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21년 9월 6일은 '여군의 날'이며,
대한민국 국군 여군 창설 71주년 입니다.

'여군의 날'이 9월 6일로 정해진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여자의용군 교육대 창설일을 기준으로 두고있기 때문입니다.

해당 사진들은 당시 여자의용군을 재현한
마네킹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여자의용군의 시작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1기 여자 배속장교 출신 11명이 대전에 모여 여자의용군 창설을 결의하고 모병에 들어간 것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18 - 25세의 중학교 이상 학력 소유자, 미혼 여성들을 모집했으며,
500명을 선발하는 자리에 2,0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후 1950년 9월 1일 육군 2훈련소
예속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그후 대구, 부산에서 구두 및 필기시험을 실시했으며,

각각 250명을 합격시켜 총 500명을 여자의용군 1기생으로 선발합니다.

부산 성남초등학교 교정에서 입소식 거행 후 훈련에 들어갔으며,
이후 전세에 따라 교육대의 위치는 수차례 변경되었습니다.

여자의용군 교육대는 대대본부와
권총 중대 100명, M1 소총중대 200명,
카빈 소총중대 200명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주로 배운 것은 화기학, 전술학 과목 중
사격, 독도법, 야간훈련 등 보병 기초훈련 과정을 배웠습니다.

다만 500명중 중도 탈락한 9명을 제외한 491명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으로 됐습니다.

이후 여자의용군 2기생이 수료한 후인 1951년 1월 1기생과 2기생은 전방에 배치됐습니다. 

여자의용군의 구성은
의용군으로 참전하신 분들과 학생 신분으로 자원한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첫번째는 의용군으로 참전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계급장을 받았으며,
대부분 학생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학생 신분으로 자원한 경우입니다. 
비록 이분들은 군번은 없지만 전,후방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주로 행정업무 지원, 간호원, 선무 활동 등의 역할들을 해왔습니다. 

또한 직접 유격대 활동에 참가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전쟁 전 학생 신분으로 적 치하에서 지하투쟁을 하다 1‧4 후퇴 때 남하하여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마지막은 전투사단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주먹밥을 만드는 보급 활동 및 간호 활동에 참여한 여학생들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고 합니다.

여자 의용군 행정요원의 경우,
G1-G5와 사단장실에 배치되어 문서 연락, 필서 업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중공군 여성 포로병의 심문 때는 통역 업무까지 담당하게 됩니다. 

또한 정훈대대 활동도 있습니다.
여자의용군 중 31명은
임관 후 정훈 1, 2대대에 배치되어,
북한 지역의 완전 수복에 대비해 정훈부대를 편성하고, 그 지역의 선무공작을 계획합니다.

총 100여 명의 정훈 선무대원들이
황해, 평남, 함남, 강원 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파견을 위해 정훈대대를 모집합니다. 

이 분들의 임무는 북한 수복 지구에 들어가 공산분자들의 좌익성을 폭로하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계몽 선전하는 등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해당 정훈대대 내에서 여자의용군 비중이 컸으며, 그분들이 맡은 역할이 중대한데다 효과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전세의 변화로 후속 대원의 북한 지역 파견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국 후속 대원은 남한에서 대민 선무, 부대 정훈 등 다른 임무를 맡았습니다. 

비록 여성이며, 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신 여자의용군과 후방 지원을 하셨던 분들을 기억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