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으로 써온 야설임


(후편) [AV 특별 기획] ~대위기! 악당에게 당하는 매지컬 모모~.txt






쾅!


"흐윽...!"


마왕군 전투원의 손에 떠밀린 모모는, 등 뒤의 문이 닫히며 난 큰 소리에 입가가 굳었다. 그런 모모에게 이 정도는 약과라며 비웃기라도 하듯, 모모의 눈에 들어온 방의 모습은 모모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요새 같은 구조에 쥐가 드나드는 열악한 독방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이건... 악취미네요.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인테리어가 아니예요."


어이 없는 혼잣말이 모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슴푸레한 주홍색 계열의 조명, 진정 효과가 있는 야릇한 아로마, 그리고 모모의 RPG에 달린 심볼과 똑같은 모양의 커다란 침대까지. YES 문구가 크게 수놓여 있는 핑크색 베개를 보는 모모의 입매가 혐오감에 일그러졌다. 긴장을 풀어 주는 잔잔한 향이 감돌고 있는데도, 그 냄새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모모는 도리어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것도 마법소녀를 떨어뜨리는 클리셰 중 하나이긴 하죠. 관건은, 지금 모모가 출연하고 있는 매체가 연령 제한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겠네요..."


더없는 위기에도 모모는 제 4의 벽을 깨는 유머를 내뱉으며 지금 이 상황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렇지만, 말한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좋지 않았다. 마왕군은 모모를 능욕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모모가 수호하는 가치를 욕보이면서.


사랑 없는 사랑의 행위. 이것만큼 마법소녀를 철저히 부술 수 있는 고문이 어디 있을까?


벌써부터 모르는 누군가의 손길이 모모의 등줄기를 간질이는 느낌이 들어, 모모는 작게 몸서리쳤다.


덜컥!


"히얏?!"


별안간 다시 등 뒤에서 열린 문에 모모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허리춤의 카타나를 빼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빼들려고 했다. 모모는 빈 허리춤을 더듬고 나서야 모든 무장을 압수당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모모는 마음을 다잡고 유쾌하지 않은 침입자를 맞이했다. 어렴풋한 적색등 아래 천천히 드러나는 얼굴을 본 모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직... 젠틀맨...!"


모모의 입에서 나온 상상을 벗어난 이름. 너무나도 뜻밖의 조우이지만,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모모의 얼굴에 잠시나마 화색이 돌았다.


"구하러 오셨군요!"

"아니, 나도 잡혔어."

"사실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냥 말해봐야 할 것 같아서 말했어요."

"하하, 모모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쾌하네."

"젠틀맨도 잘 받아쳐 주시는 걸 보면 쌩쌩해 보이는걸요?"


매지컬 파워가 없는 젠틀맨이 직접 자신을 구하러 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모모는 알고 있었지만, 젠틀맨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붙잡힌 신세라는 것을 확정지어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어서 젠틀맨의 품에 안겨  내색은 안 했어도 불안했던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위기라고 해도 마법소녀로서의 본분은 잊지 말아야 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혹시 다른 아이들은 어때요? 백토나 다른 마법소녀들도 무사히 도망쳤나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젠틀맨이 그렇게 말하면 괜찮은 거겠죠! 자, 이제 협회 최고의 브레인과 협회 최강의 전력을 겁도 없이 같은 방에 집어넣은 건방진 마왕군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죠! 젠틀맨도 잡혀오시면서 내부 구조는 다 파악하셨겠죠?"


기운을 되찾고 재잘대는 모모는 더없이 안심한 나머지 젠틀맨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젠틀맨의 끊어내는 듯한 한 마디에 더 놀랐으리라.


"미안, 모모... 모모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네...?"


모모는 그제야 젠틀맨의 눈을 바라보았다. 죄책감에 흔들리는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모모의 동공이 당혹스레 떨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는 모모에게 젠틀맨은 쐐기를 박았다.


"이번 마왕군의 습격...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 그야... 이번에는 완벽한 기습이었고... 규모도 전례 없이 커서, 단단히 준비하고 왔다는 느낌을 받..."


더듬더듬 변명하듯 주절거리던 모모의 뇌리에, 번쩍 하고 불꽃이 튀듯 한 가지 착상이 지나갔다.


공교롭게도 소모된 마법소녀들의 마력을 충전하는 타이밍에 걸려 온 습격, 상성이 안 좋은 사천왕을 상대하게 된 마법소녀들, 차근차근 퇴로를 확실히 끊어가며 한 명의 손실도 없이 몰아붙여오는 공세, 협회의 VIP 밖에 모를 임시 거점에 당연하다는 듯이 매복해 있던 마의 군세들...


마치, 마왕군을 상대하던 젠틀맨의 그것 같은...


"아, 아니야..."


모모의 입술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부정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최후의 가능성. 그러나, 지금 이 정황과 너무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가정이었다. 농담인 거죠? 제 긴장을 풀어 주시려고 또 놀려먹으시는 거죠? 하하, 그렇다면 실패네요. 하나도 재미있지 않은 농담이었어요...


"...맞아."


유들유들하게 넘기려는 모모에게, 차가운 대못 같은 긍정이 내려박혔다.


"..."


고개를 떨군 모모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배신은, 갈비뼈 사이를 소리도 없이 파고들어오는 잘 갈린 나이프보다도 아팠다.


"...어째서죠?"


모모의 생각보다 앞서서 입이 열렸다. 입술을 짓씹으며 어깨를 떨고 있는 모모에게로 젠틀맨의 커다랗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널 위해서였어."

"거짓말."

"...이것만큼은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거짓말거짓말!!!"


