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12시가 지난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바로 몇 시간 전에 온 메세지야. 


아직 까지 저걸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아. 평범한 친구라면 잘 지낸다며 금방 이라도 답장을 보냈겠지. 


하지만 저 이름을 보는 순간 등골에 오한이 서렸어.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들어봐. 평범한 동성 친구라면 야 뭐하고 사냐? 뭐하냐 요새? 처럼 편하게 물어봤겠지? 


근데, 잘 지내? 도 아니고, 잘 지내니? 야. 


보통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윗사람이 저런 식으로 말을 하곤 하는데, 내가 상대를 알고 있는 이상 그게 아니란 걸 아니까. 


나랑 동갑이니까. 게다가 자꾸 그 일이 지워지지 않아. 


벌써 2년도 넘게 지난 이야기라고. 왜 아직도… . 













막 성인이 시작되고, 사회로 흘러 나가야 할 무렵의 일이었어. 


집안 사정 탓에 대학은 포기했고, 곧장 취업에 뛰어들었지. 


그리고 주말엔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며 스트레스나 풀고, 한창 그럴 때였어. 


하지만 평일 저녁엔 늘 컴퓨터 앞에서 살았으니까. 


약속이 없는 날엔 주말까지도 늘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도 했으니 말이야. 


그때 한창 즐기던 게임에서 그녀와 처음 만났어. 


온라인 특성 상 성별도 몰랐고, 당연히 남자처럼 친근하게 대화하다 보니 금세 친해졌지. 


같이 게임도 하고… 가끔은 아무 의미도 없이 사적인 대화도 하고. 


뭐 인터넷이잖아? 그러니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도 했었어. 


남들에게 꺼내기 어려운 말. 그래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니 반대로 생각하면 맘 편히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있었거든. 


뭐 집이 어쩌니 어째서 힘들다. 그래서 대학도 포기하고 바로 일이나 하고 살고 있다고. 


상대의 그 말 하나 하나가 거짓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말이야? 


단지 위로 받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떠들기도 했어. 


모든 걸 다 받아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는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크게 와 닿았는지 몰라. 


그야 그렇잖아? 평소엔 친구들에게는 못 꺼내는 이야기였으니까. 


만약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으면 분위기가 개판 날 게 분명하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가까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어. 


매번 내가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고, 서로의 고민을 털며 자연스레 가까워졌으니까. 


근데 문제는 그때 생긴거야. 


언니랑 싸웠대. 


그냥 뭐 단순한 자매끼리의 싸움이지. 


근데 그게 문제인 거야. 난 남자인 줄 알고 있었는데 상대가 여자라는 소리잖아? 


되게 흔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뭐랄까, 갑자기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어려워졌다고 해야 하나. 


내가 여자한테 쑥맥인 것도 있고, 지금까지 했던 말들 중엔 분명히 외설적인 말도 있었으니까. 


그냥 조금 당황스럽더라. 그래도 뭐 어쩌겠어. 알고 있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해야지.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그러지 않으려 해도 서로가 이성으로써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니까.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그런 제안을 받아들였어. 


전화번호를 알려 달래. 


뭐 내가 요새 잔업 때문에 바빠서 게임에 자주 못 들어오기도 했고, 아무래도 그녀와 대화하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늦게 자곤 했으니까. 


체력 관리 때문에 일부러 게임을 안 들어가는 날도 있었거든. 그러다 보니 먼저 그녀가 그런 얘기를 꺼낸거야. 


처음엔 물어봤지. 왜? 라고. 


그냥 뭐 게임 들어와도 대화가 주된 목표인데 이럴거면 굳이 게임에서 만나서 얘기를 할 필요도 없지 않냐고 하더라. 


뭐 어느 정도 납득이 됐지. 굳이 컴퓨터를 켜서 불편하게 게임을 메신저로 쓸 필요는 없다 생각했으니까. 


근데 그때 내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은 고작 이틀 만에 알 수 있었어. 


분명 잘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녀의 카톡은 끊기지 않고 계속 날아왔고, 잔다고 말을 하기에도 되게 애매한 상황이었거든. 


대화가 끊기지를 않았어. 이게 뭐랄까 설명하기가 되게 애매한데 어떤 대화를 해도 그녀가 말 한마디만 하면 


대화의 끝은 커녕, 아직도 중간을 달리고 있는 느낌? 


어쨌든 결국 그녀의 얘기를 다 들어 주거나, 내가 졸려서 쓰러지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거야. 


처음엔 그녀도 내가 피곤해서 그렇구나, 하며 이해해 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얘기를 하는 빈도가 늘어났어. 


혹시 귀찮아? 라고.


진짜 답답하지 이러면. 


