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있는 한 아가씨 학교.


그 곳에 재학중인 한국인 유학생 설민아는 충격에 빠졌다.


"사쿠라이양...?"


진로희망조사서를 집어든 민아는 이내 침묵했다.



제 1 희망 : 엄마가 되는 것


제 2 희망 : 결혼


제 3 희망 : 행복한 가정 꾸리기



"불만이라도?"


혼혈다운 또렷한 이목구비와 조그마한 얼굴.


탈색임에도 자연스러운 금장발.


사파이어 같은 진한 녹색 눈동자.


작은 키에도 긴 다리와 각선미가 돋보이는 몸매.


적은 말수와 차가운 눈매, 그리고 쿨한 행동.


프로즌 프린세스라는 애칭을 가질 정도로 교내에서 인기있는 아이돌 같은 존재.


낮고 차가운 사쿠라이의 목소리엔 가시가 돋쳤다.


"진로희망조사서는 가고 싶은 대학이나 공부하고 싶은 전공, 취업하고 싶은 직종을 쓰는 칸이니까..."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고 작성하는 게 어떨까?"


"성가시네." 


사쿠라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을 나가는 사쿠라이를 민아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며칠 뒤.


민아는 선생님의 심부름을 마치고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사쿠라이양, 진로희망조사서 다시 써오도록 하세요."


담임은 사쿠라이에게 진로희망조사서를 돌려주었다.


사쿠라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담임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제 진로는 확고합니다."


"뭐라고요? 고3 학생이 엄마, 결혼, 가정을 운운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의 논쟁이 교무실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이에 주변 선생들이 두 사람을 중재하려 노력했다.


"사쿠라이양, 잠시 나좀 볼까?"


민아는 사쿠라이의 손을 잡고 황급히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옥상 밴치에 앉았다.


그리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숨을 쉰 사쿠라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보같다고 생각하지?"


"아니."


예상치 못한 대답.


사쿠라이는 화들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당황했어. 근데 교무실에서 네 얘길 듣고 알았어.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거구나."


민아는 해맑은 미소를 짓곤 사쿠라이를 바라보았다.


사쿠라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어렸을 때 부터 외롭게 살았으니까."


사쿠라이는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사쿠라이 사츠키.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스미토 제약 회사의 장녀.


어린 나이에 미국인이었던 엄마를 여의고 정서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는 일본인 의붓어머니와 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만 신경쓰기 바빴다.


사쿠라이는 어린 나이부터 별채에 혼자 살게 되었다.


형식적인 보모들은 사쿠라이의 응석을 받아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성격과 환경 때문에 소꿉친구도, 학교 친구도 없었다.


이에 사쿠라이는 결심했다.


엄마가 되어서 아기에겐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되풀이 하지 말자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소중한 가정을 꾸리자고.


그리고 행복한 삶을 누리자고.



구체적인 개인 이야기.


게다가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임에도 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들어줘서 고마워."


"너도 말해줘서 고마워.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민아는 사쿠라이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었지? 여태까지 고생 많았어."


진심 어린 위로가 느껴지는 따뜻한 한 마디.


복 받치는 감정이 사쿠라이를 뒤흔들었다.


"응원할게."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급우에게도, 보모한테도, 선생한테도, 가족한테마저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한 마디...


"항상 힘들고 지칠땐 말해. 언제든 도와줄게."


결국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쿠라이는 엉엉 울며 민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 나 제멋대로인 사람이야!

널 귀찮게 할 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상냥하면 나 착각해버려..."


민아는 조용히 사쿠라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 후, 사쿠라이는 아기병아리처럼 민아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동 수업을 들으러 갈 때도, 점심 시간일 때도, 체육 시간에도.


민아 혼자 떠드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쿠라이는 즐겁게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학교에서 우정을 쌓아나갔다.



"사츠키는 여름 방학 때 뭐 할 거야?"


"글쎄. 아마 핀란드에 있는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은데."


"우오, 부자의 여유!"


"텐션 높잖아."


여름방학이 다가오는 하교길.


두 사람은 마지막 고3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 지 고민했다.


사츠키는 도쿄의 혹독한 더위가 너무나 싫었다.


그렇기에 평소 핀란드나 뉴질랜드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곤 했다.


"너는?"


"한국에 가려고."


역시 고국행인가.


가족도 친구도 한국에 있을 테니.


사쿠라이는 부러움과 외로움, 섭섭함과 질투를 느꼈다.


"나도 따라가도 될까?"


갑작스러운 사쿠라이의 질문.


민아는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손사레를 쳤다.


"미안, 이번 여름은 힘들 것 같네."


사쿠라이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여름방학식 날.


마지막 여름방학에 대한 설레임때문일까?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흥을 돋았다.


"자, 조용!"


담임이 박수를 치며 능숙하게 시선을 모았다.


"우리 반이었던 설민아 학생이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고등학교 입학부터 고3 1학기까지 같이 했던 학급 친구인 만큼,

슬프지만 따뜻하게 보내주도록 합시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느낌.


