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독 그랬다.
외로웠다.
비도 내렸고
웃긴 일이다. 내가 필요 없다고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잡아주는 손도, 건네오는 친절도 다 쳐내고 나왔는데.
이제와서 외롭다는 게
후회는 없었다.
번복할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눈 앞에 광경에 손을 뻗는다면
추악하고 더러운 질투심과 독점욕으로 점철되서
뻗어준 손들을 다 쳐냈는데
거짓말들로 아득 바득 가려놨는데.
외로운 건 모른다고
혼자가 편하다고
더 이상 지쳤다고
그저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변명하며
가려놓고 덮어놓고 나왔는데.
지금 여기서 손을 뻗어 그녀를 잡는다면
애써 가린, 보고싶지 않은
내 마음을 다시 들춰보여지는 것 같아.
".....당신, 누구에요. 그리고 전 누구죠?"
그녀의 말에 말 없이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며 옆에 섰다.
".....글쎄 난 여기 주변에 그냥 사는 사람이라. 같이 갈래?"
질문에 애매모호하게 답하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 하는 순간에도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등골을 타고 위로 올라와 몸을 휘감는다.
"........네"
동의를 얻고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대체 그 폭발에서 어찌 살아남은 건 지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상관 없을 것 같다.
"...저는 뭐였을까요? 왜 폐허에서..."
"뭔가 사고라도 있었나 보네. 쉬다보면 차츰 기억나겠지."
무어라 질문을 하는 그녀를 보면 해줄 말은 많지만
굳이 할 필욘 없겠지.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슨 짓을 했고 무슨 죄를 짓고 살았는지
지금은 그냥 조용히, 그냥 옆에,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몇 달 뒤
??? 자택
똑 똑
"왔구나."
"오랜만이야 형 별 일 없었어?"
"딱히?"
꽤나 친했던 사이인지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두 사내들 서로 얼마나 기뻣는지 들어올 생각보다
현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념 없다.
"여보 손님 오셨나요?"
"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
다른 한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진한 붉은 색의 단발머리의
여성이 웃으며 맞이하러 나오자
손님으로 온 사내의 얼굴이 굳는다.
".....사령관 서재 가서 이야기하자. 여보 커피 두 잔 부탁해."
"네~"
사령관이라 불린 사내는 굳은 얼굴로 부엌으로 향하는
여성을 지켜보며 집 주인 사내의 손에 이끌려 서재로 간다.
딸깍
"형 델타잖아. 아니 그보다 분명 그때 폭발이 있었다 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거야? 아니 아니 그보다 내가 아는 델타 맞아?
별 일 없다면서, 근데 왜 델타가 형한테 여보라면서
저러고 있는건데."
팅 치이익
"후우웁.... 푸후우...."
사령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담배부터 피우는 사내
그런 그가 익숙하다는 듯 쇼파에 몸을 앉히고
대답을 기다리는 사령관
"모르겠다. 비오는 날 산책 나가니까. 비 맞으면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더니, 나는 누구고 자기는 누군지
모르겠단다."
"그 말만 듣고 데려온거야? 그리고 지금 서로 부르는거나
눈 보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더만. 아직 유럽 완전히 정리는
하지 못해서 우리 애들 순찰도 돌고 소탕도 하는데...."
"발견되면 큰일이겠지."
".....어떡할거야. 안그래도 우리 애들도 집들이 한 번
하려고 하는데. 형 집에 이렇게 델타가 버젓이 있으면...!"
똑 똑
"커피들 드세요~"
사령관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니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조차 모르겠던 델타의 활짝 웃는 얼굴은
자신 알던 그 희대의 악녀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리고 사내를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다.
혼자가 편하다며 자신이 맡았던 사령관의 자리까지
넘겨주고는 도서관에 박혀서 책만 읽던 그가
이곳에서 바이오로이드와 단 둘이 살고 있고 심지어는
결혼까지 했다.
거기까지 본 다면 문제 없지만 상대가 문제다.
델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악행을 일삼고 최후까지
어떠한 사죄도 뭣도 없이 사라진 악녀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커피를 받고도 매우 찜찜했다.
"....고맙...습니다."
"호호 아니에요. 편히들 대화 나누세요~"
친절하게 커피를 넘겨주곤 조신하게
빈 쟁반을 들고 나가는 델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정말 저 모습이 내가 알던 델타가 맞는가
아니면 내 앞에 있는 이 형이 대단한건가.
확
"확실히 기억상실인거지?"
"....어."
"일단 오늘은 커피만 마시고 갈게.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네."
"미안하다. 여러모로."
"......."
서재에서는 화기애애했던 현관에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조용히 대화 없이 커피만 홀짝이는 두 남자가 있었다.
사령관은 커피를 다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와 델타의 배웅을 받으며 오르카로 돌아갔다.
"여보... 저 분 표정이 안 좋으셨는데..."
"괜찮아. 사소한 문제야. 사소한 문제...."
"후훗... 손은 떨리는걸요?"
맞잡은 손을 더욱 힘 주어 잡는 델타 그리곤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사내는 그런 델타의 머리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집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