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얀순이는 작가야.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가 전문인 작가지. 얀붕이는 평범하게 살고 있는 회사원이었어.


 얀순이는 인기가 많은 작가였지. 로맨스 판타지 같은 장르가 얼마나 많은, 찍어내는 양산형 작품들이 많은지는 모두가 잘 알거야. 레드 오션에서 살아남은 거랑 다를 바 없지. 얀순이가 살아남은 방법은 정공법이였어. 진부한 소재도 필력 하나로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필력 말이지.


 오죽하면 순수 문학밖에 읽지 않는 평론가들과 고전 작가들이 얀순이 책을 읽고 이런 인재가 정통파로 등단하지 않는다는게 한국 문학의 거대한 슬픔이라고 말했겠어?


 뭐, 그에 비해 남편인 얀붕이는 평범한 사람이야. 그냥 어딜 가나 보이는 회사원들. 하루하루, 갈굼당하고 스트레스 받고 똥치우고 회식자리 가서 술마시고 퇴근하고도 또 내일 출근해야하는 그런 슬픈 쳇바퀴 인생이지.


 그래도 얀붕이에게 자랑할 점은, 아리따운 아내인 얀순이의 존재였지. 뭐 자기보다 돈도 잘벌어, 장르 문학 작가인데도 유명해. 남자로서 좀 자존심 구겨지고 그럴만도 해도, 얀붕이는 크게 신경 안썼어. 왜냐하면 그 이상으로 얀순이를 사랑하고 있었거든.


 그 왜 있잖아, 멜로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호구 순애보 남자 있지? 그게 얀붕이거든.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같은 반 얀순이가 도서관에서 책읽는 모습을 처음 본 얀붕이는 한 눈에 반해버렸어.


 태풍 경보가 울린 어느 여름날, 빌린 책을 늦기 전에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린 얀붕이. 그리고 그 곳에서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얀순이를 발견해. 도서관의 불은 다 꺼져 있었고, 오직 어두침침한 빛만이 도서관 창문가에서 쏟아져 들어왔지. 얀순이는 그런 빛 아래에서도 환하게 빛이 났어.


 백옥같은 피부, 안경 속의 커다란 두 눈, 긴 생머리. 이목구비는 말 할 것도 없이, 아름다웠지. 정작 얀순이 본인은 고등학교 당시 쓰고다니던 촌스러운 테 굵은 안경이 흑역사라고 말했지만, 얀붕이는 오히려 그게 더 귀여운데, 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지.


 한 눈에 반한 얀붕이는 얀순이와 친해지기 위해 모든걸 다 했어. 고등학교 3년 내내 친해졌고 고백하고 차이고를 반복했지. 그리고 졸업하는 시점, 같은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얀순이는 결국 얀붕이의 고백을 받아들여줘.


 뭐, 대학교 4학년간 그 흔한 NTR 스토리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졸업까지 일직선으로 쭉 내달려갔어. 시발 무슨 뇌 좆박은 새끼들이 대학가면 다 깨진다 그랬지만 뭐??? 그런건 존재하지 않아요. 얀붕이 군대 갔을 동안 어떻게 됐냐고? 얀붕이는 곤운가서 한 달에 한 번 휴가 나왔다고 하자. 그정도면 그냥 장거리 연애잖아 그치??????


 아무튼, 그렇게 찐사랑 영화같은 사랑하던 얀붕얀순 커플은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얀순이는 대학 시절 동안 쓴 소설로 출판사와 박치기 들어가서 로판 작가로 성공하기 시작하지. 얀붕이도 운이 좋아서 그런가, 취준생 1년 반이 좀 지나갈 무렵에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건실한 중견기업에 취직하는데 성공해.


 그렇게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며, 언젠가 둘 사이에서 예쁜 아이도 보고 늙어갔음 얼마나 좋았을까.


 늦은 겨울. 얀붕이는 연말 휴가를 받고, 오랜만에 강원도 여행이나 갈겸 얀순이와 함께 차를 탔지. 정말 오랜만의 긴 운전이었을까, 얀붕이는 피로로 인해 잠깐 졸았어. 휴게소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얀순이는 이미 곤히 잠들어서 도착하면 깨워줘! 상태였지.


