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너와의 만남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학교가 같아서집으로 가는 길이 같아서취향이 비슷해서.

 

 그저 우연히 친해진 관계였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1. 어린 시절.

 

 

 어렸을 적의 기억을 되짚어보면그때 우린 참 많이 싸웠었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도 하고잔뜩 삐진 상태로 일주일이 넘도록 말을 안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다투고 나면우리는 언제 싸웠냐는 듯 붙어다녔다그것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사귄다며 놀리기도 했었지만 난 괜찮았다.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리고 언제였더라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중학교 3학년 쯤이었을 것이다.

 

 베이스 기타?”

 밴드부에 들어갈 거야!”

 

 갑자기 베이스 기타를 들고 와선 함께 밴드부에 들어가자며 졸라댔었지.

 

 우리는 제대로 외우지도 못한 코드를 짚어가며밤새도록 베이스 기타를 연습했었다.

 

 너네 베이스야?”

 아직 실력은 모자라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좋아합격!”

 

 그땐 몰랐지만베이스는 생각보다 훨씬 환영받는 존재였다.

 

 그렇게 쉽게 통과할 줄 알았다면 밤을 새면서까지 연습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래도 나는 좋았다이것도 너와의 추억이라 생각하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음악에 푹 빠져있던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난 여전히 베이스 기타를 좋아했고 이따금 너와 연습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넌 고등학생이 되자 훨씬 예뻐졌다.

 물론 어렸을 때도 예뻤지만지금의 넌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그렇게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안녕수희 맞지?”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그냥 너 엄청 예뻐서.”

 히히그래?”

 

 너는 단숨에 우리 반의 중심이 되었다.

 

 네가 웃으면 다른 아이들도 웃었고네가 어딜 가면 다른 아이들도 너를 따랐다.

 

 시후야오늘은 같이 못 갈거 같아.”

 나 먼저 간다.”

 

 서서히변화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다가왔다.

 

 학교가 끝나면 너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냈고나는 연습실로 향해 베이스 기타를 연습했다.

 

 점차 대화를 나누는 일도 뜸해졌고결국 학교에서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너는 더 이상 베이스 기타에 손을 대지 않았고나는 학교에서 잠만 자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너와 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사이로 변하고 말았다.

 

 어쩌면 우린 남보다 못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연락하기엔 어색했고예전처럼 대하기엔 너무나 멀어졌기에.

 

 [수능 파이팅]

 

 남들이 너와 함께 있을 때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2. 착각의 끝.

 

 

 시간은 언제나 덧없이 흘러가는 탓에지긋지긋하던 고등학교 생활도 어느덧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아주 오랜만에 그녀와 함께 하교했다.

 

 엄청 오랜만이네.”

 뭐가?”

 우리 이렇게 걷는거.”

 

 내 말에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살며시 웃었다.

 

 그러게우리 어렸을 땐 맨날 같이 다녔는데.”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어색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원래는 좀 더 분위기가 풀어졌을 때 말하려 했는데슬슬 하교길도 끝나고 있는지라 어서 말해야 했다.

 

 수희야크리스마스에 시간 있어?”

 크리스마스?”

 이번에 그 밴드 공연하는거티켓 구해놨거든.”

 

 우리가 베이스 기타를 시작할 때부터 좋아해온 일본의 밴드 그룹.

 

 마침 시기에 맞춰 내한 공연이 예정되었고운이 좋게도 티켓을 두 장 구할 수 있었다.

 

 이걸 계기삼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자 곧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그게… 나 그때 친구들이랑 놀기로 해서.”

 

 그리고내게 그런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냐.”

 

 지금까지 줄곧 착각했던 것이 있었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그저 우연에서 시작했을 뿐인 관계였다.

 

 내게는 그 사이가 특별할지라도나는 그녀에게 남들과 다름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착각도 이정도면 병이었다.

 

 이젠 슬슬 인정하고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3. 크리스마스.

 

 

 미안해대신 졸업식 날엔 꼭 보자!”

 그래.”

 

 한국에도 이 밴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남은 티켓 한 장은 원래 샀을 때보다 조금 더 비싸게 팔렸다어느정도 위안은 되었지만그렇다고 원래부터 되파는 걸 염두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닌 누군가와 공연을 보고 싶지는 않았고내 옆자리가 비어있는 걸 원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다행인 점은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연출해준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나도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고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고그들을 볼수록 네가 나의 곁에 없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겠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 뿐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참고로커플들의 성지라 불리는 일루미네이션은 그냥 전구였다.

