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15000자로 꽤 길어져서 미리 죄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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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성탄절을 시작해서.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는 날까지, 정확히 7일이자 일주일이라는 시간.


이 시간을 무한히 반복되어가면 어떨까?


누구는 좋다고 할지도 모르고, 누구는 끔찍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잘모르겠다.


그런 삶이...... 나의 인생이......


크리스마스 00시를 시작해서 새해 첫 00시에 끝난다는 게 만족스러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영원히 7일이라는 세월을 회귀하는 나의 나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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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어떠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그냥 집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고 일어나보니 캐롤송이 나를 반겨준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첫 회차 때는 이전에 내가 겪었던 일들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묘한 데자뷰을 느껴야만 했다.


2번째 회차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또 꿈이야?!"


혹시나해서 똑같이 행동해보니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 기억과 완벽하게 되풀이되는 날들 때문에 데자뷰을 확고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나마 조금씩 행동을 다르게 해봄으로서 데자뷰가 조금은 사라지긴 했다.


가령, 밥을 먹어할 시간에 안먹고 밖에 나간다던지, 게임을 할 시간에 잠을 잔다던지 그런 식으로 말이다.


시간이 달라지며 당연히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기억과 비슷한 일들은 번번히 일어났다.


3회차.


내가 일주일을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긴 하다만 어째서인지 실감이 나지 않으며 기쁘지도 않았다.


앞으로의 7일 동안 내가 뭔 짓을 하고 무엇을 남기더라도 내 몸은 7일 전으로 돌아와 있는다.


그나마 기억만큼은 온전한 상태로 온다는 게 다행이긴 하다만 그리 좋아할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똑같은 7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면...... 나름대로 고통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무튼 나의 본격적인 회귀 인생은 4번째 회차부터.


3회차에서 복권 번호를 미리 외워두고 평소에 얻고 싶었던 것도 생각해뒀다.


편법이기는 해도 살아 생전 로또 1등이라는 걸 해봤다는 것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100만 단위를 넘어본 적 없었던 나의 통장이 0으로 도배되어있는 숫자를 보며 뿌듯함을 느낀 나는 곧장 사치를 부려봤다.


여지껏 먹어본 적 없던 것들을 음미해봤으며 사진으로만 구경했던 것들을 직접 들고 다녀보았다.


앞으로 며칠 뒤면 사라질 예정이지만 그래도 사치로 인해 풍족해진 나의 마음은 남아있으니 만족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20회차까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다 해보면서 인생을 즐겼다.


21회차.


돈으로 해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해봤다고 자랑할 수 있다.


세계 일주는 당연히 끝냈고, 외제차도 잔뜩 뽑아봤고, 안 먹어본 음식은 비위 상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에는 사람 많은 번화가에서 지폐를 뿌리고 다녀보기도 했다.


즐겁기는 했지만 재력을 갖고 노는 건 이젠 질렸다.


다음은 뭘하며 지내야 이 무료함을 달랠 수 있을까?


"음......"


"진짜?"


"진짜라니까! 글쎄 내 남친이......!"


창 밖에서 여고생들의 수다 소리가 귀에 박혀들어온다.


이제까지 여러번 회귀하면서 들어왔던 그녀들의 목소리.


"그래, 다음은 여자다!"


돈으로 인생을 즐겨봤으니 이번에는 사랑으로 인생을 즐겨보고자 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존재하며 제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즉, 여성이라는 존재는 파고 파도 무궁무진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으니.......


"회귀하면서 온갖 여자들과 사귀어 보는 거야!"


세상 모든 여자들까지는 무리겠지만 가능한 많은 여자들과 사귀어보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아닌 진정한 연인과 풋풋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어라? 나 연인이 있었던가?


여러번 회귀하다보니 기억력 쪽에 문제가 생긴 걸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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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차.


사랑은 돈과 다르게 매우 까다로웠다.


어떤 여성들은 로또 1등으로 얻은 재력에 쉽게 넘어오는 한편, 어떤 여성은 재력이 얼마나 있든 간에 나를 거절하며 밀어냈다.