그건 아니라고. 그냥 피곤해서 눈이 감기니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처음에는 이해해주는 그녀였지만 곧장 다음 날 그녀가 해결책을 들고 온 거야. 


일일이 터치하는 것도 귀찮으니 아예 전화로 하자네. 


그리고 진짜 졸리면 목소리에서 다 드러날 거라고. 


진짜 모르겠다 싶었어. 


이게 나한테 득이 될지 독이 될지 그 당시에는 몰랐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루 종일 대화를 하는데 대화 주제가 남아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할 얘기가 떨어져 이런 일도 줄어들 거라 생각했는데, 정답은 아니었어. 


처음에는 되게 어색했다? 매일 데이터 쪼가리만 보다가 직접 목소리로 대화하니 말이야. 


근데 그렇다고 대화가 짧아지나? 전혀. 오히려 반대였어. 


신 난 듯이 얘기를 꺼내는 그녀와, 그저 대꾸하기를 반복하는 나. 


당연히 금방 들켰지. 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 아니 근데 뭐 어쩌겠어. 난 진짜 할 말이 없는데 이제. 


그럴 때마다 졸리다는 핑계를 댔지. 그러니 몇 번은 넘어가 주더라고? 


근데 그게 줄어 들지를 않으니 미칠 노릇인 거야. 


물론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여자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지. 


카톡 프사도 봤었으니까. 여자는 사진을 믿으면 안된다고는 하는데 예뻤어. 


뭐 근데 상관 없는 일이잖아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만날 사이도 아니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 그냥 인터넷 친구인데. 그렇잖아? 


근데 빈도가 너무 늘어나니 솔직히 조금 피곤해 지더라. 


일하고 있을 때에도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은 울려댔고, 쉬는 시간이 되면 커피 한잔 하면서 폰이나 붙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요새 조금 시간이 없을거라 말하고 답장하는 간격을 상당히 늘렸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 와있으면 바로 답장하고, 출근한 뒤에 10시 정도에나 답장을 보냈고, 


그 다음엔 점심시간. 그리고 3시. 그리고 퇴근. 


난 솔직히 이것도 바로바로 대답한다고 생각했거든. 그야 그렇잖아.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폰을 자주 보겠어. 


여기까지는 그녀도 이해해 줬나봐. 하지만 문제는 저녁 이후였지. 


집에만 있을 걸 뻔히 아는데 답장이 늦으니 뭐가 그리 답답했는지 몰라. 


2~4개 씩 보통 쌓여있던 메세지가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10을 넘어갈 때 그 기분이 어땠는지는 아직도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결국 난 그때 처음으로 그런 얘기를 꺼냈어.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실제로 만나는 친구도 아닌데 그렇게 까지는 답장을 빠르게 못할 것 같다고. 


아직도 그때 내가 했던 말을 후회해. 


말이 저렇지 실제로는 그거잖아? 니가 내 친구나 애인도 아닌데 내가 뭐 때문에 그리 칼답을 해야 하냐고. 


진짜 이렇게 치자 마자 스크린을 닫기도 전에 1이 사라지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기억나. 


곧장 오는 답장이 뭐였는지 알아? 


어디야? 라더라. 


그땐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퇴근 하고 이제 집 왔다고 했지.


근데 바로 날아오는 답장이 말이야? 



그거 말고, 집 어디냐고. 



진심이냐고 물었어. 


알아서 뭐할 거냐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소릴 하더라. 그런 이유로 날 멀리할 거면 실제로 만나보고 생각하면 되지 않냐고. 


그럼 진짜 친구처럼 대해줄 거냐고. 


뭐 여기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쩌겠어? 미안하다고 했지. 


당연히 너도 친구고,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고 말이야. 


웬일로 칼답이 아니더라. 


1이 사라지고 1분? 넘게 지났는데 답장이 안 오길래 화면을 껐지. 


저녁이나 먹으려 부엌으로 갔다가, 대충 컴퓨터가 있는 책상 위로 옮겨 왔는데 답장이 와 있는 거야. 



친구 이상은? 



머리가 얼얼했어. 


그리고 다시 그런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었지. 


당연히 그녀가 이렇게 쌔게 나올 줄도 몰랐고 내가 이렇게 거절하고 있는데 더 들어올 생각을 할 거란 생각은 못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진짜 만난 사이도 아닌데, 그 이상이 어떻게 될 수 있냐고 말이야. 


지금 상대가 하려는 말은 의미는 그거잖아? 연인.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고, 곧장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 



만나자 그럼.



오히려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때보다 더 섬뜩하네. 


난 이때의 내 대답으로 지금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도대체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실제로 만나보고, 같이 걸어보고 얼굴 보며 얘기도 해보면 뭔가 달라질게 있을 줄 알았던 걸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나한테 실망해 이 관계를 끝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알았다고 했지. 그래봐야 뭐 빨라도 한 달 뒤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쨌는 줄 알아? 