 

 슬슬 시작하겠네.”

 

 감상은 이정도면 충분하다모처럼의 내한공연이니 늦지 않도록 공연장으로 갔다.

 

 역시 인기가 많은 밴드여서 그런지 객석은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안녕하세요한국의 팬 여러분!”

 

 밴드 일원들의 짤막한 인사 이후 공연이 이어졌고활력 넘치는 공연을 감상하는 내내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녀와 함께 베이스를 시작할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이 곡들을 들어왔다그 노래들을 직접 듣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걔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지지금은 잊자.”

 

 정작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혼자 왔지만그런 내 처지를 잠깐이나마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운 공연이었다.

 

 정말 팬이에요베이스 시작할 때부터 매일 들었어요.”

 에에베이스라니 정말인가요다음에 한 번 들려주세요!”

 

 공연 후 이어진 팬 사인회 역시 즐거웠다.

 

 나의 꿈이었던 이들과 악수를 나누고함께 사진을 찍는 동안은 정말 꿈을 꾸는 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꿈이란 건 언젠간 깨게 되는 법이다.

 

 공연이 아무리 즐겁고 행복했어도나는 결국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혼자 온 처지였다.

 

 … 진짜 싫다.”

 

 갑자기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즐겨놓고 이제와서 쭉 우울했던 것처럼 행동하다니이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공허한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서려 하자등 뒤에서 조금 어색한 한국어가 들렸다.

 

 저기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자내 몸이 덜컥 굳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해버린 이상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밴드의 리더이자 내가 베이스에 모든걸 바치게 만든 사람.

 

 나의 우상이었고지금도 여전히 내 목표인 사람.

 

 기다릴게요.”

 

 베이스의 여제이시카와 유키가 나를 향해 팔을 흔들고 있었다.

 

 

4. 우연어쩌면 운명.

 

 일본어는 잘 못하는데이시카와 씨가 한국어를 할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오오여기서 시후 군이 연습하는거군요!”

 거의 매일 나와서 연습하고 있어요.”

 대단해시후 군은 사실 굉장한 노력가였군요!”

 

 사실 지금도 정신이 살짝 멍했다.

 

 이시카와 유키가 우리 연습실에 오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이 새벽에나와 단 둘이서만 말이다.

 

 시후 군그거 알고 있나요?”

 뭔데요?”

 

 내 물음에 이시카와 씨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실 이 만남은 예정되어 있었어요요컨대 운명이란 얘기죠!”

 그런가요.”

 잠깐만생각보다 놀라지 않는데요?”

 

 그야 뭐평소에도 실없는 소리 하는거로 유명하니까.

 

 손나한국에서 제 이미지가 그런가요?”

 일본에서도 그렇지 않나요엉뚱한 4차원 유키.”

 엣헴그래도 할 때는 한답니다!”

 

 잠시 우쭐해졌던 그녀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진지해졌다.

 

 그 극적인 변화에 순간 숨이 멎었다.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시카와 씨가 말했다.

 

 정말로저희는 시후 군을 알고 있었어요.”

 저를 알고 있었다고요?”

 인터넷에서 베이스 연주하는거 봤어요.”

 

 아마도예전에 연습실 사람들끼리 찍었던 동영상을 봤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그 영상만 조회수가 높았었는데이렇게까지 퍼졌을 줄은 몰랐다.

 

 사실이렇게 공연에서 만나지 않았어도 시후 군을 만나보려고 했어요.”

 저를 보려고 했다고요?”

 후후진정한 베이시스트는 기타로 대화하는 법이죠.”

 

 또 실없는 소리를 내뱉은 그녀가 기타 케이스를 뒤적거렸다.

 

 벌써 10년이 넘도록 사용해서 그런지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검은색 베이스 기타였다.

 

 사인회에서제가 한 번 들려달라고 했었죠?”

 

 이시카와 씨가 자신의 베이스 기타를 내밀었다.

 

 실력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

 

 뭐라 반박의 말을 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홀린 듯이제는 더없이 익숙한 코드를 짚었다.

 

 오오소울이 담겨있어요.”

 그럼 뭐어시작합니다.”

 

 고요한 연습실에 묵직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연습했다.

 

 잔잔해야 할 때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얕게,

 빨라야 할 때면 베이스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기교가 필요할 때면지금까지 연습해온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역시 이게 최고야.’

