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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 못한 까마귀와,

눈치채지 못한 남자.

그 뿐인 이야기.


***


침묵을 등에 업은 고요한 들판과, 그 위에 서있는 까마귀와 인간 하나.

정지 화면을 연상케 하는 긴 침묵과 부동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불어오는 바람과 살랑이는 나뭇잎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멈췄다고 해도 믿었으리라.

"아야 씨?"

돌이 되어버린 눈 앞의 까마귀를 소리 내어 부른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쉼없이 요동치는 그녀의 동공이 아니었다면 선 채로 기절했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못 들었어요."

굳은 입술이 마침내 움직인다. 그녀는 입가에 위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떠나요? 어딜요? 여행이라도 가려는 건가요? 그, 좋은 생각이네요! 가끔은 당신같은 집돌이도 밖에 나와서 세상을 구경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녀는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옮겨갔다. 이해하지 못한 걸까, 이해하지 못한 척 한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아, 여행지라면 제가 괜찮은 곳을 알고 있는데...나중에 같이 가실래요? 지금은 못 가겠지만, 지저에 괜찮은 욕탕이 하나 있거든요. 물론 혼욕은 안 되겠지만..아, 아니..당신이 정 원한다면 생각해 볼 수도..."

팔짱을 낀 손에 힘이 실린다. 마치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어미처럼,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맹금류처럼. 그녀는 내게 얽혀들어왔다.

"...아야 씨."

뭔가 이상하다.

나는 그녀가 웃으면서 나의 마지막을 배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던지면서 앞으로도 잘 지내라는 덕담으로 끝맺을 줄만 알았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눈 앞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입꼬리는 위로 휘어지고, 목소리도 평소처럼 해맑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 숨어있는 끈적거림과, 섬뜩함을.

"왜,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요."

그녀는 내게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했다. 부드러운 감촉이 팔을 완전히 파묻고, 달큰한 살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 적극적인 행위에 가슴 깊숙히 묻혀있던 성욕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고마웠다니, 웃기지 말라구요. 아예 사라져버릴 사람이 할 법한 인사잖아요. 저처럼 마음 여린 소녀를 놀리니까 재밌나요? 생각했던 것보다 최악의 남자네요. 당신."

"아야 씨."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조용히, 나지막하게, 떨림 없이.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게 멈출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저는 환상향을 떠날 겁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있는 직설적인 표현이다. 텐구 중에서도 현명한 그녀가 이해 못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바보가 되기로 결정했는지 구태여 캐물었다.

"언제...언제, 돌아오실 건데요?"

그래서, 이번엔 바보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확실히 말해주기로 했다.

"돌아오지 않아요."

일말의 희망 한 조각으로 버티던 그녀의 미소가 점점 희미해진다. 애달픈 숨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제가 있어야 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나는 담담히 선고하듯이 말을 끝맺었다. 무어라 할 말을 찾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끝내 의미있는 단어를 뱉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왜?"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세 방울.

칠백 년 전, 첫만남 이후로 본 적 없었던 그녀의 눈물이 세 방울이나 땅 위로 떨어진다. 평소처럼 활발함을 연기할 기력조차 없는지,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웅얼거렸다.

"뭐..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으신 거에요? 왜 갑자기... 아니, 적어도 떠날 거라면...저랑 상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제가 당신한테, 으윽..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어요..?"

순간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그럼 그녀가 나한테 무슨 존재란 말인가. 그저 아침이 되면 신문을 주고받고, 가끔 실없는 농담이나 나누며, 연회장에서 만나면 종종 술잔이나 기울이는 게 전부였는데.

그저 그 뿐인 사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녀는 이렇게나 슬퍼하고 있는 걸까.

"아야 씨."

참을 수 없이 궁금해져서, 나는 물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 목소리가 조금은 차가웠던 것 같다.

"당신한테 저는 대체 무슨 존재였나요?"

"뭐...라..고요..?"

이제는 여러 번 말하는 것도 싫증이 난다. 나는 언성이 높아질 뻔한 것을 참고,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에 저희가 그렇게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잖아요? 그저 오랫동안 알아온 것이 전부였던 저희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를 위해 울어줄만큼 애틋한 관계가 된 거죠?"

"그야..당연하잖아요...! 저희가..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엔 나를 향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어째서 기억해주지 못하느냐고, 그녀는 눈빛으로 나를 추궁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황당했다.

