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인 양키, 특이사항 없음, 이상]

[라인 줄루, 특이사항 없음, 이상]

지지직거리는 무전기 잡음 사이로 띄엄띄엄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여기는 마이크, 각 소 10분 간격으로 상황 보고할 것. 이상"

수많은 통신병이 나지막하게 주고받는 대화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컴퓨터들.

지휘실 옆에 붙어있는 통신실은 아직까지 평온하다.

그에 반해 어두컴컴한 지휘실, 맞은 편 벽에 띄워진 상황판은 실시간으로 참담한 전황을 비추고 있었다.

원래 붉은 지도가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지도를 가득 메운 채 빛나는 붉은 점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가 어느 정도라고?"

"...적게 잡아도 300만은 됩니다."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도 많군'

당장 떠오른 감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이미 꺽일 사기가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꺽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이크, 여기는 빅터 3-1, 보고 대기중, 이상.]

"여기는 마이크, 빅터 3-1 계속하라, 이상."

[노블 알파, 폴른 400기. 노블 브라보, 기갑대열 일곱. 노블 찰리, ㅡㅡㅡ. 연결체급은 보이지 않음. 전부 입감했는지, 이상.]

"입감 완료. 노블 찰리 재송바람, 이상."

[알겠다. 노블 찰리 재송하겠다. 노블 찰리, 기간테스 20기. 입감했는지, 이상.]

"입감 완료. 추가내용 있는지, 이상."

[아니다. 추가내용 없음, 이상.]

"상황이 허락하는 한 자리를 지키고 10분마다 계속 적 위치를 보고하라, 이상."

[알겠다. 빅터 3-1 통신종료.]

압도적인 숫적열세.

그래도 연결체급은 없다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한명이라도 더 살 확률이 올라갔으니.

참모들의 얼굴에서도 약간 생기가 돌아온다.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네요."

한명의 참모로써 지휘실 테이블 한자리에 앉아있던 피닉스 대령이 제일 먼저 말했다.

"저랑 나머지 2명으로 화력지원을 나가겠습니다. 허가를."

나는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린 이길 수도,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으니까.




2.

공기를 잡아찢는듯한 소리를 쫓아서 무심코 하늘을 본다.

착륙보단 추락에 가까운 모습으로 활주로에 들어온 주인공은 GS-10 샌드걸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활주로에 내려선 그녀에게 브라우니들이 달려나갔다.

"소화기, 아니 의무병부터!"

"장비 떼내! 폭발한다!"

무사히 장비와 분리된 샌드걸이 의무실로 호송되는 동안, 몇명의 브라우니와 노움이 활주로를 정리를 한다.

찌르면 터질 듯이 긴장된 공기.

마치 공기가 굳어버린 듯해서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공기를 깨려는 듯 브라우니들이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소리친다.

"5분안에 활주로 비워! 대령님 이륙하신다!"

"점검, 장비점검 빨리해!"

"주유확인! 얼마남았어?!"

분주한 격납고에서 실키와 노움이 피닉스의 장비를 손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우리의 호위를 맡을 블랙 하운드가 보였다.

6기

"지난번에 11기였나?"

"그땐 우리도 5기였어."

뒤따르는 다른 피닉스 둘의 잡담이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판다.

블랙하운드에서 시선을 돌려 내 장비를 본다.

마침 점검이 끝난 듯 옆에 있던 장비를 손보던 실키가 날 보고선 달려와 경례했다.

"장비점검 끝마쳤어요. 아무 이상없어요."

"그래. 수고했다."

"주유도 곧 마무리 될 거에요. 활주로만 비워지면 제시간에 뜰 수 있어요."

등을 접속장치에 가져다 대자 장비가 천천히 부팅되기 시작했다.

눈앞에 떠오르는 홀로그램 창에는 점점 차오르는 주유게이지를 포함해서 장비상태가 일목요연하게 표시된다.

다행히도 샌드걸의 장비가 폭발하진 않았는지 활주로는 금세 제 기능을 되찾았다.

"통신점검, 그리즐리 1, 체크."

"그리즐리 2, 체크."

