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쉬웠습니다. 불쌍한 놈들. 뱃가죽이 등에 달라 붙었습니다. 식량에 눈이 뒤집힐만도 했지 말입니다."


브라우니의 눈에는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모모가 무감정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적이잖아."

"예. 하지만 동포입니다. 저는 같은 모델이기도 하고."

"속도 편하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이 녀석도 그랬을 겁니다."

브라우니는 떨어진 들개 브라우니의 목을 조심스럽게 수습해 눈을 감겨주었다.

"나무아미타불."

그렇게 중얼거리는 브라우니의 모습에 모모는 의아한 듯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세한건 잘 모르지만 이러면 좋답니다. 죽고나서 좋은 곳으로 간다고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브라우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들에게 영혼이란게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뭐,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말고 아니겠습니까."

영혼이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인 바이오로이드에게 영혼이라.

멸망 전이었다면 숱한 사람들이 서로 격렬한 설전을 벌일만한 주제였다.

하지만 뭐 어떠하랴. 어느날 찾아온 멸망이 떠들 사람들의 입을 모조리 틀어막았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모모는 카타나를 한번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들개 브라우니의 피가 흩뿌려지며 콘크리트 바닥에 기묘한 그림을 남겼다.

"영혼이라는게 우릴 살아있게 해 주진 않아. 죽거나, 죽이거나. 간단하잖아."

"이해합니다. 이 지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일어서며 모모를 돌아보는 브라우니의 눈에는, 여전히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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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시설이 가동하며 내는 나지막한 소음이 지배하는 복도에 다수의 발소리가 울렸다.

들개들의 본대가 지하 냉동고로 진입하는 소리였다.

바디벙커를 앞세운 알비스를 전위로, 좌우를 맡은 님프와 레프리콘이 뒤따른다. 리더가 가운데 위치해 빈틈없는 경호를 받고 후방을 베라가 경계하는 대형이다.

한차례 꺾인 어슴푸레한 복도에는 몸을 숨길만한 지형지물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함정을 설치할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도주였든 전략이든 일부러 지하로 내려왔다는 것은 스스로의 전력을 자신하지 못했다는 소리이며, 그것은 곧, 필연적으로 위협적인 고급 바이오로이드의 부재를 의미했다.

고급 바이오로이드였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할 필요도 없이 지상에서 브라우니들을 도륙냈을 테니까.

그렇다면 두려울 것은 없다.

머릿수도 화력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지원도 퇴로도 없다.

전력을 뒤집을만한 유일한 가능성은 폭발물 뿐이었지만 같이 죽을 생각이 아닌 이상 폐허의 지하에서 폭발물을 터트릴 생각을 하진 않을 터였다.

들개들이 취할만한 최적의 전략은 복도를 따라 늘어선 냉동실들을 수색하며 사냥감들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 뿐이었다.

"전진."

리더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들개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진하며 목이 떨어진 브라우니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한 들개 분대는 핏자국을 따라 시설의 안쪽으로 계속해서 향했다.

발견되지 않은 나머지 브라우니 하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지만 그런 것 쯤은 이제 곧 밝혀질 것이었다.

분대원 상호간의 빈틈없는 엄호 하에 냉동실들이 하나하나 확인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복도의 가장 안쪽, 비품실 뿐이었다.

완전한 체크메이트다. 뒤집을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끽해봐야 폭발물이겠지만 설령 있다 해도 여태 터뜨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보다 부드러운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리더는 비품실의 문 너머로 외쳤다.

"항복해라! 도망칠 곳은 없다."

[엿이나 드쇼!]

문 너머로 대번에 돌아오는 되바라진 답변에도 리더는 불쾌해 하는 기색 없이 다시 외쳤다.

"네게 당한 부하를 봤다.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었을텐데 우린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지. 실력이 좋더군. 지금 항복한다면 우리 분대에 합류시켜 주겠다. 네가 우리 분대원을 죽인 것도 추궁하지 않으마. 그리고... 그 목소리는 브라우니로군.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목소리다. 나 역시 스틸라인이니까." 

[......]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설득이 어느정도 상대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고 판단한 리더는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C-77 레드후드' 12호. 스틸라인 제 1사단 4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자다. 스틸라인의 이름을 걸고 명예로운 대우를 약속하마, 전우여."

[연대장님...?!]

문 너머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드후드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음을 기꺼워하며 말했다.

"그래, 본관이다. 귀관의 관등성명을 밝혀라."

[브라우니 0159, 생존을 신고합니다.]

"0159라고?"

태연자약하던 레드후드도 상대의 정체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0159라. 연합전쟁 시절부터 살아있었다던 그 베테랑 아닌가.

확실히 자신 휘하에서 복무하던 개체였다. '그 날', 인근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스틸라인 군단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살아있었나, 브라우니 0159. 진심으로 놀랍군."

[저 역시 놀랐습니다. 분명 가장 먼저 돌격하셔서 전사하셨던 게...]

