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1.

적막이 감도는 집.

정우를 기다리며,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나리의 귀가 불현듯 치켜 올라갔다.

갑작스레 들리는 부선스러운 소리.

그 소리에 곧장 잠에서 깨, 꼬리를 바짝 세운 나리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현관을 쳐다보았다.

현관 앞에는 정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두런거리며 얘기를 하고 있다.


캉! 캉!


나리가, 곧장 현관 앞으로 달려가 앙칼지게 짖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 영역을 침범한 이들에게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너머에서 짖는 소리가 들렸던 걸까.

일순간 조용해진 너머였지만, 머지않아 다시금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띠릭!


갑자기 도어락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키패드를 활성화하는 소리였다.


삑, 삑, 삑, 삑.


당연하다는 듯이 낯선 이는 키패드에 네 개의 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는 여섯 자리일지도, 어쩌면 여덟 자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른 이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것이 확실하다는 듯, 이내 우물 정자를 눌렀다.


띠리릭-


도어락이 힘없이 열렸다.

역시, 정답이네.

천천히 열리는 문의 너머.

기이한 열락이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음울하게 집을 훑는다.

스읍- 하고 빨아 들이쉬는 숨.

코에서 여실히 느껴지는 정우의 그 미미한 체취에, 입이 히죽- 일그러진 반달을 그렸다.


그녀가 누른 비밀번호는 전에 살던 집과 똑같았다.

0527

그 번호는 정우와 희수가 결혼했던 날을 의미했다.

오월 이십 칠일.


고작 서류상의 결혼이었을 뿐 일진데도, 그때의 정우는 오늘을 평생 잊지 않겠다며, 통장을 비롯한 어지간한 비밀번호들을 전부 이 번호로 바꾸었었다.

잊지 않고 있었구나.

역시 정우 씨는, 날 잊지 않았어.

그런 생각을 하며, 아직은 기회가 있음에 얼굴이 상기되는 여인.

그녀, 정희수의 눈이 이내, 아직도 자신을 향해 짖고 있는 나리에게로 뚝 떨어졌다.


끼잉-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꼿꼿이 서 있던 나리의 꼬리가 저절로 늘어졌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이하면서도 위험한 기류를 느꼈는지, 나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위험한 사람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꼬리가 말릴 정도로, 번들거리는 눈은, 한치도 깜빡거리지도 않은 채 자신에게 고정되어있었다.


"강아지, 키우는구나..."


희수가 몸을 숙여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향하는 곳은 나리.

충분히 물러나거나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느리고 굼떴지만 어째서인지 나리는 조금도 발을 뗄 수 없었다.

압도당했다.

그저 할 수 있는거라고는, 너무 가까워져 이제는 시야의 전부를 가리는 희수의 손을 보며 눈만 끔뻑거리는것 뿐.

뻣뻣이 굳은 채, 지척에 달한 희수의 손을 보며, 나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쓱-


허나, 희수의 손은 나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머리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손길.

그 기분 좋은 감각에 슬며시 눈을 뜨니, 살짝 입을 벌린 채로 웃고 있는 희수가 나지막이 한마디 꺼냈다.


"귀엽네..."


머지않아 나리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직은 너무나 어린 강아지이기에.

분별력이 떨어지는 이 작은 생명체는, 자신에게 따뜻이 구는 희수에게 경계심을 완전히 풀고 말았다.

그저, 주인님의 친구구나 하는 속 편한 생각으로, 일전의 사고뭉치로 돌아가 버렸다.


헥-헥-


얼마나 놀아주었을까.

머지않아, 나리는 희수의 앞에 배까지 까뒤집으며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정우가 본다면 그야말로 경을 칠 광경이멌다.


"후후…. 이쁘다."


십 분 정도 나리와 놀아주던 희수가, 돌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작업 시작하세요."


나리에게 한 말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것은 뒤에 있던,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서서 대기하던 수많은 자신의 사람들.

그들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현관에 쪼그려 있던 희수를 지나, 집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나, 희수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주인님의 친구겠거니라고 단순히 생각한 나리는, 그들을 아무 의심 없이 집으로 들였다.


탐색하듯, 정우의 집을 샅샅이 살피던 희수의 사람들이 머지않아 작업에 들어갔다.

드륵-하며 벽에 들키지 않을 작은 구멍을 내는 소리 하며, 작정하고 의심스럽게 보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나, 공간들을 찾아내, 하나둘 아주 작은 무언가를 설치했다.

그 모든 작업에 걸린 시간은 한 시간.

희수가 나리와 놀아주던 그 짧은 시간 사이, 작업을 마친 이들이 현관 앞으로 몰려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어요."


최소한의 겉치레도 없는 차가운 말일진 데도, 희수의 말을 듣자마자 작업자들은 군말 없이 곧장 집을 나섰다.

마지막 사람이 나가며 덜컹-하며 닫히는 현관문.

어수선했던 집에는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네 집 구경 좀 해도 될까?"


캉! 캉!


"그래, 고마워...근데 너 이름은 뭐니?"