"그리즐리 3, 체크."

"순서대로 이륙한다. 그 후 호위기 블랙 하운드가 모두 이륙하는대로 작전구역으로 이동한다."

"그리즐리 2, 카피."

"그리즐리 3, 카피."

콜싸인과 간단하게 계획을 브리핑하는 사이 노움이 이륙허가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활주로에 들어서기 전 최종점검구역에서 나는 플랩과 안정판을 직접 움직여 상태를 점검하고,

이상 없다는 뜻으로 노움에게 엄지손가락을 펴서 보여줬다.

"관제탑, 여기는 그리즐리 1. 이륙하겠다. 이상"

"여기는 관제탑. 확인했다."

천천히 회전수를 올리는 프로펠러 소리에 심장이 뛴다.

느릿느릿 활주로를 주행하다 어느 순간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편대기의 이륙을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선회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비행장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작은 전초기지

우린 계속해서 철충들과 싸워왔지만, 밀리고 밀려서 여기까지 왔다.

더 많은 장비와 지원, 더 많은 숫자로 싸워도 졌다.

과연, 어디까지 더 버틸 수 있을까.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에 나머지 피닉스들도 이륙하고, 블랙 하운드들도 전부 이륙하는데 성공했다.

지상에서 미리 브리핑한대로 피닉스 하나에 린트부름 2대씩 붙어서 작전구역으로 향한다.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까지 이 전초기지가 버텨줄 수 있을까?

불길한 생각은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리고 나는 속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3.

[마이크, 여기는 라인 브라보. 항공지원은 대체 어딨나?!]

무전기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아무도 그딴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눈앞의 철충들을 막는게 더 급하니까

"마이크, 여기는 라인 에코! 철충들이 몰려들고 있다! 화력지원 바란다!"

나는 무선지침따윈 신경쓰지 않고 무전기에 대고 계속 소리친다.

"반복한다, 여기는 라인 에코! 화력지원 바란다!"

그리고 무전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머릿속으로 해서는 안될 짓이라는 본능적인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긴다.

4연장 기관포에서 쏟아져나오는 납탄세례는 순식간에 철충들을 벌집으로 만들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철충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한계까지 과열된 기관포를 잠시 냉각할 겸 확성기를 들고 외친다.

"물러서지 마라! 전선을 유지해!"

사방에서 들리는 총성과 폭발음에 과연 효과가 있을 성 싶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철충들의 끝도없는 파상공세에, 지구상의 모든 AGS가 감염되서 이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무렵.

높은 휘파람 같은 새된소리가 가까워진다.

곧이어 땅을 뒤흔드는 충격과 폭발음이 전방에서 터져나왔다.

"늦지 않았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175mm 포탄은 확실하게 저 멀리서 몰려오던 철충들의 진격을 저지했다.

포탄세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철충들마저 전부 정리하고 나니,

철충들도 포격을 뚫는 건 무의미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는지 잠깐의 틈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둘러 피해상황 파악해서 보고할 것! 나머지는 참호 보수해!"

그다지 좋지않은 피해상황을 들으며 재배치에 고심하고 있을 때,

"연대장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브라우니-342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일병"

"...그게..."

"똑바로 말해라, 일병."

"...새로 온 분대장이 좀..."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갔다.

"안내해라, 일병."

"예"

브라우니-342의 안내는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참호에서 곧 끝났다.

거기엔 자기 기관총에 머리를 박고 눈을 꼭 감은채 떨고 있는 레프리콘이 한명 있었다.

총알이 가득 찬 탄창과 차갑게 식어있는 총열.

나를 안내해준 브라우니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나머지 데리고 가서 탄약보충하고 좀 쉬게"

"..."

브라우니는 무언인 채로 경례하며 자릴 비켜줬다.

"괜찮나, 상병?"

계급으로 불리자 놀란 듯 황급히 일어서는 그녀를 제지하며 그자리에 앉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방울방울 흐를듯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마주보며 나는 한번 더 말했다.

"괜찮나?"

"...괜...괜찮습니다. 연대장님."