바로 그 주 주말에 오겠대. 


자기 지금 종강 했다고. 


당황했지 엄청. 성인이 되고 외모 관리도 소홀히 했었고, 정확히 말하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 말이야. 


도대체 누가 게임에서 만난 이성을 실제로 만나보겠어? 그런 일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고. 


그때가 아마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 그랬을 거야. 


진짜 시간이 촉박했지. 뭐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하루 하루가 이유 모를 긴장? 불안감에 찌들어 있었어. 


평소처럼 오는 그녀의 메세지에는 뭔지 모르게 애정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였고, 아니 어쩌면 진짜 그런 대화였을 지도 모르지. 


나는 상대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 지는 지금까지 대화를 하면서 어느 정도 흘려 들은 것이 있으니까 담아 두려고는 하는데, 


그녀는 정확하게 네가 그거 좋아하니까 그것도 해보고, 지도를 봤는데 거긴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진심이구나 싶었지. 지도까지 보고 자기가 코스를 짜려고 했다니까? 


아니 뭐, 솔직히 고맙긴 했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많이 이상했어. 


그리고 약속 당일이 되어, 기차를 탔다는 그 티켓 사진을 보여주며 조금만 기다리라던 그 메세지가 아직도 기억나네. 


꽤 거리가 있긴 했으니까. 아침 일찍 그렇게 출발을 하더라고. 


당연히 아침부터 나는 천국 같은 지옥을 경험했어야 했지. 옷도 나름 신경써서 입어보고, 정리하지 않은 머리도 정리해보고. 


그냥 내가 미쳤다 싶기도 했어. 웃겼어 그냥 그땐. 


그래도 나름 여자를 만나러 가니까 기대도 했지. 


기차에서 찍은 그녀의 셀카를 보고 두리번 거리다, 아 저 사람이구나 해서 빤히 바라보니 웃으며 날 향해 다가오더라. 


내가 그때 어떤 표정이었을지는 아직도 나도 모르겠네. 


그냥 모솔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었겠지 뭐. 


옷차림에 화장까지 보니 신경 쓰고 왔다는게 느껴질 정도더라. 


예쁘다고 한마디 해주니까 웃으며 바로 팔짱을 끼던 건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있긴 하네. 


그렇게 미리 생각해뒀던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었지. 


실제로 보니까 어떠냐던가. 보고 싶었냐던가. 


그냥 뭐 적당히 대답했어. 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연인처럼 보일까? 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걸었으니까. 


반 쯤 혼이 빠져있었어 그때는 그냥. 


여기까지 보자면 그저 남들이 질투할 법한 연애가 시작되는 단계인데,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꺼낸 그녀의 말이 시작이었지. 



" 나 오늘 어디서 자? " 



난 내가 그렇게 빨리 눈을 깜빡일 수 있나 처음 알았어. 


고개는 여전히 정면을 보면서 걷고 있었으니까 들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진짜 당황했거든. 


그야 오늘 바로 돌아갈 줄 알았으니까. 



" … 표 예약 해줄까? " 


" 아니, 나 안 갈 건데. " 


" 그럼 호텔 잡아줄까? " 


" 너는? " 



이젠 눈도 안 깜빡여지더라. 


그냥 걷기만 할 수 있는 로봇처럼 계속 걸었어. 


아무 말도 못했어. 페이스에 이미 말려들었으니까. 


무슨 대답을 하던 그녀가 진심이란 건 이미 말투로 알 수 있었으니까.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그 목소리는 수 많은 통화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처음 본거지.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그대로더라. 


이게… 진짜 무서웠어. 


농담이냐고 몇 번을 물어봐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대답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불안에 떨며 저녁이 되어 해가 질 무렵, 다시 한번 물었지. 


어디서 잘 거냐고. 



" 너 혼자 산다며. 나 그래서 집에는 여행 갔다 온다고 말했는데? " 



이때 알아차려야 했을까. 나는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놨고,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의 의미를. 


울며 겨자먹기로 그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고,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지. 


집은 치워야 했으니까. 


원 룸 이었던 지라 가구는 별로 없었고, 그냥 널브러져 있던 옷들이 생각났거든. 


뭐 딱히 숨길 건 없었으니까. 금방 된다고 그녀를 문 앞에서 기다리게 했어. 


그렇게 현관을 닫고 집에 들어오니 머리가 어지럽더라. 


지금 동정인 내 집에 여자가 온다는 사실에 그냥 혼란 그 자체였어.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급하게 옷을 세탁기에 때려 넣고 문을 열어 그녀를 들였지. 


