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듀얼해서 이긴다면 말이야."


소년은 연신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얼이 빠진 소녀를 호기롭게 비웃었다. 그리고는 큼지막한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손목보도해인지 뭔지 모를 플라스틱 쪼가리를 위풍당당하게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소년이 팔을 한 번 까딱이자 종이비행기처럼 접혀 있던 부분이 펼쳐지며 V자를 이루었다. 소년은 목덜미의 깃을 한껏 올리며 '와하하하하하핫!'하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소녀는 도통 오리무중이었다. 분명 주변 남자애들이 어릴 적에 비슷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에 기억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소녀가 말하길,


"그 장난감은 뭐야?"


"어허, 장난감이라니, 이건 듀얼리스트의 방패, 듀얼 디스크다!"


"듀얼디스크?"


"그래. 카드가 검이라면 듀열디스크는 방패! 전장에 나갈 때 맨몸으로 나가진 않잖아?"


"그래서 결론이 뭔데?"


"기한은 일주일! 그 안에 강인! 무적! 최강인 이 몸을 쓰러뜨릴 덱을 만들어 도전하도록! 으흐흐흐흐.. 와하하하하하핫!!!"


소년은 소녀를 가소롭다는 양 내려다보며 팔짱을 끼더니 목이 넘어가도록 웃어제꼈다. 그의 각진 갈색 머리와 다리께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망토와 조합되어 소년의 행보를 더욱 기묘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곤해할 성질머리임에도 소녀에게는 그런 기행마저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거침없이 질주하는 맹수를 자신의 손으로 붙잡았을 때의 쾌감은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오로지 생각만으로 살짝 느껴버렸을 정도니 말이다. 소녀는 조용히 일어나 소년과 눈길을 맞추고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소녀의 감색 눈동자에는 천 년 묵은 구미호를 연상케 하는 요사스러움이 감돌았다. 


"후후, 벌써부터 지지 않았다고 억지 부릴 네가 생각나는데?"


"흥, 무르군! 이 몸의 사전에 패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그래. 일주일이야. 그 동안 마음껏 자유를 느껴봐."


소녀의 녹아내릴 듯한 어조와 시선에도 소년은 굳건히 서서 그녀와 마주했다. 긍지높은 듀얼리스트로서 범골만도 못한 애송이르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소년은 도리어 피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목석마냥 담담한 반응에 소녀조차 조금 놀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머릿속에는 첫 경험부터 결혼까지 로드맵이 창창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뭐야, 이거 애들 게임 아니었어?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저연령층이 즐기는 게임이라 손쉬울 것이라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규칙 자체도 몇 번씩 바뀌었고, 재정에 관해서는 제조사가 별도로 답변을 작성할 정도이며, 관련 정보는 위키의 항복 하나를 훌쩍 넘어선 수준이었다. 


"파괴랑 묘지로 보내고는 뭔 차이야? 대상이랑 고르고는 왜 다른 건데? 때와 경우는 왜 구분해 놨어? 체인 트리는 뭐고 우선권은 대체 무슨 소리야? 펜듈럼이랑 링크는 대체 어떻게 쓰는 거냐고!"


재정 항목을 쭉 훑어보던 소녀는 이를 갈며 몇 번이고 애꿎은 키보드를 두들겼다. 예전부터 수재 소리를 들어왔던 자신이었지만 단 일주일 만에 습득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방대한 정보량이었다. 소년이 어떤 덱을 쓰는지는 감시카메라로 파악했건만, 카드의 효과를 모르니 변변한 대응책을 고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근 반나절 동안 자포가지했을 지경이었다. 


반쯤 진이 빠진 소녀의 뇌리에 문득 묘안이 번뜩였다. 


'굳이 복잡하게 접근할 필요 없잖아? 쉽고 강한 덱을 사면 그만이지!'


소녀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운지 싱글벙글거리며 자신을 안아주기까지 했다.그리곤 즉시 컴퓨터를 켠 뒤, 즉시 유튜브에 '쉽고 강력한 덱'을 검색했다. 꽤나 인기있는 게임인지 스크롤을 내려야 할 만큼의 결과가 나왔다. 영상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대충 넘기던 소녀는 한 영상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잼민이도 30분이면 마스터하는 초간단 덱'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에 30분이 넘는 다른 영상과는 다르에 고작 10분 남짓한 길이가 소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래이션이 후줄근한 남자 목소리인 건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소녀는 꾹 참고 끝까지 시청했다. 


영상 말미에 이르자, 소녀는 막힌 길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에 휩싸였다. 나는 왜 이런 게임에 괜히 열을 내고 있었을까. 이렇게나 간단한데 말이다. 소녀는 즉시 검색엔지를 풀가동하여 신사임당 3장짜리 덱을 쿨하게 질러버렸다. 배송까지는 약 이틀, 소녀는 영상을 수십 번이고 복습하며 승리와 연인에 대한 욕망을 불태웠다. 




