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천재, 라고?”

“네 교수님, 얼마 전에 사고를 당했다는데 그 뒤로 숫자가 눈앞에서 보인다는군요.”

흥미로운 일이다. 후천적 서번트 증후군.

내가 연구 중인 논문에 실릴만한 완벽한 실험체.


“연락하도록. 거기 병원장이 아마 박찬수였지? 내가 밥 한 번 산다고 전해줘.”

“그럼, 만나 뵙겠다는 건가요?”

“말로 해야 알겠나?”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이만, 가보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의자를 빙글 돌린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영재. 최고의 대학. 조기졸업. 교수. 

이번 논문만 마치면, 세계적 명성도 거느릴 수 있겠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허무한 걸까?


그와 동시에 나도 어쩔 수 없는 연구자라 흥미가 일었다.

후천적 천재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인류가 보지 못한, 너머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까?

만나보고 싶다. 


조교가 가져온 보고서를 한 눈으로 흘기며, 눈으로 그녀의 인생을 그려본다.


서아라.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한 학교를 다니는 소녀.

가스 노출이라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불운한 소녀.

신기하게도 뇌의 손상이 지적 장애가 아닌,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된 특별한 소녀.


재미있다. 어찌 이리도 신기한걸까.

보고서 속 사진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찍혀있었다.

“부디, 그렇게 남아있어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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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는 듯한 날씨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때리며 지나간다.


“약속이 오늘이었지?”

“그렇습니다. 오늘 교수회의 끝나고 병원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그래, 어찌 시간이 이리 안가는지. 그녀는 잘 있고?”

“그게,, 나머지 가족이 전부 사망하여, 상심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말하는건 뇌는 건강하냐. 이거지”


“아, 가족이 죽은게 충격이 컸는지, 조금 방향이 변한거 같습니다.”

“방향이라니?”

“수학적이 아닌, 감성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실책이다. 더욱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아니지, 아니야. 괜찮아. 


“감성적이란게 어떤 식으로 된거지?”

“사람의 색깔이 보인다합니다.”

“자세하게."

"그게... 사람의 선악이나 감정의 변화가 명확한 색으로 보인다고...”


“말이 되나? 증명은?”

“실험해보았는데, 거짓말 같은 감정의 동요는 바로바로 맞추고, 정재계 인물 중 비리가 있는 인물을 그 사람의 배경을 모른채 확인한답니다.”

“그 외는?”

“애가 많이 힘들어해서 중단했다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안내해.”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진다.

흥미로운 일이긴 하다. 흥미로운 일이나, 말을 저는 조교나, 예상이 빗나간 일에 대한 짜증은 들뜬 기분을 강제로 가라앉혔다.

일단 만나봐야 안다. 

과연 그녀가 나의 슬럼프의 열쇠가 돼 줄 것인가.

아니면 그저 헛수고인 시간낭비였는가.


...


병실의 문을 열자 순백의 머릿결이 바람에 흩날린다.

티 없을 맑은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너무나 깨끗해, 말을 머뭇거리게 했다.



“반갑다. 카이스트 뇌과학 교수 이재호라고 한다.”

“.. 회색”

“뭐?”


“아저씨는, 나쁜 사람인가요?”

"말의 의미를 모르겠군”

아저씨라니? 교수직을 달고는 처음 들어보는 호칭인 것 같다.


“순수한 과거와 달리 부와 명예만을 쫓아가다가 제동을 걸고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네요.”

“교수는 그런 직종이 아니야.”

“‘교수’는 아니죠.”


“쓸데없는 잡담은 넘어가고 본론만 말하지. 감정을 읽는다는게 대체 뭔가?”

“글쎄요, 과연 뭘까요?”

“나는 말장난하러 온 게 아닐세.”

“저도 말장난 하는게 아니에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평행선을 달리는 문답에 말을 잃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궁금하다. 

색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너의 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피곤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너, 내가 누군지 알고...!”

“몰라요, 모르니깐 나가주세요.”


그녀의 옆에서 병원장이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쩔쩔맨다.


“.. 시간만 낭비했군.”

기분이 상해, 고개를 돌리고 문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려는데, 그녀의 말이 발걸음을 잡는다.


“계속 어둡게 되면 후회할거에요. 분명히.”


쾅-


.....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가 아직 불안정해서..”