 

 모든걸 잊어버리고 손끝의 감각과 소리에만 집중하는 순간.

 

 지금만큼은 아픈 기억도 잊어버리고 집중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꽤나 공들인 연주를 마치고 나자잔뜩 흥분한 이시카와 씨의 박수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엄청 멋있어요저보다 더 잘하시는거 같아요!”

 과찬이에요.”

 아뇨특히나 하이라이트 부분의 슬랩이 최고였어요!”

 

 꺅꺅거리며 좋아하는 이시카와 씨를 지켜보자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중학생 때의 내 연주를 들을 때면 그녀도 이시카와 씨처럼 좋아했었는데.

 

 잠시 상념에 빠져있으니이시카와 씨가 손을 휙휙 흔들었다.

 

 멋진 연주였어요동영상에서 봤을 때보다 실력이 좋아진 거 같아요!”

 

 그야 당연한 소리였다그때는 아직 그녀와 멀어지기 전이었고그녀와 멀어진 후로는 미친 듯이 베이스 기타에만 매진했으니.

 

 그러면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아까 전처럼그녀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원래 일렉기타를 해주시던 사이토 씨가이번에 결혼하시면서 마지막 연주를 하게 됐어요요컨대 은퇴라는 뜻이죠그래서 제가 일렉기타를 맡기로 했어요.”

 그 말은.”

 저희 밴드는 베이스 기타를 맡아주실 분이 필요해요.”

 

 이어질 말이 어떤 의미일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시후 군저희 밴드와 함께해주실 수 있나요?”

 

 

#5. 이별.

 

 

 그날로부터 며칠이 더 흘러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꽤 오랜만에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이 전부 모였다.

 

 시후야수희야졸업 축하한다!”

 

 술과 음료수가 든 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오던 고깃집이었는데오늘은 어쩐지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체할 정도는 아니어서 남들이 먹는 만큼은 먹었고남몰래 편의점에서 소화제를 사다 먹었다.

 

 식사를 끝낸 뒤 다함께 우리 집에 들어왔고부모님들은 술을 꺼내오면서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요즘 주식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느니 하는우리 입장에선 정말 지루한 이야기였다.

 

 나야 억지로 참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는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잠깐 걸을까?”

 .”

 

 이대로 두면 꼭 쓰러질 것 같아서너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 공원을 향해 느긋하게 걷고 있으니 지쳐있던 네 표정에도 점차 활력이 돌아왔다.

 

 저기시후야.”

 .”

 우리 이렇게 노는거 오랜만이네.”

 

 그렇게 말한 네가 배시시 웃었다.

 예전부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내가 뭐라 하려는 찰나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도며칠 뒤면 어른이네.”

 그렇지.”

 시후 넌 뭐 하면서 살거야?”

 베이스나 하면서 살지 뭐.”

 으으난 재수나 할까봐.”

 

 그때처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시후 너는 어렸을 때 기억나?”

 그다지?”

 옛날에 너 다쳐서 울었잖아.”

 그땐 네가 울었잖아막 피 난다면서나 죽는거 아니냐고.”

 몰라난 기억 안 나요.”

 자기가 물어봐놓고 기억이 안 난대.”

 

 아무리 추억을 쌓았어도 2년이 넘는 공백을 가리지는 못했는지우리 사이엔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나는 하염없이 널 바라봤다.

 

 수희야.”

 ?”

 

 막상 말하려니 목이 메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이제 말해야 했다.

 

 이것만큼은어느 누구보다도 너에게 먼저 말하고 싶었다.

 

 나 일본 가.”

 

 

#6. 운명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있었다.

 

 너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사실 너와 난 운명으로 이어진 사이였다.

 

 초중고 내내 같은 반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성별이 다른 남녀가이건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가능성이었다.

 

 

 중학교 시절너에게 베이스 기타를 권유했을 때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었다.

 

 그런데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와 함께해줬고그 덕분에 밴드부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혼자였어도 통과는 됐을거 같지만.

 

 그렇게 베이스 기타에 열광했던 중학교 시절을 지나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안녕수희 맞지?”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이 나와 친해지고 싶다며 내게 다가왔다.

 

 내가 웃으면 따라서 웃고내가 어디로 움직이면 다같이 함께해주었다.

 

 조금씩 베이스 기타도 머리 속에서 잊혀졌다연습실에서 연습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학교 친구들과 노는 게 훨씬 즐거웠다.

