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이 없는 날이었다. 유전자 씨앗 저장고를 발견한 덕에 스틸라인에 새 연대가 보충되었고,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바이오로이드 몇을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AGS도 몇 기가 새로 합류했고 에이다는 화성 테라포밍 작업과 함께 지상에서 날 보조하여 철충을 최대한 밀어내고 있다. 기습이 있긴 했지만 전부 제때 정찰하여 피해는 크지 않았다.


"오늘 일과는 그럼 끝낼까?"

"수고하셨어요."

"수고했어. 지금부턴 내가 맡을 테니까. 푹 쉬어."

"좋아. 그럼 다들 야간근무 힘내."


내가 쉴 동안 사령관 대리를 맡을 메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콘스탄챠에게 보고받는 것으로 내 일과는 끝났다. 사령실 인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지금 시간대는 사령관실에 오갈 사람도 별로 없으니 복도는 한산했다. 이럴 거면 사령실에서 저녁 때우지 말고 천천히 식당에서 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딱히 할 일도 없고 피곤해서 숙소로 방향을 잡았는데. 어느 순간 뒤에 누가 따라붙었다.


"누구야?"

"나다."

"칸이구나."


언제나 그렇듯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뒤따라오니, 속으로 조금 놀란 걸 내색하지 않으면서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은 별 일이 없다고 들어서."

"응?"


내가 맥락을 못 잡고 있나? 평소에 보지 못한 전술 코트 차림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칸에게 무슨 말을 할까 싶다가. 어디까지 따라오나 궁금해서 그냥 말없이 걸었다. 그러니 정말 칸은 내 숙소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들어왔다. 지휘관급에게 출입허가를 내놓긴 했지만. 이건 좀. 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건 뒤 칸에게 용건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려다. 뒤늦게 뒤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오늘은 일이 없다고 들어서."

"아. 그래서?"

"굳이 입고 올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런 의미였나. 전술 코트를 벗은 칸은 장식은 없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속옷차림이었다. 이제야 알아차렸지만. 하얀 뺨에 약간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지, 이런 짓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을리가 있나. 하지만. 칸이라서 할 수 있는 대담한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스널이라면 더 당당하게 들이대긴 하겠지만서도, 저렇게 단순한 접근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건 역시 칸이 더 잘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일은 없는데."

"그럼, 오늘 밤은 같이 보내도 괜찮은가?"

"좋아. 샤워는?"

"하고 왔다."

"탈론은?"

"워울프와 같이 술을 먹고 자고 있다."

"벌써...."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어떻든 칸이 문제는 없다니 안 믿을 것도 아니다. 샤워를 같이 하면 더 좋은데. 나도 아침에 하고 나오긴 했지만서도.


"나는 안 했는데. 기다릴래? 아님 바로 하고 싶어?"


칸은 말없이 날 끌어안고는. 뚜벅뚜벅 침대로 가 날 부드럽게 눕혔다. 그리고 아직 벗지 않은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벗겨버리고는. 내 위에 걸터앉아 자신도 속옷을 벗어내렸다. 그리 크지 않지만 모양이 잘 잡힌 가슴을 감싸던 브래지어가 떨어지고. 내 위에서 요염하게 움직이던 다리 끝으로 팬티를 살짝 튕겨 방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나보다도 키가 큰 칸이 배 위에 앉아있자 묵직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그리고 배 위가 서서히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벌써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예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하고 싶어졌을 뿐이다."

"거 참."

"싫은가?"

"아니. 뭐부터 시작해야 하나 조금 당황스러워서."

"괜찮다면, 내가 리드해도 괜찮나?"


부끄러움이 약간 떠올라 있지만 단호한 미소 앞에서 아니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칸은 내가 과하게 눌리지 않게 조심스럼게 엎드렸다. 탄력있는 강인한 근육이 들어찬 몸이 내 위에 길게 누워 힘을 빼자, 마치 고무판이 들러붙는 듯한 느낌이 났다. 살짝 취한 것 같은 칸이 내 입술을 열고 들어오자. 반항하지 않고 부드럽게 맞아들였다. 피부 다음엔 혀, 칸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쥐고 잠시 서로의 맛을 보다가 얼굴을 떼고 천천히 뺨을 핥았다. 귓가에 스며드는 듯 희미하게 숨소리를 내면서 볼을 핥더니 목덜미로 내려왔다.