세상살이 쉽지 않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였다.


하지만 세상에 도전이 없으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법, 나는 재력에 쉽게 넘어오는 여자들보다 안넘어오는 여자들이 더 마음이 갔다.


성취감이라고 해야할까? 힘들게 고생해서 얻는 것이 더 보람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제대로 여성들을 공략해보자며 도전심을 불태웠다.


31회차.


역시 7일 가지곤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성을 공략할 순 없었다.


허나 나에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있다.


안된다면 여성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같은 정보들을 계속해서 모아 조금씩 공략해 나가면 된다.


32회차.


여성은 여전히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 회차들과는 다르게 내 고백을 오랜 시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능성이 보인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필코 이 여성을 내 여자로 만드리라!


33회차.


드디어 내 여자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지만 꽤 많은 시간이 소비되고 말았다.


이왕하는 거 시간 단축도 해봐야겠다, 그래야 새해가 오기 전에 더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


34회차.


이 여성에 관한 거라면 줄줄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외우게 되었다.


고백도 전회차보다 더 빨리 성공하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리 단단하던 철벽을 무너뜨리고 그녀를 손에 넣었는데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여성은 내가 바래왔던 짝이 아닌 것 같다.


남은 며칠 동안 이 좀 더 사랑을 나눠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여성을 찾아봐야할 것 같다.


53회차.


회귀를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성과 사귀고자 열심히 뛰고 있었다.


아리따운 청순계 여자, 지적인 문학 여성, 활발한 체육계 여성, 그 밖에도 이런저런 여성과 사귀어보며 그들만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꽝이네."


연말이 가까워지고 새해가 시작될 무렵, 나는 이번에 사귀고 있는 여성과 작별하며 영원히 마음 속에서 떠나보냈다.


딱히 그녀가 싫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게 과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다만 어딘가 부족했다, 다른 남자들이 부럽다며 우러러 볼 정도로 그녀는 매력적이었음에도 부족했다.


비유하자면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과 비슷하다.


"얼마나 더 해야 내 이상의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나......."


그러나 끝도 없이 회귀를 거듭해보아도 나는 이상의 여성을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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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100회차.


"이제 할 게 없구나"


사람에게 캐롤송을 100회 이상 틀어주면 없는 정신마저 나가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수도 없이 찍어왔던 로또 용지도 이젠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돈도 여성도 반복되는 인생에선 필요없다는 것을.


무료하다, 가슴이 텅텅 비어버리며 공허했다.


삶의 의지라고는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진짜?"


"진짜라니까! 글쎄 내 남친이......!"

 

"야! 내 집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말고 꺼져!"


"꺄악?! 뭐야 저 아저씨는!"


"어이없네!"


이런 식으로 여고생들을 내쫒아보기도 했지만 이 짓거리마저도 이젠 질렸다.


그러니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한다.


이 끔찍한 저주에서 살아가게 해줄 목표가.......


그렇게 새롭게 할만한 것을 찾기위해 나는 집에 틀어박혀 TV만 보게 되었고, 기념적인 100회차는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이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다음 뉴스입니다, 지난 24일, 여성을 무참히 난도질한 연쇄 살인범 김OO의 증언에 따르면 김OO씨의 배후에 OO그룹의 사장이 있는 걸로 알려져......]


빌어먹을 정도로 좋은 연말인 와중에도 TV 속의 범죄자들은 경찰에 구속되어 끌려갔다.


[다음 속보입니다! 지직!! 오후에... OO병원에서... 한 남성이... 투신자살... 지지직!!]


"뭐야, 고장났나?"


어차피 더 볼 것도 없었기에 나는 TV 전원을 꺼버리며 제자리에 누워 전에 봤던 뉴스를 떠올렸다.


"범죄인가......."


언젠가 들키게 될 거라 알면서도 왜 저리 범죄에 목 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쓸모 없어진 종이조가리를 얻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일탈을 함으로서 얻는 짜릿함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도 범죄를 저지르면 그들의 심정을 알아볼 수 있을까?


어차피 죄를 저질러도 나는 다시 7일 전으로 돌아오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범죄는 아니야! 이건 용납해선 안돼 !"


