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

이건 유열물이자 후회물이다.

따라서 빌드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NTR 요소가 있으니, 불호이거나 내성이 없으면 돌아가.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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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녕, 오르카호


느릿느릿 저무는 해를 등지고, 부상한 오르카호의 위에서 주섬주섬 내 짐을 작은 고무보트에 싣는다.

그래봤자 하루 버틸 물과 식량이 담긴 작은 배낭과 원터치 텐트 정도였지만.

 

그나저나 2100년대라도 텐트는 내가 살던 현실 세계와 별로 다르지 않다니, 좀 어이가 없네.

 

그리 생각하고 어이없는 듯 웃음을 짓자, 내 뒤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던 페로가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뭐가 좋다고 히죽거리는지 참…. 빨리하기나 해요! 난 물가는 질색이니깐."

 

다들 날, 무능한 주제에 섹스만 생각하는 더러운 돼지 새끼 취급한다지만 내가 떠나는데 페로 단 한 명만 배웅을 나올 줄이야. 아니, 고작 하루 먹을 식량만 준 시점에서 어서 죽어주길 바라는 게 틀림없다. 그래, 당연한 이야기지…. 당연한... 이야기…….

 

무심코 주먹을 쥘 뻔했다.

이러면 안 된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떳떳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들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어쩌면 내가 떠나는걸, 현 사령관과 그 부관들이 카메라를 통해 지켜보며 비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비참한 모습을 보이며, 너희들의 알량한 우월감을 안겨줄 먹잇감이 될까 보냐.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페로는 어떤 전자기기를 하나 던져주었다.

 

"이건...?"

"아~ 주인님께서 인간님께 주는 특별한 선물이라네요."

 

주워서 가만히 바라보니, 휴대용 영상기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바다로 던져버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감히 주인님의 선물을!!"

 

페로는 나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마지막 짐과 함께 내 몸을 고무보트에 싣는다.

 

"그럼 잘 있어."

 

분명 그 기기엔 현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들의 섹스 장면들이 들어있었겠지. 그 증거로 그 휴대용 영상기기에는 삐쩍 말라비틀어진 하얀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있었고, 고약한 오징어 냄새가 진동했으니까. 가는 순간까지도 나를 비참하게 가지고 놀며, 현 사령관은 자기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었겠지. 그에 협조하는 그녀들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너희들 뜻대로 내가 화를 내고, 울먹일 줄 아느냐.

 

당당해라, 나.

가슴을 펴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라.

 

이윽고 모터의 시동을 걸고, 천천히 오르카호를 떠난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지도 손 인사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뭍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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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송신합니다."

 

어두운 서버실 한구석, 커넥터 유미는 자그마한 태블릿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결국, 그 인간이 버티지 못하고 이 좌표로 나온다는 게 맞겠지요?]

"그렇습니다, 레모네이드 님."

 

담담한 듯이 말하는 유미였지만, 언제 들킬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는 첩자 짓을 하는지라 전신이 긴장으로 딱딱해져 있었다.

 

[...... 저를 방금 뭐라고 불렀지요?]

"죄, 죄송합니다. 레모네이드 '파이' 님."

 

태블릿 너머의 목소리에 유미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물론 영상통신이 아니기에 보일 리는 없었지만.

 

[좋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다른 자매들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으면 좋겠군요. 이만 끊겠습니다. 잘 지내시고, 몸조심하시길.]

 

그리고 유미가 바라보던 태블릿도 같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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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후우......"

 

어느 망가진 해수욕장에 도착한 나는, 급한 대로 배낭을 메고 근처 숲으로 이동했다. 주어진 전자 장비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이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이미 고무보트의 연료는 고갈되었던 참이기에 의미는 없었다. 단지, 해가 벌써 수평선 너머로 져버렸기 때문에 일단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해야 했고, 허허벌판인 해수욕장보다는 숲속이 좀 더 안전해 보였을 뿐이니까.

 

"운동... 좀... 할 걸... 허어... 허억..."

 

약 2km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서야, 해수욕장의 좌측 끝에 있는 숲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캄캄해지기 직전이 되어버렸기에, 급한 대로 이곳에 텐트를 펼치기로 했다. 손전등도 없으니까, 더더욱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일단 접혀있던 텐트의 커버를 벗기고 한 번에 펼치자, 내 한 몸 뉠만한 텐트가 완성되었다. 문제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있었다는 점이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걸 닦아낼 천 조각 하나 없어서 텐트 안에 들어가 입구를 지퍼로 닫고 그냥 드러눕기로 했다.

 

"하아......"

 

침낭은커녕, 그라운드시트 하나도 없이 덩그러니 텐트만 주다니. 하다못해 모포라도... 줬으면......

 

순간,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오르카호에 들어간 첫날이 떠올랐다. 미묘한 표정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그녀들. 그랬던 그녀들이...... 

 

그 생각이 도화선이 된 것인지, 그동안 참았던 울분이 터져 나오며 눈물이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흑... 흐윽.... 끅......."

 

그저 초기의 시행착오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하기 위해 정말 손가락 하나 함부로 댄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거야...... 흑.... 으윽......"