나의 잘못인가?
사실 그녀와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이자 연인이었던 건가?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던 내가 호구병신이었던가?

헛소리. 

개가 짖는 것만도 못한 지랄이다.

"기억 안 나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언젠가 제가 직접 신문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응원해주겠다고...만약 그 날이 오면 제 첫번째 구독자가 되어주겠다고...항상 곁에서 누구보다 먼저 읽어주겠다고..그렇게, 약속했으면서..."

그래.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날갯짓도 못 하던 꼬마 시절의 그녀가, 삐뚤빼뚤 어설픈 글씨로 써갈긴 신문을 가져와서 내밀던 그 장면이.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좋은 말로 격려하던 나의 모습이.

"저는 그 날 이후로, 당신만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왔는데...흐끅, 당신은 이렇게 좋을대로 떠나버리고...이게 대체 뭐에요..! 저만 바보가 된 셈이잖아요..!"

그녀의 어깨가 힘없이 쳐졌다. 바닥으로 떨군 고개 아래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신문은 이미 보지 못할 만큼 구겨져 있었다.

"아야 씨."

나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마지막이 될 부름이었다.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저희가 환상향에서 다시 재회했을 때, 기억 나세요? 그 때 저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당신한테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었죠."

그녀는 여전히 훌쩍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뭐 어쨌냐는 듯했다. 나는 격양되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조곤거렸다.

"근데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세요?"

아직도 선명하다. 과거의 인연을 재회한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나서 다가가던 나를 향해 그녀는,

"고개 한 번 끄덕이고 그냥 지나가더군요. 그 때 도대체 무슨 바쁜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저는 깨달았어요."

아,
저 소녀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시선 한 번 주고 말 존재일 뿐이구나.

"아..아니에요..그때는..정말 바쁜 일이..있어서..!"

"그뿐만이 아니죠."

그녀는 변명하기 위해 황급히 입을 뗐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입을 놀릴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변명을 하든, 그게 나의 마음을 돌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날 이후로도 당신은 저한테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더군요. 신문을 주러 가끔씩 오는 걸 제외하면, 당신은 저를 개인적으로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어요."

그녀의 가증스런 입술이 드디어 닫혔다. 그 표정이 점점 죄책감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연이어 입을 뗐다.

"제가 당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존재였다면."

찌익, 찌이익. 손에 잡힌 신문을 두 손으로 잡아 반으로 찢는다. 어느새 종잇쪼가리로 전락한 그녀의 신문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마음에 담아두지만 말고 행동으로 보였어야죠. 제가 알 수 있도록. 그랬다면 저도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안아줬을 텐데요."

그녀의 몸이 망가진 목각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공허한 눈동자는 바람에 흩어지는 신문조각들을 담고 있었다.

"아..아아..."


모든 것이 무너진 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울음소리였다.


"흐, 흐윽...흐아앙.."

마치 어미를 찾듯이 애달프게 울부짖는 그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거슬리게 긁었다. 듣기 싫었다. 괜스레 감정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아야 씨."

"흐..끄윽...죄, 죄송..해요...제가..흐읍, 겁쟁이라서..마, 말 못한 것 뿐이에요...그러니까..제발..."

모든 것이 끝났지만 다시 한 번 그녀를 부른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폐의 공기를 모조리 뱉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방금 전에는 몹시 불쾌하긴 했지만, 여전히 당신은 제게 좋은 친구이자, 신문 배달부니까요."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물기에 젖어 일렁이는 그 예쁜 눈동자엔 끝모를 자책, 슬픔, 그리고 어리석게도 티끌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당신한테 했던 말 기억하나요? 그날 은행나무 아래서, 당신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했던 말이에요."

그녀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이건 차마 기억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친절히 그 답을 알려주었다.

" '웃어, 아야. 너는 웃을 때가 가장 예쁘니까.' "

그녀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이런 기념적인 날을, 이렇게 엉망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나의 소중한 친구였고, 그녀에게도 나는 소중한 존재일 테니까.


"아..흐윽..아..안 돼....거, 거짓말이야..그, 긴 세월동안 기다렸는데..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 부디 울지 말고, 평소처럼 밝고 활발한 미소로 우리의 마지막 이별을 장식해주길 바란다. 


"잘 있어요. 아야 씨.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내가 기분좋게 이 환상을 떠날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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