신발장을 한번 쳐다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라. 


어쨌든 들어오라 하고, 고민에 빠졌지. 


이제 뭐해? 재워? 아니, 아직 그럴 시간은 아닌데. 


아 씻고 오라고 해야 하나? 


그러던 와중에 먼저 그녀가 그런 소릴 하더라. 



" 먼저 씻는다? " 



그냥 내가 미쳐서 헛 것이 들리나 싶었는데. 이게 그게 현실인데 어쩌겠어? 


그녀를 보내고, 수건은 화장실에 있으니 괜찮겠고, 잠옷으로 입을만한 옷이나 챙겨서 화장실 앞에 내려두었지.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어. 오늘 하루 확인하지 않았던 카톡이나 페메나, 그리고 머리나 비우려 유튜브나 보면서 말이야. 


조금 시간이 지나 그녀가 나왔고, 옷은? 까지 말하던 그녀는 내가 미리 꺼내둔 옷을 봤는지 작게 웃더니 다시 문을 닫더라. 


그제서야 나도 잠옷을 찾아 꺼내니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왔어. 


젖은 머리를 꾹꾹 수건으로 누르면서 내 옷을 입고 있는데, 그냥 조금 많이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 


드라이기 위치 알려주고 나도 욕실로 들어갔지. 


샤워하고 나간지 얼마 안되어 따뜻한 공기에 내가 쓰는 바디 워시와 샴푸 냄새. 그리고 옅게나마 그녀의 체취도 났고. 


내가 쓰던 바디워시가 이런 향기였는지 긴가 민가 싶을 정도더라. 


어쨌든 머릿속이 진짜 복잡했어. 


진짜 이러다가 하는 거 아니냐고 망상을 하니까… 뭐, 한 발 빼고 나왔다. 어쩔 수 없었어. 남자니까?


근데 그래도 팔팔하더라. 평소에 좀 가혹하게 해둘걸 싶기도 하고, 어쨌든 화장실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니 


꽤 시간이 지났는지 드라이기 소리는 안 들리고 마우스가 딸깍이는 소리는 조용히 들리더라. 


이때 큰일 났다 싶었어. 


카톡이니 페북이니 전부 로그인 한 상태였고, 검색 기록엔 남자라면 없을 수 없는 그게 있었을 테니까. 


애써 당황을 감추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날 한번 흘기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그리고 내뱉더라. 



" 있잖아.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해? " 


" 난 네가 많이 좋고,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 같은데. "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고백이잖아?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근데 알잖아. 서로가 너무 멀리 있다는 걸. 


그리고 아직 전부 다 알지 못한다는 걸. 


그냥 그녀를 떠보고 싶었던 건지, 그때 그게 내 진심이었는지. 



" 우리 이제 처음 만난 거잖아. 조금 더 알아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 



"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 



" …… 오늘 처음 봤는데? " 



"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대화들은 다 환상이고? " 



" 아니 그건 아닌데… . " 



" 아니면 내가 싫어? "



한마디를 안 지려 하더라. 그게 진심이었기에 그렇겠지 아마. 


여기서 더 밀어내면 그건 남자가 아니잖아. 고자새끼지 뭐. 


아니라고 대답하니까 그제서야 빙글 웃더라. 


화장은 지운 것 같았는데, 컬러 립밤이라도 발랐는지 입술이 연하게 빨갛더라. 


그게 그때의 나한테는 너무 자극적이었어. 



" 그럼 우리 사귀는 거지? " 



이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상황이 변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마 고백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연락이 올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만난 지 하루 만에 사귀고,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했어. 


그날 밤은 유난히도 길었네. 


관계 중에도 몇 번이고 그녀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지. 


근데 그때 했던 말 중 하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네. 


혼자 하는 것보다 기분 좋지? 라고. 


뭐 어쨌든, 그렇게 아침이 밝고 침대 위에서 나체의 남녀가 있단 게 당시에도 실감이 잘 안나더라. 


일요일이니까. 예상 못한 상황이었지만 자취 처음에나 몇 번 해 먹었던 토스트를 했어. 


귀찮아서 잘 안 해 먹었지. 그냥 식빵에 누텔라만 발라 먹어도 맛있는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덩그러니 줄 순 없었으니까. 


기름 튀기는 소리에 그녀도 나왔고, 고갤 돌아보니 싱긋 웃더니 곧장 뒤에서 날 껴안더라. 


그래 뭐. 마냥 좋았어. 진짜 여자친구가 생겼구나 하고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하루만에 이렇게 친해질 수 있구나 싶기도 했고. 그냥 다 신기했네. 


며칠 전 고민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평화롭게 대화나 나누고, 씻고 또 밖에 나가서 놀고. 


