형체 네 개를 찾았다. 그들은 그녀를 등지고 있었다.


  네 바이오로이드와 두 자동포탑은 다친 바이오로이드를 뒤로 하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들을 이끄는 로지 에코는 안정적인 자세로 소총을 겨누고 조준경 안에 목표를 넣었다. 목표물은 달려오고 있었다. 다수의 목표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곤봉, 칼, 돌맹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눈을 박차는 미친 여자들이 미친 말을 외쳤다.


  "명령권자를 죽여라!"


  "자유! 자유!"


  로지의 조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자유는 자연스레 충돌하기 마련이란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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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얼마만이야


  근데 3편까지 구상했는데 과제가 많아서 늦었다... 혹시 늦은 제출도 가능합니까?



2편: https://arca.live/b/lastorigin/904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