일순간 나의 사고가 미쳤음을 인정하며 미친 발상을 떨쳐냈다.


아무리 회귀로 인해 정신 상태가 미약해졌다고는 하나 범죄만큼은 이해해서는 안된다, 결코!


"하하, 다시 생각해보면 웃기네, 내가 이렇게 정의로웠던 사람이었나......."


나 자신도 누구인지 망각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101회차, TV로는 새로운 걸 찾을 수 없었으니 직접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없음.


그저 한없이 걷고 또 걷는 것이다.


주변을 보고 풍경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기를 빌었다.


"음...?"


내 의욕을 되찾아줄 목표는 어디를 봐도 나타나지 않아 지쳐갈 때즘.


나는 우연히 어느 병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병원이 있었던가?"


동네에 작은 병원은 있어도 이렇게 큰 대학 병원은 없었다.


없던 병원이 생겨난 것도 의아했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병원이 있음에도 그 주변에 인기척이 아예 없었다.


진료를 받기 희망해서 찾아온 사람, 입원하다 밖으로 나온 환자, 병원에서 근무하다 쉬러 나온 간호사, 일에 지쳐 담배 피러 나온 의사까지.


본래 있어야할 사람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으니, 마치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폐병원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병원의 외곽이 새로 지은 것 같이 말끔한 걸 보면 폐병원이라고 하기엔 또 무리가 있었다.


결국 들어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 나는 불안했지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내부도 깔끔하며 최신식 느낌이 물씬 났지만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그러나 들려오는 건 메아리 뿐, 아무도 없었다.


괜스레 불법 침입하고 있는 걸까 걱정하게 되며 나는 병원 내부를 돌아다녀 보았다.


진료실, 간호사실, 수술실, 응급실, 주차장, 매점, 그 밖의 시설들 까지 다 돌아봤으나 알아낸 사실은 변함 없었다.


"여기만 보고 돌아갈까......."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으면 자연스레 관심이 사라지지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다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남은 505호 병실.


이번에도 없을 거라 생각하며 노크도 없이 열어 제낀 병실 안에는.......


"이제야 왔구나?"


아름다운 흑발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이곳에서 줄곧 바라고 있었어."


나긋한 목소리와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


"네가 다시 나를 찾아오기를."


아름답게 수척해진 몸매를 지닌 그녀는, 


"어서와, 얀붕아."


내가 잊고 있었던 사람이자


"얀순아......"


내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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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이는 처음으로 생긴 여친이며 그녀와의 연인 관계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이렇게보면 나는 연인이 있음에도 다른 여자들을 꼬셨던 천하의 몹쓸 바람둥이였다는 거겠지만,


얀순이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죄책감따윈 내다 버릴 수 있었다.


애초에 나는 얀순이, 그녀를 싫어한다.


회귀를 시작하기 전,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백을 받으며 세상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내게도 연인이 생겼다는 기쁨도 있지만 예쁘다고 동기들에게 소문난 얀순이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사실이 제일 기뻤다.


나를 좋아해주는 그녀가 사랑스러웠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깐에 불과했다.


사람의 겉과 속은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청순해 보였던 얀순이는 알고보니 집착이 광적 수준이었던 여성이었다.


내가 잠시라도 그녀의 곁을 떠나면.


"얀붕아? 날 두고 어디 가?"


여성이 나오는 광고를 보면.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다른 여자? 내가 아니라?"


아는 여자애와 대화를 하면.


"얀붕아, 네 목소리는 나만 들어야 해! 내 거야, 내거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이렇게 얀순이는 사사건건 내 앞에서 집착을 숨기지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얀순이를 이해하자고 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녀의 집착은 심해져 갔고.


"얀붕아, 우린 앞으로 쭉 같이 사는 거야! 내 전부를 너에게 줄테니까, 너도 나에게 네 전부를 줘!"


결국 그녀의 집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얀순아, 우리 그만 헤어지자."


"왜? 뭣때문에? 무슨 이유로 우리가 헤어져야해?"


"그건......."