"HUN, 꼴사납게 무릎을 꿇을 준비는 됐나?"


"어머, 내가 말을 대신 해 주네. 내 패배는 기정사실이야. 받아들여."


"흥, 나는 미래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내가 내딛는 길, 그것이 미래가 된다! 듀얼 개시! 네가 선공이다!"


소년은 한껏 거만한 표정을 자아내며 당당하게 소녀를 손가락질했다. 자신에게 차례를 넘겨준 순간, 소녀는 회심을 미소를 지었다. 덱 조작은 진작에 끝낸 상태. 그 빌드라면 소년의 덱을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소녀는 입꼬리가 귀에 닿도록 웃더니 덱 위에서 5장을 뽑았다. 키 카드 2장과 핵심 마법 카드 1장. 실로 완벽한 패였다. 소녀는 중국풍이 물씬 나는, 용의 투구를 쓴 검은 피부의 여검사를 필드에 내놓았다. 


"상검사-막야를 일반 소환, 효과로 패의 상검사-태아를 보여주고 토큰을 소환할게."


막야를 보자마자 소년의 눈썹이 불안하게 들썩였다. 출시된 지 1달도 되지 않은 최신 카드를 무슨 수로 입수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지만 소년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패가 상당히 잘 풀린 덕에 한두번의 견제 정도는 돌파할 수 있었다. 소년은 묵묵히 소녀의 전개를 지켜보기로 했다. 


상검대사-적소

[환룡족/싱크로/효과]

튜너+튜너 이외의 환룡족 몬스터 1장 이상

이 카드명의 ①②의 효과는 1턴에 1번, 어느 쪽이든 1개밖에 사용할 수 없다.

①: 이 카드가 싱크로 소환에 성공했을 경우에 발동할 수 있다. 덱에서 「상검」카드 1장을 패에 넣거나 제외한다.

②: 자신의 패/묘지에서 「상검」카드 1장 또는 환룡족 몬스터 1장을 제외하고, 이 카드 이외의 필드의 효과 몬스터 1장을 대상으로 하여 발동할 수 있다. 그 몬스터의 효과를 턴 종료시까지 무효로 한다. 이 효과는 상대 턴에도 발동할 수 있다.



"레벨 8 싱크로, 상검대사-적소를 특수 소환, 막야의 효과로 1장 드로우하고 적소의 효과로 용상검현을 패로 가져올게."


벌써 견제 카드가 하나. 왠지 모를 불안이 소년의 사고를 스치고 지나갔다. 


튜너 + 튜너 이외의 몬스터 1장 이상

이 카드명의 ②의 효과는 1턴에 1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①: 1턴에 1번, 필드의 카드 1장을 대상으로 하고 발동할 수 있다. 그 카드를 파괴한다.

②: 이 카드가 필드에 앞면 표시로 존재하는 한 1번만, 마법 / 함정 / 몬스터의 효과가 발동했을 때 발동할 수 있다. 그 발동을 무효로 하고 파괴한다.

③: 서로의 스텐바이 페이즈에, 자신 묘지의 레벨 9 이하의 몬스터 1장을 대상으로 하고 발동할 수 있다. 이 카드를 주인의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리고, 그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상검군사-용연의 효과 발동, 패의 태아를 버리고 용연을 특수 소환. 그리고 토큰을 특수 소환할게. 이 둘로 레벨 10 싱크로. 플뢰르 드 바로네스를 특수 소환. 용연의 효과로 너한테 1200데미지를 줄게."


소년의 입이 무기력하게 벌려졌다. 무슨 효과든 틀어막는 만능 견제 요원. 저것까지 나왔으니 상당히 어려워졌다. 소년은 소녀가 엔드를 선언하길 간절히 바랬지만, 갈망이 무색하게 소녀는 육욕 가득한 웃음을 짓고서 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이 마냥 귀여운지 키득거리더니 패의 마법 카드 한 정을 보여줬다.


"용상검현을 발동, 아크네메시스 프로토스를 패로 가져올게. 그리고.. 묘지의 몬스터를 3장 제외, 프로토스를 특수 소환."


이 카드는 통상 소환할 수 없다. 자신 묘지 및 자신 필드의 앞면 표시 몬스터 중에서, 속성이 다른 몬스터 3장을 제외했을 경우에 특수 소환할 수 있다. 이 카드명의 ②의 효과는 1턴에 1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①: 필드의 이 카드는 효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②: 필드의 몬스터의 속성을 1개 선언하고 발동할 수 있다. 필드의 선언한 속성의 몬스터를 전부 파괴한다. 다음 턴 종료시까지, 서로 선언한 속성의 몬스터를 특수 소환할 수 없다.


"프로토스의 효과 발동, 빛 속성을 선언할게. 적소는 파괴되고... 아 맞다! 대령봉상검문 발동! 묘지의 적소를 특수 소환할게. 내 정신 좀 봐. 이걸 까먹을 뻔했네."