“됐네, 볼 일은 다 끝났어. 나중에 연락하도록 하지.”

“아, 예! 살펴 가십시오!”


차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자꾸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저씨는, 나쁜 사람인가요?’

 ‘회색’

‘계속 어둡게 되면 후회할거에요, 분명’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서번트 증후군이 오면서 자폐가 같이 온 것인가?

초면의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로운 결과.

별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성격이지만, 연구를 위해서라면 괜찮을거 같다.


“박 비서”

“예! 교수님”

“박찬수 병원장이랑 다음 약속을 잡아줘.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에 대해 더 알아봐. 경찰 쪽 번호 넘겨줄 테니까, 상의하고.”


“젊은 나이에 어찌 그리도 인맥이 많으십니까?”

“질문할 처지인가?”

“죄송합니다!”

“주제를 파악하고 말하게. 괜히 낄데 안낄데 구분 못 하지 말고.”


나도 안다. 내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하지만, 35세의 나이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어도, 돈으로 기회를 살 수 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땀을 흘리는 나보다 나이 많은 기사를 보며 죄책감도 들었지만, 가슴 한켠으로 밀어넣었다.


.....


“결국은 변명이네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뭐?”

다음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말을 하였다.


“역시, 아저씨는 그쪽이랑 어울리지 않아요.”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아니요, 아저씨도 알고 있어요.”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채 미소를 짓는 그녀.


“남의 감정과 생각은 술술 읽으면서 정작 너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군.”

“이제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셨나요?”

“뭐든지 아는 체 말하지마라.”

“아는 체하지 않아요. 알고 있는 것일 뿐.”


숨이 막히는 기분에 찌뿌둥한 몸을 움직여 병실을 본다.

간략하게 정돈된 병실이 기분이 나쁘다.


“병문안 오는 친구는 없는 거냐?”

“어머, 놀리는 건가요?”


여전히 어느 감정도 담기지 않은, 놀람의 뜻의 문장.


“아닌 걸 알고 있지 않나.”

“뭐, 뇌가 망가진 신세라. 친구도 떠나버렸네요.”

“농담이라면, 재미없는 이야기로군.”

“티났나요?”


혀를 빼꼼 내밀며, 표정을 지어보려하지만, 잘 지어지지 않는다.


“.. 다시오지”


이상하다.

전혀, 의미도 없는 만남에, 도움도 안 되는 대화.

처음 왔을 때의 목적도 잃어버린채, 주기적으로 그녀를 만나러간다.


“또 오셨네요?”

“아무래도.”

“교수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한가한가봐요?”

"환자라는 직업도 생각보다 편한가보군.”

“설마요,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걸요?”


“돈은 있고?”

말을 하고 실언임을 깨달았다.

“아니, 내 말은..”

“풉”


응?

“푸하하하! 뭘 미안한 척해요. 아니, 진짜 미안해하네? 푸하하하하!”


처음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예의상 지어 보이거나, 억지로 짓는 웃음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미소.


“역시 아저씨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아요. 어때요? 이 기회에 전향하는건?”

“헛소리, 이만 가도록 하지.”

“또 봐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그러지”


마지막 그녀의 말이 조금 떨린 것 같은건 기분탓이였을까?


.....


"오늘은 웬일로 정장을 입고 오셨어요?"

"오전에 학회가 있어서."

"나쁜짓 했죠?"

"몰라"

"조금 더 검은색이 진해졌어요. 가지 마세요."

"중요한 안건이다."


"저 다음주에 퇴원해요."

"그래서?"

"후견인이 돼 주세요."

"하, 내가 왜?"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천재를 기르는 대가 치고는 싸지 않을까요?"


"참으로 당돌해서 어이없을 지경이군."

"아저씨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난 그렇게 생각안한다. 실없는 얘기였군."

"어디가세요?"

"학회."

"가지마세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리지 않았다.


.....


"또 오셨네요."

"..."

"조금 하얘졌어요. 무엇을 하셨나요?"

"이자는 두둑히 치를거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거지?

왜 이런 무의미한, 시간낭비일 뿐인 짓을 하려는거지?


"고마워요. 정말로."


감정의 변화가 미묘하게 생긴걸 느꼈다.

결국, 그녀도 나이에 맞는 소녀일뿐이다.

단지 조금 엇나가버린.


