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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얀순이는 잠을 잘 잤을지 모르겠다.



얀순이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한 것이었다.



후희를 임신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후순이랑 결혼하기로 한 것은 나였다.



내 선택 때문에 얀순이가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후순이와의 관계가 정리되고나면 얀순이와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싶었다.



후순이와는 하지 못했던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결혼하자마자, 내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 확정되자마자 바로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던 후순이와는 하지 못했던 신혼생활을,



전적이 있는 후순이라도 그때는 사랑했던 후순이를 위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 했었던 신혼생활을,



이제는 완전히 짓밟혀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풋풋한 신혼생활을 얀순이와 해보고 싶었다.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주고, 지켜주었던 얀순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며 살아가고 싶었다.



내 스스로도 놀랐다.



그래도 조금은 후순이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제대로 집에 붙어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부부로 있었던 시간이 훨씬 길었던 후순이에 대한 마음이 얀순이와 지낸 한달만에 사라져버렸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졌다.



그럼 도대체 후순이와 결혼하며 들었던 마음은 대체 뭐였을까?



난 정말 후순이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처음 후순이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대학교 근처, 선배들이 데려간 술집에서 만났던 후순이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첫 눈에 반해버렸다고 할 만큼 말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고, 거기에 나도 끌려가버렸다.



그래서 고백했었다.



얀순이에 대한 마음을 간신히 접고, 첫 눈에 반해버렸던 후순이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때는,



그때 만났던 후순이는 지금까지 만났던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후순이는 모두에게 매력적이고 사랑받는 사람이고 싶어했다.



쿨한 연애 하자며 자신의 성벽 용납해주지 않으면 당신이랑 연애를 할 수 없다고 했었다.



한창 빠져있던 건 나였으니 손해를 보더라도 후순이 곁에 있기위해 후순이의 성벽을 묵인했다.



정말 힘들었다.



후순이를 위해 모든 사랑을 바쳤지만, 후순이는 정말 적은 사랑만을 돌려주었다.



후순이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나를 대했다.



정식으로 사귀고 있다고 주변인들에게 공표까지 했음에도 나는 그녀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사랑을 바치는 사람 중 한명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고, 내게는 아주 적은 기회만 주더라도 나는 후순이의 연인이었으니까.



후순이의 연인이었고, 후순이 또한 나를 연인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괜찮았었다.



하지만, 후순이는 그 연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도 연인처럼 하고 다녔다.



나만 하는 줄 알았던 데이트는 후순이의 내연남들도 했다.



그들이 바치는 사랑에 내려주는 포상처럼 데이트와 함께 잠자리를 가졌다.



후희를 가진 후에도, 후희를 가졌다며 나와 결혼하자고 했던 그때도 그랬다.



그래도 후순이를 사랑했었다.



그때까지는 후순이가 너무 좋았기에 호구같은 짓거리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였다.



연인이면서 연인답게 지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후순이가 나와 어울려준다는 사실 자체가 기뻐서,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후순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게 행복해서 아파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후순이를 만났었다.



분명 그렇게나 불탔던 사랑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기꺼이 호구짓도 해가며 지내게 만들어준 사랑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알고는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후순이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후희에 대한 의무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후순이가 돌아봐주지 않는 남편의 삶을 살며, 반항을 할 때마다 내 상처를 건드려 제압하는 후순이에게서 마음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음을,



사랑이 두려움으로, 애정이 애증으로, 헌신적이던 연심이 어두컴컴한 공포로 바뀌었음을 알고는 있었다.



항상 참아왔던, 후순이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왔던 네토라레 플레이를 더이상 웃어넘기지 못했던 시점부터,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현실이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과 공포로 다가오던 순간 부터,



후순이에게 향하는 감정에 사랑과 함께 분함과 섭섭함이 섞이기 시작하던 때부터,



후순이가 자신의 딸인 후희를 낳자마자 나에게 내 던지고 그동안 만나지 못한 내연남들 만나러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랑의 결실이라 생각한 후희를 짐덩이마냥 내던지던 후순이가 원망스럽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는 잘 억눌러왔던 마음의 상처가 깨지고 터지기 시작했던 그 때부터,



후순이를 향한 사랑은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아직 후순이를 사랑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던 모양이다.



