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침부터 모든 지휘관을 통신 채널로 호출한 사령관의 한마디가 오르카 호를 뒤흔들고 말았다.


"에, 갑작스럽게도, 소완, 포티아, 아우로라가 사냥 겸 출격했다가 완파당하는 바람에. 당장 식당을 지휘할 바이오로이드가 없어졌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냉동창고의 식재료는 충분하니. 수복하는 동안에는 모든 팀이 각자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야겠지."

"...뭐?"

"오케이, 용건은 여기까지. 식재료 불출은 콘스탄챠와 포츈이 하고 있으니 팀별로 사람 보내서 받아가도록. 이상."

"사령관? 사령관! 너 혼자 컴패니언 시중 받으려고! 이 망할!"


그렇게 처절하다면 처절한 자력갱생이 시작되었다. 하루 뿐이었지만.



- 스틸 라인


"사람 수가 많으니 받는 게 엄청나지 말입니다."

"아침엔 빵 먹고 싶지 말입니다."

"브! 생고기랑 전투식량 박스가 섞여있지 말입나다!"

"임펫! 선반 위 야채부터 다 꺼내! 솥 가져와!"

"노움! 반합 다 꺼내! 전열기는 분대당 하나다!"

"브아아! 밥과 국을 동시에 못 끓이지 말입니다!"


"...난장판이군."

"면목없습니다."


실키와 임펫 수십 명이 창고와 연병장을 오가며 부지런히 물건을 하역하고, 레프리콘과 브라우니가 오는 족족 상자를 열어보며 모든 분대에 정해진만큼 재료를 나눠주고 레드후드가 이 모든 것을 지휘하며 이프리트 엉덩이를 걷어차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준비검열, 탄약급속불출훈련이라면 오르카에서 제일 숙달된 스틸라인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눈에는 언제나 조금 부족해 보였다. 눈을 내리까는 선임 레드후드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는 마리는 미리 받은 전투식량을 뜯었다.


"우리는 이걸로 먼저 먹지. 아무래도 부대원들이 밥 한 술이라도 뜨려면 내가 가서 한 마디 해야 할 거 같으니까."

"굳이 그러실 필요 까지는..."

"아냐, 요즘 휴식 군기를 직접 세워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지."


아 젠장, 선임 레드후드는 혹시나 마리가 가져갈까 확성기를 꽉 쥐었다.



-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샌드걸, 물자 불출은?"

"저와 베라, 알비스가 맡습니다."

"좋아. 그렘린?"

"대형 전열기는 예열중이에요. 솥은 겨우 구해왔네요."

"발키리?"

"저와 님프는 레시피를 숙지했습니다. 최소한도의 인원과 숙련도로 진행 가능한 요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뭐지?"

"카레라이스 입니다."


레오나는 조용히 눈만 깜박였다. 발키리는 억양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전문적인 요리 경험이 없는 저희 부대에서, 사고 위험을 최소한도로 낮추고 추가적인 기술 없이 무난한 식사가 가능한 것은 현재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리고 저희 부대가 카레라이스를 맡는다면 이점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이점?"


발키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레오나의 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카레라이스에 초콜릿을 넣을 경우 맛이 훨씬 좋아진다고 합니다."


레오나는 눈썹만 치켜올리며 샌드걸과 같이 상자를 나르며 즐거워하는 알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게 되물었다.


"몇 개?"



- 앵거 오브 호드


"뭐 먹지?"


칸의 화두는 그리 복잡하진 않았지만. 퀵 카멜, 탈론 페더, 워울프 셋 모두 꿀먹은 벙어리마냥 묵묵부답할 뿐이었다. 차라리 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눈앞에 있는 건 생전 만질 일이나 있었을까 싶은 곡식과 고기와 야채 박스뿐. 그나마 칸과 탈론 페더가 조리도구라도 챙겨오지 않았다면 생식 체험 이벤트가 벌어질 법 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야 워울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영화에선... 이걸 다 솥에 넣고 끓이던데 말입니다."

"제정신 맞지?"

"아니 진짜 그랬다구. 배 위에서 먹을 떄긴 했지만."


퀵 카멜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인 말에 그녀답지 않게 자신없는 어조로 대답한 워울프는 칸의 얼굴을 살폈다. 칸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탈론 페더에게 뭔가 속삭였다. 칸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는 것 자체에 흥분해서 허벅지를 비비던 그녀는 칸이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부리나케 숙소로 달려갔다. 칸은 부대원들을 위한 결단을 내렸다.


"우리 중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럼 내가 해야겠군."

"괜찮으신.. 가요?"

"나도 그동안 밥은 먹고 살았다."

"아이고, 여기, 여기 가져왔어요!"


얼굴이 상기된 탈론 페더가 손에 빨간 병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병을 받아든 칸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뭔가요?"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니다 중국 쪽에 잠깐 들렀을 때 얻은 건데. 밀봉해서 그런지 아직 괜찮군."

"대장이 만든다면 뭐든 괜찮겠죠."

"좋아. 그럼 일단 재료부터 썰도록. 내가 볶으면 너희들은 밥을 한다."

"네!"


칸은 '麻辣'라고 쓰여진 병을 웍에 쏟아부었다.



- 둠 브링어


"실피드랑 지니야는 어디 갔어?"

"어디 가긴요, 물건 받으러 갔지. 보내 놓고서 잊어버렸어요?"

"뭐? 나는 가라고 안 했는데."

"저기...."

"무슨 소리에요, 대장이 가라고 안 하면 개네들이 왜 가요?"

"그게...."

"나도 통신 받고 준비해야겠단 생각을 하긴 했어. 근데 나오자마자 찾았는데 둘 다 없잖아."

"사실..."

"아니 진짜. 대장. 대장답게 좀 해봐요. 매사 그렇게 건성건성으로 할래요?"

"제가..."

"건성건성이라니! 내가 통신 듣고 하달했으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둘 보고..."

"아이고 대장님 납셨다. 그쵸? 뭐 지시를 똑바로 해야 아이고 이게 명령이구나 하고 듣지."

"미리..."

"뭐? 말 다 했어?"

"가라고..."

"다 하긴요. 지시도 하나 제대로 못 내리는데 사령관하고 그거 한 번은 제대로 하겠어요? "

"했..."

"너 진짜 뚫린 게 입이라고!"

"는..."

"이런 썅! 나온 게 가슴이면 사령관하고 침대에서 좀 뒹굴어보던가! 부하들 다리 사이에 거미줄이나 치게 만들고!"

"데..."

"오냐! 오늘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 이 평평이 멀대야!"

"요..."

"이 난쟁이 지방자루가!"


실피드와 지니야가 다이카의 지시대로 일본식 식사에 필요한 식재료와 조리도구, 조미료, 그리고 식기까지 식사에 필요한 일체를 가지고 돌아와서 본 풍경은 처참했다.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둘 사이에서 다이카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니야는 자기도 모르게 먹던 옥수수를 집어넣고 합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