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에 휘둘러 적을 베어야만 하는데

심신에 오로지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한 자루 날붙이에 의지해 님을 지키는 것이

소첩의 삶을 아우르는 본분이었거늘

주인의 품 안에 웅크리고 싶다는 천한 욕망이

소유물에게 허락되기엔 그리도 과분했던 것일까요


님을 보고파 눈을 뜨면 숯이 타는 듯하고

님을 만지고파 맨손을 뻗으면 이리도 쓰라리니

가슴 속에 몸부림치던 봄바람이 갈 곳이 없어 

한숨이 되어 하르르 

잔잔하던 수면이 그에 일렁이느라 

떠오른 님의 모습마저 흐려집니다


...


...


"그래서, 금란 언니가 날 찾아온 거구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천진난만한 인상과 달리

닥터는 진지하게 금란의 말을 경청해주었다.


"그렇습니다, 닥터 양.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져 좋은 방도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대로는 주인님을 보필하는 데에도 차질이 생기니까요..."


의자에 정자세로 앉은 채 손을 단아하게 모았지만

부끄러움 탓에 금란의 표정은 어두웠다.  

닥터는 그런 모습이 안쓰러운지 분위기를 띄우려 쾌활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무 우울해하지 마! 솔직히, 곧 금란 언니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지가 꽤 됐거든. 조만간 내가 먼저 물어보려 했는데,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 언니도 많이 참아온 거지? 인내심이 대단해~."


닥터의 노력이 효과적이었는지 금란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일방적으로 재잘거리는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여자 울리기 도사인 오빠야가 무조건 나쁜 거야 아무렴~.

그건 그거고, 여기(닥터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가리켰다) 들어있는

오르카 최고의 두뇌는 이미 언니를 파박! 고쳐줄 방법을 다 마련해놨다는 말씀!" 


그야말로 자신감이 좔좔 흐르는 언행이었다.

속이 한결 개운해진 금란은 표정을 밝게 하며 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닥터 양. 그 방법이란 무엇인가요?"


"언니에게 필요한 신통방통 치료약은 단 하나! 

오빠와의 찐득끈적한 하룻밤이지롱~."


"......예...?"


허리춤에 주먹을 올리고 으스대는 닥터와 

놀라면서도 민망해하는 금란이었다.


...


'주인님과의 하룻밤... 그것도 찐득...끈적한......'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떠올린 것만으로 가슴팍이 뜨거워지고

생각할수록 커져가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청각이 마비될 듯하다.


하지만 단지 그뿐.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감각 탓에 

사령관이 자신을 최우선으로 배려하느라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은 고통스럽지 않은 척하느라 정신적으로 피로해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쉽게 그려졌다. 


싫어도 이따금 비밀의 방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언제나 남의 것.

자매들에게 서글픈 질투를 약하게나마 느끼던 때마저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어린 소녀가 순식간에 날려주었다. 


...


사령관실로 향하는 금란의 발걸음은 조용조용했지만

배틀 메이드 소속의 누군가 봤다면 그녀가 들떴음을 눈치챘으리라.

흰 장갑을 낀 손에 쥔, 닥터에게서 건네받은 플라스틱 약병에는  

희미하게 하늘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금란은 닥터에게서 들었던 설명을 다시 떠올렸다.


.


'이 약은 언니의 감각을 '일반적인' 수준으로 만들어줄 거야. 

이 정도 분량이면 딱 10시간. 그 이상은 안전한 범위 밖이라 줄 수 없어.

미안해... 아무튼, 마신 뒤 약 15분에 걸쳐 감각이 서서히 둔해질거야.

그리고 10시간이 다 지나면 2시간에 걸쳐 감각이 되돌아올 거구.


이런 효과가 나도록 조절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술이냐면 재잘재잘...

응? 에에이, 뭘~. 보답하고 싶으면, 때때로 오빠야한테 내 칭찬 열심히 해줘. 히히.

언니는! 오빠야랑 이쁜 시간 보내는 것만 생각하세요오~.'


.


아직도 얼떨떨했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감각은 약병의 존재를 크게 외치며

이 꿈만 같은 상황이 현실임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고맙습니다, 닥터 양. 이 큰 빚을 반드시, 반드시 갚겠습니다.'


사령관실에 가까워지자 사령관과 누군가가 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그 누군가는 콘스탄챠였고 금란은 크게 안도했다.

사령관의 동침 일정을 관리, 조정하는 자상한 언니. 

둘에게 동시에 말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터.

운이 따라주는 거라 믿으며 금란은 어떻게든 마음을 다스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업무는 이미 끝났고

차를 홀짝이며 잡담을 하는 중인 듯했다.

금란은 문 옆의 버튼을 살폿 눌렀다.

언제 들어도 기쁜 바로 그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들어와도 돼."


...


...


"......그러니 소첩, 하... 하루 밤 동안, 곁에서 주인님을 

홀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처, 청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금란이 닥터의 약을 둘에게 보이며 그 효과를 설명할 때부터 

콘스탄챠는 얼굴에 기쁜 빛이 떠나질 않더니, 끝에 가서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자매를 응원해주었다. 

사령관도 금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콘스탄챠."


"네, 주인님?"


사령관이 부르자 평소보다 반 박자는 빠른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 금란의 요청을 거절했다간 적어도 일주일은 찬바람이 

쌩쌩 불겠지. 어차피 거절할 생각도 없지만!

사령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이 수요일이고, 금요일과 토요일 밤이 비어있었지?"


"네, 맞아요."


"그렇다면, 으흠, 금란."


사령관은 목을 가다듬고 앞에 앉은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함이 묻어나왔다. 

