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죠마치는 도쿄도 소속으로 도쿄 본토에서는 직선거리로 약 280km, 배로 11시간,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하치죠마치는 크게 하치죠시마와 하치죠코시마 2개의 섬을 관할하고 있는데 이중 왼쪽에 작은(小) 섬이 하치죠코시마(八丈小島)입니다.


하치죠코시마는 면적 3제곱킬로미터 정도의 작은 섬으로 우도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높이는 최대 600m에 달하는 꽤 높은 섬입니다. 영화 배틀로열을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섬은 현재 무인도이고 하치죠마치에 포함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무려 5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기도 했고 섬에는 2개의 촌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섬은 무인도가 되었을까요?


본래 이 섬에는 크게 2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했습니다. 이중 북쪽에는 도리우치무라(鳥打村)가 남쪽에는 우츠키무라(宇津木村)가 에도 시대부터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조차 지나가지 않는다는 이 외딴 섬에서는 메이지 시대 진행되었던 행정개혁이나 그런게 없이 에도 시대부터 내려져 온 명주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도 특이한 점입니다. 실제로 지방자치법이 실시되던 1947년 전후하여 공무원들이 섬을 방문해서 촌장 집을 찾아갔는데, 사람들이 촌장이 뭔지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69년 촬영된 도리우치무라 전경


이 섬 사람들은 보통 농업, 어업, 축산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했습니다. 농사는 보리를 주로 길렀고 기름을 얻기 위한 동백나무나 양잠용 뽕나무를 길렀고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기도 했습니다. 쌀은 나지 않아서 모두 옆 섬에 가서 사왔지요. 한편 섬에서 김은 잘 나지 않았는데 옛날에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為朝)가 섬에 상륙할 때 김을 밟고 미끄러져 저주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축산업의 경우 소를 길렀는데 우유와 바닷물에서 구한 소금으로 버터를 만들어 고수입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도리우치 소중학교. 1950년대 촬영

민가의 모습. 1950년대 촬영


인프라의 경우 각 촌마다 소중학교가 하나씩 있었고 이중 도리우치 소학교에 발전기를 들여와서 전기가 들어왔는데 각 가정에 백열전구 하나 정도 켤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또 1955년에는 하루 1시간만 통화가 가능한 공중전화가 설치되었고, 상하수도는 당연히 없고 식수조차도 부족해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빗물을 받아 사용했습니다. 1958년 첫 정기선이 취항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교통수단도 존재하지 않았구요.


이렇게 낙후된 섬의 실정에 섬의 인구는 계속해서 줄어 들고 있었습니다. 섬 아래의 우츠키촌은 1955년 인구가 66명으로 기초자치단체이기는 했지만 의회를 세울 수 없어 정촌총회라는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기도 했을 정도인데, 설상 가상으로 이 섬에는 '바쿠'라고 하는 풍토병이 있어서 옆 섬인 하치조시마 사람들도 '코지마의 바쿠'라면서 되도록 저 섬에는 상륙하지 않으려고 했고 섬 사람들도 사람이 바쿠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면서 체념하며 지내는 상태였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다리가 부어오르거나 발작을 하거나 심하면 사망하기도 했죠.


한편 개화기가 되면서 일본 내부에 서양 의학이 알려지고, 일본 각지의 풍토병을 연구하는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쿠병 역시 소문으로만 알려지게 되었는데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나카하마 토이치로(中浜東一郎)가 처음으로 섬을 방문하여 의료 행위를 펼치고 병을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하였으며 이후 수십년간 연구 끝에 도쿄대학 전염병연구소의 사자 마나부(佐々學)가 이 병이 사상충에 의해 발생하는 필라리아증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민가에 있는 빗물탱크, 하치죠코지마의 민가에는 이런 탱크가 없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1950년대 촬영


이 섬에 필라리아증이 만연했던 이유는 바로 이 섬의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필라리아증은 모기가 사상충을 옮겨 전염되는데 위에서도 말하였듯 이 섬에는 식수가 부족해서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비가 오면 물을 저장해두기 위해 물탱크를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고인 물에 모기가 번식하면서 온 섬에 수백년간 필라리아증이 만연했던 것이지요. 그중에서도 토고숲모기(Aedes togoi)는 민가 물탱크 뿐만 아니라 해안가 조간대 물웅덩이에도 서식하는 것며 사상충을 옮긴다는 사실 역시 알려졌습니다.


