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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 T-3 레프리콘

T-2 브라우니

 


 

 

1월 24일


펄~펄~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옵니다~ 하아늘나라 씹쌔끼들이~ 송이 송이 하얀눈을~ 하늘에서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의 설원은 사탄이 싸지른 설사로 한가득이다. 배탈이 났는지 끝도없이 내려온다. 가뜩이나 머저리같은 브라우니 3호가 후임으로 들어온 후로 안 좋은 일들만 잔뜩 일어났는데, 이젠 눈까지 내리고 자빠졌다. 이프리트 개새 병장은 또 모포속에 쳐박혀 계시고 저 선머슴같은 브라우니들은 신이 나서 삽질을 팍팍 후려치고 있는데, 임펫 중사는 사기진작을 목적으로 확성기를 들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있다.


"동지들! 하나도 안 춥지? 제군들의 피와 땀과 노력이 곧 인간들의 번영과 안전에 기여된다 생각하고 열심히 움직이도록!"


저 주둥아리에다가 눈 한 바가지 퍼 담아줄까 욕하지말자 욕하지말자


"그리고 이프리트 병장의 소재를 알고있는 병사는 내게와서 알려주도록! 언제 한 번 제대로 갈궈줘야지 원."


아 그건 못참지.


1월 27일


브라우니 2호가 삽을 부숴먹었다. 사흘째 내리는 눈에도 굴하지 않던 브라우니가 가장 최신형 삽을 굴복시켰다. 덕분에 이프리트 병장에게 욕 한 사발 얻어먹었다. 씨발샠 침착하자. 심호흡하고, 침착하자. 나는 레프리콘 상병. 브라우니들의 분대장. 이런걸로 이성을 잃어선 안되지. 침착하자 침착하ㅈ 씨이발 브라우니 1호가 거수경례를 까먹어서 레드후드 장교에게 한 소리 들었단다 저 썅놈에 대가리에 뇌 대신 진공관을 쳐박았나 이 개쌴ㅇㅏㄴㅕ이 [이 뒤론 알아볼수 없는 욕설들이 적혀있다]


2월 1일


누가 지사제 좀 가져왔으면. 사탄새끼 똥이 멈추질 않는다. 아니, 아주 시원스레 싸지르고 자빠졌다. 이젠 눈 폭풍이 눈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고있다. 창문 흔들리는것 좀 보소. 초소 근무중 브라우니 2호가 졸다가 시찰나온 마리 지휘관님께 들키는 바람에 우리 부대가 발칵 뒤집혀졌다. 죽여버리고싶다.

                                                                                                                                                                                     누구냐! 연대장이다!


2월 7일


[외설적인 농담과 이프리트와 브라우니에대한 욕설이 적혀있다가 볼팬으로 찍찍 그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2월 11일


눈만 치우는 줄 알았는데 사람까지 치우게 생겼네. 새벽 1시 쯤 초소 근무 중에 경계선 밖에서 누군가 진입했다. 심하게 불어닥치는 폭풍때문에 아무것도 보질 못해서 초소 근처까지 접근하게 만들었다. 거수자 두 명이 외치는 소리에 그제야 경계를 갖췄으나 이미 얼굴이 보일때까지 접근해 와있었다. 거수자들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행정반에 보고하니 잠시 후 군용 차량이 와서 거수자 두 명을 태워갔다. 나는 속으로 쌍욕을 퍼부으며 다음 근무자와 교대한 후 행정반으로 기어들어갔는데, 의외로 별다른 말을 안 했다. 같이 근무를 섰던 브라우니 3호도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마 내 표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싶다. 분명히 영창감이었을텐데? 그 두 명이 누구길래?


2월 12일


아침 일찍 헌병대에서 나와 브라우니 3호를 데리고 심문을 했다. 무슨 취조를 6시간이나 쳐 하는지. '또 다른 거수자는 못봤는지'나 '수상한 물품을 손에 쥐고 있진 않았는지'나, '무언갈 건네거나 중요한 언급은 없었는지'등 이상한 질문들만 물어봤다. 난 그때 보고 들은 모든 걸 털어놓고 난 후에야 생활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관물대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있어서 동기생에게 물어보니 뻣뻣해보이는 헌병대들이 잔뜩 뒤엎고 갔다고 말해줬다. 개새끼들이 진짜 정리 좀 하고 가지. 대충 정리해보니 다 털어갔고 병영일기 하나만 남겨줬다. 옆에 동기생에게 팬을 빌려 일기를 작성했다. 피곤한 하루다.


