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줘”

 

에밀리가 중얼거리자 제녹스의 총구에서 새파란 광선이 쏘아졌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것은 길게 늘어진 뜨거운 자국과 그 위에 눌러붙은 철충의 조각들 뿐, 에밀리는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제녹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철충무리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비켜줘”

 

에밀리는 아까와 같았지만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녹스의 충전이 끝나자 아까와 같은 새파란 광선이 다시 철충들에게 쏟아졌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푸른 빛, 사라지는 철충들…오분전과 똑같은, 지루한 전투의 반복.

 

복도를 가득 채우며 나타났던 철충들이 모두 사라지자 에밀리는 다시 제녹스에 올랐다.

 

에밀리는 알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철충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에밀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인간들이 모두 사라지고 철충만이 남은 기괴한 실험실에서 주인 잃은 바이오로이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주인이였던 인간이 내린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는 것 뿐이었다.

 

[죽여! 저 괴물놈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라고!]

 

에밀리는 머릿속에 울리는 철충들에게 삿대질을 하던 비명과도 같은 남자의 마지막 명령을 떠올리며 작은 몸을 바삐 움직였다.

 

“아…?”

 

저게...저건..뭐야? 에밀리는 커다랗고 하얀, 난생 처음보는 거대한 무언가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고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에밀리의 옆에 떠 있는 제녹스만이 지잉..하고 힘없는 기계음을 낼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기괴하게 생겼다 해도 인간이 아닌 이상 저건 철충과 같은 '괴물' 일뿐, 

그 괴물도 언제나와 같이 제녹스의 푸른 빛이 작렬하면 한줌 먼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에밀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언더왓쳐의 팔에 제녹스를 겨누었다.

그리고 제녹스의 끝에 푸른 빛의 구가 맺혔다. 

 

파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살벌한 파열음과 함께 강인한 언더왓쳐의 몸통에 제녹스의 총알이 작렬했다.

제녹스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 살아남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철충이 아닌 AGS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에밀리는 언제나처럼 생긋, 옅은 승리의 미소를 띄우며 제녹스를 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려고 했다. 

에밀리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빨간 칼날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급하게 제녹스를 조종해 칼날을 피한 에밀리는 간발의 차로 칼날이 바닥을 쓸고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실톱을 닮은 칼날은 제녹스의 포가 작렬했던 AGS의 거대한 몸체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칼날이 어찌나 날카로웠는지 제녹스의 총알로도 쉽사리 뚫리지 않았던 단단한 실험실 바닥에 반듯한 칼 자국이 나 있었다. 

 

저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면 자신도 저 바닥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에밀리는 기계팔의 공격 범위를 생각하며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전투에서는 프로페셔널 급인 에밀리였지만, 제녹스의 포를 맞고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언더왓쳐와의 전투는 에밀리로써도 힘들었다.

 

에밀리는 바로 제녹스를 충전하는 대신, 잠시 몸을 뒤로 빼고 머릿속으로 자신과 저 괴물의 전투를 시뮬레이팅 했다.

타고난 전투기계인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시무시한 언더왓쳐와의 전투가 수백. 수천번도 넘게 펼쳐졌다.

수많은 시뮬레이션의 결말은 대부분 에밀리의 몸이 반토막이 나거나, 팔다리가 잘려 피를 흘리는 끔찍한 모습으로 끝났으나, 그 미래중 어딘가에는 자신이 제녹스로 저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을 구워버리는 장면도 있었다.  

 

붉은 레이저가 언더왓쳐의 광자포 끝에 모이는 것을 본 에밀리는 제녹스를 타고 뒤로 물러났다. 

 

이동하면서 제녹스를 사용하는건 위험하지만,

저 무식한 공격을 피하며 제녹스를 사용할수 있는건 이 방법 뿐이였다. 

잠시 앉아있었을 뿐인데도 충전중인 제녹스의 몸체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비켜줘…”

 

부탁이야, 뒷말을 삼킨 에밀리는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거대한 철충의 팔을 조준했다.

공기가 일렁이는 것이 눈에 보일정도로 열이 올라있었다. 

 

“제녹스...부탁해”

 

여느때보다 더 오래 충전하여 달아오른 제녹스의 포신의 열기에 주변의 공기가 달아올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기도하는 듯한 에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녹스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해치운거야..?"

 

피어올랐던 먼지구름이 약해지자 에밀리는 중얼거렸다. 적이 철충이 아닌 탓에 뇌파감지를 할수 없었지만 

제녹스의 무자비한 폭격에 살아남을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에밀리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확실히 언더왓쳐는 이전보다는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레이저를 쏘는 곳은 아직 건제하였다.

자신을 상처입힌것에 분노한 듯 언더왓쳐가 붉은 레이저를 토해냈다.

 

“...!”

 

순식간에 에밀리의 옆구리가 둥글게 뚫렸다. 그리고 곧 에밀리의 작은 몸에서 나온 것 이라고는 밑기지 않을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와 연구실 바닥을 가득 적셨다. 따끔으로 시작한 통증은 금세 자라나 허리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으로 변했다. 

 

그 고통에 에밀리는 몸속에 묶여있던 무언가가 풀리며 의식이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에밀리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너… 용서 못해.”

 

전투회로가 미친듯이 돌았다. 몽환적인 자주빛을 띄고있던 에밀의 눈이 회색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였다.

 

“X-05 에밀리, 화력, 최대전개합니다.” 

 

스스로가 놀랄만큼 기계적인 목소리가 에밀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리미터가 해제된 에밀리가 손을 움직이자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제녹스가 충전되기 시작했다. 

지잉 ..지잉...순식간에 많은 힘을 받아들인 제녹스가 한계라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평소라면 여기서 버스터 캐논을 발사했을 테지만 어쩐지 지금이라면 제녹스를 오래 충전해도 제녹스를 제어할수 있을것만 같았다. 

 

“조금만...더..”

 

에밀리는 다시금 날아들어 오는 붉은 칼날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저 괴물을 부숴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더왓쳐의 칼날이 마악 제녹스의 포신에 닿기 직전,

땅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빛의 형태를 한 120mm 총알들이  쏟아졌다. 그 엄청난 위력에 에밀리의 길고 얇은 머리가 후폭풍에 휘말려 사정없이 헝클어졌다.

 

모든 힘을 쏟아낸 에밀리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괴물은 허무하게도 간단히 사라져 있었다.

 

“조금... 쉴래…”

 

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에밀리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처입은 몸이 느리게 회복되며 회색빛으로 가라앉았던 눈동자도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에밀리는 고개를 들어 철충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몸은 어느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언더왓쳐가 쓰러져 실험실로 나가는 길이 뜷리자, 실험실 여기저기 숨어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본능에 이끌리듯 실험실 출구 쪽으로 향했다. 나도 저 빛을 따라 나가야 하는 것일까. 망설이던 에밀리는 곧 연구실 안쪽에서 느껴지는 철충의 뇌파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망령과도 같은 남자의 마지막 명령이 다시 에밀리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죽여! 저 괴물놈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라고!]

 

“...타깃 감지, 명령 수행합니다.”

 

에밀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철충의 뇌파가 흘러나오는 실험실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태어난 곳, 이 저주스러운 실험실에 존재하는 모든 철충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녀의 길고 긴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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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4만개 5-8 뺑이에 꼬라박아도 에밀리 안뜨길레 글이라도 써주면 나오지 않을까 해서  글 써서 올림 ㅠ

드랍률 악명 높은건 알고 있는데 당장얻을 방법이 없어서,., ㅜ

 라오 시작한지 일주일도 안된 뉴비라 설정구멍 있을수 있음...라오 글쓰는거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