사자 마나부는 곧바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질병 치료 및 모기 구충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구충제를 주민들에게 보급하고, 모기를 구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기 구충에는 크게 천적의 이용과 DDT(살충제) 살포 2가지 전략이 사용되었는데 이중 천적을 이용하는 방법이 효과가 좋았다고 합니다. 


1950년에 사자 마나부가 섬에 방문하였을 때 이미 한 집에서 빗물통에 금붕어 3마리를 기르고 있었는 데, 문제는 이 방법을 사용하려고 해도 저 멀리 도쿄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이 섬까지 민물고기를 들여오는건 어려운 일이었고. 마을에서도 그 금붕어 3마리를 제외하고는 민물고기를 들여오지 못했습니다. 사자와 연구원들은 큰 결심을 하고 커다란 물통에 금붕어 50마리와 송사리 200마리를 넣고 도쿄에서 하치죠지시마까지 간 다음 이를 다시 하치죠지코지마까지 운반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 하치죠시마에 도착한 후 작은 배로 갈아타서 거친 파도 속에 젊은이 3명이 통의 뚜껑을 누르는 수고를 해가며 물고기를 운반했고 토리우치의 선착장에 도착해서는 마을 청년들이 단체로 나서서 언덕길을 따라 무거운 통을 운반했습니다. 


1951년 해안가 물웅덩이에 DDT를 살포하는 헬리콥터 


사자는 금붕어를 키운 물통을 보니 모기는 한 마리도 없고 오히려 원래 2cm로 작았던 금붕어가 15cm 정도까지 큰 것을 보고 각 물통에 송사리와 금붕어를 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을에는 DDT를 살포하여 모기를 죽이고 해안가에 조수 웅덩이에는 헬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방제 작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DDT를 살포하고 모기가 크게 줄었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다시 늘어나 일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후 정부와 과학자들이 계속해서 병 근절작업을 펼쳐 드디어 1968년 하치죠코지마 주민 검사에서 기생충 검출률 0%, 즉 필라리아증을 근절해내게 되었고 이제 주민들은 원인 모를 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일본 고도성장기에서 하치죠코지마는 소외된 섬이었습니다. 이때 이미 토리우치촌과 우츠키촌은 옆의 하치죠정과 통합된 상태였는데 마을 주민들은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아이들은 섬을 떠나 도쿄에 취직하여 돌아오지 않아 고령화 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의회에 자신들의 삶에 대해 전원 이주 탄원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당시 주민들이 든 이주 희망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기, 수도, 의료 시설이 없다.

2. 생활 수준 격차가 커졌다.

3. 인구 과소의 경향이 막대하다.

4. 자녀 교육이 어렵다.

 

이후 협상이 진행되어 섬의 토지는 전량 도쿄도가 매입하고 생활, 생업자금의 대출 및 위로금 지급하며, 하치죠지정에서 생업자금 대출 이자를 일부 부담하고 도영주택 입주 우선권을 주는 조건으로 주민 대표가 합의서에 서명, 1969년 3월 31일, 24가구 91명 전원이 섬을 나와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섬을 나올 당시 대부분의 주민은 노인 아니면 어린이었다고 합니다.


도리우치촌의 선착장 잔해(2017년)


주민들이 쓰던 콘크리트 빗물통


도리우치 소중학교의 현재 모습. 2017년 촬영


토리우치촌의 현재 위성사진 선착장 흔적(파랑원)과 소중학교 흔적(빨강원)이 보인다.


우츠키촌의 우츠키소중학교 터의 현재 위성사진


하치죠코지마를 잊지 말자는 비석


이렇게 약 수백 년 동안 창궐했던 바쿠 병의 근절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수백 년 동안 사람이 살던 섬 역시 무인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도 이 섬은 무인도로 남아 있으며 이따금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 하치죠코지마는 일본에서 거의 유이하게 정촌총회를 실시했던 촌으로 그리고 최초로 사상충을 근절한 사례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 : 위키피디아


여담 : 우리 섬들은 인프라가 나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만약 조금 더 고령화가 진행 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