고개를 팩 치켜든 모모의 눈가에서 두 줄기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실연 당한 연인처럼. 모모는 젠틀맨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추궁했다. 추궁하듯 매도했다. 매도하듯 애원했다.


"다 거짓말이었어! 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맹세도!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우리들을 다독여 주던 그 달콤한 말들도! 전부 거짓말이야! 지금도! 지금도! 날 위해서라고? 이 가증스러운 사람! 이미 속을 만큼 속은 내게 또 무슨 거짓말을 하려고!"

"네가 더 싸우길 원치 않았어."

"...그만해요."

"협회의 병폐에 치여서 멋대로 유기하듯 떠맡은 막중한 힘과 책임에 개인의 삶과 행복도 박탈당하고,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목숨을 걸고 싸우는 너희들을 전장으로 내몰면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졌어."

"...제발, 그만..."

"수 세기 동안 협회가 자기 의무를 방기하느라 마의 세력은 어찌할 수 없는 단계까지 세를 불리고 말았고, 그럼에도 변함 없는 협회의 방침으로 인해... 예전부터 그랬듯이 소수로 싸우게 될 너희들에게, 마의 구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였어."

"...그만..."

"최전선에서 뛰어다녔던 모모야말로 잘 알고 있잖아? 이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야. 혹사가 계속되면 결국 누군가는 먼저 쓰러질 수밖에 없어. 사천왕과의 연전 이후로 백토의 각력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알고 있지? 모모가 매번 숨기고 있는 어깨의 부상도 알고 있었어. 이젠 학교 체육 활동도 정상적으로 소화하지 못할 지경이잖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이대로라면 이번 대의 마법소녀들은 전원 평화롭게 은퇴할 수 없다... 난 그렇게 판단했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우리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배신자인 주제에, 제대로 속은 내 추태를 비열한 웃음으로 맘껏 비웃기나 할 것이지... 대체 그 쓸쓸해보이는 얼굴은 뭔가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걸 그 좋은 머리로 알았으면... 도망쳐버리기나 하라구요... 왜 우리를 승승장구하도록 이끈 건가요...? 잠시 뿐인 승리를 만끽하게 했던 건가요...? 어차피 배신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상냥하게 대하지 말라구요... 내가 당신을 신뢰하게 만들지 말라구요..."

"...너만이라도, 내가 맡은 이번 대 아이들만이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꼭 무사히 마법소녀를 졸업하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복귀하길 바랐어. 그래서 필사적으로 너희를 이끌고, 단 하나의 희생도 없이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근데 이젠... 나도 어쩔 바를 모르겠더라. 더는 너희를 구하면서도 세계를 같이 구하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어."


그런 슬픈 얼굴로 내 앞에서...


"그래서... 세계 대신, 너를 구하기로 한 거야."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모모, 이제 더 이상 위험하게 싸울 필요 없어."


...당신을, 진심으로 미워할 수가 없잖아요...


모모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모모는 시야가 번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으아아아앙~!!!"


모모는 서글피 울었다. 아주 서글프게.



**



"...이제 좀 진정 됐어?"


젠틀맨이 건낸 손수건을 모모는 보지도 않고 앙심을 담아 쳐냈다.


"씁, 피, 필요 없어요. 이 배신자."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문질러 서투르게 눈물을 닦아 내며 모모는 작게 투덜댔다. 매지컬 메이크업이 흐트러져서 해제 후 재변신을 해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히끅, 이제부터 절 마, 마왕군에 팔아넘기기라도 하실 건가요?"

"이미 팔아넘겼잖아."

"...그렇, 네요."


이런 시시한 만담에도 마음 속에 즐거움이 차올랐다. 모모는 그런 자신에게 점점 화가 났다.


"...많이 화났어?"

"...그, 그걸 말이라고 해요? 기, 기가 막혀... 다, 다 큰 어른이 머, 머릿속이 꽃밭인 것도 저, 정도가 있지... 여, 여자아이 하나 구하겠다고 세, 세계를 들어 마, 마왕군한테 바치다니..."

"앞으로 더 기막힌 일을 모모한테 하게 될 거 같은데..."

"킁, 흥. 이미 아까 놀랄 거 다, 다 놀라서 더 놀랄 것 같지도 않네요. 뭔데요?"


젠틀맨은 침통한 얼굴로 입술에 침을 묻혔다. 수 번을 고민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려고 망설이고 있었다. 아까 날 배신했다고 고백할 때에는 저런 고민 하지도 않았으면서! 모모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젠틀맨은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게... 마왕군에게 협력하는 조건으로 너희를 상처 하나 없이 생포하기로 했고... 그것까지는 무사히 해냈는데..."

"...?"

"...그 쪽에서도 맨입으로 너희를 놓아주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더라. 당연히 다시 적대하지 않겠냐고."

"...당연한 소릴. 여길 나가면 모모는 이 치욕을 갚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쳐부술 생각인데요? 마왕군에 붙은 당신 째로."

"그래서... 너희의 마력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으면, 영영 풀어주지 않겠다더라."

"...그게 어쨌다구요."

"그게에..."


그 덩치에 꼬물거리는 것을 참지 못한 모모가 쏘아붙였다.


"뭔데요! 말할 게 있으면 시원하게 말하라구요!"

"...모모, 알고 있지? 마법소녀가 마법의 힘을 모두 잃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잖아... 은퇴하고 협회에 모든 힘을 반납하는 방법이랑, 또 하나는..."

"..."


묘한 분위기의 방과, 하필 이런 공간에 남게 된 젠틀맨과 자신. 그리고 사랑에 빠진 마법소녀는 모든 마력을 잃게 된다는 전승까지.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며 모모의 얼굴이 발간 조명 밑에서도 보일 정도로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세, 세 번째 의식..."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