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4    5    6    7




나는 늘 하던대로, 잠에서 깨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달력을 체크하였다.


거의 기계적인 습관이 되어있던, 지나간 날자를 X자로 표시하는 손길이, 오늘 날짜의 칸에 먼저 적혀있는 메모에 조금 느려졌다.



"벌써 이런 때인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달력에 마저 표시를 하고 펜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나의 조금 이상하지만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권속을 찾아 방을 나섰다.


그 권속의 생활 패턴대로라면, 그 아이는 나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지금쯤이면 집무실에서 원래는 내가 하고 있어야 할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권속 아이가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저녁이에요, 주인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쩐 일이세요? 지금 오신다고 하셔도 결제하실 서류가 나오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텐데……."



그 아이의 지나칠 정도의 유능함에 조금은 골방 늙은이가 된 것 같아, 별거 아닌 한 마디로 자격지심을 느끼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애쓰며 대답했다.



"험, 험. 나도 알고 있느니라. 그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느니라."


"어떤 건데요?"


"혹시 지금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음식이 있느냐?"


"……음식이요? 갑자기?"



나의 사랑스러운 권속은 주인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강아지처럼 머리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내심 그 아이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던 나는 별 다른 정보를 주고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지어보였다.


결국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 아이가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주인님께서는 이전에, 제가 더 이상 인간과 같은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렇다고 주인님께서 식사를 필요로 하실리도 없을테고요?"


"그렇겠지?"


"……그 질문, 혹시 중요한 안건인가요?"


"해석하기 따라서는?"



그 아이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이내 곧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다시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노,,,,,뭐시기에 시선을 돌려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굳이 먹고 싶은 음식을 물으신다면, 저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네요."


"그것 뿐이냐?"



놀이를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내심 이 스무고개가 계속 이어지길 바랬던 나는, 마음속으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음……. 그 밖에는 별달리 생각나는게 없네요. 고기는 좋아하는데다 먹어본지 오래 되어서 그립기도 하고요."


"그러느냐. ……헌데, 스테이크는 조금 그렇구나."


"안 되는 건가요?"


"물론 안 될것은 없는데……. 뭐, 좋다. 어차피 한번 쯤은 겪어봐야 할 일이기도 하니."


"……?"


"그럼 기대하고 있으려무나."



나는, 기특하게도 원래는 내가 처리해야할 일을 도맡아서는 그것에 집중하려고 하는,


또 한편으로는 장난에 좀처럼 어울려주지 않아 내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작은 수수께끼만을 남긴채, 그 의문이 일하는 내내 조금 정ㄷ는 신경쓰이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심술을 품으면서 집무실을 나섰다.


나는 생각해뒀던 식자재들을 구입하기 위해, 해가 진 것을 확인하고는 현관을 박차고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실은, 이런 허드렛일은 하인들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깨끗하게 닦고, 방부 처리를 마쳤다고 해도 죽은 때 모습 그대로인 그들에게 민가를 거닐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집을 나오고 나서야 나는 동생 일행에게는 오늘 일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은것을 떠올렸지만,


'뭐, 그 아이야 워낙 제멋대로니 말해줬다고 해서 함께 해줄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라는 판단 하에 발걸음을 돌리는 일 없이 그대로 자주 가던 야시장으로 향했다.


.

.

.


"저, 실례할게요. 혹시―――"


"들어오려무나."



막 주방으로 들어오던 권속 아이는, 이런 곳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깜짝 놀란듯 보였다.



"주인님? 여기는 어쩌신 일로……."


"오늘 분 연고를 가지러 온거겠지? 저쪽 탁자에 올려놨으니 가져가려무나."


"아, 예……. 그런데 주인님께선 어쩐 일로 요리를 하고 계신가요?"



그 말대로였다.


나는 지금 권속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직접 고기를 사와서 손수 굽고 있었다.



식사를 하지 않는 우리 밤의 귀족들에게 주방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약물을 만든다던가 연금술 실험을 한다던가 하는 목적으로나마 그 형태가 유지되고는 있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요리를 하는 경우는 중요한 인간 손님을 맞이할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고, 그래서 딱히 청소를 하지 않아 더럽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식이 조리되는 곳 특유의 냄새나 분위기는 없었다.


거기다 나는 그다지 연금술이나 약학에는 흥미가 없어서, 이곳의 일은 대부분 하인들에게 일임해두고 있었기에, 확실히 내 모습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잇었다.



"네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도 요리는 간만이라 나름 즐겁구나."


"주인님께서 직접 하시는건가요? 다른 하인들은……."



권속 아이의 말대로 다른 하인들이 주변에 없는것도 아니었고, 집에 사람이 늘었다곤 해도 그만큼 하인들도 많이 늘었기에 손이 비는 이들이 아주 없는것도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그렇긴 한데 말이다, 생각해보거라."


"네?"


"너는 저런 모습을 한 요리사가 한 요리를 먹고 싶더냐?"


"……아."



우리 집안은 그래도 죽음의 하인들을 보존 처리할때 살점을 남겨놓는 악취미 같은건 없기도 했고, 나도 깔끔한걸 좋아하는 탓에,


해골 하인들은 해부학 표본처럼 깔끔한 백골이었고, 살점이 남아있는 하인들도 안색을 제외하고는 생전의 모습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체는 시체다.


이제는 매일같이 봐온 하인들이니 보고 입맛이 떨어진다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는 없었던데다,


분명 위생에 필요한 처리는 빼놓지 않고 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거라고는 해도,


저런 모습을 한 하인들에게 식자재를 만지게 하는건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권속은 대충 납득은 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든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렇긴해도, 굳이 주인님께서 이런 궂은 일을 하실 필요는……."


