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쪽 책은 냄비 받침으로 잘 쓰고 있어요! 








크기는 다소 작지만, 아늑한 느낌이 드는 투룸의 간이 거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두 여자가 좌식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전반적으로 아늑한 느낌이 드는 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거실만은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듯했다. 




아니, 정확하겐 탁자 중간을 기점으로 한쪽 편만 뿜어내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 분위기의 출처는 비운의 여대생 한우리. 


축 처져있는 어깨, 내키지 않는 듯이 쭈글거리는 표정,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누가 봐도 이 자리를 원치 않아 기분이 땅속까지 파고들어 가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주 앉아 있는 여자는 정반대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앞서 말한 쪽이 추운 겨울이라면, 이쪽은 따스한 봄. 밝은 기운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텐션이면 먼저 말문을 열어주었으면 좋겠건만. 


헤실헤실 웃는 표정으로 상대가 먼저 물꼬를 트길 기다려 주고 있다. 

아마도 먼저 얘기를 꺼낸 우리가 말을 이어 나가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녀 나름의 배려겠지. 




안 그래도 되는데. 


결국 냉탕과 온탕이 뒤섞여 있는 이 숨 막히는 공기를 참지 못한 우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저 먼저 할게요." 


근데 뭐라고 말하지. 통성명이라곤 했지만 이미 이름은 서로 알고 있지 않나. 

그거 말곤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는데. 


아.. 어색하다 어색해. 




이렇게 앉아 있으니 우리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아무도 말 걸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좋은데. 


그저 어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였다. 




"저는 한우리. 스물다섯이고, ㄱ대 천문학과 다니고 있어요." 




깔끔하다. 이 정도면 훌륭한 자기소개지. 

그렇게 우리가 자찬을 하며 반응을 기다리고 있자 

눈앞의 상대는 잠깐 동안 말이 없다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ㅎㅎ 천문학과 다니고 계시는구나. 저도 ㄱ대 나왔는데!" 




아무래도 우리의 말이 끝난 줄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데 저거 말고 할 말이 뭐가 더 있다고. 




우리가 그녀가 멈칫했던 이유를 곱씹어 보고 있는 사이, 

은하는 우리가 입고 있는 과잠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xx학번이신 거죠? 전 xo학번인데! 제가 두 학번 선배네요ㅎㅎ" 




..설마 학교 선배였을 줄이야. 그래도 xo학번이면 웬만하면 졸업을 했을 시기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마터면 학교에서까지 마주칠 뻔했다며, 우리는 마음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 이은하에요! 스물여섯이고, ㄱ대 문예창작과 졸업했어요." 


"아.." 




'문예창작과구나. 

하긴, 작가라고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가 이제 슬 집 구조나 생활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화제를 넘어가 

대화를 빨리 끝내려고 할 때. 




"지금은 2년 차 소설가고, 주로 다루는 장르는 sf랑 로맨스 쪽이에요! 

필명은 미리내고, 데뷔작은 <은하수 전화번호부>인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엑. 




'끝난 거 아니었어..?' 




예기치 못한 진행 방향에 당황해버린 우리. 


그런데 데뷔작이 <은하수 전화번호부>였구나. 

예전에 한 번 읽어본 기억이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때도 서현이 억지로 읽어보라고 해서 읽었었다. 




"어.. 네.. 예전에 한 번.." 


"아ㅎㅎ 아시는구나! 뭔가 쑥스럽네요. 

아, 제일 인기 있었던 작품은 <두 개의 세계에서>인데 이건 또 매출 10만 부를 찍어서-" 




뭐야, 그거 10만 부나 찍었어? 




왜? 




순간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별로 묻고 싶진 않았다. 

그야 그런 얘기를 했다간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 진 뻔했으니까. 


우리는 그저 이 힘겨운 대화 자리에서 빨리 떠나 돌아가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대화 자체는 은하가 혼자 다 하고 있었지만. 




