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15)

 

 

 

 

 

 

이런 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33.

 

그리운 풍경이었다.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모순된 두 감상이 부딪힌다. 

 

“여긴……뭐지?”

 

누구의 방이지? 꽤 호화롭고 멋진 방이었다.

 

감바나무로 만든 가구들에, 바닥엔 붉은 카펫이 깔려있었다.

 

천장엔 마나로 작동되는 등불이 달려있었고, 벽에는 다양한 패턴이 어우러진

 

벽지가 발라져있었다. 본 적 없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리운 곳이었다.

 

나는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이건……나인가? 흠, 어려졌네. 어째서?”


지금의 나는 7, 8살 정도로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건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그레이시아!”


그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이 여자는 누구지? 이 붉은 머리카락은, 이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아는 사람이다. 뭐야? 이 기억은 대체 뭐냐고?

 

“어머, 왜 우니, 우리 딸?”

 

아름다운 여인이 내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닮았다.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니다. 나랑 쏙 빼닮았는데. 어째서?


“……엄마?”


“너도 참. 이렇게 좋은 날에 왜 이리 울상이야?”


엄마.

 

이상하다. 잘못됐다, 분명 무언가가……아니야!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내겐 엄마가 없다.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따윈 없었다.

 

뭐지? 그럼 이 사람은 누구야? 나랑 이렇게 닮았는데, 엄마라고? 

 

대체 왜?

 

“머리가……아파……뭐지? 대체 뭐야? 당신은……나는……누구야?”
 
“그레이시아?”
 
“내 몸에 손대지 마!!”


나는 여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 이건 누군가의 공격이다. 누군가가 내 기억에 혼선을 주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이런 기억 따윈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까.

 

“왜 그러니? 어디 아픈 거야?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까?”


“당신 누구야? 내게 엄마 따윈 없었어.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 있어!?”


“무슨 일이야? 그레이스,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너답지 않게.”


이번엔 처음 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남자였다. 그리고……이번에도 나를 닮았다.

 

“당신은……아니야! 내 기억에 혼선을 주려는 속셈인가? 이건 누구 짓이야!?”


“그레이스! 어디 아픈 모양이구나. 일단 좀 쉬는 게 좋겠는데.”
 
“당신들은 누구야? 나는……내겐……이런 기억이 없어. 이건 누구의 기억이야?”


“우리가 누구냐고! 엄마랑 아빠잖니! 나, 올리비에 루벤록스. 여기는 네 아버지

 

헨슨 루벤록스. 너는 그레이시아 루벤록스-”

 

“루벤록스? 그건 뭐야? 그런 이름 따윈 들어본 적 없는데.”


“얘가 참 오늘 왜 이런담? 정말 괜찮은 거니?”


루벤록스. 처음 보는, 나를 닮은 두 사람. 처음 보지만 낯익은 저택.

 

지금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다.

 

첫째, 누군가가 내 기억에 간섭하여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둘째……어떤 이유로 나는 ‘이 시절’의 기억을 잃었다.

 

어느 쪽이건 평범한 상황은 아니다. 

 

“……죄송해요.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어머님.”
 
“다행이구나, 그레이스. 정말 다행이야.”


일단 지금 당장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다.

 

어느 쪽이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가 전부 같으니 말이다.

 

“따라오렴. 어서 가야지!”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내가 중년 남자, 헨슨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말해줬잖니. 일주일 정도 조반니를 만나러 간다고. 아, 조반니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

 

“조반니 얀데르손?”


“맞아! 아빠 친구 말이다. 일주일 정도 그의 집에서 머무를 예정이란다.”


조반니 얀데르손. 나의 아버지……여기선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건가?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그 친구가 왠지는 모르겠지만 너한테 참 관심이 많더구나. 하긴, 내 딸이지만

 

보기 드물게 예쁘긴 하지. 그 친구도 결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조반니 님은 여자를 가까이 두는 성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죠.

 

자, 여보. 어서 가요, 마부가 기다리다 잠들게 생겼어요.”