후희가 나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해서,



내가 엄마에게 받았던 상처를 후희에게만큼은 주기 싫어서,



나와 닮지 않은 후희를, 



엄마에게서 구해주고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서 키워주시다시피 했던 얀진 회장님과 얀붕 교수님 처럼 되고 싶어서,



아직 후순이를 사랑한다고 최면을 걸었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면 후순이가 정신을 차리고 후희의 엄마가 되어주리라고, 



나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좋은 부부가 되어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헛짓거리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후순이는 내게 사랑 받기를 원했다.



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내가 일방적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었지, 한번도 자신의 사랑을 내게 비춰주지 않았다.



후순이가 내게 보여주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후순이가 가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었다.



나는 후순이를 사랑해줬지만,



내 모든 사랑을 바쳤지만,



후순이는 그걸 사과 집어먹듯이 먹어버리고는 던져버렸다.



후순이가 먹고 버린 사과 찌꺼기를 나는 사랑이랍시고 받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후희와 나눠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마 있지도 않은 후순이의 사랑을 그래도 엄마는 우리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후희와 나눠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후희가 엄마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내가 아닌 후순이가 버린 사과 찌꺼기를 택한 것이었다.



후순이보다 내가 후희와 지낸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약하고 무능력했던 나보다 강하고 능력있는 남자들이 붙어있는 후순이를 택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후순이와 후희에게 버림받은 상황에서 다시 만난 얀순이는 정말 특별했다.



얀순이는 정말로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줬다.



후순이에게 받지 못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부어주었다.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져있던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약하고 무능력했던 나를 강하고 능력있는 사람이라며 치켜세워 주었다.



그런 얀순이가 후순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있는지도 몰랐던 부부사이의 정 보다, 불륜 관계라 할 수 있는 얀순이와의 시간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얀순이는 소생이 불가능 했던, 재기불능에 빠져있던 나를 소생시키고, 부축해주었다.



나를 강한 사람으로,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얀순이가 아파하는 것이 싫었다.



벌써 내 마음을 가득 채워버린 얀순이가 내가 선택한 후순이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싫었다.



고맙고 소중한 얀순이가 후순이 때문에 다쳤다는 것이 싫었다.



생각이 그렇게 바뀌고 나니, 후순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찍소리도 못하고 눌려서 지냈었는데, 이젠 반격다운 반격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후순이의 영향으로부터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해방된 셈이었다.



결국, 또 얀순이가 나를 구해주었다.



유치원 때는 엄마로부터 지켜주었고, 중학교 때는 후진이로부터 나를 떼어내 주었으며, 이번엔 후순이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고마운 일 밖에 없었다.



평생에 걸쳐 갚아도 다 갚지 못할만큼 너무 큰 은혜를 얀순이에게 입었다.



그러니 제발,



얀순이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얀순이가 나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얀순이가 나처럼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악몽을 꿨다.



한달만에 돌아온 후붕이가 멀리 떠나버리는 꿈을 꿨다.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나의 후붕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꿈을 꿨다.



깜짝놀라 잠에서 깼다.



후다닥 거실로 나갔다.



후붕이는 여전히 거실 쇼파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후붕이는 내 곁에, 아니 우리의 보금자리 안에 있었다.



몰래 다가가 후붕이의 얼굴을 살폈다.



한 달동안 연수를 받아서 생긴 다크서클이 퇴폐미를 뿜어냈다.



그렇게 한참동안 후붕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래, 아직 후붕이는 내 손 안에 있다.



잠깐 없어지긴 했지만 내 손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안해 후붕아.



제발 어딘가로 가지 말아줘.



이제 말 없이 사라지거나 안방에 네가 아닌 누군가를 들이지 않을테니까,



후희도 데려와서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할 테니까,



내 곁에 있어줘.



네가 없으면 너무 외로워.



네가 없으면 안방의 침대는 너무 넓고, 휑하게 비어버린 내 곁 만큼 추워.



언제나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내 곁으로 와서 사랑을 부어줘.



네 사랑이 없으니 몸도 마음도 제대로 움직이질 않아.



그러니 제발, 어디로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을 속삭여줘.