"그럼 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지?"

"...그치만"

그녀의 갈곳을 잃은 눈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뇌파 때문에? 사전에 전부 설명했을텐데."

"..."

나는 참호 바깥의 철충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들이 인간으로 보이나?"

"아닙니다."

"그럼 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나!"

그녀는 직접 인간을 본 적이 없다.

부대에 배치된게 어제밤이니, 대충 그저께쯤 생산되었겠지.

"시,시정하겠습니다!"

그런 그녀를 조금 더 자상하게 가르치고 이해시켜 줄 수도 있다.

"저것들한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면 모조리 죽는다! 병사!"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너 뿐만 아니라, 네 전우들도! 나도! 이 참호 뒤에 있는 모든 스틸라인 전부 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우린 모든 것이 부족했다.

"넌 우릴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나!?"

"아닙니다!!"

싸울 병력도, 장전할 총알도, 병사들의 사기도,

심지어 흘러가는 시간조차도.

"그럼 다음엔 그 빌어먹을 방아쇠를 당겨라, 병사!"

"예!! 알겠습니다!!"

"내 총구가 널 향하지 않게 해라, 병사. 난 필요하다면,"

난 홀스터에 들어가 있는 권총을 슬쩍 내비치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응당 그러하겠다."

그 자리에는 오직 군인만이 남아있었다.




4.

위장막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딜 봐도 철충뿐이었다.

무너지고 박살난 도심 사이로 행진하는 철충들.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군."

"그러게요..."

작게 내뱉은 혼잣말에 옆에 있던 베라-50이 맞장구친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베라는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쌍안경으로 반대쪽을 보고 있었다.

"전부 방어선을 향해 가는군요..."

"우릴 눈치채지 못한 건 다행이지."

하지만 둘 다 알고 있다.

지나간 철충들도, 보고있는 철충들도, 앞으로 올 철충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것을.

그나마 연결체급없이 인해전술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게 불행중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고층타워가 불타고 있었다.

"저긴...?"

멍한 베라-50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무전기를 거칠게 들어올리고 있었다.

"마이크, 여기는 빅터 2-2! 빅터 2-1이 당했다! 반복한다, 빅터 2-1이 당했다!"

[여기는 마이크,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다. 빅터 2-1 위치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이 일어났다. 장거리 포격에 당한 것 같다. 이상"

[적 포대의 방열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지, 이상.]

나는 베라에게 쌍안경을 달라고 손짓하며 빅터 2-1의 근처를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눈에 힘을 줬다.

그 때 빅터 2-1 근처의 다른 빌딩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찰나에 스치듯 본 것이라 제대로 본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베라에게서 건네 받은 쌍안경으로 도심을 지나 더 멀리 살펴보아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니다. 소리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상."

[가능한 위치를 사수하고 상황을 계속 보고할 것. 이상]

"알겠다. 이상"

지휘실과의 짧은 무전을 마치고 베라에게 다시 쌍안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사격위치 예상되는 도심 너머 좀더 먼 시야를 눈에 담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는 빅터 2-2, 모든 빅터에게 전한다. 경계를 철저히 하고 은엄폐에 신중해라. 이상"

[빅터 2-3, 카피.]

[빅터 2-4, 카피.]

[빅터 2-5, 카피.]

[...]

잠시 기달려봐도 빅터 2-6의 대답은 오지 않았다.

"빅터 2-6, 입감했는지?"

그러나 무전기는 불길한 침묵만을 계속 토해내고 있었다.

긴장을 놓고 있던 건 아니지만, 새로운 위협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이 복잡하게 우거진 콘크리트 정글 속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베라, 출구 확보해."

"알겠어요, 발키리님"

"베라"

"네?"

"조심해라, 뭔가가 있다."

내 말에 베라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으로 사라졌다.

맨 눈으로 조심스레 도심을 훑어보는 내게 또다시 폭발음이 들렸다.

"마이크, 여기는 빅터 2-2. 빅터 2-5와 2-6을 잃었다. 반복한다. 빅터 2-5와 2-6을 잃었다."

[현재 상황은 어떤지, 이상.]