 

나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마차로 향했다.

 

“자, 출발!”

 

마차에 올라탄 뒤엔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다만 대화의 주제는 무도회니 연극 같은 시시한 이야기여서 정보 수집엔

 

딱히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6시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뭐지? 이보게, 토미. 무슨 일인데 멈춘-”


그 순간, 검이 마차를 뚫고 들어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여보!!”


“어?”


그 직후 문이 벌컥 열리며, 가면을 쓴 괴한들이 엄마와 나를 끌어냈다.

 

“여보! 아아,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큰 쪽은 필요 없다고 했지?”


“필요 없다고 했어. 죽여.”


서걱-

 

괴한들이 올리비에를 베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차올랐다.

 

뭐지? 이 감정은 뭐야? 어째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거지?

 

“너희는- 아니. 일단 너희 전부 죽이고 남은 놈한테 물어보겠어.”


손을 뻗어 놈들을 얼렸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어째서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왜 능력이……나는 분명, 태어날 때부터……어어?”

 

“두건 가져와. 자, 아가씨. 우리도 악감정은 없어.”


마지막 순간, 나는 그들 손목에 있는 ‘사자’ 문신을 보았다.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것이었다.

 

 

 

 

 

 

35.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은 존재한다.

 

그런 것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날 수 없다.

 

나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몇 번을 해도, 몇 번을 다시 해도 나는 결국 엄마를 구할 수 없었다.

 

마음이 부서진다.

 

몇 번이나 소중한 사람이, 엄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가.

 

……나는…….

 

“나는……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


비가 내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엄마를 업고 거리를 헤맸다.

 

어디로 가든 엄마를 치료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엄마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로선, 이토록 무능한 나로선 엄마를 구할 수 없었다.

 

만약 아버지였다면. 아버지는 분명 엄마를 구해줄 수 있었을 텐데.

 

“……얀센, 엄마가……아빠를 어떻게 만났는지 알아?”


“엄마?”


그 때, 등에 업혀있던 엄마가 말했다.

 

“너희 아빠는……정말……멋진 사람이었어. 위험에 빠진 엄마를 멋지게

 

구해줬거든. 그래서 내가, 콜록! 콜록……! 내가……당신은 내 영웅이에요……라고

 

했는데,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하길……자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라고……하더라.”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네가 해야만 하는 일에서 도망치지 마.

 

아버지는,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을……나는 떠올렸다.

 

“이미 알고 있잖아. 얀센,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나는…….”


“영웅이라는 건……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야.”


엄마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영웅인 거야.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영웅이야. 얀센, 지금 네가 헤야만 하는 일은 뭐야?”

 

“나는 엄마를-”
 
“이미 끝난 일을 후회하는 건, 내 아들은 그런 일 따윈 하지 않아.”


알고 있었다.

 

내가 어찌해도 이미 끝났다는 것을.

 

엄마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결국 나는, 아무도 구해주지 못한 무능한 바보라는 진실을.

 

“그렇지 않아.”


엄마의 목소리가 울음소리에 파묻혀간다.

 

“나의 아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는, 고작 이런 일로 무너지지 않아.”


“…….”


“후회하며 망설여도, 설령 이번엔 실패했더라도- 분명 나아갈 거야.

 

아무리 느리고 힘들어도 나아가는 것만은 멈추지 않아. 너는 내 아이니까.”

 

“난, 엄마……나는……왜 아무도 구해주지 못하는 거야?”
 
“……얀센.”


“왜 나는 이렇게 무능한 거야? 왜 엄마 한 명 구해주지 못한 거야! 나는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왜!? 왜 나는 영웅이 되지 못하는 거야!! 나는 어째서

 

아빠만큼 잘 해낼 수 없는 거야!? 대답해줘. 왜 나는 이렇게 약한 거야!?”

 

이런 내가 싫다.

 

아가씨처럼 어떤 적이든 쓰러트릴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어떤 문제든 척척 해결할 수 있었다면.

