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한 달간의 휴가철이 끝나고, 아쿠아 랜드는 다음 여름을 기약하며 문을 닫았다. 오르카호는 본격적인 레모네이드 델타와의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전투원들은 훈련을 위해 스발바르 제도 남동쪽에 있는 세베르니 섬으로 이동했고, 그 덕분에 오르카호와 방주는 반대로 한산해졌다.


물론 이는 표면적인 움직임이었다. 실제 오르카호 주력부대는 델타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그린란드의 배핀만, 네어스 해협쪽으로 은밀히 이동했으며 오르카호 내의 첩보부대는 계속 바르그의 동향을 감시했다.


바르그가 자신이 경계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사실을 알고있는 자들은 오르카호의 간부진만으로 제한했다. 비전투원들에겐 상황을 공유하지 않고 평소처럼 행동하도록 냅두었다.


그리고 그 비전투원 중에는 두 번째 인간도 포함됐다.


***


사방에서 전쟁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슬슬 바르그가 일을 벌일 타이밍인 거 같은데, 나한텐 아무런 정보도 공유해주지 않고있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았다간 표정관리 못하고 바르그한테 들킬 것 같았나 보지. 이미 다 알고있지만.


원작 스토리대로라면 바르그는 오밤중에 기억의 방주를 정전시키고 거기서 어슬렁거리는 사령관을 납치하려 접근했다가, 역으로 함정에 빠져 거센 저항 끝에 붙잡히게 된다. 요점은 이 모든 일은 기억의 방주에서 벌어질 예정이라는 거다. 반대로 말하지면 방주에 가있지만 않으면 불똥 튈 일 없이 안전하다는 거지.


그래서 나는 당분간 방주엔 얼씬도 안하고 오르카호에 틀어박혀서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것도 낮에만 돌아다니고 저녁 이후엔 숙소에서 안나간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다. 바르그가 잡힐 때까지만 이러고 버티면 된다.


***


때가 됐다. 오르카호의 주력부대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다. 레모네이드 델타한테도 신호를 보냈으니 그년의 함대도 곧 도착할 거다.


준비는 이미 끝마쳐뒀다. 목표물의 행동반경과 패턴을 분석해 납치할 계획을 짜뒀다. 바르그는 오르카호 밖으로 나와 전파 방해 장치가 설치되지 않은 장소로 이동했다.


딱 한 번, 마리오네트들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물론 쓸 수 있는 마리오네트라곤 델타가 오래전에 버리고 간 패잔병들 뿐이다. 두 번째 인간 곁에 있는 마리오네트 저격병은 아무래도 델타의 명령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큰 효과는 없을테지만, 시선 분산용은 될 거다.


바르그는 녹음기의 버튼을 특정한 순서로 눌렀다. 


스발바르 제도 곳곳에서, 눈 덮인 채 쓰러져있던 마리오네트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마리오네트의 수명 한계상 이미 기능이 정지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들이었고, 실제로 몇몇은 벌써 부패가 겉에서 보일 정도로 진행돼있었다. 무기를 들기는 커녕 하나같이 제 몸도 제대로 갸누지 못하고 있으니 그 꼴이 좀비나 다름없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죽어서 쉬는 것 조차 허락받지 못한 인형들이 비적비적 방주를 향해 걸어갔다.


***


"거기 정지. 잠깐 괜찮겠나?"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사디어스가 우릴 불러세웠다.


"...뭐야, 불심건문?"


"그렇다. 다만 용건은 네가 아니라 그 마리오네트에게 있지. 혹시 오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던가 하진 않았나?"


사디어스가 손가락으로 미호를 가리켰다. 나는 미호를 슥 쳐다보고, 다시 사디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조금 전에 마리오네트 무리가 기억의 방주를 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뭐?"


마리오네트가? 이 시기에? 이런 건 원작에선 없던 일인데?


"무슨 소리야, 델타가 여길 침공하기라도 한 거야?"


"아니. 지금 방주를 공격하고 있는 마리오네트는 외부에서 새로 들어온 놈들이 아니라, 스발바르 제도 내에 방치되어있던 놈들이다. 누군가가 다 죽어가던 마리오네트들을 억지로 일으켜세워서 공격하도록 시킨 거지.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서 방주에 남은 방어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대응 가능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 마리오네트를 일으켜세운 네크로맨서가 나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건가?"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건 네 옆에 있는 마리오네트도 다른 놈들처럼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거지. 혹시 모르니 지금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만 그 마리오네트의 신병을 확보해두라는 상부로부터의 지시다."


"...지금, 뭐라고?"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디어스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불온한 시기인 만큼 최대한 내부의 위협을 차단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다. 안심해라. 그 마리오네트가 날뛰지만 않는다면 위해는 가하지 않아. 감옥에 가두지도 않고, 그냥 시티가드 사무실 내에 앉혀두고 시간만 때울 뿐이야."


아직도 이딴 의심을... 마리오네트라고, 아직도... 

열받는 일이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만약 델타나 그런 정식 명령권자가 명령한다면 여기있는 미호는 안전한 건가?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들긴 했지만, 솔직히 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이 끝나면 더 미호를 의심할 건덕지는 없어지는 거겠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쯧 하고 혀를 찼다.


"...좋을 대로 해."


"협조에 감사하마. 그럼, 거기 너. 따라와 주겠나?"


미호는 잠시 가만히 서있다가 내 어깨에 손을 한번 올리고서 사디어스를 따라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자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 때, 갑작스런 폭발음과 동시에 오르카호 전체가 어두워졌다.


