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작가님, 과학 시간에 주무셨어요? 








"휴.." 


어딘가의 사무실 안 책상. 

검은색 단발 웨이브펌의 여자가 휴대폰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르마를 탄 앞머리에, 세련된 느낌의 세미 정장. 


책상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서류뭉치와 양옆의 파티션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포스트잇들로 

커리어 우먼의 아우라를 물씬 풍기고 있는 그녀는, 우리의 외사촌 언니이자 은하의 담당 편집자, 

천서현이었다. 




회사에 갑작스레 터진 일들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와중에, 

데리고 있는 두 동생도 덩달아 말썽이었던 것. 




"둘이 괜히 붙여놨나.." 


사실 이번에 우리와 은하, 이 둘이 같이 살게 된 건 서현의 의도대로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은하의 집 계약이 꼬여버린 참에, 혹시 우리가 은하에게 자극제 역할이 되어주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붙여놓게 된 것. 


둘 다 서현이 가장 아끼는 동생들이기도 했고, 이번 기회에 둘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일과 관련된 얘기로 넘어가 보자면, 

회사에서, 특히 서현 개인적으로도 은하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꽤 컸다. 


데뷔 초창기부터 히트작만 뽑아내는 천재 작가. 


하지만 그녀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으니, 

그건 바로 sf를 주력으로 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과학 지식이 처참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은하에게 과학 공부를 시켜보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몇 번 있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공부를 정말로 하기 싫어한다는 것. 


그래서 정반대 스타일이자 공부 덕후인 우리랑 붙여놓으면 무언가 변환점이 되어주지 않을까 해서 

같이 지내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둘의 성격으로 보나 생활적인 부분으로 보나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만한 점들은 정말 많았으니까. 




하지만 서현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우리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똘끼 있는 캐릭터였다는 것. 




'설마 진짜로 냄비 받침으로 쓰고 있었을 줄이야..' 


우리의 집에 억지로 책을 놓고 갈 때, 

그녀가 당장 가져가지 않으면 냄비 받침으로 써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말은 왜 쓸데없이 잘 지키는 거냐고. 




'그나저나, 은하 걔 화나게 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서현은 근 2년가량 은하와 알고 지내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화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삐지는 건 자주 보긴 했지만서도. 




'대단하다, 한우리..!' 


역시 내 동생이다. 그 어려운 걸 또 해내다니. 




그런데 사실 이번에 우리와 은하의 갈등에 불을 붙인 건 서현의 역할도 컸다. 

은하의 푸념이 들려왔을 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 


이왕 충격받은 김에 확실하게 충격을 줘버려서 은하를 성장시킬 심산이었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역효과를 낳아버린 것 같았다. 




'좀 너무했나..?' 


하지만 은하에게는 이번 기회로 확실히 성장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기로였으니까. 


여기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껍데기를 깨고 나올 수 있느냐에 따라 

그녀의 작가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었다. 




그러다 서현은 문득 든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이러다 둘이 진짜 싸움 나는 거 아냐..?' 




그녀는 잠시 둘의 성격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조용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우리.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하는 소심한 평화주의자였다. 

표현을 잘 안 할 뿐이지 생각보다 마음씨도 깊고, 배려심도 있는 편. 

갈등이 있더라도 보통은 자기가 손해 보고 마는 성격. 




반대로 은하는 친화력이 흘러넘치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 


슈퍼 인싸 캐릭터로, 항상 사근사근하고 웃는 것이 특기인 착해빠진 성격. 

불만이 있어도 혼자서 삭히는 편이고, 또 금세 풀려서 어느새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싸울 수가 없는 조합인데. 


둘 다 싸움의 '싸' 자라곤 모르는 순둥이들이었다. 




'에이, 설마.' 


그냥 여느 때처럼 은하가 좀 삐진 정도겠지. 걔 삐지는 건 잘하니까. 


아마도 둘 다 각자 방에 처박혀서 꿍한 상태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잘 달래줘야겠다.. 


서현은 둘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야근으로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리고 오늘 이 일들을 다 끝내지 못한다면 내일도 분명 야근 지옥이 될 게 확실했다. 


화해는 내일 시켜줘야지. 




"그래, 별일 없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잠시 덮어놓았던 노트북으로 다시 손길을 옮겼다. 













*** 













삑삑삑- 




철컥. 




"하하- 얘들아, 너네 안 싸우지?" 


"-그러니까," 


갑자기 들려온 도어락 소리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둘의 상태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나 본지 결국 서현이 찾아오게 된 것.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런 서현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여기 이 설정은 지구 공동설을 채용했다는 건데, 사실 이게 전혀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이 가설은 당시엔 그럴듯하게 보였지만 계속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주축을 이루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반박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사장된 가설이에요. 따라서 이런 폐기된 가설을 채용한 것이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게 만들지 않았나 싶네요. sf라서 일부 설정들이 과학적 사실과 다른 건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겠지만, 메인이 되는 설정이 이 정도로 보편화된 과학 사실과 동떨어진 거라면 아무래도 몰입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죠." 