 그리고 얀붕이 옆을 달리던 트레일러 기사도 똑같았나봐.


 밤중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위험해. 트레일러 기사들이 불도 안켜고 달리는 경우가 있거든... 그리고 이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달리던 트레일러 기사는 졸면서 잠깐 핸들을 돌렸고, 그대로 얀붕이와 얀순이가 탄 차를 그대로 들이박고 튕겨버려. 강한 충격에 흠칫한 트레일러 기사는 그대로 도주.


 차는 아작이 났고, 얀붕이와 얀순이는 그대로 즉사해.




 그래도 이 세상엔 신이란게 있어서, 얀순이 소설을 잘 읽던 신은 얀순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로 해.


 얀순이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환생해서, 얀순이가 비밀스럽게 욕망하던, 그토록 꿈꾸던 황태자와의 그림같은 연애와 결혼 생활을 보내게 해줘. 기억을 전부 지우고 말이야.


 그리고 얀붕이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지. 하지만 자비라고 해야할지, 고문이라고 해야할지.


 신은 내심 얀붕이가 마음에 안들었거든. 얀붕이랑 결혼하고 나서부터 얀순이는 책을 쓰는 빈도도 줄어들고, 내용도 정통파적인 가난한 똥차 버리고 부유한 벤츠 타는 내용에서, 가난하지만 순정파인 남자와 함께 행복해지는 내용을 쓰기 시작했거든. 신은 그런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어.


 그래서 얀붕이도 환생을 하게 돼. 하지만 환생한 얀순이, 여주인공과는 영원히 이어질 일 없는, 소설에서 단 한 줄 밖에 언급되지 않는 얀순이의 집사로서 말이야. 그것도 모든 기억을 가지고. 신은 얀붕이에게 경고를 해주지. 너와 그녀는 영원히 맺어질 일이 없다. 그리고 그녀는 널 기억하지도 못해, 라고 말이야.


 그래도 씹호구 순애보 찐사랑 얀붕이. 그래도 좋다. 얀순이가 살아만 있다면 좋다는거야. 아무리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하고, 나와 보내지 못한 영원을 다른 이와 보낸다고 해도 괜찮다. 우리가 사랑했던 추억은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는거야.


 그렇게 둘은 환생하게 되고, 엄격한 신분제에 따라 평민인 얀붕이는 영원히 시중드는 삶을, 귀족인 얀순이는 영원히 그 시중을 받는 삶을 살게 돼.


 얀붕이는 얀순이 곁에서 그녀를 잘 보조해줘. 첫 사랑에게 데인 어린 아이에게 위로를,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여린 소녀에게 충고를, 그리고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 성숙한 여인에게 격려를 해줬지.


 그래도 그녀를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런 과정들 속에서도 속은 타들어가고 앓아가지만, 얀붕이는 꾹 눌러 참아. 여긴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잖아. 얀순이의 이야기고, 얀순이를 위한 세계야. 그렇다면 희생해주는건 남편이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하니까, 라며.


 하지만 얀붕이가 모르는게 하나 있었어. 얀순이와 황태자가 거의 이어질 무렵에, 그걸 시기한 얀순이의 라이벌들이 공모해서 얀순이에게 암살자들을 보내게 되지. 원래라면 여기서 얀순이는 죽고, 황태자는 황가의 유물로 얀순이를 다시 살린 후 결혼하는게 원래 플롯이야.


 하지만 그 날 밤, 얀순이가 암살당하는 그 밤에 불안한 직감을 감지한 얀붕이는 얀순이를 깨워. 그리고 단장할 새도 없이 그녀를 가문의 마차에 태워 황태자에게로 보내지. 그리고 자신은, 이럴 순간이 올 것을 예상해서 준비해둔 마법 도구들과 무기들로 찾아온 암살자들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해.


