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휴우...”

 

강의에 마침표를 찍은 리마토르는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을 옷소매로 훔쳤다. 방금 자신이 평온한 호수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돌을 던졌음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칫했다가는 이전처럼 시위대의 습격을 받을지도 몰랐기에 리마토르는 지체 없이 장소를 옮겼다.

 

“수고하셨어요, 교수님.”

 

“고생 많았어요, 하르페이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는 듯하니 우선은 제 강의실로 철수하도록 하죠.”

 

발표에 쓰였던 개인 장비들과 대본 정도만 챙긴 뒤 리마토르는 잰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하르페이아의 뒤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섞인 청중들의 난잡함이 그를 빠르게 쫓아왔다. 혹시라도 그 목소리에 잡히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랐기에 리마토르는 자신의 다리를 잡아끄는 불안감을 털어내며 앞으로 향했다.

 

“연구실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그날따라 유난히 복도가 길게 느껴졌다. 강의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던 길이 이상하리만치나 낯설었다. 익숙함에서 오는 기묘한 생경함에 그의 온 신경이 곤두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전력 질주를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아플 정도로 속도를 높여 숨이 가빴다. 갑자기 그런 게 아니었다. 강단에 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빨랐던 박동이었다.

 

예민해진 신경, 빨라진 박동, 동시에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 발표 내내 갖고 있던 모든 걸 그는 이제야 인지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수준 이상으로 떨고 있었나 본데. 이 논문이 가져올 결과를 스스로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었나.’

 

파편을 조립해 전체를 맞추자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내면이 보였다. 리마토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연구실 문 앞에 다가간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까.”

 

리마토르는 문을 열었다. 이미 허공으로 날았다가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는 더 이상 그의 손 위에 있지 않았다. 주사위를 허공에 던진 시점에서 자신이 할 일은 끝을 맞았었다. 남은 일은 주사위의 눈을 읽는 것이었기에 그는 조작자에서 관측자로 역할을 바꾸었다. 리마토르가 관측을 시도하자마자 그의 눈에 새로운 결과가 들어왔다.

 

“두 분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자신보다 앞서 연구실에 도착한 두 명의 존재를 인식한 리마토르는 즉각 용무를 물었다. 스노우 페더는 살짝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답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교수님의 신변을 보호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어요. 그에 따라 저와 하치코가 24시간 동안 교수님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할 예정이랍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스노우 페더의 말을 들은 리마토르는 단답 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심한 긴장이 아직 전부 가라앉지 않아 이성이 온전히 제 기능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 상황에 등장한 새로운 요인의 원인과 전망을 분석하기 위한 사고가 자꾸만 좌우로 휘청였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두뇌에 짜증을 내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리마토르는 사령관의 지시를 곱씹었다.

 

‘경호 목적으로 컴패니언을 파견한다, 정말 경호인가? 사령관이라면 충분히 감시 목적으로 이 둘을 보낼 수 있어. 리리스와 페로, 포이처럼 작정하고 전투에 특화된 인력이 아니라,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처럼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인원을 보냈다면 일부러 실질 경호력을 낮추면서 경호를 제공했다는 명분을 챙기려고 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전과 달라졌어. 일단은 연구에 한해 면책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고, 사령관이 나를 일방적으로 적대하지도 않으니까.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이번에 보낸 인력은 진짜 경호가 목적이라는 해석이 더 개연성이 있어.

 

그렇지만 마냥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아직 논문에 대한 사령관의 반응이 나오지 않았어. 사령관의 반응에 따라 저 둘이 내 목을 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지. 100%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사령관의 반응부터 알아야 해.’

 

계산이 끝나자 과열되었던 머리가 살짝 식은 것 같았다. 리마토르는 구겼던 미간을 펴고 둘의 눈치를 살폈다. 늘 헤실헤실 웃고 있는 하치코는 이번 사태에도 별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스노우 페더는 누가 봐도 심란함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쳐다볼 때 리마토르가 스노우 페더를 바라보는 시선이 교차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리마토르와 스노우 페더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상황이 어색해지자 리마토르는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 제가 발표했던 논문 읽어보셨나요?”

 

“네, 읽어봤어요. 내용이 많이 어려워서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반복 회독해주신다니 저자로서 정말 영광이군요. 많이 어려울 거라 생각해서 오늘 발표를 진행했는데, 혹시 발표도 어려웠나요?”

 

“아니요. 다행히 발표는 알아듣는데 지장이 없었어요.”