"으음..."


여기선 뺨처럼 핥는 대신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피가 몰려 조금 민감하게 된 부분을 혀로 간질이더니. 내가 깨닫기도 전에 가슴팍으로 내려와 혀를 붓삼아 부드럽게 무언가 써내려갔다. 지난 번에 내가 가슴팍을 핥을 때마다 묘하게 반응했던 부분을 한붓그리기라도 하는 양 쉬지 않고 핥아내리는 그 모습에 난 은근한 쾌감 속에서도 오늘 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졌다. 그래도 담백한 편이었던 칸이 오늘은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를 집중적으로 눌러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궁금증은 곧 피와 함께 아래쪽으로 쓸려내려갔다. 보지도 않고 내 다리 사이를 만져본 칸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군."


칸의 탄탄한 허벅지가 내 몸통을 죄었다. 엉덩이를 든 칸은 그 상태로 잠시 날 바라보았다. 놀랄 정도로 흘러넘친 애액이 빳빳하게 일어선 내 끄트머리에 뚝뚝 떨어지는 걸 본 나는 칸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칸은 손으로 잡지도 않고 엉덩이를 내렸다. 각도는 정확했고. 충분히 윤활이 되어 있던 터라 아무 장애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엉덩이가 완전히 내려앉자. 칸은 잠시 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삽입감을 즐기는 듯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움직일까?"

"잠깐만."

"응?"

"팔을 들어주겠나. 그렇게 살짝 힘을 주고 버티는 식으로. 그렇게..."


내가 손을 들자, 양손을 맞잡은 칸은 손에 힘을 주더니 마치 고삐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침대의 탄력에 맞춰 움직이기 때문에 허리가 서로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마치 출렁이듯 날 훑어내리고 빨아올렸다. 조용히 그 움직임에 집중하는데, 귓가로 소리가 들렸다.


"음, 으흠, 음음..."


노랫소리일까? 다큐멘터리에서 본 유목민들의 노래가 떠올랐다. 평원을 말과 함께 달리며 말과 함께 부르던 노래. 언제까지나 달릴 수 있을 거 같은 분위기를 만들던 그런 노래. 그러고보면, 칸은 그 노래를 직접 들었을까. 그 시절에는. 노래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마치 박차를 가하듯 허리도 강하게 움직였다. 침대는 삐걱거리는 소리 같은 건 내지 않았지만. 정말 말을 타는 듯 칸의 머리채가 거칠게 흔들렸다. 격렬히 흔들리던 가슴 끝에서 땀이 튀는 것이 보였다.


"하아, 후우, 후..."


칸의 페이스에 맞춰 움직이다보니 절로 숨이 가빠졌다. 칸은 눈을 감고 정말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양 몸을 움직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결합부에 집중하자 칸의 내벽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전보다 더 빠르게 마찰하면서 느껴지는 내벽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칸과 함께 달리던 상상을 하다 쾌감이 선을 넘자 아랫배에서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칸... 나 이제 슬슬..."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앞으로 조금만 더...."


그 순간은 갑자기 왔다. 칸의 허벅지가 몸통을 강하게 조이고 엉덩이가 허리를 세게 짓눌렀다. 근육이 탄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깊숙히 파고든 뒤 내가 먼저 폭발했다. 짧은 사정이 끝나자. 칸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맞잡은 손을 풀지 않고 숨을 고른 우리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짧게 정의했다.


"마치 말이 된 느낌이었어."

"잘 버텨줬다. 다음은 좀 더 길면 좋겠군."

"뭐?"

"휴식은 짧게. 어서 세워라."

"뭐라고?"

"오늘은 적어도 80킬로는 달렸으면 좋겠군."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