아까 대화할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텐션이 올라가 있는 우리는 

그렇게 속사포로 말을 쏟아낸 뒤 들고 있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또 어디가 문제냐면, 

여기 이 부분에서 이 캐릭터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고요. 또 거기서 두 줄 밑에 있는 이 대사도 방금 거랑 비슷한 상황인데, 이건-" 




그리고 그런 우리의 앞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는 은하. 


양 주먹을 꽉 쥐고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듣고 있긴 했지만, 

불만에 가득 차 부들거리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네, 잘 싸우네..' 


벌써 한바탕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심란한 마음에 괜히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지체 없이 달려온 서현이었지만, 

아무래도 한 발짝 늦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자신의 등장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서로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근데, 그래도 이건 소설이잖아요." 


결국 참다못해 한마디 하고 마는 은하. 


아까 자신이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조용히 우리의 말을 계속 들어주곤 있었지만,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소재가 그럴듯하고 재밌기만 하면 된 거 아녜요? 


지구 속이 비어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 


쿵- 


그리고 그녀의 발언은 의도치 않게도 우리에게는 장렬한 카운터 펀치로 들어가고 말았다.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의 우리.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어버버거리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은하에게 물어보았다. 




"저.. 작가님. 


혹시 과학 시간에 주무셨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은하가 발끈하고 말았다. 




"아., 아니! 말씀을 왜 그렇게 하세요!;" 


부정은 하지 못하고 움찔,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정곡을 찔렸나 보다. 




"그야.., 이건 엄청 상식적인 부분이니까요..;;" 


"..모를 수도 있죠!!" 




어지럽다는 듯한 인상을 지으며 대꾸하는 우리와 울컥해서 언성을 높이는 은하. 

둘 다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얘네 이제 진짜 안 되겠는데. 


결국 보다 못한 서현이 둘 사이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자, 자. 우선 둘 다 진정하고.." 


"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 




이건 또 둘이 죽이 잘 맞네. 


하지만 그래도 서현은 이제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적당히 해야지. 




결국 그녀는 둘을 바라보며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살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하라고." 













***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투룸의 간이 거실. 

거실에 놓인 작은 소파에 우리와 은하가 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래도 자기가 잘못했단 건 알고 있는지 쭈그러든 모습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은하는 완전히 심기가 상해버린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창틀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로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주시하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투닥거리고 난 뒤의 어린애들 같았다. 




그리고 그런 둘을 양손을 허리에 두고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서현. 


그래도 둘 다 아까 전과 비교해선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휴..' 


서현은 조용해진 거실에서 숨을 돌렸다. 

얘네를 어쩌면 좋을까. 




'..어라.'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얘네 잘하면 괜찮겠는데..?' 




서현이 알아차린 사실은 우리와 은하 둘 다 생각보다 그리 감정적으로만 말다툼을 하고 있진 않았다는 점. 


비록 나중에는 감정이 많이 격해지긴 했지만, 

따져보면 우리는 나름대로 논리에 입각해 자신이 느낀 바를 설명해 주고 있었고, 

은하도 나름대로 그런 우리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서현은 마음속으로 빙긋 웃으며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둘에게 얘기했다. 




"우리 넌 은하 과외 좀 해주고, 은하는 우리한테 좀 배워." 


"..?!!!" 




못 들을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우리와 은하. 

둘 다 극도로 싫다는 표정이었다. 




"뭐..?!" 


"갑자기 무슨..!" 




역시나했던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서현은 손바닥을 들면서 에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자, 들어봐." 


그녀는 먼저 은하를 가리켰다. 




"은하 너는 이참에 맨투맨으로 배워. 

과학지식 부족한 거 계속 느끼고 있었잖아. 


그리고 우리한테 계속 말하는 거 보니 어느 정도 얘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 아냐?" 


"윽.." 




그리고 다음은 우리. 




"우리 넌 대신 네가 예전부터 노래 부르던 망원경 사줄게. 


그리고 네가 신랄하게 깠으니 너한테도 책임 있는 거 알지?" 


"끙.." 




"됐지? 

내일부터 하는 거다. 검사할 거야." 


한 건 해결했다는 느낌으로 손바닥을 짝 치며 경쾌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서현. 




이러한 결정이 썩 못마땅한 우리와 은하였지만, 

딱히 틀린 말도 없었고,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결국 둘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ㅎㅎ..' 


이번 기회에 좀 친해졌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서현은 내친김에 둘의 손을 잡아끌어 

초등학생 둘을 화해시키듯이 억지로 악수를 시켰다. 




"자, 자. 악수. 

화해해-" 


그리고.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앞을 보니 우리와 은하가 마지못해 손을 잡은 채로, 

함께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 


아무래도 화살의 방향이 조금 바뀌었나 보다. 

공동의 적이 생기면 앙숙도 손을 잡는다더니. 




서현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억지로 맞잡게 한 둘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화.. 

화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