"아니! 이유따윈 상관없어, 어차피 헤어짐따윈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절대로!"


"얀순아, 제발 부탁이야."


"싫어! 서로 자신의 전부를 주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어째서? 어째서 헤어지려고 하는 거냐고!!"


얀순이의 외침을 끝으로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 도망쳤고, 그 뒤로는......


"얀붕아, 몇 일만에 만나는 걸까?"


아무도 없는 병원에서 나는 그녀와 재회하게 되었다.


"얀순아."


"미안 정정할게, 너와 몇 회차만에 만난 걸까?"


"뭐?!"


생각치도 못한 발언, 얀순이는 내가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 설마! 네가 나를 회귀하게 만든 장본인이야?"


"글쎄?"


"대답해!!"


"미안해 얀붕아, 그건 알려줄 수 없어, 그것보다도 어땠어? 내가 없었던 새로운 삶들은?"


다른 주제로 말 돌리는 얀순이.


어떻게해서든 이실직고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녀는 한번 숨기는 게 있으면 끝까지 숨기려는 여성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새로운 삶은 개뿔, 이건 저주라고 그것도 거지같은 저주!"


회귀는 그녀와 비슷했다.


자세하게 몰랐을 땐 행복했지만 알고나면 끔찍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이 빌어먹을 저주나 풀어!"


로또 1등을 하지도 못해도 괜찮다.


매력적인 여성과 사랑을 나눠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미안해, 얀붕아."


"씨발!!"


얀순이는 끝까지 내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나는 그대로 병원 문을 열어제끼며 그녀에게서 떠났다.


그녀의 얼굴을 더 봤다간 이 화를 못참을 것 같았으니까.


102회차.


"얀붕아, 또 나를 만나러 와주었구나."


얀순이는 저번 회차때의 내가 그녀와 재회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녀가 이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으니까.


그렇게 나는 내키지않지만 매일 병원에 찾아와 얀순이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정보 쪽으로 주제를 돌리거나 이런저런 선물들로 정보를 얻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회귀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그녀는 쓴웃음을 짓더니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만 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나를 묶어두려는 거야!"


"미안해 얀붕아, 그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마음은 없다면 왜! 어째서냐고!"


"미안, 미안해 얀붕아."


"씨발......!"


얀순이는 달라져 있었다.


밑도 끝도 없었던 집착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항상 낮은 텐션으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차라리 예전부터 이랬다면...... 아니, 차라리 그녀가 이렇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막무가내로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이도저도 아닌 얀순이의 모습을 보니 억지 부리기 어려웠다.


103회차.


계획을 바꿔서 얀순이의 집착적인 면모를 들춰내고자 마음 먹었다.


그래서 여지껏 회귀를 거듭하면서 사귀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와 여성들과 어떠한 사랑을 나눴는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얀순이의 앞에서 묘사했다.


오로지 얀순이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그러나.......


"다행이다, 행복해 보이네."


어째서 그녀는 질투를 하지 않는 걸까?


옛날의 얀순이였다면.......


"얀붕아? 왜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거야? 왜? 왜? 왜!! 왜에!!!"


어김없이 광기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멱살을 잡으며 몰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얀순이는 그저  씁쓸해 하는 표정만 지을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분하지도 않아? 우리가 만나기 전에 헤어지자며 싸우기는 했어도 아직 연인이잖아? 연인이 대놓고 바람 피우는 이야기를 하는데 화나지도 않냐고!!"


"괜찮아,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해."


"너... 진짜로 얀순이가 맞냐? 내가 알던 그 얀순이가 맞냐고!"


"응, 맞아."


"그럼 옛날처럼 미친듯이 화내라고...! 제발!"


"미안해, 얀붕아."


"더 이상 사과하지마!!"


나는 또 다시 병실을 도망치듯이 나왔다.


벗어나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대로가다간 모든 게 무너져 갈 것만 같았다.


130회차.


괴롭다.


150회차.


언제쯤 되야.....


200회차.


벗어날 수 있을까?


300회차


이제 그만......


500회차.


제발......!


1000회차.


