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주의 


*주인공에 한해서 노맨스 물임.


2화 https://arca.live/b/lastorigin/89210368





젠장현장에서 구르고 실패작 돌보는 일은 전부 내가 했건만공은 전부 연구소장 그 교활한 늙은이가 챙겨나는구만.”

 

 

기업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 기업의 회장그것도 기업들 중 가장 바이오로이드 제작 기술이 뛰어난 삼안의 회장과 독대해 보고하는 자리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최정상에 선 남자와의 독대자리.

 

그 곳에서 얼마나 좋은 인상을 심어 주냐얼마나 입을 잘 놀려 성과를 포장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가도가 깔리느냐 안 깔리느냐가 걸린 그런 중요한 자리는 당연히 현장에서 구르고 보조랍시고 귀찮은 일을 잔뜩 도맡아했던 자신이 가야하건만 그 늙은이가 가다니.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늘어놔도 소장의 권력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기업 간의 전쟁이라곤 하지만 후방에 숨어든 블랙 리버의 쥐새끼들로부터 보호한답시고 연구 시설을 지키는 블랙 리리스의 경호를 받아 갈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는 연구소장과는 달리여기 남아있는 자신은 없어지면 새로 뽑으면 그만인 평범한 신입 연구원일 뿐.

 

어떻게든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위로 올라가 성공가도를 밟으려면 위에서 올라갈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 소장이 블랙 리버에게 암살당하거나 그가 없는 동안 어떻게든 성과를 내는 일 밖에 없는데 핵폭격도 막을 수 있는 블랙 리리스의 호위를 받으니 전자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후자뿐.

 

문제는 그 성과를 낼 기회를 제공해야 할 실험체가 망가져도 제대로 망가진 녀석이라는 것이다.

 

 

젠장하필이면 처음으로 배정받은 곳에서 개발한 바이오로이드가 저딴 덜떨어진 녀석이라니.”

 

 

생체 전기를 조종해 기상조작조차 가능하게하는 오베로니아 레아 같은 뛰어난 바이오로이드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인기가 살짝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팔리고 성능도 중간정도 하는, 마치 지금도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배틀메이드의 바닐라 모델처럼 얇고 길게 가는 바이오로이드를 만드는 게 소원이었건만 정작 실험실에서 나온 건 블랙 리리스의 유전자 베이스와 전용 모듈들까지 처먹고도 명령도 제대로 안 듣는 불량품중의 불량품이었다.

 

학습모듈을 좀 장착하면 나아지나 싶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학습모듈까지 장착시켰건만 밤새 횡설수설하며 돌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정신이 나가 주먹으로 문을 내리 친다던가 벽에 머리를 수 십 차례 박기까지 하기까지 한다.

 

명령을 안 듣는 것도 골치 아픈데 거기에 지랄 발광까지 추가되다니게다가 대체 어디서 기억모듈을 이식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입력도 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아마 학습모듈로 전해 받은 데이터와 어디서 입력받았는지 모를 기억 데이터가 충돌해서 저러는 거겠지.

 

그리고 지금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제까지 하던 지랄 발광을 멈추고선 침대 위에 앉아 여기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다.

 

저 불량품은 대체 뭐가 좋기에 저렇게 웃고 있는 걸까난 시시각각 개판이 되는 커리어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데.

 

어떻게 보면 자매기라고 할 수 있는 블랙 리리스는 삼안에서도 가장 완벽한 바이오로이드지만그 유전자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이름도 붙이기 아까운 저 불량품은 삼안을 포함해 바이오로이드를 제작하는 모든 회사를 통틀어서 가장 엉망인 바이오로이드일 것이다.

 

앞으로의 실험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도 건질 것 하나 없겠지.

 

그나마 작게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연구소장이 성과를 보고하러 갔으니 이제 곧 실험도 막바지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빨리 이 실험을 끝내 저 웃기지도 않는 불량품을 처리하고 새로운 바이오로이드를 개발하는 곳에 배정된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듣는 사람 하나 없는 실험실에 남아 불만만 표출하고 있을 때컴퓨터를 바라보며 시간만 죽이고 있던 그의 귀에 유리창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또 뭐야?”

 

 

오늘은 또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화장실에 배치된 두루마리 휴지에 물을 묻혀 유리창으로 집어던지는 실험체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좋은 아침이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휴지를 던지던 행위를 멈춘 실험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기 시작했다.

 

오후 9시가 다 되어가건만 좋은 아침이라니.

 

실패작답게 시간 개념도 없는 건가?

 

어쨌든 그녀아니 저것과 말을 섞지는 않을 것이다말을 해 봤자 이전처럼 단어를 끊어말하며 횡설수설하던가아니면 기억 모듈에도 없는 망상을 풀어낼 게 뻔하다.

