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빛이 창백한 그 여자는 렐을 예부터 녹서스인들이 가장 증오해왔던 적을 무찌를 무기로 보고, 양친에게 사악한 제안을 했다. 곧 렐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의회의 감시가 닿지 않는 특수한 학교에 들어가 가장 주목받는 학생이 되었다. 렐의 부모는 학교로 면회하러 오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딸 앞에 놓인 밝은 미래에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다.

잠깐이지만 렐은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렐이 처음으로 다른 학생과 전투를 벌인 것인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전투를 마친 뒤에는 마력을 증폭시키는 마법의 인장을 팔에 붙였다. 훈련의 일환이라고는 했지만, 렐은 자신이 상대했던 소년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이후로 맞붙은 상대들도 마찬가지였다.

렐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마법을 활용한 전투 능력도 점점 향상되었다. 온몸은 인장으로 뒤덮였고, 덕분에 마력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광석을 뽑아 올리거나 철벽을 뒤틀어 무기를 만들고, 상대의 갑옷을 가열해 으스러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교수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렐을 제국 역사상 최강의 전사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결국 열여섯 번째 생일, 유난히 처절했던 결투를 마치고 이성을 잃은 렐은 교수들과 경비병들을 죽인 다음, 학교 내 금지 구역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곳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동안 결투에서 제압했던 모든 상대가 기억과 감정이 없는 꼭두각시 상태인 무효체가 되어 갇혀 있었다. 렐의 마력을 증폭했던 인장의 힘은 그들의 몸에서 강제로 추출되었던 것이었다. 다시 돌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던 교장은 사실 렐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말했다. "전부 너를 위해서였다. 탁월함은 희생으로 쌓아 올리는 법이니까."

렐은 분노했다.

학교 내 소수의 생존자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땅이 갈라지면서 날카로운 소용돌이처럼 변했고, 건물이 해체되어 렐의 몸 주위로 검은 갑옷을 형성했다. 노련한 병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태산보다 무거운 창으로 무장한 소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강철로 만든 말을 타고 정문을 돌파한 렐은 최대한 많은 학우들을 구출했다. 검은 장미단은 서둘러 남은 무효체들을 수습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의 흔적을 없앴다.

그러나 뒤늦은 조치였다. 생존했던 교수들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무효체도 더는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렐은 녹서스 제국의 적이 되었지만, 수배 전단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약자를 보호하면서, 수년간의 고통과 학대를 눈감았던 녹서스 제국에는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 찬 무자비한 괴물이 되었다. 제국이 직접 저지른 일은 아니었으나, 알고도 방관했기 때문이었다.

강철마를 타고 달리는 렐의 목적은 간단하다. 바로 녹서스 제국의 파멸과 검은 장미단 학교에서 생존한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렐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