***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갑작스런 정전, 눈앞이 칠흑으로 뒤덮이면서 공기가 한 순간에 굳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주 수비를 지휘하던 중이었던 사령관은 순간 놀랐으나, 금새 침착을 되찾았다. 예상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컴패니언과 가디언 시리즈을 비롯한 모든 경호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비아타, 티아멧 등 근접전투의 달인들이 언제든지 바르그를 제압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비록 방주를 공격한 마리오네트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 중 일부를 차출하긴 했지만 문제없다. 


와라, 바르그. 지금이 나를 잡을 기회니까. 사령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을 미끼로 던졌다. 그러나,


바르그는 오지 않았다.


[사령관님, 보고드립니다! 방금 목표물이...!]


대신 온 거라곤 바르그를 감시하던 팬텀으로부터 온, 허를 찔렸다는 보고였다.


***


"아니...?"


갑작스런 정전에 사디어스는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어째선지 비상 유도등도 작동하지 않았다. 바르그가 벌써 일을 벌인건가?


사디어스가 손전등을 꺼내려 마리오네트 미호에게서 눈을 뗀 그 순간, 자신이 왔던 길을 쳐다보고 있던 미호는 냅다 뒤돌아서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잠깐! 어딜 가는 거냐!"


고글에 야간투시 기능이 포함돼있는 미호에겐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았던 사디어스는 한 발 늦게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


오르카호가 정전됐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설마 바르그가...? 오늘이 그 날이었냐? 그렇다 해도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방주가 아니라 오르카호가 정전된 거지?


그런 추측은 지금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폰의 불을 키고 손전등 삼아 주변을 비춰보았다. 좁은 복도인지라 이런 작은 빛 만으로도 벽과 바닥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한 자루 단도같은 사나운 기척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리자 바르그가 순식간에


"엇..."


눈 앞까지,


*


'툭.' 주인의 손을 떠난 휴대폰이 땅에 떨어지면서 불이 꺼졌다. 바르그는 기절시킨 두 번째 인간을 어깨에 짐짝처럼 들쳐매고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몇 초가 지나고, 그 자리에 도착한 미호가 그 스마트폰을 주워들었다.


"......"


엄지손가락으로 금 간 액정을 쓸기를 잠시, 고개를 홱 치켜든 그녀는 어둠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바르그와, 그녀가 들고있는 검은 머리의 인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격총만 있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바르그를 맞췄을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가진 무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미호는 소리없이 바르그를 뒤쫓았다. 전력이 복구됐을 땐 바르그와 두 번째 인간, 그리고 마리오네트 미호는 이미 오르카호 밖으로 나간 뒤였다.


***


맹점이었다. 상대를 제 뜻대로 유인할 수 있을거란 확신은 생각지도 못한 판단미스를 유발했다. 사령관 자신한테만 모든 호위를 집중시키느라 두 번째 인간을 무방비하게 내버려두고 만 것이었다. 그를 따를 바이오로이드를 제조해주기는 커녕, 어리석은 의심으로 그의 유일한 호위였던 마리오네트까지 떼어놓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목표를 놓쳤습니다!]


바르그가 전력으로 뛰기 시작하자 그녀를 미행하던 팬텀은 뒤쳐지고 말았다. 사령관은 황급히 남은 병력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추격대를 보냈다. 


오르카호를 벗어난 바르그는 어느 해안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그 끝에서 한 스텔스 잠수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위성카메라에 잡혔다. 바르그를 운송하기 위해 마중나온 델타군 소속의 잠수함임이 틀림없었다.


바르그가 저곳에 도달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지금 오르카의 모든 전투부대는 네어스 해협에서 델타의 함대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공군은 물론이고, 빠른 기동력이 장점인 호드조차 자리를 비웠다. 오르카호의 추격대는 차를 타고 쫓는데도 출발이 너무 늦은 탓에 발로 뛰는 바르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델타군을 상대중인 전투원들 중에서도 부를 수 있는 이가 남아있었다. 사령관이 긴급호출신호를 보내자 에이다가 응답했다.


"에이다, 위성포격 가능하지!?"


[현 상황에서 목표 바르그를 공격했다간 같이있는 두 번째 인간까지 100% 확률로 사망할 겁니다.]


"알고있어! 그러니 잠수함을 파괴해!"


사령관이 명령을 내리고 잠시 후, 하늘에서 빛기둥이 내려와 바다를 강타했다. 바르그를 실어나를 예정이었던 델타의 잠수함은 상륙도 못하고 침몰했다. 그러나 바르그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그 빛기둥을 봤을텐데도.


그 이유는 얼마안가 알 수 있었다. 바르그가 해안에 근접하자 또다른 잠수함이 떠올랐다. 그것도 두 대씩이나. 잠수함에서 마리오네트 병사들이 몰려나왔다.


"에이다!"


[안됩니다. 두 번째 인간까지 포격 범위에 들어섰습니다.]


"큭...!"


오르카호의 추격대가 현장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마리오네트 병사들이 진을 친 뒤였다. 마리오네트들이 화망을 펼쳐 접근을 방해하는 한편, 바르그는 그들 사이를 프리패스로 지나쳐 잠수함에 뛰어탔다. 그녀가 들쳐맨 두 번째 인간과 함께. 자칫하면 인질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마음대로 바르그에게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바르그가 탄 잠수함이 먼저 출발하고, 다른 한 잠수함도 마리오네트들을 실은 뒤 스발바르 제도에서 철수했다. 눈 앞에서 목표를 놓친 오르카호의 추격대는 허망하게 바다를 바라봤다. 


두 번째 인간이 납치됐다.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갔던 건 모두에게 의심받던 마리오네트였다. 그러나 오르카는 끝까지 그녀에게 무기를 지급해주지 않았었고, 그 오판은 최악의 결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바르그와 델타군이 떠나고 난 해안에서 무기가 없는 마리오네트 저격병의 시신이 한 구 발견되었다.



샬럿이 니엄델 찬스를 놓친 세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