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얀순 씨,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고생하셨어요."


김얀순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공개하고 나서 치룬 첫 공식 스케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녀의 도도하고 신비주의적인 이미지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해 퇴폐적이면서 색기 넘치는 느낌의 화보 촬영이었다. 

처음엔 기존의 이미지를 확 벗어나는 무모한 촬영에 반신반의하던 스태프들과 관계자들은 매혹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녀의 매력에 너 나 할 것 없이 역대급 화보가 될 것이라며 말을 바꾸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상보다 일찍 촬영을 마친 그녀는 메이크업을 지우면서 신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참을 폰만 바라보는 그녀에게 코디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남자친구 분이 그렇게 좋으세요?"

"응, 당연하지~. 생각만 해도 좋은데?"

"좋을 때네요."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얀순의 머리를 정돈했다. 3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와는 이제 설렘이 느껴지지가 않으니 한창 서로 얼굴만 봐도 행복할 때가 그리웠던 그녀였다.  

코디는 아직 그녀가 남자친구와 사귀게 된 경유를 잘 몰랐지만 분명 그녀와 사귀는 김얀붕이란 남자는 동성에게까지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녀와 데이트를 즐기고, 함께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나눌 행복을 누리는 엄청난 기회를 얻은 거겠지, 라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감정적이고 변덕스런 그녀의 성격을 감당할 만한 사람인 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한편, 촬영장 인근에서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룬 상태였다. 라이브 방송을 통해 남자친구를 공개하는 충격적인 언행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대놓고 병문안을 가서 찍은 셀카까지 인증하며 팬은 물론이고 대중들의 관심이 극에 달했다.


당연히 연예 소식을 다루는 신문사와 방송국의 전화기는 김얀순의 남자친구가 뭐하는 사람이냐며 취재해달라는 전화로 조용할 틈이 없었고 뒤늦게 소문을 파악한 기자들은 커뮤니티 사이트와 카페를 쥐잡듯이 뒤지며 황급히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지금 촬영장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며 그녀를 기다리는 기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서 조금이라도 무언가 한 마디라도 얻어가려는 이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들이 원하고 바라던 모델 김얀순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녀에게 폰과 카메라, 마이크를 들이밀며 질문 공세에 나섰다. 


"얀순님! 남자친구하고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남자친구 분이 어떤 분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소속사와 상의 없이 남친 분을 공개하셨는데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나 그녀는 기자들의 공세에 애매모호한 대답만 내놓고는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대형 밴에 탑승했다. 기자들은 허탈한 눈빛으로 떠나가려는 차량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창문 한 번 열지 않고 촬영장을 벗어났다. 



어딘가로 향하는 대형 밴, 그녀를 따라 쫄래쫄래 탄 코디와 아무 말 없이 목적지를 향해 운전하는 매니저 사이로 그녀는 폰에 온 집중을 다하고 있었다. 


ysun97kim : 촬영 끝!!

ysun97kim : 오늘 일정 끝났는데 집에 놀러가두 되지???

ysun97kim : 같이 치킨 뜯장ㅎㅎ 🍗💏

hyojayanbunbun : 맘대로해

ysun97kim : ㅎㅎㅎ우리 얀붕이 사랑해~~ (❁´◡`❁) ♡


곧바로 날아온 얀붕의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며 입이 귀에 걸렸다. 어차피 그가 대답을 안하거나 거절하더라도 그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칼대답으로 그가 수락하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는 그였지만, 그의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까지 주고받고나니 그제서야 이 상황을 수긍한 듯 그는 순종적인 상태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연인스런 대화는 없었지만. 

 

때마침 그의 자취방 근처에 도착한 듯 매니저가 차를 갓길에 세웠다. 


"얀순 씨, 도착했어요."

"어, 그래? 수고많았어~. 내일 10시에 YBS 본사 앞으로 오면 되지?" 

"예. 아직 캔슬 얘기는 없네요."

"그럼 이대로 퇴근해, 너 여친하고 데이트도 해야 할 거 아냐~."

"...콜록콜록!"


그녀를 배웅하던 코디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둘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있던 얀순은 찡긋 윙크를 보내고는 "내일 봐~!" 를 외치며 휙 나가버리고 말았다. 


.

.

.

.

.


"..."


솔직히 아직까지도 실감이 안 난다. 


천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그녀가 별 보잘 것 없는 나를 강제적으로 남자친구로 만든 거?