이제는 네가 주는 사랑을 매정하게 버리지 않을테니까,



이제는 누구보다 귀한 네 사랑을 잘 간직하고 있을테니까,



제발 내 곁으로 와줘.




*     *     *




아침이 되었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옅은 햇살이 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간밤에 겪은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치는 바람에 정신이 몽롱했다.



곁에 있을 후붕이에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내 팔에 잡히는 건 덮고잤던 이불 밖에 없었다.



후붕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침대는 여전히 차가웠고, 평소였다면 남아 있을 후붕이의 온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든 후붕이를 관찰하다 들어왔던,



서늘하게 식어있어 덜덜 떨며 잠이 들었던 안방침대였다.



안방 밖으로 나갔다.



후붕이는 내 몰골을 보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얼굴이 부었네, 잠이라도 설쳤어?"



무미건조한 표정 만큼이나 후붕이의 말에서도 무엇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괜찮냐고 걱정부터 했을텐데, 걱정같은 따스한 감정은 담기지 않았다.



일면식 없는 사람을 대하듯이 어색한 말투로 물어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붕이가 내게 저런 서늘한 말투로 물었다.



"응... 악몽을 꿔서."



"저런... 큰일이었겠네."



후붕이의 대답은 짧았다.



평소였다면 호들갑을 떨며 달려와 따뜻한 우유라도 한잔 데워줄텐데, 그런 반응이 전혀 없었다.



안타까운 일에 대하여 짧게 유감만 표명하고 끝냈다.



낮설었다.



후붕이가 이렇게까지 차가웠었나 싶기도 했다.



이럴리가 없는데...?



어제는 연수에서 막 돌아와서 피곤했다고 하지만, 오늘은 분명 컨디션이 회복되었을텐데, 어째서?



어째서 나를 차갑게 대하는 거야?



넌 나만의 후붕이잖아?



나에게만 마음을 열고, 나에게만 사랑을 주던 후붕이잖아?



그런 네가 어떻게...?



나 말고는 없던 네가 어떻게 그래?



어떻게 나에게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게 반응할 수 있어?



불안해졌다.



정말로 후붕이가 나를 떠나버릴것만 같아서,



악몽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후붕이에게 달려가 요리를 하고 있는 후붕이의 등을 껴안았다.



"아내가 악몽을 꿨다는 데 걱정도 안돼?"



후붕이는 이렇게 하면 항상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었다.



고작 백허그 하나에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처럼 반응하는 것이 귀여워서 자주 이런 장난을 치곤 했었다.



지난 번에는 요리를 하다가 깜짝 놀라서 손가락을 썰어버린 적이 있었다.



제발 사람 놀래키지 말라고 소심하게 화를 내던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러겠지?



또 손가락을 베어버려서 소심하게 화를 내고 연고와 반창고를 가져다 주면 앞으로는 위험하니까 이러지 말아달라고 한소리 하겠지?



"네가 그러는게 어디 한두번이어야지."



하지만, 후붕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여 손을 다치지도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사랑의 잔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체념한 목소리로 내 장난에 익숙해졌다는 대답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후붕이가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차가운 말이었다.



오히려 내가 놀라서 후붕이와 떨어졌다.



후붕이가 사랑을 주지 않았다.



내게 유일하게 사랑을 주던 후붕이가 사랑을 담아주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평소의 후붕이와 뭔가 다르다.



아직 피곤해서 그런 걸까?



하긴, 한 달이나 연수를 다녀왔으면 고작 하루 푹 잔다고 해서 피로가 풀리진 않을 것이다.



후붕이는 지금 지쳐서 그런걸거야.



후붕이도 사람인걸.



후붕이도 사람이니까 지쳤겠지.



다른 사람에게 신경써줄 여유가 없었겠지.



그래도 나를 위해 음식은 해주고 있잖아.



생활력이 전혀 없는 나를 위해 집안일까지 해줬잖아.



그 정도면 됐어.



후붕이는 이미 충분히 내게 사랑을 주고 있어.



"후순아."



"으, 응? 왜불러 후붕아?"



"나 이제 곧 나가야 하니까, 알아서 챙겨 먹어. 지금 안나가면 지각이라서 아침을 챙겨줄 시간이 없어."



