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1화

2화

3화


지민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는 리트빙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사실 지금처럼 이상한 것을 먹여서 마음을 변질시키는 것도 각오하고 있기는 했다. 상대의 마음을 읽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리트빙이나 카트나 같은 사람들이라면 굳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약 같은 것에 손을 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보다 쉽고 정밀하게 마음을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새로 얻은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리트빙이라면 언젠가는 이럴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니가 그 생각을 하게 만들었잖아?”

“그래, 이렇게라도 안 하면 맨날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것 같으니까 그렇지!”

“잘 아네.”


지민은 약기운에 취해 흐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리트빙에게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리트빙이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장난감 취급이라는 말이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저쪽의 뜻에 맞춰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예의 그 암울한 일상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이 낯선 곳에서 딱히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까닭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역시 저쪽에서 이렇게 등을 밀어주는데도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기는 조금 샘이 났다.


“그럼 지금부터는 내가 뭘 해도 아무 상관 없는 거지?”

“글쎄…”


리트빙도 지금처럼 지민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상황을 즐기는지, 지민이 손가락으로 턱과 목을 쓰다듬고 있는데도 가만히 서서 지켜보며 웃을 뿐이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보니 언제든 자신이 다시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리트빙이 움직였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괜찮겠어? 모처럼 기회를 줬는데?”

“그 기회가 무슨 기회인지 어떻게 알고?”


말은 퉁명스럽게 던졌지만, 몸은 어느 새 다시 리트빙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이제는 지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리트빙이 마음으로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럽다는 생각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리트빙이 입에서 입으로 먹인 약의 효과가 벌써 온몸을 물들인 것 같았다.

아무튼 무의식 중에는 지금이 리트빙을 곯려줄, 혹은 유혹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은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긴 했기에, 그 행동에서는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찍어누를 기회일 수도 있잖아?”

“뭐 어때?”


리트빙도 지민이 꽤 즐기듯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음대로 하라며 씨익 웃었다. 지민은 그걸 보고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거리낄 것 없이 본능과 약기운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후회할 것 같진 않지만… 멈춰 달라고 안 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지민은 리트빙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리트빙의 목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어차피 대답을 듣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 듣고 마음에 새겨두라며 경고하듯 던진 말이었으니까.

그러자 리트빙도 분위기를 타며 지민에게 양팔을 뻗어 겨드랑이 아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니 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마주 보며 다가가게 되고, 그대로 둘의 코 끝이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으응…”

“하아…”


지민은 자신의 입에 입술로 다가온 리트빙을 향해 입을 살며시 벌려, 서늘하고 도톰한 맨살덩어리에 옅은 숨을 내쉬었다. 촉촉하고 따스한 공기가 리트빙의 가슴을 조금 달구었는지, 안쪽 팔이 천천히 지민의 등을 훑고 내려가는 촉감이 등골을 간지럽혔다. 지민도 지지 않고 한 손을 리트빙의 옷 안으로 집어넣어 맨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일단 하면 잘 하네?”


리트빙은 지민의 제법 과감한 행동에서 옅은 황홀감을 느끼며, 뺨을 스치듯이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흥. 그게 뭐?”


그 말을 들은 지민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짧게 내뱉었다. 그런 희롱에 일일이 말로 대응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을 것 같고, 몸으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지민은 왼손을 리트빙의 엉덩이 쪽으로 내리면서, 목의 옷깃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아 가슴 앞으로 움직였다. 웃옷에 달린 단추를 풀어 벗겨서 가슴을 드러낼 생각이었고, 리트빙도 거기에 호응하는 것처럼 어깨를 뒤로 젖혀서 지민이 손을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모든 게 너무나 잘 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지민에게는 더 거칠 게 없었다.


“아, 그래, 그렇게…”


단추 옆으로 지민의 손가락이 들어가며 둘의 살이 맞닿자, 리트빙이 달콤한 소리를 냈다. 리트빙네 종족이라면 소리로 혀를 간지럽히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신음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천천히 손을 내려, 지민의 바지 속에서 둔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단추를 푸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고, 리트빙의 이성이 허물어지는 것은 그보다도 더 쉬웠다.


“저, 이쪽도.”

“응?”


리트빙은 왼손을 지민의 허리를 따라 움직여 앞쪽으로 향했다. 그 손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기에, 그 대목에서는 지민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 거기는!”

“왜, 아직도 부끄러워? 벌써 여기까지 와 놓고?”

“그렇긴 한데…”


지민이 말을 더 꺼내기 직전, 리트빙의 입술이 다시 지민의 말문을 막았다.


“으, 응읍…”


지민의 배꼽 아래에서 한 번, 그리고 뒤이어 리트빙의 허리 앞에서 한 번, 단추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리트빙의 발 아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마도 이런 잔재주로 지민을 놀래키고 싶어서 일부러 애매하게 말한 것 같았다.

그렇게 지민이 흠칫 놀라서 정신이 흐려진 틈을 놓치지 않고, 리트빙의 오른손이 지민의 가슴을 향해 올라왔다.