 

옆으로 웅크린 채, 한없이 울먹이던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너무나 놀란 나는 흐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입을 손으로 억누른 채, 청각에 최대한 집중했다.

 

'바스락, 바스락'

 

무언가가 지면 위의 잡초들을 밟으며 나는 소리.

그리고 점점 커졌다.

 

경황이 없던 나는 얼마간이 지난 후에야, 이 텐트로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달빛에 비친 무언가의 그림자가 내 텐트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흡과 맥박이 빨라진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텐트 안에서는 무엇이 다가왔는지 알 수조차 없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내 숨소리를 최대한 억제하며 미지의 생명체의 움직임에 내 모든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그 생명체는 어떠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가줘......

 

그런 내 바람이 무색하게, 미지의 생명체는 텐트를 잡고 조심스럽게 흔든다.

 

"......!"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리를 낼 뻔했지만, 어떻게든 입과 코를 손으로 틀어막고 참아냈다.

인기척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죽는다. 이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때.

 

'찌익, 찌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퍼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제 난 끝장이야-

 

"...... 안녕하세요오, 인간님. 길을 잃은 바이오로이드입니다만, 잠시 같이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눈을 감으며 긴장을 하던 난, 아름다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 긴장을 시켜드린 것이면 죄송합니다. 다만 인간님의 뇌파를 느껴버렸기에 무심코......"

 

기다란 은발과 파란색 눈동자를 지닌, 신비한 느낌의 성인 여성이 텐트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굴곡진 매력적인 몸매와 성숙한 얼굴의 여성이었지만, 내가 가만히 있자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다가왔다.

 

"저기... 인간... 님?"

"아, 아아...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벼, 별건 없지만 말이에요."

 

긴장의 끈이 탁하고 풀어진 탓인지, 횡설수설하며 그녀를 텐트 안으로 들였다.

그러자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이 그녀의 옷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얀 가운을 입으신 분이 왜 이런 곳에......"

"아, 이거 말이에요? 의사... 라고 생각하면 되실 거예요. 사실 저는 여기 근처에서 철충에 대항하던 어느 무리에 속해있었어요. 지금은...... 흩어졌지만요......"

 

성숙한 여의사의 느낌이 나는 것이, 퍽 매력적으로 느껴질 법도 했지만 아직은 경계를 풀지 못한 나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라비아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부대... 였나요?"

"으음... 그런 건 아니에요. 분명 인간님을 찾아서 오르카호...에서 결집하여 저항하자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나왔지만...... 철충들의 방해전파로 통신도 안 됐었으니깐요."

 

아무래도 인류 멸망 이후, 남겨진 바이오로이드 잔류 세력 중에 소규모로 모여 저항하던 그룹에 속했던 모양이었다.

 

라스트오리진 게임 안에서는 본 적 없는 바이오로이드가 내 눈앞에 있었지만, 일단 이곳은 실제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니까 게임에 나오지 않은 바이오로이드가 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겠지.

 

"보다시피 저는 치료에 특화되어 있기에, 철충들로부터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고요. 그런데 인간님께서 여기에 이렇게 계신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인류멸망의 상황에서 만난 한 줄기 빛 같은 마지막 인간인 내가 이런 곳에서 혼자 캠핑을 하고 있다니.

게다가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덩그러니 방치된 것처럼 말이다.

 

"아... 하하......"

 

그러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이야기했다.

 

"제가 전투는 못 해도, 치료는 정말 잘하거든요. 상담도 언제든지 가능한 특수 바이오로이드니까, 허심탄회하게 말해주세요!"

"고, 고마워요."

 

그러자 그녀는 아차 싶었던 듯, 안경을 끼고 말했다.

 

"안경을 끼고 있어야 일하는 느낌이 나지요~ 참, 제 이름은 ㄹ... 파이에요. 먹는 '파이' 아니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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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에 있는 인간을 방심시키기 위해 활발한 성격을 연기하며,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다.

그의 이야기 안에 오르카호에서 세운 비밀스러운 작전 내용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에게 있는 경계심을 허무는 것만 해도 큰 의미는 있었으니까.

 

어차피 커넥터 유미를 통해 이 인간이 오르카호에서 버림받은 과정을 상세히 보고 받았다. 그러니 그가 힘들어했을 만한 내용을 일부러 끄집어내며 맞장구를 쳐주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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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을 터인데.

어느새 나는 그의 감정에 동화되어버렸다.

 

마리, 레오나, 메이 같은 지휘관급뿐만 아니라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챠와 리리스, 심지어 부사령관이라는 작자인 라비아타까지 한 통 속이었다.

 

아니, 아니.

내가 어째서 이 인간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인가.

 

어쩌면.

인간 멸망 전의 세상에서 나는 그 미친 노인네의 노리개였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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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문학] 표시를 제목에 올리는 것은 진짜 작가 분들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뗐음.


그리고 다음 편은 빨라도 금요일 저녁은 되야 올라갈 수 있을거 같음. 


그럼 착한 리리스 보러간다 ㅂ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