캉-


"미안, 역시 못 알아듣겠어."


이윽고 나리를 품에 안은, 희수가 정우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후-하는 달뜬 숨이 곧장 희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애써 티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현관 앞에 서 있었던 순간부터 희수의 심장은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터질 것 같은 흥분.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은 열락.

이것이 지금 자신이 가장 기대했던 순간이기에.


한때 자신 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흔적들이다.

그 공간에 갇혀있는 것만 같아서, 그게 죽을 만큼 너무나 힘들어서 미친 듯이 찾고 또 찾았었다.

그리고 오늘, 겨우 찾았다.


정우.


정우.


정우.


정우.


이 집의 모든 것이 정우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게 자신을 옥죄던 시선과 압박이 눈녹듯이 사라졌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남아있는것은 오직 정우의 사랑스런 체취.

모든 것이 정우의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수한 그의 것이다.

희수는 저절로 행복해지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오랫동안 정성스레 매만졌다.


"아."


현관에 가까운 쪽부터 시작해, 이제야 거실에 들어온, 희수가 드디어 정우 것이 아닌 것을 하나 찾았다.

눈에 보이는, 사료가 수북이 쌓여있는 그릇에 쓰여 있는 자그마한 글

'나리.'


"나리...나리구나. 예쁜 이름이네."


캉-캉!


제 이름이 맞다는 듯 우는, 나리의 머리를 웃으며 쓰다듬던 희수가 나지막이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정우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었으면 어땠을까.

희수의 머릿속으로 정우에게 꼬리치던 그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그렇다면...


상상만으로도 뿌득-하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희수의 짓씹어진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한창 기분 좋게 졸고 있던 나리가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그 찰나에 표면에 드러난 감정을 감추고,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와있던 희수는, 나리의 시선에 태연히 입을 열었다.


"음...나리야. 혹시, 네 아빠 안방이 어딘지 알려줄래?"


그렇게 말하는 희수의 눈이 몇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문 너머, 한쪽 귀퉁이에 침대가 보이는 방 앞으로 고정되었다.

저기구나.

저도 모르게 스륵-하며 손에 힘이 풀린다.

나리를 바닥에 놓아주며,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한껏 필사적으로 억눌러왔던 충동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분출하지 못한다면, 머리가 어떻게 돼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이라도 좋으니까...


달칵.


희수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다.

정우의 향이 빠져나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한층 더 짙게 느껴지는 듯한 체취.

정우가 떠나던 순간, 조금이나마 자신을 위로해주었던 그 체취를 다시금 마주하자 희수의 얼굴이 곧장 흘러내리듯 이지러졌다.


"하아아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철썩이며 매트릭스가 출렁이자, 그 안에 쌓여있던 한층 더 짙은 정우의 체취가 그녀의 코를 희롱했다.


"정우 씨 냄새...정우 씨 거...정우 씨..."


그때처럼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오랜만에 맡아서 그런 건지, 처음 맡았을 때보다 훨씬 진하게 느껴진다.

곧장 뜨겁게 타오르는 몸.

저도 모르게 손을 아래로 내렸으나, 작게나마 남아있던 그 실낱같은 이성이 본능을 억눌렀다.

흔적이 남으면 안 되니까.

아쉽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리 생각하며, 희수는 당장 달아오른 몸을 달래기보다는, 오랜만에 찾아온 깊은 편안함과 안락함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기로 하였다.


이렇게 있으니까, 마치 품에 안긴 것 같네.

정우의 베개를 가슴에 파묻고 이불을 몸에 두르자, 퍽 그런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안긴다면 어떤 느낌일까

정우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그중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

그것은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며 희수는 신혼집 새댁처럼 머릿속에 행복한 망상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일어나면, 남편이 먹을 아침밥을 차리는 거야.

아직 칼 잡는 것도 서투르긴 하지만...그래도 하다 보면 늘 거니까, 분명 나중에는 맛있다고 먹어주겠지?

그렇게 아침을 먹으면...일을 하러 가야겠지.

가기 싫지만...매일매일 붙어있고 싶지만...사실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건실한 모습으로 가정을 지켜야 하니까...

출근하면 오 분, 아니 십 초에 한 번씩 문자를 보내는 거야.

정우 씨라면, 분명 하나하나 정성스레 대답해주겠지.

그렇게, 퇴근하면 정우 씨가 나를 위해 저녁을 차려놓은 채 웃으면서 날 맞이할 거야.

그 차려진, 정성스러운 식사를 먹다 보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지도 몰라.

그렇게 식사를 마치면, 바로 씻으러 가는 거야.

씻는 것도 무조건 같이.

정우 씨도 분명 좋아하겠지.

그렇게 서로를 씻겨주다 보면...눈이 맞아서, 침대에 가서는...


"하웅..."


다음의 상상을 포기한 채, 희수가 붉어진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정우가 집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세 시간.

희수는 채미연이 약 십 분쯤 뒤 도착할 예정이라는 문자를 보낼 때까지, 그의 침대에 누워 한껏 갈망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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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메 졸린거.

빨리 자야지.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