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설정이랑 다른 것 있음. 시간 많으면 소설로 쓸텐데 시간 모자라서 이렇게 썼어.

근데 선생님들 의외로 순수하구나 뷴태들 튀어나올 줄 알았더니 순애 희망하는 선생님도 있고

그래서 저번 거랑 달리 좀 잔잔하게 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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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무인도의 끝자락에서 오르카 호가 천천히 부상했어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해왔던 절차에 따라 먼저 스틸라인부대가 상륙하고 탈론페더를 비롯한 앵거 오브 호드가 전개하면서 위협요소가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지

보급을 위해서는 아니야

아무리 오르카가 대형 잠수함이라고 해도 대양이 가져다주는 갑갑함은 극복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승무원의 스트레스 경감을 위해 종종 이렇게 안전이 확인된 섬에 상륙해서 휴식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야


오르카 호의 선수에서 해변으로 내려서며 기지개를 켜는 사령관은 당연했고 그 뒤에서 돗자리와 바스켓등을 주렁주렁 든 채 뒤따르는 리제도 그 중 한명이었지

하품과 함께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면서 사령관은 오늘 네 번째로 리제에게 짐을 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역시나 또 거절당했어

그는 뻗은 손을 머쓱하게 거둬들이면서 리제와 함께하게 된 경위를 떠올려 봤지


몇 번이고 스캔했고 지금도 부대들이 정찰을 돌고 있는 섬에 위험이 있을리가 없지만 바이오로이드들은 어딜 가나 사령관에게 호위역을 붙여 놓고 싶어했고 그도 거기에 익숙해진 편이라 따로 토를 달지는 않았어

그리고 사실 리리스나 금란 같은 전문적인 애들로 엄격하게 호위진이 짜이는 전투임무랑 달리 이런 한적한 곳에서는 함께 할 바이오로이드가 원래 맡은 업무랑 상관없이 제비뽑기로 정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

말은 안 꺼내지만 나름 피크닉 기분으로 나올 수 있고 그게 바이오로이드들한테도 도움이 된다면 나쁠 건 없겠지하는 생각이 강했지


그리고 그게 바로 사령관이 이상하게 느끼는 점이었어

평소같으면 신나서 날뛰면서 사고 한 두개는 벌써 쳤을 리제가 차분하게 바스켓이랑 돗자리랑 짐 짊어지고 얌전하게 따라오고 있다는게 오히려 걱정되는거지

어디 아픈데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언가 사고가 있었는지, 이리저리 짐작해보면서 찔러봐도 리제는 별 반응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고 사령관은 걱정만 늘어갔어


둘은 드문드문 끊어지는 대화를 나누며 해변을 걸었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도착했지

사령관은 이번에는 리제가 뭔가 하기 전에 돗자리를 받아들어서 펼친 뒤에 바스켓을 건네받으려고 했어

그런데 리제가 아... 하는 신음을 흘리면서 바스켓을 뒤로 빼며 물러섰지

눈 깜빡이는 사령관을 보며 자기 실수를 깨달았는지 그녀는 곧 스스로 바스켓들을 차례차례 내려두고 뚜껑을 열기 시작했어


하나는 사령관이 예상했던 대로 먹을것이었어

샌드위치나 마실 것이 세심하게 채워져 있는데 서툴게 재료가 삐져나와있는 솜씨나 좀 눅눅해진 빵을 보고 사령관은 아마도 리제가 직접 만들었을거라 추측했지

그리고 리제가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다른 바스켓 안에는 화분이 들어있었어

작디 작은 봄맞이꽃이야

화려하게 피어나는 색채도 없고 관능적으로 코에 와 닿는 향기도 없었지만 리제가 두 손을 모으면 그 안에 들어갈만한 화분 안에서 흰색 풀꽃 몇 가닥이 솟아올라 해풍에 흔들리고 있었어

금방이라도 바람에 꺾여 버릴 것 같은 그 봄맞이꽃을 손으로 가려주면서 리제는 조심스럽게 이 애를 숲 속으로 옮겨주어도 괜찮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지


사령관은 그제야 리제가 왜 그렇게 얌전했는지 깨달았어

원칙적으로 오르카 호 내에서 사적인 용품은 허가를 받아야 지닐 수 있게 되어 있는데 특히나 흙 같은 것들은 정밀기계에 들어가 고장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정비반이 좋은 표정을 짓지 않는 종류의 물건이었거든

그리고 사령관은 동시에 그 많은 브라우니들조차 제각기 애착을 가진 물건 한 두개는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어

자기가 위험한 곳으로 내모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사령관은 그것들을 눈감아주고 있었지

양 손을 포개면 안에 들어올 것 같은 봄맞이꽃은 리제가 타협하고 타협한 결과였을거야


거기까지 생각한 사령관은 짐무더미에서 모종삽과 면장갑을 챙기며 리제에게 물어봤어

어디가 좋을지 안내해달라고

그제야 리제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지고 한 손으로 화분을 들고 한 손으로 사령관의 손을 잡은 채 앞장서기 시작했지


