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악.....!」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직업을 고르라면,

그건 분명히 사채업자일 것이다.


그야, 하루도 빠짐없이 집으로 찾아와서

있지도 않은 돈을 달라고 하니


어지간히 성실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아줌마, 내가 좆으로 보이나 봐? 

   분명 이자까지 해서 마련하라고 했을텐데.」


「ㅈ,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달까지만 어떻게......」


「허, 씨발.」


기억도 안 나는 오래 전,

한 남자가 없는 집 살림을 도박에 탕진하고 사채를 쓰더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돈 갚을 사람이 사라지자 과녁은 남은 가족에게 향했다.


그때마다 어린 딸은 옷장에 숨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가엾은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눈물을 쏟았다.


「서아야. 엄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이는 엄마가 원망스러웠지만,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녀는 매일 밤 대답 없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천사든 악마든 좋아요.

   제발 아무나 도와줘요. 도와달라고요.....」


확실한 건, 비참한 인간일수록 악마가 다가오기 쉽다.

어떤 조건이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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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

아이들이 가방을 챙기고 삼삼오오 모여 학교를 나선다.

교실은 금세 텅 비었다.


서아는 책상에 멍하니 앉아,

분필 자국이 남아있는 칠판을 응시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엄마는 일 때문에 항상 늦게 들어오고, 

집에는 반겨줄 사람이나 애완동물도 없었다.


함께 놀 친구라도 있으면 그나마 나았을까.


그녀에게 인간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아이들의 관심을 피해 조용히 다녔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집어들었다.

발길이 닿는대로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가방 틈으로 노란 포스트잇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 네 시간을 사고 싶어.

  수업 끝나고 학교 도서관에서 기다릴게. 채유리 -


서아는 고민했다.


짧지만 알 수 없는 쪽지 내용은 물론,

쪽지를 보낸 사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채유리? 얘가 왜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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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봤구나, 와 줘서 고마워~」


결국 고민 끝에, 서아는 쪽지에 쓰인 장소에 도착했다.

쪽지의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채유리, 같은 반 친구이자 학생회장.

단 둘이서 만나는 건 처음이네. 서아는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보고 떠오른 단어가「매혹적이다」일 만큼

'예쁘다'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을 이끌리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아이였다.


재벌 총수의 외동딸이라니

할리우드 배우와 한국인 사이 혼혈이라느니

추측만 가득한 소문이 항상 따라다녔다.


성적도 우수하고, 학생들과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유명인사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들 틈 사이에서가 아닌, 혼자서 마주하는 채유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했다. 확실히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서아는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담임이 챙겨주라고 했어?

    혼자가 편하니까, 안 해도 돼.」


「하하, 아니야~

    담임 때문이면 이렇게 따로 안 불러냈지.」


「그럼, 왜 나한테 쪽지를 보냈는데?」


「응? 그야~ 

   서아 너, 내 취향이거든.」


너무나도 명쾌한 대답에, 서아는 당황했다.


「어..... 어어?」


「하핫, 빨개졌어~

    서아 너, 나한테 관심 있어?」


유리가 살짝 미소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서아는 자신의 목덜미부터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네 하루를, 나한테 줘.

    대가는 충분히 치를 테니까.


    한 시간에 백만원. 어때?」


유리는 빙긋 웃으며, 가방을 열고 서아 앞으로 가져왔다.

5만원권 현금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서아의 몸이 순간 우뚝 굳었다.


「후훗, 장난치는 거 아니야.

   네 시간을 사고 싶다고 했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원한다면 선금으로 먼저 줄 수도 있어.」


「너, 대체 뭔 소리를.....」


「쉬잇..... 궁금한 게 많겠지만,

   제안을 받아들이면 더 알려줄게.」


서아는 혼란에 빠졌다.

유리의 제안은 의문투성이였다.


학생이 저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시간을 사고 싶다는 말도 이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많은 돈을 미끼로, 

자신을 나쁜 일에 이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에 백만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액수는

상대가 누구라도 한번쯤 고민할 정도였고,

그게 서아라면 더욱이 그랬다.


가방에 담긴 저 액수만 해도, 

아빠가 남기고 간 빚을 갚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사채업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엄마를 도울 수 있었다.


서아는 이 말도 안되는 제안에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채유리는 그토록 서아가 원하던 존재였다.

매일 밤마다 대답 없는 신에게 올렸던 간절한 기도.


채유리는 신의 대답이었다.

다만 신이 나의 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아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밝아서 차라리 암흑과 상통하는

채유리의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서아야. 내 제안, 받아들일거니?」


서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