"놀라게 만들어주고 싶었느니라."


"……그런 건가요?"


"그런 거다. ……이미 서프라이즈는 물 건너간 듯 하지만……."


"……죄송……해요?"


"그렇다고 죄송할 필요 까지는 없고. 이왕 온 김에 연고를 다 바르고 나면 너도 상을 차리는 것을 도우려무나."


"그렇게 할 게요."



준비했던 서프라이즈를 놓친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그 아이와 공동으로 가사를 하는것도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이건 이거대로 좋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

.

.




내 상차림을 앞둔 그 아이는 우리 집안의 식사 예절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지 기도문을 외우려다가 말고, 합장을 하거나, 고개를 어설프게 숙이거나 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냥 '잘 먹겠습니다.'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구나."


"아……아아, 그런가요? 헤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본인은 나도 모르게 틈을 내서 우리 집안의 역사와 예법을 공부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식사 예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가여운 아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식사 예절에 대한 것 만큼은 익힐 수 없었을 것이다.


애당초 있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배운다는 말인가?


당연히 우리 집안 사람들도 인간이었던 적이 있긴 했지만, 몇백년도 전의 일이다.


살아오면서 식사를 했던 기간보다, 식사를 하지 않았던 시간이 월등하게 많은 것이다.


피를 마시는거야 하루 중 아무 시간만 내서, 필요한 만큼만 마시면 그만이라 몇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식사에 대한 예절같은것도 자연스럽게 잊혀져갔다.


그래서 먼 옛날에 있었을 귀족적인 예절같은 것은 이제와서는 가물가물해서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왜 그러느냐. 먹지 않을 것이냐?"


"아니, 그게……."



감사의 인사와 동시에 접시로 식기를 가져가던 권속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인님……, 이건 어떤 조리법인가요?"


"보이는 그대로다만……."



나는 그제서야 과자와 설탕 가루로 범벅이 된 스테이크가 그 아이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님께선 원래 이런 입맛이셨나요?"


"뭐, 먹어보면 알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했고, 원래 겪어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일도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아이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망설이면서도 포크와 나이프를 고기로 가져다대서, 잼과 과자가루가 미처 묻지 않은 구석의 살점을 천천히 썰기 시작했다.


그때, 동생 일행이 우리가 식사를 하고 있는 응접실을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좋은 저녁입니다. 둘째, 즈은느음……."


"좋은 저녁."



그대로 지나쳐가던 동생이 다시 뒷걸음질을 치더니, 응접실 안으로 흘금 고개를 들여다보았다.



"뭐야, 오늘 금식일?"


"……기념일에 무심한 것도 여전하구나. 지금이라도 뭔가 준비해주길 바라느냐?"


"아냐, 됐어. 우린 알아서 할게. 얘, 가자."


"하, 하으응~"



동생은 내 권속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권속의 어깨를 잡아당겨 끌어안았고, 동생의 권속은 그 품에 안겨 헤벌쭉 한 채로 천천히 끌려갔다.


동생의 품에 안긴 녀석의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저번에 말 해준 작전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보였고,


그래서 눈짓을 보냈더니, 동생의 권속은 동생의 품에서 헤벌쭉해 있다가도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똑같이 눈짓을 보내왔다.


내가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 어쩐지 내 권속이 뜨악 하는 표정으로 나와 동생의 권속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오해라도 사버린게 아닌가 싶지만, 지금 당장은 동생이 보고 있는 앞이라 어떻게 정정하기도 뭐해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대신,



"뭐 하느냐? 그러다 다 식으면 맛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아, 아 그렇지요! 그럼 일단……."



권속은 고개를 털어 정신을 차리고는 포크에 찍힌 적당하게 구워져서, 내가 봐도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선홍빛 살점을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후, 싱글벙글 하면서 고기를 씹던 권속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떠냐. 먹을만 하더냐?"


"이거……엄청나게 비려요. 우엑……."


"그렇지?"


"아, 아니, 잘 못 구우신거 같다거나, 식재료가 잘못된거 같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건 아닌데……"


"……이전이라면 맛있게 먹었을것 같은 맛인데 어쩐지 몸에 받지 않는다?"


"네! 바로 그거에요! 어쩐지, 혓바닥이 이상해진 것 같이……."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핫핫핫하!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더냐. 스테이크는 조금 그렇다고."


"정말 너무해요, 주인님. 그런 줄 알고 계셨더라면 미리 말해주셨으면 좋을 텐데……."


"뭐, 내가 미리 말해줬다고 해서 네가 먹고싶은게 바뀌지는 않을것 아니겠느냐."


"……그것도 그러네요."


"애초에 우리 몸은 이제 피만을 받도록 되어있다. 너도 백년 쯤 지나면 나처럼 장기의 모양 자체가 피만를 받아들이기 위해 변형되겠지."


"……그래서 주인님께서는 그나마 먹기 편한 과자 같은걸 드시고 계셨던 거군요."


"그런 게지."



권속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두 번째 조각을, 이번에는 잼과 설탕가루가 듬뿍 발린 부분에서 잘라서 입 안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몇번 씹더니 이번엔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저, 주인님……."


"말해 보거라."


"주인님 앞에 놓인 그 시럽, ……조금 빌려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나는 권속 아이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면서 간신히 미소를 참으며, 내 앞에 놓여져있던 메이플 시럽을 그 아이의 접시 옆에 가져다주었다.