"장거리 포격 외에도 우릴 노리는 게 있다. 폭발음이나 총성은 일절 들리지 않는다. 이상."

[대처 가능한지, 이상.]

"모르겠다. 숫자도, 무기도, 알 수가 없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이상."

[방어선으로 계속 철충들이 몰려들고 있다. 우리가 지원할 방법이 없다.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귀로 들으니 가슴 꽉 죄여드는 느낌이 든다.

가까스로 새어나오는 탄식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한다.

"...알고 있다."

[...행운을 빈다. 이상.]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망설이는 사이에 야속하게도 무전은 끝나버렸다.

포격쪽은 어차피 여기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결론내린 나는 이 콘크리트 정글속에 숨은 무언가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영원같기도 하고, 찰나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어떻게 할 지 정했다.

'반은 도박이지만...'

기계식 조준기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다른 발키리, 빅터 2-4 였다.

건물 위 무너진 광고판 사이에 숨어있는 그녀옆으로 쌍안경을 든 베라가 보인다.

'제발...'

긴장속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또다시 울려퍼지는 폭발음이 다른 발키리의 죽음을 알렸다.

그래도 시선을 고정한 채, 무전도 보내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잔뜩 찌푸린 이마 위로 땀 한방울이 흐른다.

야속하게도 눈썹을 그대로 지나쳐 눈 위로 흘러 내린다.

0.1초

눈이 깜빡이는 시간

빅터 2-4의 베라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발키리는 광고판 뒤를 향해 발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장전손잡이를 당겨 탄피를 빼내기도 전에, 기다랗고 끔찍한 촉수가 그녀의 복부를 관통해 건물 옥상에 꽂힌다.

"대체 뭔..."

신축성과 내구성을 겸비한 촉수는 금세 줄어들면서 광고판 너머로 사라졌다.

도박에선 이겼지만 이대로라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끝난다.

배가 뚫린 발키리는 총을 껴앉은 채 앞으로 고꾸라진다.

"...일어나."

비록 쓰러졌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저격수는 쉽게 죽지 않는다.

"...일어나...어서..."

내 기도가 닿은 것일까,

"...일어나...!"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져서일까.

쓰러져 있는 사이에 장전을 마친 것인지 번개같이 일어선 발키리의 총이 또다시 불꽃을 내뿜었고,

동시에 발키리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이 보인다.

혓바닥 마냥 입에서 나온 촉수.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가락들.

AGS처럼 보이지 않는 두 발로 선 유기체같은 몸체

처음 보는 형태의 철충이었다.

"드디어 잡았다."

머리처럼 보이는 부분을 조준하고 숨을 멈춘다.

녀석은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발키리의 머리를 건물 밖으로 톡, 걷어찼다.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분노 때문인지

오싹하게 등골을 타고오르는 소름 때문인지

탄환은 빗나갔다.

순식간에 장전손잡이를 당기며 뒤로 돌아선다.

저 멀리 기계식 조준기 너머에 있던 괴물은 내 눈앞에도 서 있었다.

'두 마리?!'

녀석의 칼날같이 날카롭고 기다란 손톱에는 베라-50의 것으로 생각되는 옷가지와 탄띠가 걸려있었다.

"울어라, 나약한 살덩어리. 울어라."

녀석이 이 세상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소리를 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비웃고 있다는 건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정글 속에서

단 한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5.

[여기는 그리즐리 1, 구름층을 통과하고 있다. 약간의 난기류가 있다.]

[알겠다. 주의하겠다.]

시커먼 구름속으로 나아가는 계기비행 덕분에 가벼운 멀미를 느낄 무렵.

[잠깐, 레이더에 뭔가 반응이 있다. 빠르게 접근중. 수는 8.]

[육안으로 확인했다. 피아식별 반응없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기대는 바람을 가르는 기총사격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빌어먹을!]

[적기 출현, 적기 출현!]

곡예에 가까운 기동으로 간신히 놈들의 기총사격을 피해내고 균형을 회복한다.

여기서 시간과 연료를 낭비할 순 없다.