소녀가 효과를 사용한 순간, 소년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자신의 주력 몬스터의 절대다수는 빛 속성, 그걸 막아버린 이상 자신에게 역전의 가능성은 없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매치는 3판 2선승!"


"어머, 그 말은?"


"다음 2경기, 듀얼리스트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너를 때려눕혀 주겠다! 이번에는 내가 선공이다! 이소노, 듀얼 개시다!"



소녀는 적당히 덱을 섞은 시늉을 한 뒤, 카드를 5장 뽑았다. 그 중 여러모로 인상적인 일러스트가 그려진 몬스터 카드를 보자, 소녀는 승리를 확신했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결의에 가득찬 표정으로 몬스터를 필드에 내놓았다. 


"나의 신부, 파란 눈의 소녀를 일반 소환! 그리고 패에서 파란 눈의 현사의 효과를 지정하겠다. 각각의 효과로 나의 영혼이자 심복, 두 푸른 눈의 백룡를 강림시키겟다! 계속해서 드래곤 자각의 선율을 발동! 패를 한 장 버리고 푸른 눈과 아백룡을 패에 넣겠다! 자, 지고의 용의 힘을 맛볼 준비는 됐나? 이 드래곤의 영혼의 힘으로 새로운 심복을 불러낸다. 나오너라! 푸른 눈의 아백룡!"


'흐응 꽤나 용을 썼네. 뭐, 그래봤자 이거 하나면 끝이지만.'


필드에는 백룡 2마리와 아백룡 1마리가 전부. 하지만 소녀는 소년이 무엇을 소환할지 너무나도 잘 았고 있었고, 대책도 이미 갖춰놓은 지 오래였다. 소년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비기를 필드 위에 내놓았다.


"이게 진화한 최강의 드래곤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융합 소환! 나타나라, 궁극의 푸른 눈의 아룡!"


"흐음.. 공격력 4500에 파괴 내성이라, 꽤나 까다로운 아이네."


"후훗,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게 어떤지? 아룡은 신이고 무적이다!"


"과연 그럴까?"


"뭣이?!"


"지금까지, 몇 번 소환했지?"


"설마, 네 녀석...!!!"


이 카드명의 효과는 1턴에 1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①: 상대가 5장 이상의 몬스터를 일반 소환 / 특수 소환한 턴의 메인 페이즈에 발동할 수 있다. 자신 / 상대 필드의 앞면 표시 몬스터를 가능한 한 릴리스하고, 이 카드를 패에서 특수 소환한다. 그 후, 상대 필드에 "원시생명체 토큰"(암석족 / 빛 / 레벨 11 / 공 ? / 수 ?) 1장을 특수 소환한다. 이 토큰의 공격력 / 수비력은, 이 효과로 릴리스한 몬스터의 원래 공격력 / 수비력을 각각 합계한 수치가 된다. 이 효과는 상대 턴에도 발동할 수 있다.


"패에서 원시생명체 니비루의 효과를 발동, 아룡을 릴리스하고 네 필드에 토큰을 하나 선물로 줄게."


"이 굴욕...! 이 모욕...! 이 수치..! 절대 잊지 않겠다!"


이후 모든 자원을 소진한 소년은 적소-바로네스-프로토스 콤보에 무기력하게 패배를 헌납하고 말았다. 소년이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는 사이, 소녀는 와이셔츠 단추를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깊은 계곡과 분홍빛 속옷이 적나라하게 보였으나 소녀는 오히려 상의를 더욱 풀어헤치며 소년에게 대놓고 보여주기까지 했다. 


"무슨 수작이냐?"


"응? 넌 이제 내 꺼니까, 못 도망가게 기정사실을 만들어야지! 자기도 내심 바랬잖아? 아니, 미리 여보라고 불러야 되나?"


소녀는 상의를 훌훌 벗어던진 뒤, 다짜고짜 소년에게 올라탔다. 한 손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한 쌍의 흉부장갑이 출렁거렸다. 하지만 소년은 욕정하기는커녕 소녀의 타오르는 눈빛에 본능적으로 정조의 위협을 느꼈다. 천만다행으로 체격 차이 덕에 빠져나갈 여지는 있었다. 소년의 사고회로는 최고조로 과부하되어 최단거리인 도주로를 산출했고,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소년은 소녀의 배에 양 손을 대고 밀어버린 후, 양 팔로 안면을 가린 채 창문을 깨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달려 백룡 커스텀 오토바이에 올라타고서 시동을 걸어 냅다 엑셀을 밟았다. 


"알카트라즈를 향해 전속★전진이DA!!"


"야! 잡히면 일주일 내내 착정할 거야! 각오해!!"


소녀의 악에 받친 고성은 할리 데이비슨의 굉음에 겹겹히 묻히고 말았다. 황혼에 다다른 노을이 두 사람을 오도카니 비출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