 

확실히 외모 하나는 봐줄만 하다.

 

그야 삼안의 최고 모델중 하나인 블랙 리리스를 베이스로 한 녀석이니까.

 

가련하면서도 아리따운 소녀다운 얼굴과 부족하지도과하지도 않은 비율 좋은 몸매그리고 머리카락처럼 티 없이 하얀 피부까지녀석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중 유일하게 봐줄만한 건 바로 저 외모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결국 저건 바이오로이드인간이 만들어 낸 유사 인류이자 인류의 가장 충실한 종임과 동시에 가장 쓸 만한 도구

 

몸값이 더 비싸다는 것만 제외하고선 연구실 휴게소에 있는 전자렌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연구 외의 목적으로 말을 섞을 필요도 없고저 헛소리에 반응을 해 줄 필요도 없다

 

아무도 없는 김에 덴세츠 주최로 열리는 검투경기에 돈이나 걸까지난번에 돈을 건 아탈란테는 제법 잘 싸워서 쏠쏠한 용돈을 안겨주었던데.

 

 

-여기 갇혀있어서 바깥날씨는 잘 모르지만 분명 좋을 게 분명해안 좋아도 나름 그것만의 매력이 있지만 말이야.-

 

 

컴퓨터 앞에 앉은 연구원이 배팅사이트에 들어가 선수 목록을 보며 누구에게 돈을 걸지 고심하는 와중에도 실험체는 쉴 새 없이 떠벌거리며 정신을 점점 사납게 만들기 시작했다

 

 

-뭐야설마 여자가 말 걸었다고 부끄러워 하는 거냐아무리 네가 여태껏 여자랑 대화한 적이 침대에서 엄마랑 한 대화밖에 없다곤 해도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난 네 엄마와는 달리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말 안 섞어주는 그런 부류는 아니니까.-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댄 연구원이 수면가스를 풀어 저 입을 다물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그의 귀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방금 저 실패작이 뭐라고 말한 거지설마 지금 내 어머니를 언급한건가?

 

두 귀로 생생히 듣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자 침대에 앉아있던 실험체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선 과장된 몸짓과 웃음섞인 목소리로 연구원의 성질을 점점 긁어놓기 시작했다

 

 

-미안..너희 엄마가 몸 팔고 다닌다는 건 비밀이었지미안해내가 그만 멋모르고 말해버렸네.-

 

실험체 IP-0. 허가받지 않은 발언은 금지한다지금 당장 입 다물..”

 

-그래도 이건 말해야겠다내가 어젯밤에 아랫도리가 좀 근질거려서 너희 엄마로 좀 달래보려고 했는데 말이야낸 돈에 비해 솜씨가 형편없더라고.-

 

지금 당장 닥치지 않으면..”

 

-프로필에는 분명 경험한 수가 많은 프로라고 적혀있었는데 횟수에 비해 실력이 영 아니었단 말이지환불을 좀 받고 싶은데 그래도 서비스는 받았으니 전액 환불은 양심상 좀 무리고 절반정도만 네가 좀 돌려주면..-

 

 

더 이상 못 참겠다

 

계속 이어지는 모욕적인 발언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연구원은 버튼을 눌렀고동시에 환풍구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가스가 실험체가 있는 방 안을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가스가 완전히 빠져나간 방에는 침대 위에 꼴사납게 누워있는 실험체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뇌파스캔으로 완전히 잠이 든 걸 확인한 연구원은 실험실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간 다음누워있는 실험체 앞으로 다가가 멱살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선..

 

 

짜악!’

 

 

이 망할 실패작 따위가감히 인간을 모욕해?! 바이오로이드 주제에되다 만 실패작 주제에!!” 

 

 

미동조차 없는 소녀의 따귀를 올려붙일 때마다 조용하던 방 안에는 살과 살이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라면 한 번 맞자마자 입술이 터지고 피가 흐를 정도의 따귀였지만 수면가스에 취해 깊게 잠이 든 바이오로이드는 연구원이 가하는 폭력에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었을 뿐.

 

그 점이 더 연구원을 자극했고따귀는 어느새 주먹이 되었고주먹은 곧 의자와 꽃병으로 바뀌었다.

 

출세를 하지 못한 울분감히 바이오로이드 따위에게 모욕 받았다는 수치심이 합쳐진 폭력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허억..허억..”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의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실험체를 가둬놓은 실험실 안의 가구는 멀쩡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 박살나 있었고때리던 도중 피부가 찢어졌는지 들어 올린 주먹에서는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후회가 밀려왔다.