2월 18일


브라우니 2호가 또 졸았다고 한다. 빡대가리년이 본인 말로는 거수자 세 명이 초소 문 앞까지 다가와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깼다고, 지랄발광을 하며 지통실에 보고하고 어영부영 근무 끝냈다고 하더니 나한테 와서 하는 소리가 '이거 걸리면 영창감 아닙니까? 저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잉잉' 하며 징징거리는데 대가리 한 대 후려 이성줄을 붙잡고 '거수자들이 솔직하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라고 위로하니 좀 꺼벙한 표정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것들의 분대장이라니. 행정반에서 별 말 없었냐고 물어보니 별다른 말은 없었다고 한다. 뭐지 진짜?


2월 19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일단 좋은 소식은 브라우니 2호는 영창에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수자들이 솔직히 털어놓진 않았나보다. 근데 나쁜 소식은, 우리 부대에 감찰이 돌았다. 아니 북쪽에서 온 거수자들이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는거지? 뭐 내통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건가? 덕분에 그날 하루는 초 긴장상태로 지내야했다. 감찰관들과 간부들의 팽팽한 기싸움에 우리 병사들만 죽어나갔다. 요즘따라 북쪽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2월 20일


브라우니 2호가 또 삽을 부숴먹었다. 네 개 째다.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온다. 간부들 표정도 밝지가 않다. 삽자루 때문은 아닌거같고, 북쪽의 거수자들 때문인가? 이프리트 병장도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병장도 거수자들 때문에 그러시냐고 여쭤봤더니 삽자루때문에 왔다고 한다. 그리고 내게 얼차려를 시키며 갈궜다.

                                                                                                                                                                  내가 언젠가 담구고 만다 진짜


2월 21일


드디어 눈이 그쳤다. 그리고 사단장님이 명령을 내렸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거수자 한정으로 1회 경고사격을 한 후 계속 접근해올 시 발포할 것. 연병장에서 명령을 들은 모든 병사들이 얼어붙었다. 이프리트 병장님이 '비무장 상태여도 말임까?' 하고 묻자 '예외는 없다'라며 싸늘하게 대답해주셨다. 사람을 쏘라고? 병사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리는 와중에 내 옆에 서있던 브라우니 2호가 덜덜 떨고있었다. 좀 안쓰러워 보여 슬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피가 통하질 않는지 많이 차가웠다. 아니면 내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던걸지도. 무섭다. 제발 내 근무시간에는 나타나지 않기를.


2월 27일


일이 터졌다. 새벽 3시 쯤 날카로운 총소리가 부대를 가로질렀다. 막사내에 잠들었던 모든 인원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자 곧이어 비상벨이 울렸고 5분대기조가 초소를 향해 뛰쳐나갔다. 이후 행정반에서 '막사내 전 병력은 5분내로 행정반의 총기보관함 키를 가져간 뒤 총기와 장구류를 챙긴고 1층 중앙복도로 집합하도록' 이란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체로 움직였다. 이윽고 5분도 되지 않아 모든 병사들이 1층으로 모이자 임펫 중사님이 인원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모였는데도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얼어붙은것이다. 그렇게 긴장의 끈이 팽팽한 체로 몇 분간 있자 레드후드 장교가 병사들 앞에 오셔서 상황설명을 해주셨다.


브라우니 1호가 근무를 서는 중 거수자 세 명이 출몰했고 브라우니는 명령대로 경고사격을 실시했으나 거수자들은 물러서는 기색없이 도리어 흥분한 상태로 달려들었다. 당황한 브라우니가 총구를 돌려 그들을 향해 발포했고 그 중 한 명이 다리를(허벅지였나? 기억이 안 나네) 부여잡으며 도망치기 시작하자 다른 두 명도 곧 이어 도망갔다. 이후 브라우니는 신속히 보고를 끝냈고 상황이 일시 종료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긴장이 풀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후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드후드 장교가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이렇게 긴장을 풀면 어떡하나! 적이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순간에 그런 헤이한 정신상태로 이 막사를 어떻게 지키겠는가!"


순간 울컥했지만 곧 가라앉혔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 이런 소동속에 브라우니 1호가 근무를 마치고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다들 잔뜩 흥분한체로 1호에게 달려들어 이것저것 물어보려 하는데 레드후드 장교가 브라우니 1호를 불러 자기 앞으로 데려왔다. 그러곤 브라우니를 칭찬하며 우리에게 '이런 신속한 대처는 곧 국가와 인간들의 안전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것을 당부하며 해산 명령을 내리자 다들 부산스레 움직였다. 그런데 1호가 총기를 들고 그냥 가려고 하길레 어쩔수없이 1호의 손을 붙잡고 행정반으로 끌고갔다. 그러면서 브라우니에게 멍때리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툴툴거렸는데 브라우니가 대답하질 않았다.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이상했다. 브라우니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1호의 눈 앞에 손을 흔들며 정신차리라고 외쳤고 그제야 브라우니가 당황하며 허둥지둥거리더니 급히 행정반쪽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혼이 빠진건가? 곧 익숙해지겠지 하며 생활관으로 돌아가 못다한 잠을 잤다.