그랬다간 지상의 스틸라인은 공중지원없이 철충과 싸우는 꼴이 된다.

빠르게 마음을 먹은 나는 무전을 날렸다.

[가세요, 대령님. 저희가 막겠습니다.]

[...현 공역은 이글 1, 2에게 맡긴다. 나머지는 신속히 이탈해 작전구역으로 향할 것.]

[그리즐리 2, 카피.]

[그리즐리 3, 카피.]

흩어진 편대를 가다듬으며 그리즐리 2와 그리즐리 3은 작전구역으로 멀어져 갔다.

그리즐리 1 또한 호위기 없이 작전구역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건 블랙 하운드-7과 36, 그리고 철충에 감염된 무인기들

[왼쪽으로 급선회, 왼쪽으로 급선회하겠다.]

[이글 1, 놈들이 흩어진다!]

이글 2의 비명같은 무전을 들은 나는 구름속으로 사라지는 무인기들을 보면서 기지로 무전을 보냈다.

[마이크, 여기는 이글 1. 적기는 와쳐 8기로 판명됐다. 고도 8000피트에서 교전 중, 이상.]

[이글 1, 여기는 마이크. 무기 사용을 허가한다, 이상.]

왼쪽 구름 너머로 보이는 와쳐를 쫓아가면서 안전장치를 해제한다.

[이글 2, 내가 왼쪽을 맡겠다. 놈들을 놓치면 안돼!]

[알겠다. 이글 1, 행운을 빈다.]

그렇게 말하고 블랙 하운드 36은 오른쪽에 보이는 거대한 적란운 속으로 사라졌다.

얼굴에 달라붙는 빗방울을 느끼면서, 앞서나가는 와쳐를 쫓는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와쳐는 위험을 느낀 듯 플레어를 사출한다.

그와 동시에 기수를 올려 공기저항을 최대로 받고, 속도까지 늦춰버리자 오히려 내가 앞서나가는 꼴이 된다.

공중전에서 뒤를 잡혀버린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지만,

종래의 그런 공중전술을 뒤바꿔버린 주인공이 바로 바이오로이드였다.

간단하게 몸을 돌려서 기관총을 갈겨버리자 정통으로 두들겨 맞은 와쳐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맥없이 추락한다.

'하나잡았고, 그럼...'

다시 자세를 돌려서 앞을 향하는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이 귀를 파고든다.

전방에서 충돌경고음이 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와쳐의 미니건이 불을 뿜는다.

천만다행으로 주익에 스친 정도의 상처밖에 내지 못한 채 쌍방이 서로 교차한다.

무인기도 한계를 넘은 공중기동이 가능하지만, 바이오로이드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시 선회하는 와쳐를 그 자리에서 즉각 반전해 쫓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급격한 관성변화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만,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바이오로이드의 육체는 가볍게 버텨낸다.

한계까지 거리를 좁힌 후에 기관총으로 간단하게 요리한다.

맥없이 추락하는 와쳐를 보고 있자니 위와 아래에서도 동시에 레이더 경보가 울린다.

하지만 무장도, 기동성도 부족한 와쳐로는 승산이 없다. 

한계까지 강화된 시력과 집중력.

압도적인 기동성을 이용한 에너지 파이팅.

와쳐 자체도 전투목적으로 만들어진 무인기가 아니기에 수월하게 공역을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흩어졌던 이글 2도 어느새인가 합류했다.

천둥번개를 동반하며 점점 궂어지는 날씨는 쉽게 풀릴기미가 없다.

교전이 생각보다 질질 끌지 않고 끝난 덕에 연료도 탄환도 충분했기에 다시 전장으로 향한다.

[마이크, 여기는 이글 1. 상황종료, 그리즐리 1에게 합류하겠다.]

방향을 다시 잡으며 무전을 날려보지만 어째서인지 응답이 없다.

악천후에 통신이 먹통이 되었나 싶었다.

구름속을 번개가 가로지른다.

찰나의 번쩍임,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이글 1, 위다!]

구름속에서 튀어나온 철충은 얼핏보면 나비같은 거대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대체..."