"그래서, 퇴원은."

"곧 할거에요. 교복을 입어봤는데, 어떤가요?"



"내게 무슨 감상을 바라는거냐? 난 눈에 보이는 실적 아니면 움직이지 않아."

"절 거둔거부터 조금씩 달라지는거에요. 다음엔 이쁘다고 해주세요."

"흥"

"전 햐얗게 된 아저씨가 더 좋아요."

".. 잔말 말고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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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피하셔야할 사람이에요."


그녀가 내 집에 머문지도 어연 일년이 지났다.

그녀는 생각보다 더욱 잘 적응했고, 여전히 감정은 비추지 않지만, 착실하게는 살아가고 있었다.


방금 집에 방문한 사람은 장애아동사랑지원회 이사장.

그녀의 기준이라면 가장 햐얘야할 사람을 피하다니?


"저 사람은 다르다."

"아뇨, 똑같아요. 내기라도 하시던가요."

"난 도박같은건 하지 않아."

"피, 겁쟁이."


"한동안 터치를 안했더니 막 나가는군."

"서서히 나아가는 과정이라 해주세요."

"부디 납득할만한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제 덕에 아군 적군 구분은 잘하고 있잖아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게 아닌가요?"

"정말로 나는 너의 뇌를 열어보고 싶다."

"글쎄요? 제가 죽으면 언젠가는?"


"사소한 잡담은 이쯤하고, 내일이면 기일이다."

"아.."

"찾아갈거냐?"

"네, 허락만 해주신다면.."

"안될 이유는 없지. 준비해놓아라."

"고마워요."


한 손을 그녀에게 살랑 흔들며 서재로 들어간다.

확실히 근 일년간 나도 내가 조금 바뀌었다는걸 느낄 수 있다.

더 이상 그녀에게 연구의 목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기에.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이것도 새로운 세상이라면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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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에 가는데 그런 옷을 입는거냐?"

"제 부모님을 제가 찾아뵌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세상엔 통념이란게 있는거다."

"아저씨는 그러니깐 그 나이 먹고도 인기가 없는거에요."


끝까지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그 꽃은?"

"아, 이제야 말해주시네요! 저는 눈까지 이상이 온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아빠, 엄마한테 보고할 꽃이에요."

"보고라니?"

"비밀."

"푸른 장미라니, 이상한 꽃을 가지고 보고하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같이 안가실거에요?"

"같이 들어갈 이유는 없지"

"뭐, 저도 혼자서 하고 싶은 얘기도 있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그거 말고 할 얘기 없어요?"

"뭐?"


"나올때까지 생각해주세요~"


후다닥하고 뛰어가는 그녀를 보며, 점 점 그녀의 특별함이 퇴색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일반 소녀와 같은 분위기.

이상하게 나는 이 상황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 그래서 그걸 변명으로 하신거에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제가 일반 소녀로 되느라 말을 까먹었다니, 그럼 제가 뭐 외계인이라도 됐을까봐요?"

".."

"교수라는 사람이 기억도 못해요?"


"예쁘네."

"!"

"옷 잘어울려"

"정답이에요"


여전히 미소는 짓지 않지만,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이 빙그르르 도는 그녀.


"부모님께 이야기는?"

"그럭저럭?"

"의문문이군"

"결과로 보여준다 했거든요."

"나에게 한 말과 동일하군"

"전혀 다른 결과지만요."

"알아서 해라"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리 보냐"

"아저씨 얼굴이요."

"말의 의미를 알잖나."

"재수없어요."

"그걸 교수라는 작자라고 하지."


"그러고보면 요즘은 그 이사장 안만나네요?"

"내기에서 지는건 싫어서"

"언제는 도박 안하신다면서요?"

".."


"전 아저씨가 참 좋아요."


두번째 웃음.

신기한 소녀이다. 분위기도, 뭣도 없는.

답을 바라지 않는 고백.


"생뚱맞군."

"아, 절 데려다줘서 좋다는게 아니에요! 알죠?"

"난 관심없다."

"그것도 알아요."


"의미없는 문답이였군. 결국엔"

"아뇨, 고백을 한 것 부터 성공이에요."

"세상에 누가 그것을 고백이라 할지 궁금하군."


"원래, 여자는 사랑을 쟁취해야하니까요."