 얀붕이는 현대를 살다온 사람답게, 총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몇 백번의 시행착오 끝에 산탄총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었지. 그리고 마법 도구와 스크롤 사는데 집사 품삯을 전부 써버리고. 하지만 지금, 그런 노력이 산탄총의 총구에서 빛나는 화염처럼 빛나는 순간이었어.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암살자로 키워진 프로 암살자들과, 값비싼 마법 도구와 스크롤, 특제 제작한 산탄총으로 둘둘 맸다고 해도 민간인에 불과한 얀붕이의 싸움은 불 보듯 뻔한 거였지. 암살자 여럿에게 납탄을 박고, 불밥으로 던져주고, 얼려버렸다고 해도 숫적 열세와 실력적 열세는 쉬이 뒤집을 수 없는 것이었지.


 결국 얀붕이는 등에 찔려 죽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데 성공한 얀붕이는 안도해.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몫이 끝났다라는걸 본능적으로 직감해. 신은 얀붕이가 플롯을 뒤바꿀 수 있는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 재미로 그를 살린거라는걸 죽는 순간 알았거든.


 결국 암살자들은 한낱 집사가 자신들을 막아서는데 성공했다는거에 격분, 얀붕이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놓지.


 하지만 그것도 예상된 바였고, 그런 하찮은 짓에 시간을 끌고 만 암살자들은 결국 황태자가 끌고온 근위대에 의해 추포되고, 황실 지하 감옥에 끌려가 고문받다가 결국 고용한 자가 어떤 자들인지 불게 되지. 그렇게 얀순이를 시기한 자들은 전부 황태자비로 얀순이를 선정하며, 황실에 대한 반역 혐의로 모두 목이 날아가버리는 걸로 끝나지. 


 그렇게 얀순이와 황태자와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되고,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사는 엔딩으로 끝나야 했지.


 하지만 삶이라는건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아. 그리고 신의 변덕은 갈대밭에 부는 바람처럼 쉬이 바뀌고 종잡을 수 없는 법이지.


 엔딩 이후, 에필로그 이후. 얀순이는 어느 따스한 봄날에 늘 그렇듯 친정 본가로 돌아와 본가의 뒤뜰 화원에서 여유로이 차를 마시고 있었어. 왜 결혼한 황실이 아니라 친정이냐면, 결혼 후 황태자비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자 황실은 얀순이에게 압박감을 주는 존재가 되버렸거든. 그래서 여유를 찾기 위해 친정으로 가끔 가는거야. 뭐, 황태자와의 아이도 들어섰고, 현재 황제와 황비는 며느리인 얀순이를 참 좋아했거든. 그래서 이런 잠시동안의 일탈 정도는 봐줬지.


 그래도 친정에 돌아오는 이유는 얀붕이 때문이었어. 어린 시절부터, 어른스러운 얀붕이는 사랑에 방황하는 얀순이에게 진심 어린 도움을 줬거든. 그리고 그 마지막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모든걸 쏟아 부었고. 외동딸인 얀순이에게 얀붕이는 내색은 안했지만, 오빠 같은 존재였어. 의지할 수 있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지. 가끔 그의 빈 자리가 정말 크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그걸 달래기 위해 오는거였어.


 그래서 화원에서 차를 마시는 얀순이에게, 어떤 부자연스러운게 눈에 띄어.


 구멍이라고 해야할 지, 무언가를 파묻은 흔적이지.


 호기심이 든 얀순이는, 정원사를 불러 흔적을 다시 파내보라 명해.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건, 어느 양철 깡통이었어. 보기 드문 물건이지만, 무언갈 보관하는 용도로는 안성맞춤인 물건이었지. 이걸 누가 파묻은걸까? 얀순이는 그 사람에 대한 무례를 무릅쓰고 깡통을 까보게 되지.


 거기 안에는 빛 바랜 반지 하나와, 엄청나게 두터운 수첩 하나가 있었어.


 수첩의 표지에는 작게 얀붕이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지.


 얀순이는 가족은 커녕, 유품으로는 여벌의 집사 옷밖에 남은게 없던 얀붕이가 이런걸 숨겨두었다는거에 기뻐하며, 유품 수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지.