그렇게 해질 무렵이 되어, 서로 아쉬운 기색이 보여야 했을 텐데. 그게 아니었어. 


나만 아쉬워하는 말투와 표정이었던 거지. 


뭘까? 이게 다 장난일까? 싶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니 응? 하고 날 바라보더래. 


집에 갈 시간이라고 말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더라. 



" 아직 안 갈 건데? " 



그제서야 안 거지. 그때 그녀가 했던 말들을. 


집에는 '여행' 다녀 온다고 했단 걸. 


하루 자고 온다는 말이 아니었다는 거를. 


기쁘기도 했지만 걱정도 됐고, 시간이 지나니 또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잖아. 



" 나 평일에는 출근해야 하는데, 그때 동안 뭐하게? " 



" 사랑하는 사람 기다리는 게 어렵겠어?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난 진짜 두근거렸지. 


그리고 다시금 내 집에 돌아왔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별 별 질문을 다했어. 


자위는 얼마나 하고, 컴퓨터에 깔려있는 다른 게임은 아직도 하냐는 둥. 


그때는 정확한 의미를 몰랐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소름 돋네. 


그때 자기 전에 한 번씩 한다는 말에 그녀는 매일 밤마다 나와 관계를 맺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게임을 하냐고 물었던 건, 자기와 같이 하지 않는 게임에 얼마나 시간을 썼냐고 묻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지? 


맞아. 그녀는 다음 주가 될 때 까지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 


이렇게 오래 지나도 되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미칠듯이 쌓여있더라. 


뭔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지. 


어쩌면 내가 납치한 입장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해봤고,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을 그녀의 부모님이 생각났으니까. 


근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서로 고민을 털어놨기에 나도 어느정도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거든. 


진짜 소름 돋는 게 뭔지 알아? 


그녀는 어릴 적 이혼해서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고, 아버지가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잦다고 했단 말이지? 


근데, 그녀의 핸드폰엔 엄마 라고 저장된 연락처로 부재중이 와 있던거야. 


그녀는 샤워하러 들어갔고, 나는 침대 위에 올려진 그녀의 핸드폰을 보면서 진짜 멘탈이 나갈 것 같았지. 


도대체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헷갈렸으니까.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들에 거짓말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와 닿았을 때 당연히 그녀가 한 모든 말이 진실일 수는 없겠다고 


의심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동정심을 위해서? 자신을 보듬어 주길 원해서? 


어쨌든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그녀가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이젠 옷이며 속옷이며 전부 여기에서 새로 산 것들로 입고 나와야 할 그녀가 알몸으로 그대로 내게 몸을 던져왔어. 


머리는 복잡해도 몸은 솔직한 내가 미웠다. 


어쨌든 그렇게 아침이 밝고, 또 출근을 하고 일을 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불안감이 사라지지가 않더라. 


그렇게 일에 집중도 못하고 대판 깨져서 집으로 돌아오니 그녀는 부엌에서 제육 볶음을 하고 있었고, 


핸드폰 스크린이 켜져 있는 걸 보니 날 위해 레시피를 보면서 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금요일이었고, 이번 토요일은 쉬기로 마음먹었던 날이라 세탁기를 돌려 달라 부탁하고 그녀의 핸드폰을 잡아서 


샤워를 하러 가는 척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갔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고생했다고 베란다로 걸어갔고 나는 화장실에서 그녀의 잠금이 풀린 핸드폰으로 


이것 저것 살펴보기로 마음 먹었지. 


충격먹었다 진짜. 


부재중이 수십 통은 넘게 와 있었고, 전부 그녀는 받지 않은거야. 


엄마, 그리고 아빠 라고 적혀있는 연락처와 언니. 그리고 친구들처럼 보이는 그 이름들까지. 


어떻게 해야 할까. 진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고민하다 나는 그녀의 연락처에서 언니로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세면대 유리에 적기 시작했어. 


그리고 때 마침 바깥에서 세탁기가 잘 안된다며 부르던 그녀 덕에 타이밍 좋게 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에서 나왔지. 


원래 그 자리에 돌려두고, 팬티만 입은 채로 세탁기를 눌러 다시 화장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고, 


그런 와중에도 내 몸을 손가락으로 쓸어가는 그녀가 이젠 무섭게 보이더라. 


계속 샤워를 하면서 하얀 연기로 뒤덮여져 가는 세면대 유리에서 미약하게 나마 남아있는 번호를 계속 머릿속으로 외웠고, 


샤워가 끝나 나는 손바닥으로 유리를 몇 번 문대고 욕실에서 나왔지. 


옷을 입고, 그녀가 해준 제육볶음과 함께 밥을 먹고. 