병원에 누워있다가 대체 그녀의 남자친구가 누군지 알아보러 왔다며 기자와 팬들이 소란을 피운거?

지상파 연예뉴스와 그녀의 소속사에서 떡하니 그녀와 내가 찍힌 사진을 발표한 거?

우리 엄마가 그녀와 인사를 나누면서 "이제 우리 얀붕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라며 싱글벙글 웃은 거? 



지금 당장 30분 전에 그녀에게서 '집에 놀러가도 되냐'는 DM도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 

확실히 엄마나 의사의 말대로 부러진 내 팔보다 기존의 사고처리능력으론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머리가 더 문제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직접 이 산만한 방으로 온다는데도 아직껏 정리 한 번 안하고 그저 게임만 할 뿐이었다. 


ysun97kim : 얀붕아ㅎㅎ 치킨 샀엉ㅋㅋ 뼈있는거괜찮지???

ysun97kim : 너 몸만 괜찮으면 맥주도 마실텐데ㅠㅠㅠ 담에 먹어야긋네

ysun97kim : 얀본빌라 302호 맞지?? 올라가는중ㅋㅋ


지금도 시시각각으로 그녀가 내 집으로 오고 있었지만 나는 도망치거나 저항할 생각도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밥상을 툭 펴 놓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띵동.

쿵쿵쿵.


"얀붕아~, 나 왔어! 문 좀 열어줘!"

     

쿵쿵쿵. 


"얀붕아, 김얀붕! 추우니까 빨리 열어어~."


그녀가 계속해서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내가 반응하지않자 그녀는 잠시 조용해진다 싶다가 곧바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벌컥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있는데 왜 안 열어준 거야?"

"아...온 줄 몰랐어..."


내가 마지못해 일어서자 그녀는 자기 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밥상에 턱 내려놓고 싱긋 웃었다. 

확실히 내가 이 상황을 못 받아들이는 데엔 그녀의 비현실적인 외모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 이렇다, 저렇다 내가 떠벌린다해도 그녀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모델이었다. 


"뭐야아~? 온다고 했는데 정리도 안 하고! 앞으로 이러면 어머님한테 말씀드려서 컴퓨터 들고 가버릴 거야."


분명 TV나 유튜브를 통해서 접하는 그녀의 차가운 표정과 단답식의 말투는 내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괴리감이 너무 심해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널부러져있던 옷들을 주섬주섬 접어서 서랍 안에 집어넣었고, 입고 놔뒀던 몇몇 옷들은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만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대충 옷으로 널부러졌던 방을 정리하고 그녀가 외투를 벗었다. 


"짜잔! 뭘 좋아할 지 몰라서 반반 사왔어~. 콜라는 코카콜라 맞지?"

"...펩시."

"하, 선넘지마."


그녀는 장난스레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만 나에게 닭다리 하나를 물렸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망상을 꿈꾸었었지만, 막상 내가 꿈꾸던 망상이 현실이 되니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나에게 친밀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향하던 증오와 원망감이 호감은 커녕 무기력함과 허탈감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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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는 한참을 좁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치킨을 먹었다. 당연히 그녀가 주제를 꺼내면 그가 단답으로 호응하는 것이 연속이었지만 나름 그녀에겐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친밀해져 집 주소와 비밀번호를 안 것, 이곳저곳에 널부러진 그의 옷을 정리하며 그의 체취를 알게 된 것과 오른팔에 깁스를 한 그를 위해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던 것. 그의 무미건조한 반응과 반대로 그녀에게 아주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두 명이서 한 마리를 겨우 먹고 난 뒤, 그녀는 긴 생머리를 묶더니만 앞소매까지 걷어올리고 지금 먹었던 것들을 비롯해 온 방을 모조리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집주인이던 그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괘...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어우, 바퀴벌레 나오겠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손님이었던 그녀에게 집안 정리를 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워 얀붕이가 그녀를 만류하고 나섰지만 그녀의 고집이 더욱 셌다. 



결국 쌓여있던 설거지들과 빨래까지 모조리 해치우고 나서야 얀순은 다시 머리를 풀고 이불 위에 앉았다. 


"후우, 진작에 치우고 지냈으면 얼마나 좋아?"

"그, 얀순아."

"응?"

"한 5분 있다가. 막차 올 것 같은데 옷 챙겨입어."


그제서야 얀붕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막차가 끊길 것이기에 서둘러 그녀를 배웅해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 그녀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고는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그에게 자연스레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나 여기서 자고 갈 건데?"