이 아이는 결국 내 권속, 입맛조차 우리 집안의 내력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은밀하게 동질감을 느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아이는 내가 과자 한 접시를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사이, 단맛의 힘을 빌려 몇 점을 더 열심히 썰어서 입 안으로 가져갔지지만,


점점 그 속도가 느려지더니 결국 절반 정도 남기고 손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먹기 힘들면 억지로 먹지 않아도 괜찮단다."


"그래도 식재료가 낭비되면 아깝고, 더군더나 주인님께서 직접 제게 해주신 음식인데……."


"애초에 말했듯이 우리 몸은 피 외에 다른걸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있다. 억지로 먹어봐야 몸만 상하지 않겠느냐?"



권속 아이는 내 말을 듣고는 일그러진 표정을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의 설탕 범벅인 스테이크를 바라보더니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멍 하니 앉아있는 사이, 해골 하인 하나가 다가와서 접시에 손을 가져다 댔고, 권속은 그 하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인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식기를 가져가는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 주인님께선 어째서 오늘 식사를 하자고 하셨던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그 아이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해보였다. 그도 그럴만할게, 자기가 좋아하던 음식이 더 이상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고, 몸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컸을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얹으며 말했다.



"일단, 널 괴롭힐 의도는 없었다는 것 만은 말해두겠노라."


"정말, 조금도요?"


"……조금 정도는……?"


"주인니임~……."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정말로 이건 우리 집안의 연례 행사 같은걸로, 두 해 똑은 세 해에 한번 정도는 식사를 하는 전통이 있단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나요?"



그렇게 물어보며 그 아이는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마, 여기서 농담이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인간성을 위해서란다."


"인간성이요?"


"그, 너도 이제 슬슬 그럴 때가 있지 않느냐. 어느 새 인간이었을 때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다거나, 그런 일이 있지 않더냐?"


"글쎄요, 그러고 보면 가끔 정신없이 책을 읽다보면 잠도 안자고 이틀 연속으로 읽을 때도 있고……."


"그래, 그런 것 말이다. 그런게 쌓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인간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지."


"주인님께서도 그런가요?"


"뭐, 대충 짐작가지 않느냐? 너, 혈액 구매서 처음 처리할때 망설이지 않았느냐?"


"그, 그건……!"


"괜찮다. 솔직히 우리가 마신 그 피가 제대로 환자에게 수혈된다면 적지 않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 그래서 인간성이 중요한 거란다. 괴물의 몸으로 살다 보면, 아무리 원래는 인간이었다고 해도 조금씩 마음이 바뀌는 것 만큼은 피할 수 없더구나."


"괴물의 몸……인가요."


"……그래."



나는 속으로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내가 자기를 구해주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쩌면 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내뱉은 감언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아이를 구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내 노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햇살이 가득한 낮의 세계를 거닐 권리를 앗아가고 말았다.


비록, 지금은 그 아이가 어쩔 수 없이 나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나는 그 아이로부터 태양을 앗아가고, 인간으로서 영예롭게 죽을 권리를 앗아가고, 밤의 어둠과 부도덕 속에서 살아가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죄책감이 들어서, 괜히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그 아이의 손을 쓰다듬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마음을 떠올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거란다."


"그게 설령 바보같은 일일지라도요?"


"그런게지."



권속은 나와 맞잡은 손을 한참을 말 없이 바라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주인니임……."


"왜 그러느냐."


"저, 속이 좋지 않아요."


"저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우처럼 웅크린 그 아이의 커다란 몸을 안아올려, 근처의 소파로 데려가 눕혔다.


그리고 여전히 배를 끌어안고 몸을 떠는 그 아이에게 무릎 베개를 해주었다.



"저, 죄송해요."


"아니, 미안할 필요는 없다. 미리 얘기 안한 내 잘못이지."


"저, 다음에는……."


"다음에는?"


"다음에는 주인님이랑 같은 메뉴로 부탁할게요."


"알겠……."



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릎 베개를 하고 있었기에,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 아이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픈 와중에도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기대에 응해주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수구렸고, 그 아이의 입술은 내 코에 닿았다.



"응, 우이잉?(음, 주인님?)"


"나도……슬슬 속이 좋지 않아……."



그렇게 우리는 응접실 소파에 누워 고통이 가실 때까지 서로 끌어안은 채 하루종일 벌벌 떨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살아간 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그런 아무래도 좋은 철학을 생각하면서, 나는 복통을 견디기 위해 권속 아이의 얼굴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오늘은 마침 읽던 책도 다 읽었겠다, 이른 저녁부터 할 일도 없었기에 일찍 집무실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다곤 해도, 이미 대부분의 일은 나의 지나치게 사랑스럽고 유능한 권속에게 전부 일임하고 있었기에, 검토를 기다리며 펜을 굴리거나, 필사를 하거나 하면서 좋게 말하면 마스코트로서,


나쁘게 말하면 애완동물이랑 크게 다를 것 없는 처지로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이따끔씩 나도 모르게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 아이의 일하는 모습을 쳐다보곤 했는데, 권속에겐 그 모습이 이전부터 여간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보다 못한 권속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펜 돌리는데 심취해있던 나는 그 아이가 내 어깨위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그것을 눈치채고, 놀라서 하마터면 펜을 떨어트릴 뻔 했다.



"벌써 끝난거냐?"


"어느 정도는요. 그보다 주인님께서도 슬슬 컴퓨터를 사용해보시는건 어떨까요?"


"내가?"


"네."


"컴……저거를?"


"네. 혹시 마음에 안드시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요?"