그만! 그만! 그만! 그만하라고! 제발!!


????회차.


......


......


......


......


......


이젠 지쳤다, 모든 게 부질 없다.


"얀순아."


"미안해, 네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괜찮아, 이젠 괜찮아."


날카롭게 손질된 식칼 하나.


"이제 포기할 거니까."


"얀붕아? 그러지마! 자살만큼은 해선 안돼! 얀붕아!"


"미안, 나는 이미 지쳤어."


망설임 없이 식칼을 내 목에 쑤셔넣었다.


서늘한 철의 감각이 목을 시작으로 온몸을 뒤덮어 갔고 뜨거운 액체가 칼을 타고 흘러나오며 내 체온은 급격하게 식어갔다.


"얀붕아!"


마지막이 될 얀순이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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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거네......."


수도 없이 봐온 아침 풍경, 변함없이 들려오는 캐롤송을 시작으로 이번에도 내 일상은 시작되었다.


????회차.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발걸음은 얀순이가 있는 병실로 향해 나아갔다.


"...얀붕아, 괜찮아?"


"있지 얀순아, 넌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어?"


"응, 당연하지."


"그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러면 부탁이 있어."


"내가 가능한 한 도와줄게, 그러니까 이제 자살은 그만둬, 얀붕아."


"고마워, 자살은 그만할게 대신."


다시금 집에서 갖고온 식칼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가 나를 죽여줘."


"얀붕아? 그건......!"


"알아, 네가 하기 싫다는 것쯤은 하지만 정말로 네가 날 사랑한다면 죽여, 네 손으로 최대한 내가 덜 아파할 수 있게 죽여줘."


식칼이 들린 얀순이의 손을 붙잡아  내 목으로 향하게끔 겨낭시켰다.


"싫어! 얀붕아, 나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다면 하다못해 나를 죽여줘, 네 손으로 직접 말이야."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 말아줘 얀붕아!"


"벌써 5000번 이상을 회귀했어, 95년 이상을 회귀했다고! 원래라면 수명을 다해 죽고 남을 시간을 반복해가며 살아간다는 게! 괴로워......"


얀순이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녀의 손을 움직여 칼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미 수천 번이 넘는 자살 시도로 인해서 나의 죽음에 대한 감각은 진작에 무뎌졌다.


그러니 나는 죽는다.


5???회차.


얀순이에게 칼을 쥐어주며 죽어도 내 인생은 되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방법으로 죽어보지 않으면......


6???회차.


이번에는 얀순이에게 밧줄 하나를 쥐어주며 내 목을 강하게 조르게 해서 죽어 보았다.


7???회차.


온몸에 기름을 두른 채 얀순이의 병실에 찾아갔다.


그녀에게 성냥을 쥐어주며 내게 던지게 만들었다.


8???회차.


돈의 힘을 이용해 총을 구해서 그녀에게 쏘게 만들었다.


9???회차.


사제 폭탄을 만들어 그녀에게 터트리게 만들었다.


10000회차.


"그만! 제발 그만해! 얀붕아! 더 이상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아직 남아 있어."


그녀의 혈액형은 A형 나는 B형.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의 피를 뽑아, 내 몸 안에 수혈해 죽어보고자 했다.


"미안, 조금 아프겠지만 참아줘."


병원 안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주사기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알려줄게!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방법을 알려줄테니까, 이제 그만...! 그만 죽어줘 얀붕아! 네가 괴롭게 죽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아!"


"하하... 아하하하하하!!"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


이 지옥같은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제! 이제야!!


"빨리 말해, 뭘 어떻게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회귀를 하지 않게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설령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서! 어서 빨리......!"


"나를 죽이면 돼, 얀붕아."


"......뭐? 너를 죽이라고?"


"응, 네 손으로 직접 나를 죽이면 이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어."


생각해보면 여지껏 나 자신을 죽이는 건 수도 없이 해봤으나 그녀를 죽여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간단한 방법이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널 죽이면 된다 이거지?"


쉽다, 현재 얀순이는 병실을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져있다.


그러니 그냥 그녀 위에 올라타 목을 졸라 죽이면 끝.