항상 미소가 가득한 그녀와 달리 내 표정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도 그냥 일이 힘들었다고 밖에 할 수 없었어. 


밥을 다 먹고, 양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핸드폰을 들어 잠깐 바람좀 쐬고 오겠다고 했지. 


평소에도 자주 담배를 피러 자주 나갔으니까 별 의심 없이 날 보내던 그녀였어. 


그럴 때마다 담배는 끊자며 장난스레 얘기하던 그녀였지만, 결국 아직도 끊지는 못했네. 


그렇게 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고 타 들어가는 담배는 내 심정과 똑같았지. 


언제 불이 스러지고, 재가 될지 모를 정도로 가슴이 심란했으니까. 


결국 난 필터까지 내려온 재를 털어내고, 전화를 걸었어. 


그녀의 언니 로 저장되어 있는 번호로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여보세요? 라며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내게 몇 번이고 여보세요 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범죄자 취급을 받을 걸 무릅쓰고 말해야만 했지. 



" 혹시 ㅇㅇ이 언니 되시는 분이세요? " 



" …… 맞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아세요? " 



그렇게 시작된 통화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보다 더 긴장됐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처음엔 믿지 않는 그녀의 언니였지만,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니 그제서야 믿는 눈치더라. 


그리고 평소에도 그런 성격이라 어느정도 납득은 간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언니였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더라. 


웃는게 웃는게 아니라고. 분명 걱정했겠지.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핸드폰 너머에서 그녀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다급하게 전화를 바꾸는 듯 했어. 


당연히 난 조금 상황을 풀어서 설명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다행이라며 말은 했지만 곧장 그런 소릴 하시더라. 


당장 돌려보내 달라고. 아버지라는 사람이 화가 많이 나 있다고. 


조금은 겁에 질려있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이야. 


내가 남의 가정에 너무 깊이 관여한 걸까 싶기도 하더라. 


그래도 의심 하나 없이 말을 믿어주고, 욕 하나 없이 전화를 이어가주던 그녀의 어머님과 언니분은 아직도 고맙게 생각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실종 신고를 했을거란 말은 아직도 무섭네. 


그런데 아직 문제가 남아있잖아? 그녀를 어떻게 돌려 보낼지 말이야. 


그냥 가라고 하면 가지 않을게 뻔했으니까. 그래도 말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분위기상 말을 듣지는 않을 것 같았어. 


돌아갈 생각이 있었더라면 부재중이 그렇게 쌓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며, 현관을 열고 들어서니 웃으며 날 반겨주는 그녀를, 난 도대체 어떻게 봐야만 했을까? 


왜 평소보다 늦었냐는 질문에 담배 냄새 빼느라 오래 걸렸다고 말했지. 


그 거짓과도 같은 배려에 용서하듯 웃던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나. 


그리고 말했지. 


네가 살던 지역도 둘러보고 싶다고. 모처럼 주말인데 안내해주지 않겠냐고 말이야.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굳었어. 


날 보내려는 거냐고. 


그때 말을 조금 더 돌렸어야 했는데. 


나는 혼신의 연기를 해야만 했지. 


나중에 너와 결혼도 해야 하는데 너희 집 근처 지리도 모르고, 맛집도 모르고, 선물 가게도 모르는데 미리 알아두면 좋지 않겠냐고.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는데 어떻게 보내려고 하겠냐고 말이야. 


그말에 넘어간 건지 그녀는 조금 의미 심장한 미소로 웃더니 알겠다고 하더라. 


다행히 주말이니까, 시간도 적당하다 싶었어. 


그렇게 밤이 되고, 피곤하다며 관계를 피하고 아침이 밝았지. 


아침 일찍 준비하는 나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그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 소지품을 챙기고 옷을 입던 그녀. 


그렇게 미리 예약해 둔 기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그녀를 돌려 보내러 가는 길. 


불안에 가득 차 있는 그녀였지만, 그럴 때마다 손을 잡아주니 웃으며 날 쳐다보는 것이 미안하기만 하더라. 


그렇게 도착하고, 기차에서 내리고 나는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었어.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으니까. 



" …… 부모님이 걱정하셔. " 



그와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갔어. 


분노.슬픔.그리고 배신감이 묻어나는 그 마주하기 힘들었던 그 표정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듯 해. 



"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어?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냐고! "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는 그녀. 그리고 주변에선 한번 씩 흘깃 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지. 



" 사랑한다면서… 이렇게 보내려고 거짓말 친 거야? 도대체 왜? 내가 싫어? " 



" 보내는 게 아니야. 언제든 볼 수 있잖아? 다음이 왜 없을거라 생각해? " 



" 돌아갈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돌아갔을 거라고! 고작 일주일 함께 있었다고 내가 질렸어? 왜 벌써 보내려고 하냐고? " 



언성이 높아진 그녀. 사람들이 빠져나간 이곳엔 우리 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 



" 제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걱정하게 만든 건 사실이잖아. 적어도 부모님한테 연락 정도는… . " 



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녀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거든. 