"내가 손을 댈때마다 화면이 휙휙 바뀌지 않느냐. 종이처럼 얌전히 있는 법이 없어서 눈이 어지럽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두렵구나."


"그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거에요."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느냐. 내가 기껏 시간을 내서 저걸 쓰는 법을 익혔더니 또 얼마 안되서 쓸모 없어진다면?"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엔 적어도 앞으로 백년 안에는 컴퓨터가 쓸모없어질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고작 백 년이냐."


"……."


"손글씨도 몇백년 가지 못하고 타자기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끝끝내는 그 타자기조차 컴,,,,,타?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내가 두려워 하는걸 이해할 만 하지 않겠느냐?"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게요. 휴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궁상 떠는것도 질리시던 참이시잖아요."


"구, 궁상이라니……말이 너무 심한것 같구나."


"주인님께서 당당하게 계시기만 하면 저도 상관 없지만, 맨날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서 제가 일하는 모습을 흘끔흘끔 훔쳐보면서 눈치만 보고 계시잖아요."


"으윽……!"


"……저도 말이 조금 거칠게 나온것 같네요. 죄송해요. 어쨌거나 그러니 이번 기회에 조금 용기를 내서 한번 시도라도 해보시는게 어떠실까 싶은데요?"


"……정말 나라도 가능할까?"


"아무렴요!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시다면요!"



나는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오랫만에 내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보았다.


그 아이의 체형에 맞춰진 의자의 높이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 고급 원목으로 된 책상의 매끈한 질감은 감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 눈 앞에,


이제껏 그토록 두려워했고 증오했던 사무실의 전자 마귀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권속 아이가 등뒤에서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두려움에 떨리고 있는 내 손을 감싸쥐면서 속삭였다.



"그럼 키보드랑 워드 사용법부터 시작해볼까요?"



.

.

.


나는 이제껏 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기계를 오해하고 있었다.


적당한 설명이 부족했을 뿐, 기본적인 면에서는 타자기랑 별로 다를게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기계적으로 해야 할 기능이 안에 들어가서, 실제 종이 문서로 만들기 전에 많은 것들을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그 기능이 너무 방대해서 익히는 것이 어려울 뿐, 그 중 일부만 활용하더라도 지금까지 하던 이상의 능률을 발휘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이 이 안에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단지, 여전히 내가 한평생 연마해온 손글씨를 사용할 길이 요원할 뿐이라는 점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후우~ 쉽지 않구나."


"그래도 정말 배움이 빠르세요."


"그만 하거라. 입에 발린 소리는 바라지 않느니라."


"정말이에요! 요즘 얘들 중에서도 주인님 보다 느리게 배우는 얘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쉽게 믿기지는 않지만 듣던 말중 제일 달콤한 소리긴 하구나. 후훗."


"아이 참, 정말 의심도 많으시네. 제가 경리로 일하던 시절에 본 띨띨한 신입 얘기라도 해드릴까요?"


"후후후, 됐다. 어쨌거나 이 만큼 하게 된것만 해도 나는 만족스럽구나. 조금 지치긴 하지만."



권속은 내 미적지근한 대답에 턱을 만지작 거리며 고민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쳤다.



"아, 그럼 컴퓨터에 조금 더 익숙해질겸, 인터넷 사용하는 법까지 배워볼까요?"


"뭐라? 넌 상냥한 아이긴 하다만, 가르침에 있어서 만큼은 무섭도록 엄격한 선생님이구나……."


"에이~ 그런거 아니에요. 어려운건 일절 없을 뿐더러, 오히려 앞으로는 재밌어서 더 하게 해달라고 조르실지도 모른다구요?"


"……과연 그럴까? 난 잘 모르겠구나."



난 권속의 지시대로 마우스(정말로 생쥐처럼 보여서 조금 재밌다고 생각했다)를 움직여서 이제까지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그림으로 커서를 갖다댔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처음 이 기계를 마주했을때도 저 그림을 건드렸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눈 앞에서 휙휙 바뀌는 화면에 정신이 어지러워서 바로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을까?



"이건 포털 사이트라고 불리는 웹 페이지 인데요. 당장 고급 정보를 얻는 용도로는 별로지만, 기본적으로 온갖 정보가 모이는 곳이라 빠르게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어서 유용한 곳이에요."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그날 소식을 그날 접할수 있는 텔레비전 뉴스보다 빠를 수 있을까?"


"물론이죠! 그 보다도 더욱 빠르게 올라온다구요!"


"난, 잘 모르겠구나. 그렇게 빠르다니…….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한번 확인해 보실래요?"



그 아이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내 마우스를 잡은 손을 잡아서 뉴스 라고 적힌 란으로 커서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손가락을 한번 딸깍 하자, 눈 앞에 순식간에 신문같은 화면이 펼쳐졌다ㅏ.



"이건 신문이 아니더냐."


"그렇……죠?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게 TV 뉴스보다 빠르다고?"


"빠르기만 하나요? 영상도 있다구요!"


권속 아이가 커서를 몇번 움직여서 기사를 고르더니, 그 중 하나의 이상한 마크가 있는 그림을 클릭했다.


그러자, 신문의 삽화가 TV 뉴스처럼 움직이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기능을 이런 식으로도 쓸 수가 있구나. 정말 요즘 문물은 대단하구나!"


"……주인님은 정말로 옛날 사람 이시군요……."


"……그건 무슨 뜻이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여기서 화면을 내리면 아래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권속의 미소 가득한 얼굴이 천천히 굳어져갔다.