 

냉기를 다루는 스노우 페더의 능력과 달리, 그녀와의 분위기 해동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하르페이아도 예상과 다른 상황에 마음이 놓였는지 편히 자리에 앉아 둘의 대화를 관망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요. 후속 강의를 위해 복습 강의를 따로 열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말이죠.”

 

“복습 강의가 있으면 더 좋죠.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된 내용이라도 두 번, 세 번 듣다 보면 이해가 될 테니까요.”

 

“복습의 의의를 생각해보면 그편이 더 낫겠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스노우 페더와 대화를 주고받자 바쁘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여유를 되 찾았다. 긴장이 빠지며 몸이 피로에 젖어 들었지만 리마토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상시의 속도로 사고가 가능해지자 그는 미뤄두었던 일을 꺼냈다. 리마토르가 하르페이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 연구실 문밖에서 짧게 끊어지는 노크 세 번이 울렸다.

 

“네.”

 

“캐노니어의 지휘관 아스널 소장이다. 들어가도 되겠나?”

 

“들어오셔도 됩니다.”

 

리마토르의 승인이 떨어지자 문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열렸다. 평소처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아스널은 자신의 옆에서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듯이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칸을 대동하고 방에 들어왔다. 웃음의 형식은 같았으나 의미는 달랐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다 그에게는 좋지 않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적절한 시기에 좋은 인물이 찾아왔다. 웬만해서는 서론으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리마토르는 이번에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미사여구 없이 자신이 궁금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 아스널은 ‘많이 궁금했냐’며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바로 대중의 반응을 묻다니. 평소의 그대답지 않군.”

 

“그게 무슨 말인가요? 누가 들으면 제가 강의 평가를 신경 안 쓰는 줄 알겠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 평소라면 강의가 끝나도 강단에서 질문도 받고 피드백을 요청했을 텐데 오늘은 그런 게 일체 없지 않았나. 그래서 뜻밖이라는 거라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은 없군요. 그렇지만 거기 오래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운이 나쁘면 강단 위로 돌이 날아올지도 모른데 제가 뭘 믿고 거기에 계속 있나요.”

 

리마토르는 장난스러운 말투를 섞어서 말했지만, 스노우 페더는 그 말 속에서 뼈를 느꼈다. 칸도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뭘 믿기는, 날 믿어야지. 빠른 기동으로 당신을 구해줄 테니까.”

 

“고마워요. 덕분에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들어주는 내내 아주 든든했어요.”

 

칸은 아까부터 담아두던 웃음기를 공간에 잔뜩 흩뿌리며 그에게 말했다. 자신에게 하는 말에서 애정이 뚝뚝 묻어났기에 리마토르도 반려자의 미소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무거울 것 같았던 분위기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자 스노우 페더도 아까 느꼈던 언중유골(言中有骨)을 해소하고자 말을 꺼냈다.

 

“걱정 마세요. 앞으로 한동안 교수님의 신변 보호는 저희가 맡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시름이 놓이는군요.”

 

리마토르의 답변에 스노우 페더는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그의 우려를 끊을 수 있는 첫 단추가 되리라고 생각하자 스노우 페더는 속으로 다시금 다짐했다.

 

‘리리스 언니가 벌였던 일련의 사건으로 교수님은 우리 컴패니언을 믿지 못하실 거야. 내가 교수님의 경호로 있는 동안 조금씩이라도 불신을 부식시켜드리고 싶어. 교수님께서 우리 모두랑 다 잘 지내는 게 가장 좋으니까.

 

그런 점에서 나도 하르페이아님처럼 교수님 옆에서 공부해보고 싶은데... 이건 무리려나?’

 

스노우 페더가 속으로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동안 아스널은 전반적인 강평을 종합했다. 그녀는 지휘용 패드에 키워드 검색 결과를 띄워 리마토르에게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보다시피 여론은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네.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 말이지. 호의적인 여론은 ‘바이오로이드의 정체성을 재정의했다.’, ‘명령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부정적인 여론은 ‘사령관님의 역할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모든 인간의 종말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군.

 

어느 쪽이든 그대가 말한 해체가 성공을 거두기는 했네. 기존의 관념과 규칙이 전부 무너져내렸으니까.”

 

“성공했다니 다행이네요. 철학자의 말이 이렇게까지 파급력을 가질지 몰랐는데 말이죠.”