 수첩은 일기였어. 그리고 그 일기는, 얀붕이의 고뇌와 아픔, 외로움, 속앓이, 분노, 좌절, 증오, 사명감으로 가득 찬, 얀붕이의 속마음 그 자체였어.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진 얀붕이,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얀순이의 집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첫장을 읽으며 어떻게 날 알았을까? 라며 궁금해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얀순이는 얀붕이가 이해가 가. 그리고 두통과 함께,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지. 오만하게 그게 당연하다 생각하는게 아니라, 가슴 깊숙히 사랑하는 이의 헌신에 감사함과 함께 당연함을 느끼는, 그런 따스한 감정이었지. 얀순이는 얀붕이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보다, 자신의 이런 감정에 당황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황태자 한 명 밖에 없는데, 얀붕이에게는 어째서?


 얀순이는 홀린 듯, 얀붕이의 일기를 읽어가. 그리고 두통이 점점 강해지며, 기억이 점차 돌아오게 되지.


 전생의 연인,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자신. 이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 불연듯 찾아오는 좌절과 분노감. 이런 구렁텅이에 자신을 밀어넣은 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 영원히 자신의 곁에서 맴돌며 속삭이는 외로움.


 그리고, 그 모든걸 꾹 눌러 삼키게 만드는 단 한가지 이유. 사랑.


 '이 모든걸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잊지 않는다. 날 위해, 그리고 사랑했던 그녀를 위해', 라는 절로 일기는 끝나.


 얀붕이는 홀로 자신과 세계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던거야. 얀순이는 일기를 덮을 무렵, 오열하고 있었지. 모든 기억이 돌아왔거든. 이제서야 이해가 가는거야. 자신에게 처음부터, 그리고 한결같이 친절했던 이유를. 가끔 얀붕이가 죽을도록 외로운 표정을 짓던 이유를. 사랑에 대해 상담할 때, 얀붕이가 기대와 절망, 그리고 슬픔이 섞인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황태자와의 데이트를 쫑알거리는 그녀의 말을, 차마 슬픈 표정으로 들을 수 없어 억지로 웃던 이유를. 마지막에 홀로 도망치거나 숨어도 되었을 때, 그녀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진짜 이유를. 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랬던거야. 그렇기에 도망치지 않았고, 도망칠 수도 없던거지.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얀순이에게 말을 걸지.


 자신은 신이며, 얀붕이와 얀순이를 여기로 보낸 장본인이라고.


 얀순이는 신에게 따져 물었어. 왜 그리도 그에게 잔인하게 굴었는지. 신은 그저, 얀붕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해. 그리고 놀라웠다고 말하지. 얀붕이는 마음 속으로도  단 한 순간도 얀순이를 배신한 적이 없었어. 인간의 사랑이 이럴 줄은 몰랐다는거야. 플롯을 뒤틀어서 원래 예정된 죽음마저 빗겨나가게 하는 솜씨는 감명까지 받았다고 말하지.


 그리고 얀붕이의 그런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얀순이에게 선택지를 하나 주기로 했데.


 기억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 기억이 지워진 얀붕이를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기억을 지우고, 황태자와 뱃 속의 아기와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말이야.


 그리고 얀순이는 얀붕이를 사랑하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고, 신은 그럴 줄 알았다며 미소를 지어.





 그렇게 얀순이는 얀진회로 풀가동으로 얀데레로 진화하게 되고, 황태자도 뭣도 전부 갈아버리며 세계관 최강자로 군림하지. 그렇게 새로운 제국의 초대 여황제로 등극하게 된 얀순이. 그리고 왜인진 모르지만 하찮은 평민 출신의, 자신을 계속 보좌한 집사 얀붕이를 남편 삼으며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되지.


 뭐, 어렴풋이 기억을 갖고 있던 얀붕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프로포즈를 한 번 거절했다가, 얀순이에게 납치 감금 착정 야스 수어번 돌려지다가, 기억 속의 여인이 전생 얀순이라는걸 알게 된 얀붕이가 다시 고백하면서 끝났다는건 비밀이야.


 

 



 역시 남자는 한 사람밖에 사랑 안하는 찐 순애보가 진짜지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