 

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실험실을 망가뜨리다니

 

하지만 그 후회보다 더 그를 짜증나게 하는 건 그의 폭력을 온전히 맨몸으로 받아낸 실험체는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입 안이 터진 듯 다문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하얀 피부에는 붉은 멍이 올라와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그것 외에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때린 사람보다 맞은 사람이 덜 다친 기묘한 상황 속에서 연구원의 머리는 빠르게 상황을 수습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비록 때린 쪽이 더 다치긴 했지만 실험체의 육체에 손상이 간 건 확실하다

 

아무리 미세한 상처라지만 저 정도의 상처면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노친네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

 

갑자기 난 상처에 의문을 품은 노친네는 분명 감시카메라 영상을 살펴 볼 테고그가 저지른 일을 보고 징계를 내릴 것이다

 

회사의 주요 자산에 피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 일단 피해를 입은 자산을 원상복구 시켜놔야 한다

 

그리고 다행이도이 연구시설 안에는 바이오로이드 복구 시설 또한 잘 갖춰져 있다

 

이런 미세한 상처따위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시설이

 

 

여기 이 실패작이 가구를 때려 부순다던가 하는 일은 이제는 일상이니 가구 몇 개 부서진 것 가지고는 일일이 신경 쓰지 않겠지이 녀석만 고쳐놓는다면 아무도 모를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연구원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실험체의 팔을 잡고 복원실 안에 있는 캡슐까지 질질 끌고 가 기계를 작동시켰다

 

스캔 결과 복원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은 약 20

 

한 시간 넘게 온 힘을 담아 팼음에도 불구하고 저 실험체가 입은 상처는 고작 20분짜리의 잔부상에 지나지 않았다

 

 

원본이 우수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몸 하나는 쓸데없이 튼튼하군.”

 

 

노출시킨 수면가스의 양을 생각해봤을 때 앞으로 2시간은 쭉 잠들어 있을 것이다복원하는 도중 깨어나는 불상사 따위는 없겠지.

 

그 말은 즉슨깊게 잠든 채 복원을 마친 녀석을 다시 실험실 안에 집어넣기만 한다면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없던 것이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게 잘 해결되었으니 실패작 녀석이 고쳐질 동안 경기나 볼까

 

 

오늘의 라인업은 아탈란테 모델과 요안나 모델인가.”

 

 

요안나 모델이 연기에만 치우친 것만 생각해본다면 9전 9승의 아탈란테에게 상대가 될 리 없다

 

아탈란테쪽에 일방적으로 쏠려있는 배팅액만 봐도 누가 이길 확률이 높은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탈란테 쪽에 배팅까지 마친 연구원은 등받이까지 뒤로 젖힌 채 경기를 즐길 준비를 하였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바이오로이드들이 펼치는 유혈 낭자한 검투 경기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단 하나의 소음이 연구원의 평화를 망쳐놓는다

 

 

쨍그랑!’

 

 

유리가 깨져나가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자 반 쯤 뭉개진 채 깨져있는 캡슐이 그를 반겨주었다

 

깨진 유리와 함께 바닥에 찍혀있는 발자국 몇 개만이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안에 담긴 채 복원되고 있을 실험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멍해진 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연구원의 머리 위로 붉은 색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실험체가 탈출했다


대체 어떻게?

 

 

*

 

 

 

전생에 본 영화의 내용 중에 그런 장면이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감옥 벽을 뚫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 드러난 배수관를 통해 바깥으로 탈출하는 주인공

 

긴 파이프를 지나 바깥으로 나와 비를 맞으며 양팔을 치켜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성별이 바뀌었어도그리고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이 되었어도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물론 내게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망치도 없고연구소 또한 영화 속의 허름한 옛날식 감옥과는 달랐지만 여기에는 하수구 대신 환풍구가 있고내 몸 또한 숨을 좀 참는 것만으로도 수면 가스의 영향을 줄일 수 있고, 방금까지 두들겨 맞았음에도 창살 정도는 맨 손으로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니까.

 

 

망할 놈아주 골고루 패 놨네.”

 

 

이럴 줄 알았으면 뒤통수나 한 대 세게 갈겨주고 오는 건데

 

일부러 성질을 긁었을 때 몇 대 맞을 각오는 했지만 온 몸을 골고루 팰 줄은 꿈에도 몰랐고그렇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멍만 들 줄은 더더욱 몰랐다

 

부러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몸을 볼 때마다 내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감상 따위는 탈출해서 해도 늦지 않는다일단은 이 환풍구부터 빠져나가고 생각하자.

 

어디가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기어가면 되겠지

 

그렇게 나는 마치 미로 속에 갇힌 생쥐처럼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 기어가고 또 계속 기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단단하게 자리 잡은 쇠창살을 뜯어내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이 세계에 온 후 처음으로 바깥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도시의 풍경도멀찍이 보이는 자동차도 모든 것들이 기억속의 도시와는 사뭇 달랐지만 하늘 위에 떠 있는 보름달만큼은 기억속에 남아있는 그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