화에 가득 차 있던 건지, 슬픔에 가득 차 있던 건지. 앞머리에 가려져 나는 표정을 볼 수 없었어. 



" 난… 난 너에 대해 전부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넌 왜 날 하나도 몰라주는 건데… . " 



화가 났다기 보다는 울컥하더라. 


맞는 말이었어. 그녀는 누구보다 날 잘 알고 있었지만, 난 지금 그녀가 원치 않는 선택을 했으니까. 


그녀를 잘 몰랐다고 할 수 있었지. 


그래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녀가 있을 곳은 부모님의 곁이 아니었을까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생각했나봐. 그렇기에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겠지. 



" … 미안해.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건… . " 



" 뭘 안다고… 걱정을 도대체 누가 하냐고… 넌, 넌 내가 했던 말들이 다 말 같지 않았어? " 



이 당시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어. 궤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곧장 미리 연락을 해 두었기에 그녀의 언니가 찾아왔고, 다급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한번 꾸벅였고, 


그녀의 뒤로 가 등을 토닥이며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더라. 


들리지는 않았어. 그리고 아직도 무슨 소릴 했을지는 모르겠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그녀의 언니가 어서 돌아가 보라는 말에 나는 머뭇거리며 걸음을 돌렸어. 


혹시나 하는 일에 대비해 돌아가는 기차는 예약하지 않았는데, 조금 낭패였지만 어쩌겠어. 


일단 이곳에서 벗어났고, 가장 빠른 기차를 예약하고 역 근처 카페에 들어갔지. 


그리고 전화가 오더라. 그녀도 아니었고, 그녀의 언니였어. 


… 그런 얘기를 하더라.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몰라도 가정사 얘기를 해주는데, 어릴적 그녀의 부모님이 이혼한 건 사실이었어. 


하지만 몇 달 전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가 함께 돌아왔고, 재결합하는 듯 했으나 트러블이 계속 생긴거지. 


몇 년 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은 처음 싸움으로 인해 헤어졌던 것과 같이 다시 싸움을 반복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두 딸은 지친거야.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지. 


아버지의 손찌검이 끝난 게 아니었어. 술을 먹고 들어오면 두 딸과, 심지어 자신의 부인에게도 폭언과 폭행을 일삼은 거지. 


그렇게 망가져가고 있을 때, 늘 밤 늦게 잠도 안자고 핸드폰을 봤었나 봐. 


언니와 그녀는 같은 방을 썼으니, 조금 일찍 자라고 해도 잠도 안자고,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도 하고. 


그것 때문에 밤 늦게 잠을 못 자서 싸웠다고 하더라. 이때 그 얘기가 생각나더라. 


언니랑 싸웠다고… .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고립되어 있는 그녀는 그저 자신을 버티게 해줄 버팀목이 필요했던 거구나.


그리고 그 지옥 같던 집에서 도망치듯 내게 온 거라고. 


가슴이 어제보다 더 복잡했어. 


내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었으니까. 


그냥 모든 게 거짓말 같았어. 


맘 같아선 그녀에게 당장이라도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 처지가 생각나더라.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2달 뒤에는 입영일 이었고, 분명 공백기가 생겨버릴 테니까. 


만약 그녀가 멀쩡한 집안에서, 나와 집도 가까웠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퇴사를 하고 


하루 종일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그게 어렵잖아.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을 그녀였고, 힘든 그녀일 텐데, 나는 곧 사라지고 마니까. 


거리도 멀었고, 딜레마에 빠진거야. 


고작 두 달동안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다 2년 가까운 시간을 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 


그럼 도대체 그동안 그녀는 누가 위로해줄 건데. 누가 보듬어줄 건데. 


그닥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의 고백이 그제서야 와닿은 거야. 


그녀의 배경을 정확히 몰랐고, 그녀라는 사람을 몰랐으니까 나는 고백을 받아버린 거지. 


내가 곧 군대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저 그 당시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걸까. 


죄책감이 먼저 오더라. 


고백을 받지 않았더라면. 


솔직하게 모든 걸 터 놓았더라면, 오히려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기차를 타고 돌아가면서도 계속 고민했어. 어떻게 해야 정답일지. 


결국 내가 내린 선택은 도망이었지. 


지금 생각해도 병신 같고, 바보 같은 선택이었어. 


어쩌면 당시 내 머리로는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지. 




저녁까지 오지 않는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다, 결국 먼저 연락했어.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렇기에 날 떠나주길 바란다고. 