2월 28일


브라우니 1호의 상태가 안 좋다. 식당에서 브라우니 1, 2, 3호와 아침식사를 하는데 1호가 식사도 안 하고 멍하니 식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러봐도 대답이 없길레 숟가락으로 이마를 딱! 때리니 눈을 껌뻑껌뻑 뜨며 나를 쳐다봤다. '이병 브라흐이?' 실없는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대자 내가 괜찮냐고 물어보니 우물거리며 괜찮은거같다고 답했다. 내가 위로차 이런저런 말을 해주는데 1호가 작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거기에 없었으면서..."


미쳤나 진짜. 상관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못들은걸로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행정반 앞을 지나갔는데 안에서 레드후드 장교와 임펫 중사가 진중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별 일 아니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어젯밤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브라우니들은 깜짝 놀라며 행정반 앞으로 슬금슬금 걸어가자 두 사람의 대화가 명확히 들렸다.


"어제 새벽 5시 경, 수색 결과 초소 주변 수풀속에서 얼어붙은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조사 후 허벅지에 총상을 당한 거수자로 확인되었습니다."


임펫 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귓가에 큰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눈앞으로 브라우니 1호가 소리를 지르며 저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와 다른 브라우니들이 황급히 쫒아가자 1호가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내가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쳐도 아무 대답도 없이 울부짖기만 했다. 강제로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임펫 중사와 레드후드 장교가 놀란 표정을 지은체 달려와 무슨일이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전후사정을 설명해드리자 임펫 중사가 브라우니 2, 3호를 데리고 행정반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명령을 따라 2, 3호와 함께 행정반에서 몇 십 분을 기다리자 레드후드 장교가 왔다. 그리곤 내게 브라우니 1호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그린캠프로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아자젤 맙소사. 브라우니의 저런 모습은 정말 처음봤다. 2, 3호 역시 몹시 놀란듯 나를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고있자 애써 위로해준 후 생활관으로 올려보냈다. 초조하다. 이프리트 병장님께 커피껌 좀 빌려달라고 할까.


3월 20일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있다. 북쪽의 거수자들은 날이 갈수록 넘어오는 횟수가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고 초소병들의 발포에도 전처럼 겁을 먹는 기색을 보이질 않는다. 다행히 전처럼 죽는 사람 없이 경고 사격을 하면 순순히 물러갔다. 하지만 우리들의 긴장감은 풀리질 않았다. 이러다 누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단체로 몰려들어오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하는거지?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가 우리들의 목을 조여왔다.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브라우니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난 운좋게도 총을 발포할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 늦든 빠르든, 내게 최악의 순간이 닥칠지도. 1호가 그랬던것처럼...그러고보니 1호를 못 본지 한 달이 되어가네. 언제쯤 돌아올려나? 슬슬 보고싶은데.


                                                                                                     브라우니 3호가 내게 커피껌을 쥐어주었다. 피곤해보인다면서. 귀여운 녀석.


3월 28일


문제가 터졌다. 아니, 문제가 터질것같다. 초소로부터 300m 거리에 거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수는 대략 구 십 명 정도로 추정된다 했다. 막사내 전 병력은 무장한 체 초소 주변부에 방비를 세워두었다. 방금 거수자가 구 십명 정도라고 적었나? 내 두 눈으로 보니 수 백 명은 족히 넘어보이는데? 철조망이 쳐진 경계선을 중심으로 전 병력의 총구와 갖가지 기관총들이 저들을 향해 겨눠져 있다. 명령이 내려진다면 즉시 저들의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발길것이다. 긴장감이 고요히 감돌고있는 상황에서 레드후드 장교가 거수자들을 향해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탈북자 여러분. 여러분의 고통과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여러분의 행동은 본 부대를 위협하는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속히 물러서지 않을시 발포 및 사살을 할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음을 포고합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탈북자 여러분..."