기사는 여행지에서 강도를 당한 소녀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 아래에는 방명록 같은 글들이 적혀져 있었는데,


그 아이를 위로하는 내용이나, 강도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성토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 일부는 강도를 당한 아이가 혼자 다닌게 잘못이라는 둥, 힘을 기르지 않아 약한게 잘못이라는 둥, 도저히 두 눈 뜨고 읽어주지 못할 글이 중간중간 적혀 있었다.



"……이건 잊어버리기로 하죠."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저, 진정하세요. 진정. 애초에 인터넷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가끔은 저런 이상한 사람들이 섞이기도 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못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내버려 둔단 말이냐!


아무리 우리 밤의 일족이 남의 피를 마시고 사는 존재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아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나……."



나는 한동안 화가 풀리지 않아서 세간의 도덕성에 대해 성토하는 말을 했고, 한시간 내내 권속은 내 얘기를 들어주며 나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조금 미안한 짓을 한듯 해서, 진정되고 나서 그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그 아이는 '딱히 저는 상관없지만, 인터넷에서 종종 보이는 이상한 사람들은 주의해주세요.'라며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그리고 그 날의 일은 일종의 헤프닝으로 잊어버렸다.


.

.

.


그 뒤로도 나는 권속에게 종종 컴퓨터에 대해 조금씩 배우며, 그것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그래서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이따끔 그 아이가 일을 하지 않고 있을때, 또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을 고르는 중에 혼자서 조금씩 컴퓨터를 만져 보았다.


컴퓨터를 만진다고 해도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것은 아니었고, 권속 아이가 만들어둔 서류를 따라서 만드는 연습을 한다던게 대다수였고, 그러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면 가끔 인터넷을 켜서 새 소식을 찾아보는 그런 정도였다.


인터넷은 정보의 보고라는 이명이 헛되지 않게, 정말로 많은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다.


비록 그 중 일부는 확실히 이상하고, 잘못된 정보가 있긴 했지만, 내 좁은 식견으로도 그것을 잘 구별하는 것이 이 기능을 사용하는 기술의 핵심이란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몇 주에 걸쳐서 천천히, 포털 사이트를 떠나 다양한 웹 사이트를 돌아다녀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포털 사이트는 아니지만, 여러가지 재미있는 글이 많이 올라오는 한 사이트에 안착을 했다.


비록 여전히 인터넷 뉴스를 읽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늘 좋은 소식이 올라오는것도 아니었고, 조금 빠르다고는 해도 나중에 TV로 확인할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굳이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글을 읽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대신, 새로운 사이트에서 더 재밌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장난이 지나친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는 유쾌하고 재밌는 농담을 했으며, 어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온갖 기발한 생각을 줄곧 해냈다.


나는 그런 젊은 사람들의, 젊은 힘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내 권속은 내가 새로운 것을 찾아 책 밖의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 흐뭇하게 느껴졌는지, 집무실 밖에서 컴퓨터에 몰두하는 나를 흥미롭게 들여다보곤 했다.


.

.

.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어코 '그 것'과 마주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댓글? 이라고 불리는 짧은 마디에 불과했지만, 어쩌면 내 삶을 크게 바꿀수도 있는 한 마디였을지도 모른다.


그 덧글은 한 유머글 아래에 적혔는데, 그 기발한 유머를 읽고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던 내 미소를 단번에 앗아가버리기에 충분한 한 마디였다.



'이거 ◎◎에서 퍼왔네ㅋㅋ하여간 욕은 욕대로 하면서 지들 스스로 뭔가 만들 생각은 없고....수준봐라~'



물론 그 아래로 사이트 이용자들의 욕설이 줄줄히 달린 뒤에, 얼마 뒤 그 댓글은 삭제되었지만, 그 상대의 인품을 의심하면서도 ◎◎라는 이름만은 마음속에 깊게 박혀 남았다.


'대체 ◎◎가 뭐길래?'


나는 호기심에 ◎◎라는 곳을 찾아 들어가보았다.


내가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했던, 그 기발한 유머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그 곳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

.

.




언제부터인가 나는 낮도 밤도 모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아니, 그게 누군가 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가면무도회처럼 똑같은 이름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그들은 다른 사람인것 같기도, 아닌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잠에 든게 언제였더라? 삼일 전? 저번 주말?


비록 밤의 일족의 수면은 인간의 수면과는 달라서 며칠 자지 않는다고 해서 몸에 무리가 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에 반해 정신적인 영향이 상당히 오는 편이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잠을 자는것이, 인간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좀처럼 여기서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글이 모여있는것도 아니고, 이 사이트가 무슨 재미가 있는거지? 하는 생각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잘 아는 책의 이야기가 나와서 한 마디 이야기를 남겼다가 시비가 걸렸다.


'~~드립도 모르면서 ◎질 왜함?' '뉴비 주제에 닥눈삼 안함?' '이새끼 전형적인 ~~충임 내가 봄'


그들은 '그 말도 안되는 주장이 유명한 농담'이라는 어쩐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내게 시비를 걸어댔고, 나는 그것에 일일히 대꾸하느라 진땀을 뺐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들에게는 일부러 농담 삼아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는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나를 놀리기 위해 더욱 주장의 허무맹랑한 정도를 심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챘을때는 이미, 나는 그 곳의 공공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머릿수와 인터넷 경험을 통한 온갖 기술을 동원해서 나를 농락했다.


그렇지만 나는 컴퓨터를 배우는 것에 진지하게 임했듯이, 그들의 문화를 익히는 것 또한 진지하게 임했고, 곧 그들의 노하우를 순식간에 익힌 뒤에 그들을 압도했다.