뭐, 어찌 되었든 그렇게 우리가 대화를 끊을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 


앞에 계신 작가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완전히 시동이 걸려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다시 신작 준비 중이에요. 아, 그리고 일 외적으로는 어떤 걸 좋아하냐면, 산책, 영화 보기, 음악 듣기, 요리하기랑.. 요샌 그림도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글 쓰는 것도 취미예요!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해서, 하하.. 근데 생각보다 책 읽는 건 별로 안 좋아하긴 하네요.. 작가인데 좀 웃기죠? 좋아하는 장르는 한 번씩 읽는 편인데, 손이 잘 안 가긴 하더라구요. 전 역시 읽는 거 보단 쓰는 게 훨씬 좋은 거 같아요. 아, 근데 또 영화 보는 건 좋아하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영상이니까 훨씬 더 흥미진진해진다고 할까.. 우리 씨는 영화 장르 어떤 거 좋아하세요? 저는 크게 가리는 건 없긴 한데, 잔인한 건 좀 못 보는 편이에요. 고어물 같은 거.. 공포 영화는 그럭저럭 재밌게 보는 편이구요. 무섭긴 하지만.. 좋아하는 장르는 sf랑 역사물 쪽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개봉했던 신작들 중에 <난세의 왕자들>이란 작품이 있는데, 이게 인기는 좀 없었지만 완성도랑 깊이가 엄청 좋았거든요. 혹시 이쪽 장르 좋아하시면 보는 거 추천드릴게요! 진짜 재밌어요!" 




"어.. 아.. 전 영화 잘 안 봐서.." 




위험하다. 

여기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간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사람의 시시콜콜한 영화 감상평까지 듣고 있어야 할 참이었다. 




사실 우리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고 방금 들은 <난세의 왕자들>도 물론 극장에 가서 두 번이나 본 영화였지만. 

굳이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지금 얘기를 꺼냈다간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이 조금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으니. 


그런데. 




'아니, 뭐 이리 말이 많은 거야.. 그보다, 처음 만난 사람하고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나?' 




"아하.. 그건 좀 아쉽네요. 취미 맞으면 좋을 거 같은데-." 




안 맞아서 다행이에요..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우리였다. 

뭔가 몸속에 있는 에너지가 쭉쭉 빠져나가고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이게 소위 말하는 기가 빨린다는 느낌인가? 




그래도, 이제 끝난 거겠지..? 


"아, 혹시 우리 씨는 룸메이트 있었던 적 있으세요?" 




우리의 기가 빠져나가서 모조리 은하에게 들어가고 있는 건지, 

그녀는 더욱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같이 지내는 건 처음이거든요! 조금 걱정되는 부분들도 있긴 하지만 꽤 재밌을 거 같아요. 우리 씨 착한 분이신 거 같고..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짐이 많아서 어떻게 내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덕분에 살았어요ㅎㅎ 방도 이렇게 내어주시고. 그럼 저희 이제 당분간 같이 지내는 거 맞죠?? 사실 대학교 다닐 때 룸메이트 구해서 같이 자취해 보는 게 로망이긴 했는데, 어떻게 소원성취하게 되었네요. 헤헤. 그래서 계속 좀 들떠있는 거 같기도 하고, 기대가 많이 되네요. 해보고 싶은 거 많았거든요- 아, 별 건 아니고, 밥 같이 해서 먹는다든지, 영화 같이 보면서 맥주 마시고 뭐 그런 거요. ㅎㅎ.." 


...... 




"아.. 저도 룸메이트는 처음이에요.." 




말 엄청 많은 사람이네.. 

우리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쉬러 가고 싶었다. 




'휴..' 


그래도 이 정도까지면 아직 용인할 수 있을 만한 단계긴 한데. 


풍문으로지만 워낙 룸메이트들 간의 불화설을 많이 들어보았기에, 

은하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상황 중 나쁜 편에 속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녀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편일 것이다. 


붙임성이 너무 과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착한 사람 같고. 