 

 시후야오늘은 같이 못 갈거 같아.”

 나 먼저 간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같이 하교하지 않았다.

 

 내가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면 너는 연습실에서 베이스를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날.

 모처럼 너와 함께 하교하려고 했는데너는 언젠가부터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시후걔 맨날 연습실 가잖아.”

 … 그래?”

 그것보다 우리 학원 근처에 노래방 새로 생겼대!”

 

 멀어진 걸 체감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운명으로 이어져 있으니까언제든지 다시 친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믿음을 가지고우리는 어느새 3학년이 되었다.

 

 [이거 먹고 힘내!!!]

 [원하는 대학 들어갈 수 있을거야!]

 [수희야평소에도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결과 나올거야.]

 

 남들에게 온갖 격려와 기프티콘을 받는 것보다 너의 짧은 문자가 좋았다.

 

 [수능 파이팅]

 

 힘내야지!”

 

 너의 문자를 볼 때마다 힘이 샘솟았다네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수희야크리스마스에 시간 있어?”

 그게… 나 그때 친구들이랑 놀기로 해서.”

 그러냐.”

 

 하지만나는 너의 제안을 거절하고 말았다.

 

 누구보다 널 좋아하면서도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대신 졸업식 날엔 꼭 보자!”

 그래.”

 

 아쉬울 텐데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웃어주었다.

 

 그 후 졸업식을 할 때 까지 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시후야수희야졸업 축하한다!”

 

 졸업식 날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이 모였다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즐거웠다.

 

 어려운 얘기에 조금씩 지쳐가던 중네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잠깐 걸을까?”

 .”

 

 원래는 밤거리를 무서워했는데너와 함께 걸으니 무섭지도 않고 조금 설레기도 했다.

 

 저기시후야.”

 .”

 우리 이렇게 노는거 오랜만이네.”

 

 내 말에 네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나는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우리는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 벤치에 앉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네 시선이 한참동안 내게서 머물렀다.

 

 뭔가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는데 자꾸만 마음 한쪽이 설레고 두근거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희야.”

 ?”

 

 너는 한참을 망설이면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이래서야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살짝 어색하고도 두근거리는 분위기 속에서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 일본 가.”

 

 네게서 나온 말은고백이 아닌 이별의 말이었다.

 

 

#7. 흔하고 뻔한 이야기

 

 

 흔하고 뻔한 이야기였다.

 

 어렸을 적 친했던 사이가 점차 멀어지는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험삼아 해외로 떠나는 일,

 그리고 유명한 밴드가 실력있는 베이시스트를 영입하는 이야기도.

 

 너무나 뻔하고 지루한 스토리여서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

 공연 보러 갔을 때 나한테 그러더라베이스를 할 사람이 필요하대.”

 

 그런데 일어나고 말았다.

 

 비극도 되지 못하는 유치하고 우스운 촌극그게 우리의 이야기였다.

 

 바로 가는 거야?”

 그렇게 됐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네 실력이 굉장하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나와 다르게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동경했던 밴드가 널 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네가 일본으로 떠나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런데그런데.

 

 이렇게 가는건 아니잖아.”

 .”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픔에 몸이 덜덜 떨리고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우는 모습이 보기 흉할텐데너는 한참동안이나 내 곁에 있어주었다.

 

 그 상냥함에 안심하면서도이제는 너와 헤어져야 한다는 걸 자각할 때마다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히끅흐으으.”

 이제 좀 진정됐어?”

 으응.”

 

 한참동안 울었다.

 

 내가 부끄러워하는걸 알아차렸는지너는 담담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어렸을 때부터 친했잖아.”

 그랬지.”

 운명이… 아니었던거야?”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 착각해버린 모양이다.

 

 우연이란 존재는 너무나 지독해서운명이란 탈을 쓰고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운명은 아니지그냥 지독한 우연이지.”

 

 그 말에 결국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울었다.

 

 너는 말없이 내 곁에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내 울음소리와 네 조용한 위로가 뒤섞인 밤은 천천히 깊어져만 갔다.

 

 

#8. 이별과 약속.

 

 

 네가 사라졌다.

 

 연습실을 떠났고한국을 떠났고나를 떠났다.

 

 [짜잔우리 밴드의 새로운 멤버시후 군입니다!]

 [윤시후라고 합니다일본어는 아직 서툴러요.]

 

 그리고넌 연습실보다 훨씬 큰 무대에 올랐다.