비록 나는 혼자였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VPN이라는 복잡한 기술과, 닉네임 바꾸기, 말투 바꾸기 등의 기술을 습득한 뒤에는,


밤의 귀족으로 몇백년간 살아오면서 한껏 길러온 복잡한 정치 기술, 더군더나 잠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강인한 육체를 통해 그들의 공간의 마비시켰으며, 그러던 중 어쩐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기묘한 희열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또 다른 각성이었다.


그리고 내가 조금만 더 한다면, 지금 나를 핍박하던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 곳의 문화를 내가 바라는대로 바꿀 수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신세계로 발을 내딛으려던 내 눈앞에서, 순간 그 세계가 없어졌다.


내 손등 위를 따끔하게 비추는 불빛을 느끼며, 나는 어느 새 암막 커튼 사이로 아침의 불빛이 들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권속이, 동생과 동생의 권속을 대동하고 내 앞에 서있었다.


나는 밤의 일족 특유의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도, 이들이 내 곁에 오는것을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생 일행, 그리고 권속이 어쩐지 걱정 가득해 보이는 얼굴로 내 컴퓨터의 화면을 덮어버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주인님, 마지막으로 주무신 게 언제인가요?"


"언제……였더라?"



떠올리려고 애써 보았지만, 좀처럼 기억에 없었다.


분명 컴퓨터에 표시가 되긴 했지만, 이 기계는 내가 언제 기게를 켰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뭐, 아무래도 좋아. 이번 일만 마무리 하고 자지 뭐."


"그게 언제인데요?"



다시 인터넷으로 돌아가기 위해 화면을 들어올리던 손을, 권속 아이가 그 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손으로 차갑게 제지하면서 말했다.


이때의 나는 어쩐지 조금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잘은 몰라. 하지만 곧 끝나."


"주인님, 지금의 주인님은 조금 이상하세요."


"언니, 완전히 주화입마에 빠진거 같은데?"


"둘째 주인님은 아마 막 인터넷에 맛들린것 같네요. 저도 그 마음 이해하는――"



동생의 권속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내 권속이 이제껏 없을 정도로 서슬퍼런 도끼눈으로 그 아이를 노려보았고, 평상시에는 잘도 반발하던 그 녀석은 어째선지 그 눈빛에 압도되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권속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주인님은 당분간, 아니 잠시 만이라도 컴퓨터랑 떨어지셔야 할 것 같아요."


"뭐라?"


"주인님께서 컴퓨터 하시느라 제 일이 밀려있기도 하고, 지금의 주인님은 너무 심하세요."


"뭐가 말이냐……."



그 건방진 권속은 내 손에서 컴퓨터를 아예 뺏아서 품에 안았다.


나는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컴퓨터는 나의 것이다. 너도 나의 것이고. 대체 무슨 권리로 네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는 말이냐?"



권속은 내 눈빛을 보고도 주눅들지도 않고 한숨을 푹 쉬었다.



"주인님, 머리 좀 식히고 오세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난 너보다 더 오래 살았다! 내가 너보다 마음을 잘 못 다스릴 것 같으냐?"


"주인님."


"…….그, 그만해. 언니 화났어."


"……."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려무나. 그 건방진 놈들한테, 조금만 더 하면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느니라."


"주인님."


"먼저 잘못을 한건 그 놈들이다! 그 미천한 것들이 감히 내게 욕을 보였단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수백년을 살아온 나를! 고작 몇십년도 채 되지 않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들이!"


"주인님."


"그, 그만……."


"아, 아……."


"아까도 말했다만, 너도, 그 컴퓨터도 내 것이다. 전부 내 것에 불과한 것인데 어째서 내 의사를 거스르려는 것이냐!"


"주인님."


"나는 오래된 밤의 귀족이며, 오랜 세월에 걸쳐 인정받은 이 땅의 적법한 주인이며, 너 같은 햇병아리에 비하면 몇백년에 걸쳐 살아온 한참 멀고 높은 어르신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 감히, 어째서 너 조차 내게 모질게 굴려는 것이냐?"


"주인님, 당분간 가져가겠습니다. 주인님께 인터넷을 알려드린 일, 조금 후회하고 있어요."



내 권속은 컴퓨터를 안은 채 그대로 내게서 등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없다! 내 힘이면 너같은 보잘것 없는 권속은 손가락만 비틀어도 끝장내 버릴수 있다! 그런데 너 따위가 감히 나를 이렇게 욕보이느냐!


권속이라는 것이 나를 이리도 괴롭힐 수 있단 말이냐! 너 같은걸 어찌 권속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그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흘겨보았다.


그 눈빛은 이제껏 그 아이가 하지 않았던 분노의 눈빛이었다.


그 아이도 처음이었겠지만 나 또한 그렇게까지 화가 난 그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아이는 다시 자신의 길을 향했다.


방금 그 아이의 분노에 찬 눈빛에, 잠시나마 내가 압도되었다는 한심한 사실이 더욱 내 화를 돋우었다.


나는 분노에 가득차서 권능을 해방했다.



"아악! 네가, 아니 누구도 나를 이렇게 핍박할 수는 없다! 이 성역의 모든 것은 내 것이다! 모든걸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그 망할 버러지 녀석들 따위가! 너 따위가! 너 따위가! 크아아아악!"



시야 구석에서 호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동생이 자신의 권속을 품에 안고 집무실을 도망쳐 나가는 꼴을 보았다.