취향이랑 성격이야 어떻든 같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지킬 것들만 지켜주면 되니까. 


물론 이상한(?) 책을 쓰는 사람이긴 하지만. 




'근데, 설마 아까 말한 버킷?리스트, 그거 나랑 다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역시 어느 정도 지켜볼 필요는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몸을 뒤로 빼고는 경계하듯이 은하를 살짝 노려보았다. 

귀찮은 건 영 질색이니까. 거리를 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고양이 같았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의미심장한 반응에 은하도 살짝 주춤한 모양이었다.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멋쩍은 듯이 웃으며 다음 화제를 던졌다. 




"저희 그럼 서로 호칭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제가 연상이긴 한데,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음.. 그렇네. 우리는 서로 누구누구 씨라고 불러도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저쪽은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친근한 느낌이 좋은 거겠지. 


그럼 선택지가 몇 개 있긴 한데.. 




"저.. 그럼 작가님으로.."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선택지를 골랐다. 

가장 우리다운 선택. 어차피 오래 볼 사이가 아닐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몇 달만 같이 지내기로 한 거니까. 그 뒤로는 볼 일이 없을 터였다. 




"아.. 작가님.." 


그런 우리의 대답에 은하는 왠지 모르게 살짝 실망한 느낌. 

하지만 이내 웃으며 "그럼 전 우리 씨라고 부를게요!"라고 활기를 되찾았다. 


혹시 내심 언니 소리를 듣는 걸 바라고 있었던 걸까? 




뭐, 본인이 편한 대로 불러달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이 호칭이 제일 편해 보였다. 


그보단 드디어 고대하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 보였기에, 

우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이제 생활 관련한 것들 알려드릴게요." 


간단한 것들만 가르쳐주고 얼른 쉬러 가야지. 




고대하던 휴식 시간이다. 













***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집 구조만 설명드릴게요." 




은하가 찾아온 지도 이제 벌써 한시간 가량이 지났다. 


간단한 것들만 설명해 주겠다곤 했지만, 

꼼꼼한 우리 성격상 대충 하고 넘어가긴 힘들었기에 생각보다 말이 길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은하가 지내야 할 옆방을 치워줘야 했기에, 

둘이서 같이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다보니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옆방을 거의 쓰질 않고 짐만 조금 놔두고 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 구조야 뭐 금방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은하와 함께 방 앞의 간이 거실로 향했다. 




"TV 리모컨은 보통 여기 두고 있어요. 

저는 잘 안 보는 편이라 편하신 대로 사용하시면 될 거 같은데, 새벽 늦게만 신경 써 주세요. 

제가 밤귀기 좀 밝은 편이라.." 


"네!" 


"주방 쪽도 전 거의 안 써서-" 




그렇게 거실 설명을 간단히 끝내고 주방 쪽으로 향했을 때. 




"어!" 


은하가 전자레인지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본 순간, 

우리는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저게 왜 저기 있지. 




왜 저기에 있긴. 물론 자신이 거기에 갖다 놓았으니까. 




"제 책 갖고 계시네요?!" 


..나는, 바보, 멍청이다. 


우리는 은하가 기뻐하면서 책을 집어 드는 것을 막지 못하며, 

그녀가 그저 책의 뒷면을 뒤집어 보질 않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서현이 몇 달 전에 읽기 싫다는 걸 읽어보라며 끝끝내 던져두고 간 책, 

<두 개의 세계에서>. 




"알고 보니 막- 

제 열혈 팬이셨다든가?" 


잘 사용하고 있긴 했다. 




"싸인이라도 해드릴까-" 




냄비 받침으로. 


"요.." 




'..ㅎㅎ..' 




신나서 얘기하던 은하를 맞이한 건 

책 뒷면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냄비의 눌어붙은 자국과, 탄 자국, 

그리고 아마 라면 국물이었을 무언가. 




'X됐다..' 




툭. 




그리고. 




그것이 이성이 끊기는 소리인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하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