갑자기 손에 들고있는 총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 쇳덩이로 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건가? 그냥...그냥 보내주면 안되나? 저 사람들은 무장한 상태도 아니잖아? 나쁜짓을 할 것 같지도 않은데...우..우린 완전 무장을 했고, 저들은 가엾은 낙옆처럼 비실비실한데. 툭 치기만 해도 쓰러질것같다고...속에서부터 구역질이 나오려는것을 억지로 참았다.


"...속히 물러서지 않을시 발포 및 사살을 할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음을 포고합니다."


나는...나는...항상 사격장에 갈 때마다 만발을 받아냈다. 임펫 중사도 브라우니 1호도 항상 날 칭찬해줬다...칭찬해줬는데...1호는 어디있지? 언제쯤 오는걸까? 보고싶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저들의 눈빛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우리를 노려보고있다. 오는건가? 움직인다...안돼...안돼...안돼...


"레프리콘 상병님! 정신 차리십시오!"


브라우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면서 어깨가 흔들렸다. 그탓에 나는 철조망을 붙잡고 토악질을 해댔다. 무섭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힘없이 앞을 쳐다보니 거수자들이 점점 물러가기 시작했다. 한 명...한 명... 서서히 물러가더니...이윽고 모든 인원이 자취를 감췄다. 다들 사라졌다. 왔던길을 다시 간 것이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레드후드 장교도 이번 상황만은 두려웠는지 저번처럼 호통치는 대신 우리처럼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훔쳤다.


현재시간 밤 11시. 지금 이 순간에도 방비는 풀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임시로 쳐진 군용 탠트에서 숙영중이다. 다음 교대근무자가 오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일기장에 몇 글자 더 적고있다. 아까는 정말 죽는줄 알았다. 아직도 정신이 빠져있어서 지금 뭘 적고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다시는 이런일 겪고싶지 않다. 정말 무서웠다.


브라우니 3호가 내게 따뜻한 캔커피를 건내줬다. 긴장이 좀 사그라드는것같다. 브라우니에게 고맙다고하니 쑥쓰러워하며 내게 힘내시라고 응원해줬다. 고마워, 브라우니. 상황 종료되면 내가 PX에서..


[문장이 급하게 끝맺혀졌다. 다른 페이지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선들이 휙휙 그어져있다. 구석에 단 한 문장만이 읽을 수 있다.]


그들이 돌아왔어

 

 

월 일


상황은 끝났다. 저 너머 구름사이로 빠져나온 따뜻한 햇빛이 이 생지옥 속을 비추었다. 화약냄새와 피냄새로 가득한 철조망 경계선을 중심으로 바깥쪽에선 몇 몇 병사들이 생존자를 파악하기위해 시체들을 뒤적이고 있었고 경계선 안쪽으론 영혼이 빠져나간듯한 병사들이 허수아비마냥 서있었다. 얼마지나지않아 본대에서 상황파악을 하기위해 온 간부들이 지프를 끌고 도착했다.


"연대장! 연대장 어디있나? 상황 보고하도록! 레드후드 연대장!"


마리 사단장님이 지휘관님을 부르자 레드후드 장교님이 황급히 달려와 경례를 했다. 사단장님은 소소한 차례는 무시하라는듯 고개를 저었고 레드후드 장교님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수자들은 야심한 시간을 틈타 경계선을 향해 기어들어왔고 곧이어 주변을 약하게 비추던 탐조등의 불빛에 노출되었다. 초소병들은 즉각 비상벨을 울렸고 거수자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으나 거수자들은 오히려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초소를 향해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않아 본대로부터 도착한 레드후드 장교님과 지원군이 달려와 거수자들을 향해 총을 겨누며 사격 준비자세를 취했다. 허나 눈 앞의 비무장 거수자들을 향해 발포하긴 거부감을 느꼈는지 공중을 향해 위협사격만 날리며 본대에 다른 명령을 내려달라고 무전을 보냈다. 허나 무전 내용을 잘못 이해했는지 지휘관은 사격명령만을 내렸고 정찰병들의 위협은 신경쓰지도 않고 다가오는 거수자들을 보며 병사들은 크게 당황한 나머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고, 어느덧 철조망이 쳐진 경계선까지 팔 한 뼘 거리 만큼 다가오게 만들었다. 더이상 지체 했다간 저들이 넘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 한 발의 탄환이 어느 거수자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가 발사했는지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아직도 알수 없었지만 그 한 발을 시작으로 병사들은 무엇에 홀린듯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나왔다. 수없이 많은 거수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도망가는 자들, 주저앉은 자들,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있는 자들 모두. 그렇게 영원할것 같은 순간이 지나자 산등성이 너머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탄입대의 탄창들은 비워졌고 병사들의 총구는 환한 붉은색으로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마리 지휘관님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순간의 판단 미스로 수 십, 수 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말인 즉슨...