사령관도 예상했던대로 리제는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어 한 뼘도 안되는 그 작은 풀은 바람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나뭇잎 사이로 녹아내린 햇살이 피부를 따스하게 쓰다듬고 나풀거리는 리제의 머리카락이 품었던 향기가 코 끝을 간지럽히는 동안 그녀는 신이 난 채로 먼저 말문을 열었어


사실은 나팔꽃을 키우고 싶었지만 숨기기에는 너무 크고 오르카에는 일조량이 부족해서 포기했다거나

봄맞이꽃은 한해살이 풀이라서 꽃이 지면 곧 시들어버릴텐데 그 전에 따듯한 햇살을 맞이하게 해주고 싶었다거나

허락해주셔서 고맙다거나


원래가 정원사인만큼 망설임없이 나아가는 리제에게 이끌리면서 사령관에게는 둘이 나누는 대화마저 멀게 들릴 정도로 완전한 순간이었어

그러다가 리제가 갑자기 멈춰섰지


사령관은 왜 그러냐고 물었고, 리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어

주변 수목들을 보면 여기가 가장 좋은데 손이 닿지 않은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나무들의 가지가 지나치게 무성하다

여기 원래 살던 나무들도 이래서야 생육에 안 좋을테고 봄맞이도 햇빛을 받기 힘들거라고

마주비비는 부츠 끝을 보면 직접 가다듬고 싶은데 주인님 휴식을 방해하기는 또 꺼려지는 눈치였지

그래서 사령관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어

봄맞이풀도 여기 살던 나무들도 좋아할 거라고 자기는 봄맞이꽃 옮길 준비를 할테니 파내야 할 곳을 알려달라고


리제는 기뻐하며 잠깐만 기다려달라 말하더니 잠자리같은 날개를 떨리게 만들며 낮게 날아올랐지

오랜만에 가위들이 본래 목적을 되찾아서 나뭇가지들이 떨어지고 잎이 흩날리기 시작했어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요정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령관은 리제가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가지치기가 끝난 나무 아래에서 떨어진 것들을 모아서 정리하기 시작했고 

리제는 이리저리 날면서 나무들을 여러 곳에서 바라보며 오랜만에 진지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어

사령관은 지금이면 괜찮을까 해서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리제의 과거를 물어봤지


오르카호에서 발견한, 지금 사령관 옆에 있는 리제는 시저스 리제중에서는 드문 생존개체였어

특이하게도 정원이나 주인 곁이 아니라 폐허가 된 시가지에서 발견된 그녀는 처음에는 입도 열지 않았고

오르카호에 익숙해진 지금까지도 과거는 한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지

그래서 사령관도 굳이 건드리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이라면 왠지 터놓을 것 같아서 물어봤어


한 순간 대화가 끊기고 가지 썰리는 소리만 이어지다가, 리제가 입을 열었어

별로 특별한 건 없었다고 자기는 수 없이 많은 정원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고


사령관 옆에 있는 시저스 리제는 수십 개의 기업이 입주한 고층빌딩의 공중정원을 관리하기 위해 구매된 개체였어

그 중 몇 층을 통째로 쓰는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자칭 화훼가 취미라는 사장님이 구매자였지만 실제로 주인으로 임프린팅 된건 

건물의 나이든 경비원 할아버지였지

리제가 정성껏 가꾸고 손본 공중정원은 기업 사장이 손님을 초대하는 날이면 그가 직접 가꾼 정원으로 둔갑해서 사람들의 감탄사를 이끌어내는 대상이 되었어

리제 본인은 할아버지가 있는 경비실에 모습을 감춘 채로


그래도 리제에게 불만은 없었어 그 날 만큼은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

공중정원의 정원사란 그런 존재였지

사각형으로 잘려나간 절벽에 꽃 한송이 한송이까지 완벽하게 재단된 공간에는 그 정원사를 포함해서 자연스러운 존재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으니까, 리제의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기분나빠서,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작은 비밀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사장이 틀어막은 탓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욕을 퍼붓는 사장 탓에 자주 올라오지는 못했지만 가끔 경비 할아버지가 몰래 올라오기라도 할 때면 리제도 들떠서 자기가 가꿔놓은 꽃들을 남몰래 자랑하고는 했지

그 때는, 경비 할아버지와 있을 때 만큼은 리제도 할아버지가 자판기에서 뽑아준 싸구려 캔커피를 받아들면서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리제가 할아버지를 못 본지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었어

리제는 그저 자기 용도를 다하면서 주인이 언젠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도록, 꽃들을 가꾸면서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소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야

주인과 붙어있을 수 없는 만큼 집착이 강해지기 쉽지만 그녀가 품은 건 도리어 걱정이었어 

경비실 서랍에 할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수십종류의 약들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함께 공중정원을 둘러볼때면 채 반도 다 돌기 전에 지쳐서 쉬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몸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때문에 솜씨가 무뎌질 정도였지만 리제가 직접 내려가볼 수는 없었어 