후붕이는 그렇게 말하며 앞치마를 벗었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변한 후붕이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가져와 맸다.



"후, 후붕아! 넥타이 정도는 내가 매줄..."



"아냐 됐어. 당신 넥타이 맬줄 모르잖아."



후붕이는 순식간에 넥타이를 매고, 거실 한쪽에 걸어놨던 자켓을 걸쳤다.



"찌개는 막 만들어놨으니까 아직 따뜻할거야. 국그릇이랑 밥그릇은 꺼내놨어. 반찬은 어제 만들어 놓은게 있으니까 그거 꺼내먹으면 돼."



후붕이는 내게 어떻게 식사를 하면 되는지 알려주었지만, 그 말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



후붕이는 내 인사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으, 응. 다녀와, 후붕아."



뒤늦게나마 인사를 해봤지만, 후붕이는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였다.



냉장고를 열었다.



썩어가던 음식들이 아니라 후붕이가 해놓은 것으로 보이는 새 반찬들이 보였다.



그중 몇 가지를 꺼내 식탁에 차렸다.



밥솥을 열고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아직은 뜨거운 김이 흘러나오는 찌개를 국자로 퍼서 담았다.



식탁에 그것들을 가져다두고 내 수저를 꺼내와 식탁에 앉았다.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던 쇠고기 장조림이었다.



하지만, 하룻동안 냉장고에 있었던 만큼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번엔 밥을 퍼서 입에 집어 넣었다.



너무 뜨거워서 후후 불며 먹어야 했다.



아직 김이 올라오던 찌개는 내가 딱 먹기 좋은 온도로 식어있었다.



그 찌개에서, 후붕이의 마지막 손길이 닿았던 찌개에서 후붕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한 입, 두 입, 세 입... 유일하게 후붕이의 온기가 남아있는 찌개를 먹다보니 국물은 거의 남지 않았다.



국물이 사라진 찌개는 빠르게 식어 반찬과 비슷한 수준으로 차가워졌다.



마치 지금의 후붕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매일 같이 부어지던 사랑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살피고 있던 찌개처럼 약간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후붕이가 나를 사랑했다는 흔적만이 후붕이에게 남아있었다.



평소였다면 회사에 늦는 한이 있더라도 아침을 차려주고 나갔고,



평소였다면 내가 넥타이를 맬줄 모른다고 해도 그 방법을 가르쳐줘가며 넥타이를 맬 수 있게 해 주었다.



평소였다면 내가 조금 늦게 인사를 건네도, 장난치느라 일부러 질질 끌어도 내가 인사를 해줄때까지 기다려줬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모든 것이 거부당했다.



후붕이 혼자서 넥타이를 맸고, 너무 바빠진 나머지 아침도 차려주지 않았다.



내가 장난을 쳐도 반응이 없었고, 인사는 당연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 인사보다도 새로운 직장에 늦을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후붕아..."



눈물이 절로 나왔다.



차가운 반찬들과 식어버린 찌개를 보고 있자니, 후붕이의 온기를 받지 못해 식어버린 나 처럼 보여서,



후붕이가 돌아와 집을 가꿔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외롭고 추워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지금까지 밀어내서 미안해."



후붕이가 힘들어할 때, 내가 더 힘들다고 했었다.



후붕이가 괴로워할 때, 그것도 못 받아들여주냐고 나무랐었다.



후붕이가 아파할 때, 버려지지 않으려면 잘하라고 협박했었다.



후붕이가 다가왔을 때, 나를 더 격렬하게 요구해주길 바라며 밀어냈었다.



"앞으로는 밀어내지 않을께, 후붕이가 다가오면 얼마든지 맞아들일께.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미 터져버린 눈물샘은 닫힐줄을 몰랐다.



계속해서, 점점 더 양을 불려가며 주룩주룩 뽑아냈다.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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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후회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후회라는 감정을 묘사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단 본문에는 후회라는 단어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걸로 후순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잘 전달됐으면 좋겠는데요.


그리고 차오르고 있는 후붕이와 점점 빠져나가고 시들어지고 있는 후순이를 대비시켜서 후순이가 더 비참해보이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만한 효과가 있었는지는 독자여러분들이 판단해주시겠지만요.


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