"쟁취의 의미를 몰랐기 바라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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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풍의 옷은 좋아하시나요?"

"아무런 감정도 없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녀.

나날히 감정이 풍부해지는 소녀이다.

아니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지도.


"신기하게도 이번주 일요일에 일본풍 축제를 한다하더라구요"

"그래서?"

"알잖아요. 같이 가요."

"싫다."


"일정 없는건 다 확인 했어요."

"내 일정은 어떻게 아는건에?"

"김 기사님께 여쭈어봤지요?"

"에휴.."


"그래서 대답은?"

"달라붙지마라"

"대답은?"

"알겠다."


만족한듯이 물러선 그녀는 이어서 한 마디를 꺼냈다.


"그리고 옷을 입은 제게 할 말은?"

"이쁘네"

"잘 했어요"

"시꺼"


뾰루퉁해 있는 그녀를 등지고, 부엌으로 간다.

가려다가, 그녀가 설거지를 해 놓은 그릇을 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래, 눈치를 채면 모든 공간에 그녀가 녹아 있었다.


함께 밥을 먹은 부엌.

자신의 구역을 정하겠다며 어질럽힌 신발장.

비누를 만들어보겠다며 실패한 무언가가 가득한 화장실.

방이 너무 휑하다고 가져다놓은 꽃병.


구역, 구역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내 영역이 확고한 나로서도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을 만날때도 곁에 그녀가 있었다.

학회나 발표회가 있을때도, 따라붙어왔다.


만나야할 사람, 피해야할 사람.

그녀의 말을 따르기 시작한건 언제부터였지?


자기 주관보다 그녀에게 의지된 지금을 깨달았다.


"조금 멀어질 필요가 있겠어."


......


"사탕과자도, 금붕어 잡기도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요!"

"그런것치곤 말과 행동이 반대인데"


분명 말투는 흥분해 있지만, 그녀는 한없이 침착했다.


"이상해요"

"뭐가"

"아저씨요."

"난 항상 똑같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는 앞장서 걸어갔다.


사격, 인형 뽑기, 포장마차.

다야한 장소를 다녀도, 무엇을 먹어도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 심통이 났냐"

"변했어요."

"의미를 모르겠군"

"색깔이!! 변했다고요!!!"


이건 또 처음보는 풍경이군.

소리지르며 화낸다라.


"사람에 따라 색이 다른다 했지 않았나? 아니면 내가 다시 검은색이 된거일 수도 있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하늘색. 자신만의 색. 어째서에요,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색이 변한건가요?"


외치는 그녀의 소리는 내게 와 닿지 않았다.


"처음 봤을때부터 저희는 같은 색이였어요. 같은 부류의 인간!"

"그건 모욕이군"

"아뇨, 같아요! 세간이 보는 자신의 모습이 제일 중요해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는, 불쌍한 사람!"

"나를 그렇게 보고 있던 거냐?"


그러고 보면 지금 소리지르며 악을 쓰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감정이 없는게 아닌, 잔뜩 숨겨둔 행동.

문득, 첫번째 웃음이 생각난다.

그녀는 진심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지었었다.


"아저씨는 변했어요, 하얀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자신만의 색"

"잘된 일 아닌가? 유일하며 독특하니."

"왜, 제 말대로 움직이질 않은거죠?"

"역시 알게 모르게 유도하고 있었군"

"눈치를 챘던거군요.."

"어쩌다 보니."


"저희는 같아야해요. 아니, 같아요."

"세상에 같은 사람이란 없는거지."

"아저씨가 뇌를 신봉하듯이, 사고 이후로 저는 색을 신봉해요. 저희는 분명 같은 부류에요."

"이제는 달라졌다며?"

"근본은 하얀색. 돌아와요. 제 말을 따라주세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녀의 말을 일축한다.


"걱정마라. 사실을 알았다고 하서 지원을 끊지는 않을테니."

"이럴 수는 없어.."

".. 먼저 들어간다."


역시 너무 가까워진걸까?

거리 조절이 어렵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헤쳐가던 그녀에게 내가 너무 다가가, 다른 사람이 들어갈 튼을 못 준것 일 수도 있다.

자기 뜻대로 나를 움직이려 할 줄이야..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



"어때요? 잘 어울려요?"


축제에서 사건이 일어난지 어연 반년이 지났다.