나는 그런 사소한 행동조차, 눈 앞의 모든것이 화를 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머리 한 구석에서 냉정하게, 잠이 부족했던 것이 영혼의 불균형을 가져와서 분노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냉정한 분석이 무색하게도 나는 한동안 집무실에서 난동을 피우며 기재들을 때려부쉈다.


그때마다 하인들이 와서 망가진 기재들을 치우러 들어왔고, 그들은 용케도 내 분노에 휘말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거의 하루 동안 화를 낸 뒤에, 나는 가슴 깊숙한 곳에 원인 모를 슬픔이 차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을 가득 메운 슬픔을 끌어안고,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돌아가 관을 열고 몸을 뉘였다.


.

.

.


얼마나 잤을까,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벽에 걸어둔 달력을 보니, 나 대신 하인들이 관리를 해주었는지, 마지막으로 세었을 때에 비해서 날짜가 많이 넘어가 있었다.


이 정도나 시간이 흘렀다고? 하는 놀라움 뒤에는 끔찍한 부끄러움과 슬픔이 뒤따랐다.


그 부끄러움이란 별것도 아닌, 나에 비하면 한참 어린 아이들의 철 없는 소리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심으로 분노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고,


슬픔이란 그런 하잘것 없는 분노에 휩싸여서 내 소중한 권속에게 심한 말을 하고, 상처를 입혀버린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어쩌면 평생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리 밤의 일족의 수명은, 주변 환경이 허락하는 한 거의 무한대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렇게 긴 수명을 살면서도, 우리는 종종 인간 이상으로 옹졸해지기도 한다.


별거 아닌 원한을 수천년 품고 증오하는 이도 있을진대, 그때 자신이 분노에 차서 두서없이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본다면 어떤 식으로 생각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다급하게 방을 나와서 그 아이를 찾았다.


나의 조금 이상하지만 사랑스러운 권속은 이제는 엉망이 된 집무실에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의 방에 있지도 않았다.


나는 점점 조급해져서 온 복도를 뛰어다니다, 급기아 공중에 떠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참을 날아다니던 중, '스승'과 마주했다.


지나치려던 중, 스승은 절그럭 소리를 내며 팔을 들어 독서실을 가리켰고, 나는 마음 속으로 그가 내가 찾던 것을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그 곳으로 향했다.


독서실 창가 자리에, 창가를 통해 져가는 석양을 등지고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는 그 아이가 있었다.


막상 마주하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권속 아이도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내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지 어떤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만에 간신히 입을 열어, 모기만한 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저, 저번에는 심한 말 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마음이 점점 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화내버려서 정말 미안해."



역시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는지, 그 아이는 컴퓨터를 돌리더니, 의자를 움직여 아예 나를 등지고 앉았다.


그래도 내게는 용서를 구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나는 주인 된 체면도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아 용서를 구했다.


두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잠도 안자고 컴퓨터만 하다가 걱정 끼친 것, 정말 미안해. 걱정만 끼쳐놓고 화만 잔뜩 낸것도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제발 용서해줘. 네가 권속이든 뭐든, 넌 나한테 있어서 소중한 존재야. 너 없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그 말까지 마치고 나는 어린애처럼 주저앉아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상 무슨 말을 더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말을 그저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는,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스웨터로 한번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대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라도 깨달으셨으면 됐어요."



완전히 밀착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더욱 크게 울면서 그 아이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

.

.

.

.


간신히 현관의 문이 열리자마자, 동생 뱀파이어는 벌벌 떨면서 권속과 함께 소파에 앉아 몸을 진정시켰다.


눈치 채고 보면 눈 앞의 소파에 앉아있던 맏언니는 그런 그녀를 말 없이 노려다보고 있었다.



"난 분명 근처에서 서로 지켜주라고 했지, 그 아이의 성역에 기어들어가서 사냥꾼들이 일망타진하기 쉽게 만들라는 기억은 없었던것 같은데……그렇지 않니?"


"……몰라."


"뻔뻔하기는. 뭐, 좋아. 그래서 그 아름답고 귀엽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집에서 나만! 빼놓고! 둘이서! 둘이서만! 아주 그냥 꽁냥꽁냥 즐거운 자매의 시간을 보내놓고……무슨 낯으로 여기에 낯짝을 비추러 온거니?"


"둘째 언니, 화났어."



동생의 말에 종종 분노의 감정을 보이면서도 기품있는 모습을 유지한 채 찻잔을 기울이며 피를 즐기던 맏언니의 몸이 흠칫 떨렸다.



"……화 많이 났니?"


"엄청."


"……얼마나?"


"권능까지 쓰면서 온 집안을 박살냈어."


"……."



맏언니는 찻잔을 든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거 오래 갈거 같아?"


"아마도."


"……조만간 방문하려 했건만 미뤄야겠네. ……너도 당분간 쉬었다 가렴."


"……고마워."


"……."



두 자매와 한 권속은 그렇게 잠시동안 둘째 흡혈귀의 진노한 모습을 떠올리며 응접실에서 몸을 떨었다.


.

.

.

.

.


그 사건의 여파도 슬슬 잊혀져갈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여행을 갔던 동생 일행이 쥐도 새도 모르게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도없이 대체 어딜 간거냐? 요즘 같이 뒤숭숭한 때에."


"……."



동생은 어쩐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동생의 권속이 어쩐지 기쁜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저기, 둘째 주인님."


"왜 그러느냐."


"다시 한번만 그날처럼 화내주시면 안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나는 조금도 떠올리기 싫은 부끄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바람에 감정이 격양되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동생이 자신의 권속을 품에 안고 그대로 줄행랑 치면서 말했다.