"죽이면 돼! 죽이면 끝이야! 죽이면! 죽여버리면!!"


쉽다, 쉬워,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쉬웠다.


.....쉬울텐데? 분명 쉬운 일인데? 자살하는 것보다도 쉬운 건데?


"역시 망설이고 있구나, 얀붕아."


"시끄러! 금방 죽여줄테니까!"


죽일 수 없었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과는 다르게 내 몸은 그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죽이기를 거부하고 있던 것이다.


"왜 이러는 거지?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모든지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왜?"


가증스러웠던 그녀를 죽이는데 기뻐하지 못할 망정, 나의 눈에서는 물이 흐르며 슬픔을 토로하고 있었다.


손은 바들바들 떨려오며 그녀의 목을 조를 힘은 커녕 물건을 잡을 힘조차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얀붕아, 차근차근 나아가면 돼."


여태까지 내가 하던 짓과 반대로 이번에는 얀순이가 나의 손을 잡아끌며 그녀의 목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이렇게 목을 부드럽게 부여잡으며 천천히 복부에서 부터 힘을 끌어오면 되는 거야."


이상하다, 내 본능이 얀순이를 죽여선 안된다며 격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면 안된다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끌어온 힘을, 가슴으로, 어깨로, 팔로, 그 다음은 손가락 하나하나로 보내면 돼."


"아니야, 뭔가 잘못 되었어! 이건 하면 안되는 거야!"


그러나 나의 손은 얀순이의 목을 강하게 쥐어잡으며 점차 그녀의 숨통을 조여가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얀순아! 도망가!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줘!!"


"미안해, 얀붕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숨통이 막혀 괴로울 텐데도, 그녀는 나의 뺨을 쓰다주면서 한없이 웃고 있었다.


"얀붕아......"


아......


"사...랑해♡"


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내 뺨에 닿고 있었던 그녀의 손은 온기를 잃으며 그대로 침대 위로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내가 무슨 짓을....!!"


얀순이를 죽인 순간,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말았다.


영원히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돌아왔다.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야!!"


얀순이와의 다툼, 크리스마스 이브의 약속과 사고, 그녀의 잔혹한 죽음, 돌이킬 수 없는 후회.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도 고통받을게요! 계속해서 죽을게요! 몇 만번이라도 더 회귀할게요! 영원히 이곳에서 살게요!! 그러니까 얀순이를...! 제발 얀순이를 돌려주세요!!"


차갑게 식은 침대 위, 내 소원과 푸념을 들어줄 유일한 사람마저 잃어버린 지금.


항상 공허하던 내 마음은 비어있는 걸 떠나, 영원히 아물지 않을 커다란 구멍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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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1회차.


분명 오열하다가 지쳐 병원 침대에 쓰러졌을 터인데, 나는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자 시간은 1월 1일 오전 8시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회귀가.....


"끝났네."


매번 듣던 캐롤송도, 집 앞을 지나가던 여고생들의 수다 소리도, 무엇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하다고 한다면 내 생활 패턴이었다.


대충 끼니를 때우며 옷도 대충 갈아입고 얀순이가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니, 본 적 없었던 광경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이 세상 전체에 널리고 널렸지만 내 관심을 가져가는 요소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나는 그저 병원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아무도 없었던 곳이 지금은 여러 사람들로 북적북적해서 생기가 넘쳐흘렀다.


마치 마법이 일어난 것 같아 다소 신기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505호실 앞, 그녀가 이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에는 웃으며 나를 반겨주던 얀순이는 없었다.


비어있는 침대와 꽃병에 들어가있는 하얀 국화꽃만이 나를 반겨 주고 있었다.


"하하........"


그렇다, 얀순이는 죽었다, 이제는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알게 되며 밀려올라온 허탈감때문에 그녀가 있었던 침대에 앉아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다시금 회상하고자 한다, 회귀 때는 잊고 있었던 전날의 기억들을........


크리스마스 이브가 오기 전, 얀순이는 나와의 다툼으로 인해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만남을 청해왔다.