그녀는 축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태도는 이전과 같이 동ㅇㄹ하게 했다.

지금도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마음 속은 아닐 것이다.


"단발로 잘랐네."

"첫 실연이였으니까요."

"근래 가장 좋은 소식이군"

"방법을 바꿨으니까요."

"방법?"


"어쩌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어떤 생각."

"어쩌면 교수님은 저를 만나지 않았던게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걱정마라. 어차피 별 영향 없으니."

"그래서 생각한거에요. 오늘부터는 아마 다를거니까요."


3번째다.

3번째 웃음. 

하지만 이번 웃음은 뭔가 이전과 느낌이 달랐다.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날 저녁, 내 기사가 대서특필이 났다.


[카이스트 뇌 과학 교수, 어두운 뒷모습을 파해지다!]


일명 이재호 게이트라 불린 사건은, 나와 과거에 연류된 정재계 인물은 물론, 내 폭언까지 싸그리 보도가 되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언론 쪽에서 연락이 온건 없었는데?

핸드폰이 불티나게 울린다.

밖에서는 어찌 알았는지 기자들로 웅성 거린다.


"기분이 어때요?"

"아..라..?"

"그러게 과거에 좀 착하게 살았어야지. 어정쩡하게 회색이니 아무도 안도와주는거에요. 차라리 착하게 살았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고, 아예 검은색이였으면 감싸고 들었을테니."


"네가 한거야?"

"네, 이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하나?"

".."

"그렇게 신경쓰던 명예도, 커리어도 다 사라졌는데 어떠냐고요!!!"

소리를 지르는 아라.


"내게서 어떤 반응을 원하는 거지?"

"무너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저씨가 너무나도 좋은데, 저희의 거리는 너무 멀어요. 역시, 좀 더 망가져서 서로에 맞게 돼야해요."


"아라야."

"오랫만이네요, 이름을 직접적으로 불러주신건."

"이런걸로 쓰러지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다."

"저랑 띠동갑이면서."


"난 너가 이해가 되질 않아."

"제 말대로 움직였어야했어요."

"그러면, 이 엇나간 관계가 유지됐을거 같니?"

"..."


"투정부리지마. 넌 어려서 착각을 하는거아."

"그놈의 나이! 내가 어리다고 아무것도 모를까봐요? "

"나는, 겨우 이런일로 상처받지 않아."


"크크큭... 크하하하"

미친듯이 목놓아 웃는 아라의 모습은 신기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다음 기사도 보셨나요? 어차피, 저 아니면 감옥이에요. 선택 잘 하셔야 할껄요?"


뭐?


[성폭행인가, 사랑인가? 이재호 교수와 소녀A의 관계는?]


"너 대체 무슨.."

"결혼할래요? 아니면 감옥갈래요?"

"이런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걸 교수인 아저씨가 가장 알고 있죠? 이미 사건이 터진 교수와 비련한 소녀. 세상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드디어 저와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보네요."

"나는 네게서 이런 결말이 아닌, 정상적인 결말을 기대했다. 평범한 소녀와 같이 웃으며 뛰어다니고, 대학을 졸업해 취직하는. 그런 미래를."

"저는 처음부터 아저씨만을 바라봤어요."


"자수할거다."

"네?"

"어느새부터, 너에게 정이 너무 들었군. 나와 어울리지 않은 짓을 너무 많이 했어."


"자수라니, 무슨 소리에요?"

"이번으로 네 기회는 사라진거다. 두번째는 없어."

"자수라니, 무슨말이냐고!!"


"다음엔, 네가 원하는대로. 숨기지 말고 살아봐라"

"내 말에 대답해!!"


악에 받치는 아라를 뒤로하고 문을 연다.

화려한 플레시와 기사들의 외침으로 눈이 멍하다.

"자수하겠습니다."

말을 하는 이 순간, 어찌 이리도 가벼운걸까.


어차피 치뤄야할 과거다. 성폭행은 빼고.

늦든 빠르든 어차피 언젠간 이뤄질 결말이였다. 


아라라는 소녀에게 정이 들었다.

그녀가 이 계기로 방향을 다시 틀었으면 좋겠다 바람을 하며 그간의 일을 상세히 고했다.


나답지 않다. 합리적. 실리적. 나답지 않다.

그런데도, 웃음이 맘추지 않는다.