“으읏!”


지민은 침대 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황홀경에 젖은 채 웃옷을 벗어 내던지는 리트빙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짧은 가죽 속옷을 위아래로 걸친 리트빙은 생각을 잊게 만들 정도로 농염하기 그지없어서, 군침이 저절로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마음에 들어?”

“어, 응…”


리트빙은 왼손을 지민의 앞으로 내밀어, 어정쩡한 모양으로 굽은 다리 사이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손목을 조금만 움직여도 허벅지에 닿는 위치라 평소였다면 뭐 하냐는 볼멘소리가 나왔겠지만, 지민이나 리트빙이나 몸도 마음도 한계까지 달아오른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지민은 리트빙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옷을 밀어올리며 가슴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도 빙긋 웃기만 했다. 여차하면 자신도 리트빙에게 ‘심한 짓’을 저지를 생각이라, 리트빙이 먼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리트빙이 지민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가슴을 쓰다듬는 사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으읏.”

“좋아?”


리트빙은 지민이 가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이 등을 떠민 꼴이라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지만, 설마 벌써부터 아래쪽에 손을 집어넣고 헤집기 시작할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만 가볍게 놀랐을 뿐 야릇한 상황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기에, 리트빙도 자연스레 공세를 취했다. 지민의 옷 안으로 손을 밀어넣고, 도톰하게 여문 가슴을 손가락으로 감싸며 손톱 끝에 꼭지를 걸쳤다.


“앗.”

“좋은가 보네?”

“당신만 하겠어?”


지민은 씨익 웃은 뒤 왼손을 들어 리트빙의 등을 끌어안고 천천히 누우면서, 귀에 입술을 대고 가볍게 속삭였다. 두 사람의 가슴이 리트빙의 손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누르면서, 둘의 감정을 한계 직전까지 몰아붙인 것은 덤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끝까지 보내줄래?”


그 물음에 말로 답할 필요는 없었다. 리트빙은 곧바로 지민의 입에 입술을 포개면서, 그간 침대 위에서만 머무르며 몸통과 이성을 지탱하는 왼손을 지민의 샅에 얹고 손가락을 굽혔다. 그것만으로도 지민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한 번 기세를 되찾은 리트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같은 짓을 지민이 먼저 시작했기에, 먼저 그만둘 이유도 없었다.


“하아…”

“흐응…”


이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과 은밀한 감정을 탐하며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땀과 열기에 젖어 가는 옷가지는 하나둘 벗어 내던지고, 촉촉한 모습이 드러난 살결은 손가락과 혀로 문지를 때마다 서로에게 쾌감을 안겼다.

입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가슴을 입에 물거나, 경련을 일으키며 허벅지로 상대의 팔목을 조이기도 하고, 손가락을 앞뒤로 벌려 은밀한 부분의 위아래를 동시에 간지럽히는 일도 있었다. 지민도 리트빙도 이렇게 아찔한 일까지 벌이는 스스로에게 조금 당혹감을 느꼈지만, 이미 절정에 다다른 애욕과 쾌감이 그런 걱정을 모조리 씻어내버렸다.


“아, 아아아아!”

“하아……아아!”


그렇게 다다른 절정의 끝에서, 두 사람은 천천히 의식의 끈을 놓고 깊은 고요 속으로 잠겨 갔다.


-


“즐거웠나 보네?”


차가운 목소리가 지민의 귀를 간지럽혔다.


“어…”


바람이 불어올 공간이 있을 리 없는 방인데도, 어딘가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지민의 눈을 띄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지민의 눈앞에는 예의 그 금발의 여장부가 서 있었다.


“문을…”

“어찌나 신이 났던지, 잠그는 걸 잊었더군.”


카트나의 목소리를 듣자, 지민의 얼굴은 찬바람도 잊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제 리트빙이 입에서 입으로 건넨 약을 들이마신 다음 분위기에 휩쓸려 저지른 일이 그대로 떠오른 것이었다.


“아, 아아아…”

“자책할 거 없다. 리트빙도 이렇게 되길 학수고대하고 있었거든.”

“그, 그럼…”

“아, 그리고…”


지민은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이불을 들어 몸을 가렸다. 하필 카트나도 다음 말을 꺼내기 시작하며 얼굴을 살며시 붉히기 시작한 것이 지민에게 불안감을 준 탓이었다.

하지만 카트나는 지민의 감정을 금방 이해하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 난 당신한테는 별로 특별한 감정이 없어서 말이야. 아무튼, 일단 옷부터 입겠나?”

“에?”

“리트빙하고 당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다른 부관하고도 말을 맞춰야 하거든.”

“그, 말을 맞춘다는 건…”


카트나는 지민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슬슬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빙긋 웃었다.


“언제까지고 전리품 같은 불쌍한 신세로 둘 수는 없잖아. 적어도 동거인 정도는 되어야 떳떳하게 생활할 수 있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