난 곧 군대에 가 너와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오더라. 



쓰레기 새끼. 


지금까지 전부 장난이었냐고. 



차마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난 그녀에게 위로보다 더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고, 자책감이 날 짓누르는 것 같았어. 


몇 분이 지나도 답장이 없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날아오더라. 



" …… 아니라고 해줘 제발… . " 



그녀가 처음 내뱉은 건 부정이었어. 


내 심정마저 전부 부정해버릴 것 같던 그 서글픔이 ... .


말이 나오지 않아 이어지던 그 짧은 침묵이 몇 시간과도 같았어. 


지옥 같더라. 그 슬픔과 분노가 섞인 그녀의 감정에 나는 어쩌면 해선 안될 말을 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네. 



" … 난 늘 진심이었어. 널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 


" 하지만, 그렇기에 이제 널 밀어내야 하는 걸 알잖아. " 



" 왜, 왜 사랑하는데 밀어내려 하냐고? 사랑하면 그러면 안되잖아. 붙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 " 



화를 낼 힘조차 없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슬픔에 잠식되어 분노라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감정에 나는 가슴이 너무 아려왔어. 



" … 사랑하니까 보내줘야 하는 것도 있는 게 아닐까. 난 적어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 나 같은 놈이 아니더라도, 세상엔 분명 나보다 좋은 사람도 많고, 너도 그런 사람이니 분명 만날 수 있을- " 



" 닥쳐. 닥치라고 제발. 난 너가 필요하다고… . " 



" …… 거의 2년이야. 2년이라고. 네가 더 아파할 게 분명하잖아. 우리… 그만하자. 널 위해 하는 말이야. "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어. 


내가 누굴 위한 선택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저 쓰레기 같은 열등감에 빠져 널 떠나보내며 자기 만족하는 나. 


그 한 켠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기를 원하는 모순적인 나.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고, 앞으로 길게 남아있을 불행을 원치 않는 나. 


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네가… 더 이상 아파하지 말았으면 나. 



무엇 하나 들어맞지 않았지. 


내가 무슨 선택을 하던 넌 분명 괴로울 테니까. 


그래도 난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렇게 믿으려 했어. 


네가 날 잊기 까지의 시간이 적어도 2년에 가까운 시간보단 짧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 … 사랑한다고 해줘. 제발…… . " 


" 나, 네가 없으면 어떻게 될 지 몰라… 그러니까… . " 



" …… 미안해. " 



그렇게 전화를 끊었어. 


알아. 내가 쓰레기라는 것 정도는. 


내가 누굴 위한 선택을 한 건지는 도통 모르겠어. 


그래도 금방 알 수 있더라. 


네가 슬퍼하고 있고, 나도 슬퍼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할 선택이었던 거야. 


이후 전화를 끊자 미친 듯이 네게 전화가 걸려오더라. 


차마 볼 수가 없었어. 


내 선택을 번복할 것 같았으니까. 


금방이라도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 같았으니까. 


네가 날 이대로 미워해 줬으면 했으니까. 


네가 날 잊어줬으면 좋겠다 생각했으니까. 


다른 의미로 긴 밤이었어. 


잠이 오지 않았어. 


이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두렵기 그지없는 밤이었으니까. 






아침이 되고, 핸드폰엔 수십통의 부재중 전화와, 300+ 가 되어있는 카톡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 


심지어 새벽 4시까지 그 연락이 이어졌으니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어. 


어쩌면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럼에도 난 그녀의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했어. 


알아. 후회할 걸 알면서. 


잘못한 걸 알면서. 


그녀가 슬퍼할 걸 알면서. 


그녀가 힘들어할 걸 알면서. 


나도 괴로울 걸 알면서. 


그럼에도 잊고 싶었으니까. 


그녀가 날 미워해주기를 바랬으니까. 


그래야만, 나를 하루라도 일찍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 어쩌다 보니 꽤 이야기가 길어졌네. 



맞아. 난 지금 전역을 하고 사회에 돌아온 지 2달이 조금 지났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술도 마시고, 여행도 가고… . 



어느덧 내 기억에서 그녀는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내가 그녀에게 준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도망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녀가 행복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에게 연락을 한 걸까? 


그때의 복수심으로?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일 텐데.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사과를 말해야 할까. 



제발 부탁이야. 


자기 일 하나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병신이라 도움을 청하고 있는 쓰레기야 나는. 


그럼에도 제발 내게 도움을 줬으면 해. 


늦은 시간이라 못 봤을 거라고 그녀는 분명 생각하고 있을거야. 


그러니 더 늦을 수는 없어. 



제발 아침까지 내게 정답을 알려줘. 





내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해도 괜찮을까? 













그녀는, 아직 나를 사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