이름이 불린 여인의 심장은 이미 쉼 없이 콩닥거리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7시부터 비밀의 방에서 저녁 식사를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그리고 그날 밤엔 내 곁을 지켜주었으면 하는데, 어떠니?"


귓속에 심장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도 사령관의 말은

에로스의 화살처럼 그 모든 것들을 관통했다. 


분명히 들었다. 정말로... 이루어졌다.


의자에 앉은 상태였기에 다행이지, 만약 서 있었다면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춤해버리지 않았을까.


"네에... 기,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고마워. 나도 기쁘게 기다릴게. 그렇게 일정을 조정해 줘, 콘스탄챠."


"물론이죠, 물론이에요, 주인님!"


셋 중 누구보다 신난 듯한 콘스탄챠가 분주히 움직였다.


...


...


마침내 찾아온 토요일 저녁.

닥터의 약은 금란을 위해 자극적이지 않고 물과 비슷하지만 깔끔한 맛이 났다.

오후 6시 43분, 금란은 조심스레 약을 마시고 

오후 6시 51분, 배틀 메이드 자매들의 호들갑 섞인 응원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사령관실로 향하는 금란을 뒤덮은 것은 고요함. 깊고도 깊은 고요함이었다.

약을 마시고 자매들의 응원을 듣는 몇 분간에도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지만 홀로 복도를 걸으니 변화가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났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기계가 진동하는 소리도 세상과 함께 작아진 듯했다.


사박. 사박. 사박.


조금 무섭기도 했으나 금란은 나아갔다.

행여나 넘어질까 벽에 장갑 낀 손을 짚으며(손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나아갔다.

그렇지만 두 눈은 꼭 감고 있었다. 약을 마신 뒤로 단 한 번도 뜨지 않았다.

감각이 둔해진 지금, 눈을 활짝 떠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을 느끼면서도.

바보같은 고집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이것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기척이 아닌, 빛과 색으로 세상을 비로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나의 주인님이기를.

때로는 감옥처럼 느껴지던 눈꺼풀을 벗어난 자신의 눈동자를 

가장 먼저 보아주는 사람이 나의 주인님이기를.


그런 염원을 소리없이 불태우며 금란은 걸었다.


...


사박. 사박. 


...어둠과 정적 속에서 금란의 걸음이 멈춘 곳은 비밀의 방 앞.

콘스탄챠로부터 받은 카드를 센서에 대면 문이 열릴 것이다.


주인님과의 약속 시간에 늦어선 안 되는데.

오늘 밤 동안 곁을 지켜드려야 하는데.

빨리 주인님을 뵙고 싶은데.

그런데...


카드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갈라지듯 저려 견딜 수가 없었다.

완전한 침묵. 완전한 무취.

금란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령관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비밀의 방문 바로 앞에 서 있는데도 그 어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수준의 감각은 정말로 이런 걸까?

...자신을 초대해 주신 주인님은 정말로 이 문 너머에 계신 걸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문이 열리는 순간 침대에서 홀로 깨어나버리는 건 아닐까?


가슴 속에서 달궈진 칼날들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카드와 센서 사이의,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떨리는 오른손이 카드를 떨어뜨릴 것 같아 왼손으로 손등을 덮은 순간-.


쉬익-


"어서 오렴, 금란. 카메라로 봤는데... 카드가 인식이 안 됐니?"


비눗방울이 터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꽁꽁 얼어붙은 주변이 녹아내렸다.

마치 환상같은 순간.

백 년같은 찰나.

금란의 귀로 흘러온 사령관의 말을 머릿속이 채 정리하기도 전에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을 들이쉬는 그녀의 등줄기와 뺨으로 뜨거운 전율이 스쳤다.


"아... 아..."


"눈은 왜 감고 있는 거니? 너 혹시-,"


약을 먹지 않은 거니, 라는 말은 나오기 직전에 멈추었다. 

딸깍 하고 카드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금란의 양손은 어느새 사령관의 뺨에 꼭 닿아 있었다. 


"아... 주, 주이...... 아아..."


넋이 나간 듯 단어조차 온전히 뱉지 못하는 금란을 보며

사령관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잔말은 필요치 않았다.

사내는 여인의 등을 덮어주듯이 손을 얹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비밀의 방으로 들어온 금란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금란아."


사령관은 왼손으로 뺨에 있는 금란의 손을 포개며 이름을 불렀다.


"눈을 떠도 괜찮아."


마법과도 같은 포용력이 담긴 한 마디. 요동치는 감정 속에서

금란을 깨워주는 말이었다. 금란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조금씩, 조금씩. 열려가는 눈틈 사이로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르 흘러나왔다. 여인의 마음 속에서 맴돌던

슬픔과 걱정을 실은 구슬은 그대로 톡,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아침의 안개 사이로 산마루에 고요히 내려않는 햇빛이 연상되는,

고풍스럽고도 잔잔한 호박색 눈이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사령관도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살며시 금란의 장갑을 벗겨주었다.

언제나 감추어져 있던 손은 희고 보드라웠다.


"주인님..."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을 시작으로 금란은 '지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본다는 게 무엇인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손끝으로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꿈에서도 보이는 사람의 품에 안긴다는 게 무엇인지.


"아, 아아... 흑, 흐, 흐으윽..." 


걷잡을 수 없이 감정들이 쏟아져나왔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울고만 있어선 안 되는데.


오늘 초대해 주신 주인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앞으로도 정성을 다해 지켜드리겠다고

언제나 주인님만을 떠올린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바로 둘뿐인 지금, 말씀드려야 하는데.

말씀드리고 싶은데.


수많은 생각들은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흐느낌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사령관은 금란을 굳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는 말과 함께 가슴팍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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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설정은 잘 기억 못해서 어색한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슴


찐득끈적한 하룻밤은 2편에 나옵니다

2편부터는 라오야설이 될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