내키진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하는 듯하였기에 나는 만남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고, 나는 약속의 장소에서 끝없이 기다렸지만 얀순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과하겠다며 불러놓고 오지도 않는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난 나는 그대로 그녀의 번호를 차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얀순이는 나를 만나러 오던 와중에 골목길에서 연쇄 살인마와 마주쳤고 그대로 흉기에 난도질 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그녀의 번호를 차단해버린 탓에 그녀의 도움 요청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우연히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로 병원에 급히 이송되었지만.......


"장기 손상이 심합니다, 수술을 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할 겁니다."


너무나 늦어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얀순이는 의식 불명의 상태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7일 후인 12월 31일.......


얀순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나타나 집착해올 것만 같은 얀순이가 죽다니?


믿기지 않았다.


얀순이의 가족이 나타나 눈물을 흘려도, 그녀의 몸이 시체 보관실로 이송될 때도, 그녀의 장례식 일자가 잡히게 되었음에도, 끝으로 그녀의 유품마저 정리하는 와중에도.


그러다 문득 유품들 속에서 편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발신인은 얀순이, 수신인은 나.


그녀의 혈흔이 꽤 묻어 있었지만 칼에 찢긴 자국이 없는 걸로 보아 그녀는 살인범에게 당하면서도 이 편지를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리 필사적이었던 것 일까?


궁금해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편지를 뜯어 내용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7일이 무한히 반복되는 회귀의 세상에 갇히게 되었다.


"이젠 나오게 되었지만......"


하얀 국화가 들어있는 꽃병 아래, 그날 봤었던 편지가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무슨 내용이었는 지 기억이 잘 안난다, 어쩌면 회귀하는 세상에 갇히게 되는 저주가 들어있었을 지도 모른다.


"괜찮아."


어차피 지금의 내가 바라는 건 그 회귀하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한번 더 얀순이와 만나 그녀와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번에는 좀 더 그녀와 마주하며 기나긴 시간을 웃으며 보내고 싶다.


이윽고 나는 뜯겨져 있는 편지를 들어 안에 있는 내용을 확인한다.


그 회귀 세상으로 돌아가길 기원해보지만......


"그럼 그렇지."


한 번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두 번이나 같은 일이 발생할 리가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얀순이의 손글씨로 가득한 종이 하나.


세상이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내게 남은 거라고는 이 편지 밖에 없네."


얀순이가 살아있었을 당시의 편지, 그녀에게서 받은 내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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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얀붕아]


회귀 당시의 그녀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첫마디가 편지의 서두였다.


매번 미안하다고만 했는데 그녀는 도대체 뭐가 미안했던 걸까?


[여지껏 너를 힘들게 만들어서, 내 집착이 너를 괴롭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아서, 미안해.]


의외였다.


얀순이가 자신의 집착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였다.


[그래선 안되는데 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하는데....... 나는 여지껏 나의 의사만 존중해버린 거야, 너를 좋아하니까, 너를 사랑하니까, 같은 변명들을 늘어놓고선 말이야.]


그걸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하지만 그만큼 너는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그런다고 해도 이젠 의미 없다.


[아무튼 나는 내 잘못을 뒤늦게 알아버린 탓에 나는 너를 놓치고 말았고, 지금까지도 나는 너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 아직 연인인데도 말이야.]


멍청한 여자.


[네가 내 곁을 떠나고나선 나는 줄곧 괴로웠어, 그리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기간만큼 많은 생각과 후회를 하게 되었어.]


이미 늦었다.


[그래서 이 편지를 통해 그동안 내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사과와 너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전해보려고 해.]


그런다고.......


[있지? 고백을 한 건 대학교 와서였지만 사실 그보다도 오래 전부터 나는 얀붕이를 너를 좋아해왔다? 우리의 첫만남이 어땠냐면.......]


내 기억에는 없는 중학교 시절의 내가 그녀를 도와줬다는 고마움, 그때부터 줄곧 몰래 스토킹 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 대학교 때 비로소 같은 학교가 되었다는 기쁨, 그리고 고백하고 연인되었을 때의 행복함.