"미안, 언니! 이녀석의무례는내가데려가서직접교육할테니제발한번만용서해줘어어어어어!"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필요는 없는데……."



나는 멋쩍은 느낌에 볼을 긁적였다.


그때 권속이 등 뒤로 다가와서 내 볼을 찔렀다.


내가 돌아보자 그 아이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컴퓨터 공부 다시 재개해보지 않으실래요?"



그 말에 나는 내면에서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한 두려움에 내장이 뒤집히는듯한 느낌을 받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 허억, 아, 아직은 무,무,무,무리이~"


"……그렇게까지 두려워 하실 필요는 없는데……."



-------------------------------------------------------------------------------------------------------


"됐다!"


집무실에서 컴퓨터를 확인하던 나는 들뜬 마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서, 응접실 소파에 누워 책에 열중하고 있는 권속에게 다가가, 그 아이의 늘어진 스웨터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저기, 부탁할 일이 있는데……."


"어떤 일이신가요? 애초에 어지간 해선 주인님 되시는 분의 일을 제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게……."



나는 난처해하면서도 내가 부탁하려는 일의 개요를 설명했고, 그 아이는 처음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정말, 난처한 부탁이긴 하네요."


"제발! 부탁이야!"



나는 이미 한 번 내던져 본 체면 두 번도 내던질 수 있겠다, 고개를 숙이면서 양 손을 싹싹 빌었다.


그 한심한 모습에 그 아이는 더욱 더 난색을 표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주인님의 일이잖아요? 그냥 본인이 가셔도 되는 것 아닌가요?"


"미안. 사람들한테 네 사진을 대신 보여줬어."


"아이고오……어째서 그런 짓을?"


"그게, 나 겉으로만 보면 어린애잖아? 이번 정모 주제가 '○○○○의 ○'인데 이런 어린애가 그 책을 읽는다고 하면 조금 말이 안되잖아?"


"하긴, 애당초 그 책은 애들이 읽을 건 아니긴 하네요."


"그렇지?"


"그런데, 그러면 그냥 그 모임에 안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건 안돼……. 그렇게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은 처음 봤단 말이야."



그 말대로였다. 한동안 인터넷을 멀리하던 나였지만, 역시 한번 맛본 세상을 계속해서 피해다니며 살 수는 없었다.


조금씩 슬금슬금 인터넷을 다시 시작한 나는,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얌전한 사람들이 모인 독서 소모임에 안착했다.


그 사람들은 이제껏 인터넷에서 봐온 사람들과 다르게 말씨도 점잖았으며, 마음도 잘 맞았다.


특히, 그 모임의 장을 맡고 있는 BlackRose119 라는 사람은 더할나위 없이 훌륭했다.


내가 재밌게 읽은 대부분의 책을 알고 있을 뿐더러, 내가 읽어보지 못한 온갖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주기 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모임의 조율도 사려깊게 하는데다, 넓은 아량까지 갖춘 인품조차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하아~ 그래요. 만약 제가 그 모임에 나간다고 쳐요."


"아싸!"


"아싸! 가 아니에요……. 제가 주인님 행세를 한다고 하면, 주인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그야……."



그냥 BlackRose119라는 사람이 만나보고 싶었을 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기에, 난 그대로 잠시 굳어버렸다.



"……딸인척 하면 되지 않을까?"


"주인님……?"



어이없는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권속을 나는 필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나 겉에만 어린아이인거 아니다? 실제로 어린아이인 척도 누구보다 잘하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던건 주인님이실건데, 이야기가 안 통하면 어쩌시려구요?"


"무슨 얘기를 할지는 내가 미리 알려줄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요?"


"……그 때는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볼게."


"하아……생각해 볼게요."


"정말 안될까?"



다급해진 나는 내 '어린아이'스킬도 보여줄 겸, 그 아이에게 팔짱을 끼고 '비장의 표정'을 지어보았다.


물론 억지 눈물까지 그렁그렁하게 짜 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 억지스럽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하으윽!"


"안돼?"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


"안, 돼?"



그 아이에게는 나도 놀랄 정도로 너무나도 잘 먹혀들어갔다.


승리를 직감한 나는 내 작은 가슴에 끼인 그 아이의 팔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심장 박동에 맞춰 움찔거리는 그 아이의 팔을, 품에서 이리 저리 굴려보았다.


팔에 닿는 가슴의 면적이 바뀔때마다 그 아이는 재밌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틀었다.



"핫, 아윽, 헤으윽, 앗! 알겠어요, 알았다구요! 이제 좀 놓아주세요!"


"아싸!"


"아싸가 아니라……."



그때 우리 사이에 어느샌가 나타난 동생이 나타나 끼어들었다.


동생은 내 권속의 치마를 잡아당기면서 볼을 부풀렸다.



"나도 낄래."


"……험, 험. 너 책에 별로 관심 없지 않느냐? 독서 모임인데 괜찮겠느냐?"


"그런거 잘 몰라. 나도 따라갈래."


"……."



거기다 어느 틈에 동생의 권속까지 그 뒤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서는 한층 더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저 젖탱이만 커다란 지지배가 또 주인님을 홀려가지곤……."


"나도, 따라 갈래. 그 ○○○○의 뭐시긴가 하는것만 읽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주, 주인님, 이 상황, 도대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만 놓고 둘이서 데이트 하려고!"


"슨브늼(선배님). 스승으는 그르드 으츠른그 읏즈 은습느까(세상에는 그래도 이치란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모임에 참가할 생각으로만 머리가 가득차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까 대신, 저 아이들이 따라온다면 어떻게 포장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