물어뜯을 기세로 거칠게 달라붙는 철충을 간신히 떼어내며 기관총을 갈겨보지만,

거대한 외형에 비해 상상할 수 없는 기동력으로 그 자리를 벗어난다.

[이글 1, 폭스2! 폭스2!]

어느새 내 뒤를 잡은 녀석에게서 타오르는듯한 광점들이 사출된다.

이글 2의 경고와 정신없이 울리는 레이더 경보를 들으며 회피기동을 실시한다.

[플레어 사출!]

꼬리날개에서 사출된 플레어에 광점들이 부딪치고 허공에 아름다운 화염의 꽃이 피어오른다.

폭발하는 불꽃과 연기에 시선을 빼앗긴 틈에 그 거대한 철충을 시야에서 놓쳤다.

"어디지? 어디야?!"

[뒤! 이글 1!]

이글 2의 애처로운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찰나

덜컹,하고 크게 몸이 흔들린다.

"이게 뭔...?"

등 뒤에 나타난 거대한 철충은 날개 밑에서 나온 긴 기계팔로 내 주익을 잡아챘다. 

강철의 날개는 듣기싫은 소리를 내며 종잇장마냥 구겨져버리고 있었다.

[이글 1, 빠져나와!]

막무가내로 녀석에게 기관총을 난사해보지만 흠집하나 나지않는다.

"이... 빌어먹을! 이거나 먹어라!"

이를 악다문 나는 안전거리조차 확보하지 않은 채, 모든 미사일을 발사했다.

[안돼! 이글 1!!]




6.

[본부, 여기는 라인 알파, 우리 셋밖에 안 남았다! 반복한다, 우리 셋 뿐이다!]

...

[여기는 그리즐리 2, 더 이상 남은 탄약이 없다. 기지로 복귀하겠다. 이상.]

...

[빅터 3-3, 오른쪽!! 3시 방향이다!]

...

[레프리콘-32! 왼쪽으로 가서 자리잡아!! 움직여! 빨리 움직여!]

...

[여기는 이글 2! 추락하고 있다! 아무것도 안보인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

[여기는 워해머 2-1, 위치가 노출됬다. 반복한다, 위치가 노출됬다. 재방열 후 보고하겠다. 이상.]

...

[마이크, 여기는 라인 골프! 그리즐리 1 피탄! 반복한다, 그리즐리 1 피탄! 낙하산은... 보이지 않는다. 입감했는지.]

...

[라인 골프, 여기는 마이크. 입감완료. 더 이상 우리에게 남은 항공지원은 없다. 이상]

...

[라인 로미오, 우린 더 이상 귀 소를 지원할 탄약이 없다. 당 소는 5분안에 철수한다, 이상.]

...

[여기는 라인 에코! 방어선이 돌파당했다! 브로큰 애로우를 요청한다. 반복한다, 브로큰 애로우!]

...

[브로큰 애로우 수신완료. 중령님, 함께해서 영광이였습니다.]

...

[모든 빅터는 주보급로로 퇴각하라. 라인 에코가 브로큰 애로우를 요청했다! 지금 당장 퇴각해!]

...

...

...

[제 4 전투여단에게 전한다. 빅터 1-6가 둠 브링어로부터 수신했다, 다음.]

...

[사령부에서 강 북쪽의 모든 철수지점을 포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

[이 무전을 듣는 즉시 전 병력은 강 이남으로 후퇴할 것,]

...

[10분 뒤 심판의 왕좌를 포함한 전략폭격이 행해질 것이다, 이상.]

...

[마이크! 당장 복귀하십시오! 마이크!!]

...

...

...

[라인 파파, 여기는 마이크. 즉시 대원들을 그 망할 곳에서 데리고 나와라!]

...

[후퇴! 후퇴! 반복한다, 이 망할 곳에서 당장 빠져나가!!]

...

[뛰어! 브라우니! 뛰어어엇!!!]

...

...

...




7.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하늘이 붉게 타오른다.

그것만으로 상황이 일목요연해진다.

"메이 소장이 결국 이긴 것 같군요."