그녀는 세세한 일조차 작은 편지지에 꽉꽉 눌러담아 써나갔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얀붕아, 이미 네 마음 속에서 내가 떠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딱 하나 바라는 게 있어.]


뚝.


[내가 얀붕이의 인생 속에서 최고의 연인으로 기억 되기를.]


뚝, 뚝뚝.


[영원히 사랑해, 얀붕아♡]


피로 물든 편지지 위로 투명한 액체가 떨어지며 매마른 종이를 적시고 있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어째서인지 입에서는 자꾸만 웃음만 나왔다.


"최고의 연인?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얀순아! 너는 최악의 연인이었어! 끝까지 최악이었다고!!"


회귀 때에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어 봤다.


"맨날 미친 년마냥 사람을 붙잡고 힘들게 하지를 않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사주경계를 하지 않나! 게다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우리 집에서 속옷 훔친 범인이 너라는 거 다 알고 있거든?"


그리고 사귀었던 모든 여성들은 매력적이었다.


"귀찮게 굴고! 힘들게 하고! 지치게 만들고! 집착은 끈적하고! 진짜 최악이었어!"


하지만 그 중에서 내 빈 마음을 끝까지 채워주는 여성은 한명도 없었다.


"최악이었다고!!"


그리고 얀순이와 만난 날,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싫다고 머리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비어있던 마음은 따듯하게 채워져 갔다.


"그러니......"


그러니.......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얀순아, 너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연인이었어.


"하하핫!!"


나 대신에 편지지를 침대 위에 올려두며 나는 병실 창문 위에 올라섰다.


"빌어먹을......"


끝도 없이 봐왔던 풍경이 보였다.


"네가 이겼어, 얀순아."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만드는 풍경.


"아무래도 나는 네가 아닌 다른 여성을 좋아하긴 글러먹은 것 같다."


사뿐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허공을 향해 걸어나갔다.


"씨발......."


몸이 뒤집히고 시야도 뒤집히며 그대로 봐왔던 세상이 반대로 보였다.


그렇게 반대로 뒤집힌 세상은.......


터무니 없이 아름다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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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길게 쓰기는 했는데 내 표현력이 부족해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내용 설명함


우선 얀붕이가 7일 회귀를 하는 세계는 얀순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심상세계임.

얀순이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보고 비로소 얀붕이는 얀순이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얀붕이는 얀순이에 대한 걸 기억 속에 지우며 회귀 세상에서 살아갔던 거임.

그래서 얀순이가 사고 당한 24일이 아닌 25일부터, 얀순이가 사망한 31일이 아닌 1월 1일에 삶을 반복하게 된 것이고.


작중 중간에 TV에 나온 뉴스에서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은 얀순이를 죽인 자가 맞고, 그게 심상세계에 나타난 것은 회귀가 반복되어가며 얀붕이의 안에서 사건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는 대목임.

그리고 후에 나오는 병원에서의 투신자살은 얀붕이의 마지막을 뜻하는 거지만 미래의 일이었기에 TV가 고장나며 안나왔던 것임.


아무튼 끝내 얀순이를 만난 얀붕이는 기억이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얀순이가 죽었다는 기억만큼은 복구하지 않았음.

이제 얀순이가 끝까지 얀붕이가 회귀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던 이유는 얀붕이의 모든 기억이 돌아오게 되며 고통스러워할까봐 그랬던 것임.

아무튼 얀붕이는 끊임없이 자살과 죽음을 반복해갔음에도 회귀 세상의 얀순이는 얀붕이가 고통스러워하지 않게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가 죽는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며 방법을 알려주게됨.


그 방법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다시 말해서 얀붕이가 얀순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임.

결국 얀붕이는 얀순이를 죽이게 되고 모든 기억이 돌아오며 후회와 절망을 맛보게 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됨.


혹시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더 있다면 댓글로 설명하겠음.


사실 얀데레의 사랑이 얀붕이를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걸 구상한 것인데 쓰다보니 그냥 순애글이 되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네.

아무튼 새드엔딩이긴 한데 후일담인 이야기 하나가 더 있으니 그건 다음에 써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