 

아스널의 말에 리마토르는 겸양의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 의도가 겉보기와는 달리 설의(設疑)에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투명하게 보였다.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의도를 놓치지 않고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파급력이 있어야지. 그대가 연구한 모든 내용을 다 담아, 그대의 모든 걸 걸고 도박수를 던진 셈 아닌가. 그대가 이곳에 합류한 이래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고려해보면 파급력이 없는 일이 더 이상하지 않나?”

 

“그렇죠. 예상하지 못한 많은 일이 있었으니...”

 

리마토르는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2년간 벌어졌던 투쟁의 기억이 뇌에 스치듯 지나갔다. 오르카호라는 공간에서 사령관 이외에 또 다른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했던 과정. 리마토르는 문득 헤겔을 떠올렸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의 결과는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으로 이어졌지만, 끝내는 주인도 노예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이성이라는 더 상위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자신과 사령관의 관계를 다룬 것처럼 보이는 1807년의 고전에 리마토르는 떠오르는 두 문장을 묵독하는 것으로 경의를 표했다.

 

‘비본질적인 개별자의 극이 행하는 희생 행위도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반대쪽 타자의 행위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 의식을 포기함으로써 자기 안의 의식이 자기 힘으로 자기 밖에 있는 타자의 의지를 산출해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헤겔은 이 문장 뒤에 이렇게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건 보편 이성이라는 상위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 어쩌면 이 모든 일도 가까이는 보편 이성으로부터, 멀리는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인가.’

 

생각을 곱씹던 리마토르는 아스널에게 직전에 설명해준 여론 조사에서 빠진 점을 물었다.

 

“아스널, 그러고 보니 중요한 점 하나가 빠졌군요. 제 발표에 호의적인 여론과 부정적인 여론 중 어디가 더 우세하나요?”

 

“그건 단언할 수 없겠군. 여론조사를 공식적으로 진행한 게 아니라, 오르카호 내부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빅 데이터로 집계한 결과라서 말일세. 그리고 이 여론은 안 중요하지 않나?”

 

“그건 무슨 말이죠?”

 

“어떤 여론은 다른 여론보다 더 평등하지 않은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의 대표적인 문장을 변주한 아스널의 말에 리마토르를 포함한 그 자리의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동물농장>을 읽어보지 않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하치코만 주위를 둘러보고 무언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 걸 제외하면, 다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면을 들추어본 후였다.

 

“이해를 못했나? 남론이라고 표현하면 정확하겠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스널. 무슨 의미인지는 다 알았으니까요.”

 

리마토르는 아스널의 노골적인 농담에 싱거운 웃음으로 반응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 희석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칸은 자신의 지휘용 패드에 울린 알림을 보고 분위기를 다시 짓눌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하려고 하네.”

 

칸은 패드를 들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발신인이 탈론 페더로 되어있는 탈론 허브 스트리밍이 시작 전 준비를 알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많이 보았던 장면이었으나 제목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속보] 사령관님 입장 표명 실시간 중계.”

 

하르페이아가 제목을 소리내어 읽자 리마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믹스 커피를 집어 들었다. 인원수에 맞추어 커피를 타며 그는 말을 이었다.

 

“철학은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사건이 다 지나간 후 되짚어보는 학문이죠.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랄까요.

 

자, 황혼이 졌으니 부엉이가 어떻게 나는지 구경해보도록 하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믹스 커피 특유의 달달한 맛을 느끼며 리마토르는 강의자에서 청자로 입장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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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앞 자리 수가 바뀌었네. 100화까지 글을 쓸 수 있도록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정말 고맙다.


최근에 군에서 있었던 개인적인 스트레스도 그렇고 내가 쓴 글을 읽을 때마다 부족하게 느껴지는 현상, 소위 말해 '내글구려병'도 그렇고 글 쓰는 게 여간 손에 잡히지가 않았는데 그래도 막상 써보니 어찌저찌 쓰이기는 하네. 작년에는 90편 가까이 글 쓰고 갔는데, 올해는 겨우 10편 남짓한 양 밖에 못쓴 게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게 남는다...


다음 편부터는 사령관의 논평과 그에 따른 내부 반응이 이어질 예정이야. 과연 이번에는 무탈히 넘어갈 수 있을까?


부족한 글이지만 100화까지 읽어줘서 다시금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적극적인 의견 제시가 더 좋은 글을 만드는 기회가 되니까 피드백이 있다면 부탁한다. 다들 날씨 추운데 건강 조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