인간인 할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이 옥상에 묶여있는 바이오로이드였으니까

리제는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정원을 감옥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어


또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이제는 하루의 절반을 옥상 입구를 바라보며 보내던 리제의 앞에서 문이 열렸어

기쁜 마음에 그녀는 바로 날아가려 했지만, 문 뒤에서 내민 얼굴에 표정이 굳어져 버렸지

옥상에 올라온 건 사장이었어

직접 꽃을 가꾸기는 귀찮지만 남들한테 부릴 허영만큼은 완벽한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요즘 솜씨가 예전 같지 않다고 리제를 다그치기 시작했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들으면서도 리제의 머리 속을 뛰어다니는 의문은 하나뿐이었어

왜, 어째서?


결국 리제는 사장의 말을 끊고 물어보고야 말았지 할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사장의 입가에 비웃음 같은 게 스쳤고 그가 던진 꽁초가 풀꽃 더미 위로 떨어졌어

그는 가래를 뱉으며 알려주었지, 그 말 안듣던 경비는 교통사고로 일주일 전에 뒈졌다고

한달을 병상 위에서 보내다가 없는 재산도 멍청하게 다 까먹고 죽었다고

그 날은 리제가 처음으로 꽃을 쥐어 으스러뜨린 날

사장에게 뺨을 맞고 가꾸던 풀밭 위로 넘어진 날이었어


가려운 느낌에 대해 생각해 봐

그게 영원히 이어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두 번 다시 긁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될지도


리제는 공중정원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어

꽃 냄새에 숨이 막혔고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가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지

리제는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나팔꽃 한 송이를 훔쳤어

화분에 옮겨심고 어딘지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려고 했지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몰라

철충들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가윗소리는 예전에 멎어버렸고 부지런히 파닥이던 네 장의 날개도 차츰 움직임을 멈췄어

천천히 땅에 내려선 리제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지

어느새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흐트러진 리제의 머리카락을 주황빛으로 물들였고 주변에는 초향이 자욱했어


사령관이 리제를 품에 안자 오열은 점점 커져갔지

가슴에 머리를 묻고 눈물을 흘리던 리제는 곧 원예장갑도 벗어던진 채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어
리제가 마음껏 울수 있도록 다독여주면서 사령관은 이해했지

때로는 바보같고 때로는 집착이 심한 이 애한테는 주인에게 집착할만한 이유가 있었던거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리제의 울음이 그칠 무렵 탈론페더에게서 통신이 들어왔고 사령관은 무전기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서 

괜찮다고 말해주었어

품에서는 떨어졌지만 눈물자국이 남은 리제의 얼굴은 엉망이었지

사령관은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닦아주면서 어딘지 리제가 어린애같다는 생각에 빙그레 웃었지만 눈을 감은 리제는 사령관의 웃음을 보지 못했어


아무리 깊지 않은 숲 속이라고 해도 밤이 오면 금새 어두워질테고, 또 걱정하던 정찰부대들이 찾아나서는 상황이 올까봐 

둘은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하던 일을 마쳤어 잘라낸 가지와 잎들을 정리하고 조그맣게 파낸 자리에는 봄맞이꽃을 묻었지

흰 봄맞이꽃이 하늘하늘한 바람에 흔들리는동안 나란히 앉아서 주변의 땅을 다지면서 사령관은 리제에게 말했어

모든 일이 끝나면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자고, 그 곁에 함께 나팔꽃들을 심자고

리제는 사령관이 내민 새끼손가락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자기 새끼손가락을 뻗어 꼬옥 걸었어


둘이 숲에서 나와 돗자리를 정리할 무렵에는 이미 석양이 비치고 있었어

아직도 조금 코를 훌쩍거리는 리제는 모처럼 주인님을 위해 준비했던 샌드위치가 자기때문에 소용없어졌다며 한숨을 내쉬었지

사령관은 바스켓에 뚜껑을 덮으며 웃었어, 그리고는 오늘 밤 자기 방에서 먹으면 된다고 리제 머리를 토닥여줬지 

그는 허공을 선회하는 탈론페더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오르카 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렸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제에게 조금 짖궂은 질문을 했지 아까 손가락을 걸때 머뭇거린 이유가 뭐냐고

원예장갑을 벗어던졌던 손을 내려다보며 리제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어

항상 흰 장갑 속에서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새하얗지만, 굵은 나무를 다루고 철충을 베어내던 리제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있었어

리제는 그 거친 손을 사령관에게 들키기 싫었던거야 


사령관은 자꾸만 리제가 가리려고 하는 그 손을 쥐었고, 고개를 숙여서...

리제의 얼굴이 귀까지 붉게 물들었어

자기한테는 예쁜 손이라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사령관을 보면서 리제는 어쩐지 짖궂은 남자애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빙긋 웃었지


멀리서는 오르카호에 승선하는 브라우니들이 그 광경을 보고 휘파람을 불어댔고 레프리콘이 안절부절하며 말리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