 

이런 내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더라면-

 

“너는 네가 할 일에서 달아나지 않는 사람이야.”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너는 언제나, 언제나……엄마의 영웅이었어.”


“…….”

 

눈을 뜨자, 어둠도 비도 사라졌다.

 

새하얀 빛이 저 멀리서 어른거렸다.

 

“얀센. 지금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은 뭐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뒤를 돌아볼지, 앞으로 나아갈지는……언제나 스스로 선택하는 수밖에 없어.”


나는 엄마를 놓아주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엄마.”


“응.”


“당신의 아들은, 저는, 나는. 분명 약하고 무능한 인간일지도 몰라.

 

하지만 후회 따윈 안 할게. 타협하거나 도망치지도 않을게. 설령 이 목숨이

 

다하더라도, 나는 나아가겠어. 끝내 실패하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겠어.”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보라고, 엄마를 버리고 갈 셈이냐고, 이제 와서 소용없는 짓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말로는 나를 흔들 수 없다.

 

“다녀올게, 엄마.”


“응.”


후회 따윈 하지 않아.

 

이미 죽어버린 목숨은, 끝나버린 일을 어찌할 순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부턴.

 

나는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간다.

 

 

 

 

 

 

 

36.

 

“……마법은 성공했고, 문제는 공주를 찾는 건데……이 성, 더럽게 넓은 게야.”

 

대체 방이 몇 개나 되는 게야? 으윽, 찾는데 3시간은 걸리겠구나.

 

이 몸은 복도를 거닐며 혹시 마법이 걸리지 않은 인간이 있나 살펴본 게야.

 

후회의 마법. 결계 내부로 들어온 모든 생물은 후회의 꿈을 꾸게 하는 마법.

 

그 인간이 가장 후회하는 기억을 꿈꾸게 하여, 강제로 꿈에 가두어 무력화시키는

 

이 몸의 마법인 게야. 아무리 강하고 날랜 자라도 일단 걸리면 자력으론 절대

 

깨어나지 못하는 게야.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후회하고야 마는 생물이니까.

 

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던 도중, 이 몸은 그를 발견한 게야.

 

“……얀센.”


그는 바닥에 엎어져 괴로운 듯 신음하고 있었다.

 

“이 몸은 분명 경고한 게야. 왜 여기 온 게야? 평범한 인간인 네가 할 수

 

있는 일 따윈 아무것도 없는데. 너는, 너는 착한 인간인 게야. 그러니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게야…….”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너는 무슨 말을 할까?

 

이 몸을 원망할까? 배신했다고 화낼까? 왜 그랬는지 추궁할까?

 

“비극적인 일인 게야. 우리들은, 저마다의 소중한 걸 위해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때론 죽일 수밖에 없는 게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따윈 없으니까.

 

“정말로 작별인 게야. 다음에 다시 만날 일 따윈-”
 
“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후회 따윈……하지 않아.”


“말도 안 돼……!”


얀센이 일어섰다.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불가능한 일이 내 앞에서 벌어졌다.

 

“불가능한 게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후회의 마법을-”


“지금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겠어. 나는 경비병……아니, 엄마의 아들이니까!!”

 

뭐지? 이 무시무시한 기백은……! 정녕 이 남자가, 내가 알던 그 멍청이란 말인가?!

 

“페르. 더 이상 네 멋대로 날뛰게 두진 않겠어.”


“얀센……!”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러나 분명, 이곳에서 일어난 일.

 

그 남자는. 경비병은 일어서고야 말았다.

 

 

 

 

 

 

 

 

 

 

표지 커미션을 넣을까 고민하는 중인데 이거 꿀잼 소설도 아닌데 괜한 낭비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소한 설정 이야기.

페르세프가 발동한 후회의 마법은 원래 자력 탈출이 불가능한 마법이다.

아무리 강하고 똑똑해도 일단 결계 안에 들어오면 100% 무력화당하며

탈출하려면 외부에서 누가 깨우거나 마법이 풀려야 한다.

얀센의 경우 일말의 후회도 남기지 않고 꿈을 부순 건데, 보통 사람은 못할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