"...어?"


그는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힌 듯 그 자리에서 잠시 멍하니 얼어붙었다. 


잔다고? 

여기서?  

   

얀붕이가 잠시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뇌정지가 온 상황에서 얀순은 이미 외투 속에서 여행용 세면도구를 꺼내면서 "그럼 먼저 씻을게~." 라며 능청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녀에게 아직까지는 남아있던 응어리가 있어서인지 쏴아- 하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결국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자신을 또다시 자책했다.



얼마 뒤, 그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그는 애써 그녀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듯 여벌용 이불을 깔아놓고는 쓰레기 봉투를 집어들었다. 금방이라도 나갈 듯 신발을 신은 그를 보고는 그녀가 현관으로 달려왔다.


"얀붕아, 이 시간에 어디가?"

"아, 쓰레기만 버리고 올"

"에이, 늦었는데 내일 아침에 버리면 되지! 이불은 또 뭐야? 같이 덮으면 상관없잖아~."


그녀는 그의 말을 끊어버리고는 곧바로 밝게 웃으며 나가려는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단순히 엄지 손가락으로 붙든 것 뿐이었지만 미묘하게 그녀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여기는 새벽에 수거해서 지금 버려야 돼. 금방 나갔다 올게."      

"그러지 말구~. 팔도 안 좋은데 이렇게 무리하면 안 돼."

"얀순ㅇ"

"얀붕아."


어떻게든 일단 밖으로 나가려던 그의 시도가 무색하게, 얀순은 방금까지 웃고 있던 표정을 싹 거두고는 옷깃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그의 부러진 오른팔의 팔뚝을 덥석 붙잡고는 그녀 쪽으로 끌어당겨버렸다. 

갑작스레 골절 부위가 움직이자 얀붕이가 신음을 내지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얀순은 아랑곳않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마치 뱀이 숨소리를 내뿜으며 경고라도 하듯이.


.

.

.

.

.


그 시각 YBS의 한 사무실에는 자정이 다 되어가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가 연애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하기 직전에 인터뷰를 나눈 곳인 만큼, 많은 팬들과 관계자들이 문의 전화를 보냈었지만 YBS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휴, 집가고 싶다..."


YBS가 그런 오판을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아닌 그녀와 공항에서 직접 만났던 촬영팀 때문이었다. 

직접 그녀와 대화를 나눴던 신입기자 박얀진은 중요한 기삿감을 놓쳤다는 일로 오늘도 반강제적인 야근에 시달리고 있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자면, 늘상 해오던 인터뷰를 끝마치고 분명 그녀와 막내 작가는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얀순을 뒤로하고 세간에 떠돌던 루머들을 떠들고 있었다. 

천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두면서도 여태껏 단 한 사람도 팔로잉하지 않던 그녀가 최근 팔로잉한 단 한 사람, 김얀붕.

  

그녀와 가족 관계다, 비즈니스 때문에 팔로잉했다, 혹은 연인 관계다. 심지어는 스폰서가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지만 하필이면 사실을 확인해줄 그녀가 외국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그 추측성 찌라시들은 공항에서 귀국하던 당시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재수없게도 그녀와 막내작가는 김얀붕 건에 대해 몰래 얘기하다 김얀순 본인에게 들켜버리고 말았고, 결국 털어놓듯이 그녀에게 그와 관련하여 떠도는 풍문들을 늘여놓으면서 그녀에게 질문을 건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관계가 어떻게 되는 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당신이 말했던 것들, 절대 사실이 아니에요. 것보다...하..."

"그럼 그 분과의 관계는?"

"진짜 아무 사이 아니에요. 나중에 다 해명할 테니까." 


그때 김얀순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기자에게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확언했었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기자의 잘못도 있었지만, 분명 그때 김얀순은 루머들을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기에 그녀는 얀순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는데... 


"아 씨발, 진짜 사귀는거 맞아?"       


기자는 기사의 오탈자를 수정하며 거칠게 쌍욕을 내뱉었다. 

그녀는 아직도 공항에서 만났던 김얀순과 남자친구를 공개할 때의 김얀순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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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해

7화까지는 원래 생각해놓은 대로 썼는데 이번 편부터는 새로 쓰려니까 개빡세네   

예아 그래도 했으면 됐지 그치요?



근데 이렇게 뒤에다 뭐 써놓으면 비틱같음?

보기 좆같으면 없앨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