"레프리콘 상병?"


순간 경계선을 넘어간 병사가 있었다. 레프리콘 상병님이 넋을 잃은체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들 황급히 상병님을 향해 달려갔으나 상병님은 곧 움직임을 멈추시고 누군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끔찍한 상처를 입은 여인의 시신과 그 품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의 시신을 향해. 아이의 눈은 어머니의 손으로 가려져있었다.


"레프리콘 상병! 개인 행동은 삼가하도록!"


레드후드 장교님이 소리쳤으나 레프리콘 상병님은 나지막히 중얼거리기만 했다.


"전부...죽였어..."


"레프리콘 상병?"


마리 지휘관님이 상병님께 말을 걸자 갑자기 상병님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전부 당신 잘못이야!"


"레프리콘 상병!"


레드후드 장교님이 상병님의 무례함에 크게 분노하셨으나 상병님은 말을 끊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모든게 다 당신 잘못이라고!"


"레프리콘 상병! 지금 누구 앞에서 망발을 하는게냐!"


"지휘관님이 우릴 염병할 살인마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진정해라 레프리콘 상병! 진정해!"


"싫습니다! 싫다고요!"


"정신차려! 당장!"


"당신 명령만 아니었으면 우린 지금쯤 아무 일도 없었을겁니다! 뭡니까 도대체! 우리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일동안 당신은 어디서 뭘 했습니까?"


레프리콘 상병님은 완전히 정신을 버린체 마리 지휘관님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레드후드 장교님의 표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마지막 경고다, 상병! 당장 지휘관님께..."


철컥.


레프리콘 상병님이 지휘관님을 향해 총을 겨눴다. 레드후드 장교님의 표정이 변하더니 자신의 권총을 뽑아 상병님의 머리를 향해 겨눴다.


"총 내려."


"애초에 우리 잡병들 따윈 어찌됐든 신경도 안 쓰겠지요."


"총 내려라 레프리콘. 두 번 말 않겠다."


"대가를 치루게 만들거야..."


"레프리콘!"


"모두 당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탕!


상병님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레드후드 장교님도 당기질 못했다. 내가 했다.


"브라우니...3호?"


레프리콘 상병님의 죄가 늘어나선 안됐다. 이미 살인마라는 오명을 쓰게 된 그분께 더이상의 불명예를 지게 둘 순 없었다. 나는 총구를 바닥으로 내린체 지휘관님께 말씀드렸다.


"지휘관님은 지금 죽어선 안됩니다."


나는 뒤를 돌아 경계선을 향해 걸어갔다.


"지휘관님은 저희같은 살인마가 아니시니까요."


마리 지휘관의 표정은 더 볼 것도 없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은 바닥에 널부러진 레프리콘 상병님의 얼굴과 다를바 없어보였다. 나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나를 쳐다보는 다른 브라우니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체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막사 앞까지 걸어간 후, 벽에 기대며 앉았다. 눈을 감으며 이 날 있었던 일들을 기억에 남겼다.


상황 종료 후, 부대엔 몇 가지 소문이 돌았다. 우선 마리 지휘관님은 매우 높으신 분들께 불려가 문책을 당했다는 소문,


지휘관 위엔 뭐가 있을까? 지휘-지휘관?



레프리콘 상병님은 프레깅 미수 혐의로 즉결 처분에 당했다는 소문, 각 초소에 조명등이 두 개 더 생길거라는 소문. 이제 뭐가됐든 아무래도 좋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브라우니 2호가 레프리콘 상병님의 짐을 정리하던중 그 분의 병영일기장을 발견하곤 내게 건내주었다. 내가 가지는게 좋을거 같다면서. 나는 휴식시간에 일기장을 훑어보았고 상병님이 남긴 글귀를 발견했다. 헤헤헤. 죄송합니다 레프리콘 상병님. PX는 다음 기회에 가자고요. 같이 가서, 맛있는거 많이 먹고, 제가 잘못한 일 막 혼내주시고, 다른 브라우니들 막 놀려주고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브라우니 1호소식을 듣질 못한지 오래되었다. 아마 그 녀석은... 뭐, 됐다. 아마 다음 기회에 보겠지. 창문 밖으로 들려오는 레드후드 장교님이 연설을 들으며 나는 일기를 마쳤다.

 

인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조국의 안녕을 위하여! 우리는 깃발을 들고 죽음을 향해 돌격할 것이다!

나라의 안전을 위하여! 우리의 적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스틸라인의 병사들이여! 우리는 선체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영원히 투쟁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