나도 아라를 만나 변했으니까.


-----------


무슨 소리야. 자수라니?

나랑 행복하게 이어질 결말만이 남았잖아.


이러면 내가 마치, 내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가지마. 내가 바란건 이런 결말이 아니야.


.....


처음 그를 만났을때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였다.

피로에 찌든 얼굴과 대비되는 새하얀 빛.

나에게서 나는 색과 같은 색깔.


흥미가 돋아 그를 자극했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답게 곧장 넘어와서는, 재미있는 남자였다.


두번째, 세번째..

나에게 흥미를 잃지 않도록 최대한 신비한 연기를 했다.

알기 쉬운 사람. 나를 계속 찾아와주었다.

나에게 유도된다는 것을 모른채로.


네번째부터는 그와의 만남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이 눈으로 색을 본 순간부터, 사람이 구분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가장 밝은 하얀색.

그가 점점 좋아졌다.

멀리서도 그의 색이 보였다.


후견인을 핑계로 그와 좀 더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알면 알수록 좋은 남자.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나를 설레게 했다.

그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끊임없이 그를 유도했다. 나를 사랑하도록.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해주라고.

하지만, 그 모든게 갑작스럽게 수포로 돌아갔다.


최대한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명예, 지위 전부다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내게는 부족했다.

곧 내가 사회로 나갈 사간이 다가옴에 따라, 그를 떠나야 할 시간 또한 가까워졌기에.


그래서 그의 과거를 풀었다. 

망가지고 몰락하더라도,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나는 그렇게 된 그를 부양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어째서..

나를 두고 떠나는거야.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니, 무슨 소리야?


내가 잘못했잖아. 

너가 제일 좋아하는 모든걸 잃었잖아.

이게 무슨 결말이냐고.


미칠거 같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

난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널 사랑해.

널 너무 너무 사랑해.


하지만 이건 아니야

내가 그린 우리의 미래엔 이런 광경이 없었어.


가지마, 안돼!


기자와 얘기하고 있는 그에게 달려간다.

체면도 필요없다.

그에게서 떨어져도 괜찮아, 이런 결말은. 이런 결말은 안돼


"제가, 제가 다 지어냈어요!!"


숨이 차오른다. 놀란 표정의 그가 보인다.

씨익 웃어본다.

이게, 나의 감정. 진짜 감정. 숨기지 않아.


"성폭행, 제가 돈을 목적으로 그에게 접촉했어요!!"


플레시가 내게로 옮겨간다.

뭔가 말하려는 그의 입을 막는다.


"죄송합니다! 물의를 이르켜서, 죄송합니다!"


과거의 범죄는 연류된 정치인들이 하나씩 숨기다보면 곧장 사라질 것이다.

알기에 성폭행을 터트리기 전에 그를 협박했던것.


성폭행 건만 사라지면, 연구는 계속 할 수 있을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직도 너무나 사랑해.

사랑해서, 이제는 내가 떠날게.

이런 결과가 될 줄 몰랐어.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카메라들과 마이크가, 나를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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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만족해?"

"..."

"둘 다 아무것도 얻은건 없이, 다 잃어버렸네."

"미안해요.."


"사과만 하면 아무것도 안끝나. 사과말고 할 말은 없어?"

"사랑해요.."

"아직도 그 말이 나오냐?"

"너무나.. 사랑해요.."


"솔직히, 여기서 널 쫓아내도 문제는 없어. 알지?"

"흐윽.. 흑.."

"하아, 나 이제 취직 못 하는거 알지?"

"흑.. 흐윽. 미안, 해요.."


"너가 돈 벌어"

"흐윽. 죄송.. 흑.. 네??"

"나 먹여살리라고."

"네??"


"사귀자는거 아니다. 망친 내 인생 책임만 지라고"

"꼬시는건요????"

"우는거 연기였냐..? 알아서 해보던가"

"사랑해요, 정말로!"


"마지막 기회야. 진짜로."

"모든걸 바쳐서 사랑할게요, 사랑해요."

"반성은 한거지?"


이번에는, 제 뜻대로 움직여줘야해요?


푸른 장미의 꽃말이 불가능한 사랑에서 기적적인 사랑으로 바뀌었듯이, 우리도 하나의 기적이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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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종합 : https://arca.live/b/yandere/20758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