"거의 그럴 뻔 했지.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살아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답하며 레드후드는 씩 웃었다. 잔인할 정도로 비틀린 미소였다.

"왜 내 부하들이 그토록 깔끔하게 당했는지 이해가 되는군. 귀관이라면 그럴만한 실력자니까. 하지만, 이제 서로가 누구인지 알게 된 이상 대치할 필요는 없다. 문을 열고 맞이해라, 브라우니 0159. 전우의 품으로 돌아와라."

[전우의 품.... 말씀이십니까.]

"그래. 귀관이라면 환영이다. 우리 분대에는 레프리콘 개체도 있다. 분명 반가울 테지."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연대장님.]

"허가한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군율이 바뀌었습니까? 명실상부한 적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생존이라는 미명 하에 동포를 살해하고 약탈해도 된다고 말입니다.]

자신을 힐난하는 목소리에 레드후드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적응이다, 브라우니 0159. 생존을 위한 적응 말이다. 살아있지 못하면 군율따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끝입니다. 절 끌어내든지 천년만년 그러고 계시던지 뜻대로 하십쇼.]

그 말을 끝으로 문 너머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예상이 빗나가자 레드후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바라는 게 거친 방식이라면 바라는 대로 해주마."

한 손을 들어올린 레드후드는 그대로 분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낡은 철문의 경첩을 겨냥한 알비스는 정확한 두 번의 사격으로 경첩을 박살내고는, 그대로 문을 걷어 차 넘어뜨렸다.

무거운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어나며 잠시 시야를 가렸다. 잡동사니가 쌓인 널찍한 비품실이 드러났고, 그 가장 안쪽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칠갑을 한 브라우니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언뜻 봐도 상당할 출혈량이었다. 바닥에 고인 피웅덩이로 보아, 응급처치 없이는 얼마 살지 못하리라.

알비스를 따라 진입한 레프리콘과 님프가 거리를 둔 채로 브라우니를 겨누었고, 레드후드가 따라 들어와 브라우니를 내려다보았다. 브라우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나게 오랜만이지 말입니다. 물론 이럴거면 차라리 안만나는게 나았을텐데 말입니다. 설마 그 용맹하고 꼬장꼬장하던 레드후드 연대장이.... 쓰레기로 전락했을 줄이야."

부상때문인지 고개를 숙인 브라우니의 목소리는 부정확했고, 비품실의 구조 탓에 약간 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경멸만큼은 확실한 예리함을 품고 있었다.

"상관에게 입이 거칠군, 브라우니 0159. 아무리 경력이 길고 공훈이 많아도 난 귀관의 상관이다."

옛 부하의 비난에 레드후드는 불쾌한 듯 말했지만, 그 얼굴엔 확실한 우위를 잡고있다는 우월감이 떠올라 있었다.

너의 생명은 내 손아귀에 있다. 그런 의미의 우월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우월감은 곧 응어리진 고통과 자기혐오에 덧씌워졌다.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난 적응의 결과라는 말 밖에는 해줄 수 없다. 인류는 멸망했다. 바이오로이드도 멸망했다. 우리의 스틸라인은 이제 패잔병들과 먼짓더미에 불과하지.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수치도 모르고 뛰고 있는 이 빌어먹을 심장 뿐이다. 이를 악물고 살아남는 것! 이제 우리에겐 그것만이 법칙이며, 그것만이 규율이다."

한껏 격앙되어 한과 감정을 담아 토내해듯 말하는 레드후드에게, 브라우니는 빈정거렸다.

"예, 적응. 적응이지 말입니다. 살고 싶어서 자랑스런 군기도 내팽게치고, 군모도 벗어 던지고. 군인정신과 양심은 세트로 버리시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패잔병이시지 말입니다. 연대장님이 제대로 된 패잔병이 되신 것 같아서 자랑스럽습니다."

"군기? 군인정신? 양심? 이제와서 그런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는 말이다. 귀관 역시 그럴 텐데. 오히려 귀관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테지. 몇 십 번이나 전투에서 살아남았지 않나. 생존의 본질은 그런 겉치레에 있는 게 아니다."

"죽지 못해 살고있는 병신한테 평가가 후하시지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귀관 역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건 당신 생각이구요, 아줌마."

서로 날이 선 감정이 부딪히고, 의견의 간극이 좁혀질 기미가 없자 결국 레드후드는 직접 허리의 홀스터에 꽂힌 대구경 권총을 꺼내들었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탄환이 장전되고, 그 총끝은 브라우니를 향했다.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겠군. 아직도 하잘것 없는 겉치레에 집착하고 있다니. 뭐, 좋아. 우리 분대원들의 본보기가 되어줘야겠다. 이 망해버린 세계에서, 웃기지도 않은 명예를 추구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

"귀관의 죽음으로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응당 그래야지."

잔혹하게 웃으며 말하는 레드후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묵직한 총성이 냉동고 폐허의 지하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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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없고, 전개는 느리고, 나는 망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