가슴이 꽉 막힌 것 처럼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럴 순 없어.


이대로는 안돼.


주변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사쿠라이는 민아에게 다가갔다.


"사츠키?"


사쿠라이는 민아의 손을 끌고 반을 뛰쳐나갔다.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었던 옥상.


매미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는 와중에도 사쿠라이는 소리쳤다.


"바보!"


두 주먹으로 민아의 가슴을 내려쳤다.


눈물을 흘리며 작별의 슬픔을 토해냈다.


"가지 마... 제발..."


민아는 사쿠라이의 눈물을 손으로 직접 닦아주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냥 가지 마..."


"미안."


"미안해 하지 마! 안 가면 되잖아!"


옥상이 떠나가라 사쿠라이는 구슬프게 울었다.


민아는 사쿠라이를 꼭 껴안았다.


"나, 어렸을 때 부터 소방관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다들 위험하다, 여자가 할 일이 못된다며 만류하더라.

그래서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적당한 회사에 취업하려고 했었어.

근데 네 진로희망조사서를 보고 깨달았어.

진심으로 원하는 걸 이뤄야겠구나.

네 덕분에 용기를 얻고 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


"여기서 소방관 하면 되잖아..."


"난 일본인이 아니라 못해.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하고 싶은 걸?"


사쿠라이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민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방법은 좋지 못했지만.


미리 말하면 좋았겠지만.


먼저 말했다면 정에 이끌려 어렵사리 결정한 꿈을 포기했을 지도 몰라.


민아는 핑 도는 눈물을 참아내며 사쿠라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마웠어. 넌 내 유학 생활에서 둘 도 없는 소중한 친구야."


사쿠라이는 민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곤 민아와 입을 포갰다.


깜짝 놀란 민아는 사쿠라이를 밀어내려했다.


하지만 사쿠라이는 손깍지를 낀 채 민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사쿠라이의 부드러운 혀가 닫혔던 민아의 입술을 열었다.


"이... 이게 무슨...!"


사쿠라이는 초점 잃은 탁한 눈동자로 민아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진로를 이루려고."


사쿠라이는 손가락으로 민아의 입을 열었다.


이윽고 속 주머니에서 꺼낸 알약을 민아의 입에 넣었다.


"내 아이를 낳아줘."


"뭐...?"


말도 안되는 소리.


여자끼리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민아는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다.


"IPS 세포 분열 알약. 이 것만 있으면 여자끼리도 임신이 가능해."


분명 아침 뉴스에서 얼핏 들었던 내용이었던 것 같았다.


낮은 출산율과 동성애자들을 위해 스미토 제약이 개발에 성공했다고.


그래서 사츠키네 회사라 잘됐네라고 좋아했건만...


좋아할 일이 아니었잖아!?


이대로라면 백프로 임신.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잖아...


있는 힘껏 저항해보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약엔 미약 성분이 들어가있거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 없어."


"사츠키... 너 엄마가 되고 싶다며..."


"난 엄마가 되고 싶댔지, 내가 임신을 하겠다고 하진 않았어."


분명 맞는 말이었다.


본인의 진로희망조사서엔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적혀있으니까.


여자끼리라면 상대방이 임신을 하면 되니까.


"결혼은 어떻게 할 건데... 한국도 일본도 동성혼은 불법이잖아..."


"나 미국시민권도 가지고 있어. 미국에서 혼인 신고 하면 문제 없어."


그래...


사쿠라이 사츠키는 이렇게 철두철미한 여자였지.


퇴로따윈 다 차단하고 사람을 조여오는 사람이었어.


민아는 무서움에 다리를 덜덜 떨었다.


사쿠라이는 입꼬리를 씨익 웃으며 가슴골에 손을 집어넣었다.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뭐야?"


이런 상황에서 뜬금 없는 질문은 왜 하는 건지...


"누군가를 구하고 싶어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돕고 싶었어."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민아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럼 날 구해줘. 평생 나만의 소방관이 되어 줘."


사쿠라이는 부드럽게 민아의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우리 같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자..."


사쿠라이의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민아의 꽃망울을 터트렸다.



몇 년 뒤.


퇴근을 하자마자 사쿠라이는 곧장 집으로 귀가했다.


그러자 예쁜 딸이 사쿠라이를 반겼다.


"엄마!"


"우리 딸, 잘 있었어?"


"응!"


딸이 애교를 부리자 사쿠라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엄마는 어딨니?"


"침대에서 자."


사쿠라이는 딸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검정 포니테일.


강인한 인상과 가슴과 골반이 돋보이는 몸매.


177cm 언저리의 큰 키.


활발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


자신의 아내가 된 민아를 바라보며 사쿠라이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이제 나도 언니가 되는 거야?"


"응. 그러니까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알겠니?"


"응!"


사쿠라이는 살짝 튀어나온 민아의 배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우수에 젖었다.


설민아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다고.


평생 설민아를 사랑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