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전공에 흥미를 잃은 공대생이 미연시를 즐겼더니

하드 성덕이 되어 정신차려보니 다음 달부터 책 편집자??



개갓은 소리하지마새요ㅋㅋ~ 라노벨도 이딴 식으로 쓰면 아무도 안 읽어 병1신아~


라고 했을 것 같은 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벌써 발매 후 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2달 뒤에 신작이 나오는 쿠룻뽀의 누키타시.


내가 누키타시라는 게임을 만나게 된 건,

군대 전역하고 반 년 정도 휴학 기간 동안 정말 오랜만에 미연시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목 보고 누키게인줄 알고 한 발 뽑고 버릴려고 받은 거였지


일어를 끌어올린 것이 거짓말 안하고 군대에서 읽은 수십 권의 라노벨 원서들 덕분이었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다쟈레가 넘쳐나는 니시오 이신의 모노가타리 시리즈 였다.

누키타시는 그 모노가타리 시리즈와 가장 유사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미연시였고.


터무니 없는 배경 설정,

예술에 가까운 시모네타,

누키게인줄 알았더니 막상 뽑을 화력은 별로 안됐고

정작 뚜껑 까보니 초 열혈 배틀물이었다는 점 등등,

기승전결의 깔끔한 드라마성과 복선 회수 등이 부드러운 시나리오 게임이라기보단

아니 ㅅㅂ 이게 왜 이렇게됨?? 하는 근성론으로 돌파하는 장면도 많이 나오는 만큼

시나리오에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게임의 즐거움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내가 일본어를 공부할 때, 즉 원서를 읽을 때 중요하게 봤던 문장의 재미를 느끼는 데에 있어선

이 작품만한 것이 없었다.


사실 누키타시 2를 플레이 한 것까진 이렇다 할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재밌는 겜을 플레이했다, 정도.


반면 쿠룻뽀는 다른 에로게 회사들과는 다르게 게임 발매가 지난 지 한참 되었음에도

어펜드CD, 캐릭터송, 유튜브 라디오, 짤막 영상, 드라마 CD, 팬미팅, 꾸준한 굿즈 발매 등등

유저들을 즐겁게 해주는 서비스가 되게 풍부했다.


그리고 작년 12월, 캐릭터송 발매 후 감상을 이야기하는 누키라지가 방영되었는데


(23:07 경)


이때 누키타시 2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이쿠코의 캐릭터송,

"렛츠 롤-!!" 에 대한 감상 메일을 보냈었고


이게 또 뽑혀서 이쿠코 성우가 직접 읽어준 일이 있었다.


우발적인 해프닝?이긴 하였으나

이 방송에서 이쿠코 성우는 자신이 평소에 음지에서 쓰는 예명을 커밍아웃 해버리고

(음지, 양지에서 복수 예명에 대해 언급하는 건 성우계에선 터부)


이 이후로 난 이쿠코 성우의 개인 방송을 자주 듣게 되었다.



코로나로 날려먹은 1년이 너무 허망하게 지나가던 12월,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는 라디오 방송은 나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올해 2월 이쿠코 성우가 팬레터를 받을 수 있는 개인 사서함을 오픈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처음으로 EMS도 보내보게 된다.


그 이후로도 각종 방송에 사연을 보낸다던지,

유튜브에 한글 자막을 만들어서 제공한다던지.


일본 원서를 읽고 일어를 어느 정도 끌어올렸으나

어디까지나 나 혼자 즐기기 위한 수단에 그쳤었던 언어 능력을

불특정 다수의 유저들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곳에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누키타시에 대한 애정은 여전해서

올해 4월에 있었던 누키타시 팬미팅에 출연자 20명 전원에게 팬레터 보낸, 9화에 걸친 장대한 썰은 아래 글에서 볼 수 이따.

https://arca.live/b/yuzusoft/27419565





아무튼 그렇게 코로나로 다양한 걸 하지 못하게 되고

앞으로의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 속에서도 그날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 작품이었고,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성우들의 방송을 들으며 알게 된 현지 일본인들 수십 명과 함께

즐거운 미연시 라이프를 보내고 있었다.



내년 머학 졸업을 앞둔 나는

이제 연말이 다가오고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해야할 시기.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학과 공부는 흥미도 없었고 열심히 하지 않았고

애초에 내가 이 길을 걸었을 때 사회 나가서 가슴 펴고 내 기술력을 자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엔 No 뿐이었다.


자존감도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기회가 내려왔다.


이번 달 초,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 모집 공고가 뜬 것.


해당 출판사와는 약 3년간 일어 원서 리뷰어 활동을 계속 해온 이력이 있었는데

그렇다보니 전혀 낯선 업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준비 기간이었지만 과감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지원서 넣고, 서류 통과 후 어제 면접을 보러 서울까지 올라왔었던 것이다.


면접은 사실 많이 떨리고 긴장도 되는 데다 인생 첫 취업 면접이니

어제 정말 긴장 많이 했었다고 생각한다.

실무진 4 : 나 1 로 1시간 면접을 봤으니까...


(59:32 경)


그래도 면접 보러 가기 전,

성우 분들과 시청자들이 나의 도전에 대해 많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셨고

장난 안치고 면접 당일까지 포사라의 응원 메시지는 200번은 넘게 반복해서 들으며 마인드 컨트롤 했다.


그리고 실무진 면접이 끝나고,

바로 이어서 임원 면접까지 직행.


임원 면접은 사실상 쉬어가는 느낌이었다고 생각해서 마음 좀 편하게 먹긴 했는데,

그래도 이번에 실패하면 난 정말 대학원생 노예가 되는 길 말곤 앞길이 보이지 않아 

여기서 떨어지는 것의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게 컸었다.


그리고 아침 10시부터 시작되어 11시 반 넘어 끝난 2번 연속 면접 끝에

다음 달부터 편집자로 상경하게 되었다...


(57:00 경)


어제는 포사라 개인 방송에서 또 메일을 읽어주셨는데

본인 일인 마냥 너무 기뻐해주시고 축하해주시고


동접 시청자들로부터 얼굴 어떻게 생겼는지 1도 모르는

(그래도 한 20명 정도는 zoom 온라인 이벤트로 얼굴 까서 알긴 아는데)

바다 건너 외국인에게 무수한 축하 멘트를 남겨준 덕에 

'아, 내가 열심히 덕질한 보람이 있구나' 라고 깨달았음.


물론 전공대로 살았으면 분명 편집직보다는 페이가 더 쎘을지도 모르고,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남들이 기겁할 정도로 진지한 오타쿠인 면모를 살릴 수 있는 이 길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 성격에 가장 알맞는 직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직접 일을 해보면 또 느끼는 바가 다를 진 몰라도

정말로 나 혼자서 찾아 일궈낸 결과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기뻤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도 괜찮다고 확신을 가지게 된 근거로

지난 1년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진심을 다한 덕질이 있었기에

내가 맘먹으면 이런 것도 해낼 수 있겠구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누키타시는 내 20대 가장 중요한 이 타이밍에 인생을 뒤바꿔준 작품이라 생각하고 있고

내가 이 정도로 심각한 또라이 새끼인지를 알게 해준 굉장히 의미 깊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미연시를 단순히 한발 뽑기 위한 장르라 생각했던 내 인생관을 뒤흔들고

수많은 인연을 맺게 해준 누키타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나에게 있어 소중한 20대를 마무리해준 [인생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