"..."

"어떻게 할까요, 제독님. 지원작전을 속행할까요?"

"...아니, 항로 반전. 이대로 괌으로 갈 것이오."

"알겠습니다."

[전 함대에 전달, 항로 반전, 반복한다, 항로 반전.]

시원하게 포말을 일으키며 바다를 가르는 배 위에서 육지를 바라본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하늘 아래에는 대체 어떤 참상이 벌어져 있을까.

"부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녀의 작은 속삭임은 새하얀 코트를 휘날리는 바닷바람에 실렸지만 멀리 가진 못했다.




8.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기침이 나온다.

손끝과 발끝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사지는 멀쩡하게 붙어있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암흑뿐.

온 몸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방향감각으로 보건데 엎드린 자세로 뭔가에 짓눌린 것 같다.

바이오로이드의 강화된 완력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수가 없다.

안간힘을 써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전신에 느껴지는 저릿한 고통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육체

끝도없이 몰려오는 철충들.

점점 더 열악해지기만 하는 상황들.

셀수없이 죽어나가는 바이오로이드들.

끝없는 소모전, 보충, 작전계획들.

그리고 하나, 둘, 

잠들어서 눈을 뜨지 않는 인간들.

아마 토모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지쳤다.

나도 그들처럼

이대로 눈을 감고

영원히 뜨고 싶지 않아,

하는 약한 마음이 가슴을 파고든다.

땀인지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무언가가 얼굴에 흐른다.

"흐읍!"

등을 철골에 대고 팔을 바닥에 댄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밀어낸다.

ㅡ전쟁에 도가 텄던 블랙 리버가 나에게 준 이름

"할 수 있어..."

조금씩 팔이 펴지고, 등이 올라가 공간이 생긴다.

ㅡ무엇보다도 승리를 갈구하던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할 수 있어... 조금만...더...!"

어느정도 공간이 열리자 재빨리 자세를 바꿔서 좀 더 수월하게 힘을 준다.

ㅡ승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

"힘내...! 조금만 더...!"

내 이름을 마치 주문처럼 속삭인다.

ㅡ나는 굴하지 않는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ㅡ결코 굴하지 않는다.

"힘내, 마리!!"

나를 짓누르고 있던 철골을 있는힘껏 밀어낸다.

마침내 무거운 압력에서 해방되고 무너진 건물잔해에서 빠져나온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뜨거운 열풍이 뺨을 스친다.

바깥은 타버린 재와 꺼지지 않은 화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뱉어내던 무전은 어느새 통신이 복구되었는지 간간히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응답하세요, 마이크!]

"...큭, 여기는 컥, 마이크. 쿨럭, 무슨 일인가?"

[맙소사, 신이시여! 뭐가 '무슨 일인가'입니까! 지휘관이 통신두절이라니!]

"핵탄두가 터지지 않았나, EMP로 인한 통신두절는 어쩔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거기로 뛰어든 사람이 할 말입니까?]

"그래... 나도 잘 알고있다, 부관."

[사령부에서 알면 군법회의로 직행할 겁니다.]

"...그래도 안 갈 수가 없었어."

[...]

"안 갈 수가 없었어..."

[...구조팀이 방금 출발했습니다. 1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래, 고맙다, 부관."

[수고하셨습니다. 마리 소장님.]





9.

[무전통신복구. 여기는 밤천사.]

...

[전투피해평가 80에 10.]

...

[철충은 얌전히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습니다.]

...

[제 4 전투여단은 전력의 50%를 손실.]

...

[90%는 나올줄 알았는데.]

...

[혼자 나서서 피해를 줄이다니... 지휘관으로써는 감점이지만, 대단하군요.]

...

[병력을 보충해 재편성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겁니다.]

...

[철충도 눈치챈 거 같군요. 기지로 복귀하겠습니다.]

...

[밤천사 통신종료.]




10.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철충이 올테고,


더 나쁜 상황이 올테고,


더 적은 희망이 남겠지.


그래도 


난 결코 굴하지 않는다.


fin.


봐줘서 감사합니다 라붕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