 

 [한국 나이로 20살이니까이쪽 나이로는 아직 18살입니다.]

 [에에완전 어려한 번 누나라고 불러봐요!]

 [이시카와 씨.]

 [잠깐만평소에는 유키 누나라고 불러주잖아!]

 

 네가 떠난 후,

 

 나는 폐인이 되어 방에 틀어박혔다.

 

 친했던 사람들과는 조금씩 멀어졌고결국 내게는 너만이 남았다.

 

 일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매일매일 밴드의 라이브를 챙겨보며 화면 너머의 너를 바라보면서 그리워했다.

 

 [후드쨩오늘도 연습인가요!]

 [후드쨩이라니그게 뭔가요.]

 [시후 군항상 그 옷만 입고 다니잖아!]

 [편하잖아요후드 쓰면 머리 안 감아도 되고.]

 [후드쨩 더러워!]

 

 저 옷은 기억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같이 샀었던 회색 후드집업.

 

 흐헤.”

 

 네가 입고 있는 옷을 꺼내 몸에 걸쳤다.

 

 예전에 우리가 만날 때면 항상 이 옷을 입고 만났는데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른 옷을 입고 다녔다.

 

 너는 언제나 그 옷을 입고 있었는데나는 참 멍청한 아이였다.

 

 [그럼 후드쨩연습 열심히 해요!]

 [대장님도 열심히 라이브 하십쇼.]

 

 화면 너머의 네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너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전의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량한 모습이었지만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틸수 없었다.

 

 라이브가 종료되고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울었다.

 

 흐끅… 흐으으.”

 

 이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조금이라도 네 곁에 있을걸 그랬다.

 

 네가 없는 세상이 이렇게 아플 줄 알았더라면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걸 그랬다.

 

 아무리 후회하고 흐느껴도 네가 돌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 말대로우리는 그저 우연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니까.

 

 라이브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너는 그곳에서 인기있는 몸이 되었다.

 

 [천하제일 베이시스트후드쨩이 왔다!!!]

 [대장님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네가 라이브에 등장하면 언제나 채팅창이 폭주했고네가 좋아서 한국어를 배웠다는 팬들도 여럿 보였다.

 

 [에에후드쨩 복근 핥고싶다 님이 후원을… 이런 닉네임 쓰지 마세요!]

 [제 몸을 왜 핥아요.]

 [맞아시후쨩 복근은 우리 밴드의 특권이야국보로 남겨야 한다구!]

 [전 한국사람인데 왜 일본 국보로 남겨요.]

 

 조금씩 새로운 무대에서 적응해가는 네 모습을 보고 있으면나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었고네가 나에게만 주던 행복에 비하면 너무나 희미했다.

 

 [대장님사람들이 우리 둘 사귀냐는데요?]

 

 이건 조금 씁쓸한 이야기였다.

 

 유독 이시카와 씨와 사이가 좋다보니 둘이 사귀는 게 아니냐는 채팅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그래시후쨩누나 안아줄래?]

 [이시카와 씨지금까지 즐거웠습니다.]

 [너무해시후쨩 나빠!]

 

 장난스럽게 넘어갔지만내 마음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쓰라렸다.

 

 혹여나 네가 다른 사람과 이어지면 어쩌나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렇게 후회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고내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시후 군이 요즘 인기가 많은데혹시 이상형이라도 있나요?]

 

 조금 쌀쌀한 가을의 어느날.

 다른 채널에서 너희 밴드의 인터뷰를 진행했고역시나 네가 가장 많은 질문을 받았다.

 

 [이상형이 있습니다.]

 [실례지만 말해주실 수 있나요?]

 

 너는 진행자의 말에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더니곧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뭐당연하겠지만 여자입니다.]

 

 [머리는 짧은 것보단 긴 편을 좋아하고요.]

 

 [잘 웃는걸 좋아하지만그래도 항상 웃는것보단 가끔은 울기도 하는 성격이 취향이죠.]

 

 [그리고.]

 

 너는 한참을 뜸들이며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뺨을 긁적거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한 말은 한국어여서 진행자가 적잖게 당황했다.

 

 그런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너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소식 들었어많이 울었다면서.]

 

 .”

 

 [예전처럼 자주 웃으면 좋을텐데이젠 힘드려나.]

 

 아니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어.

 

 화면 속 너는 살며시 미소지으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는데벌써 10년이 넘었네.]

 

 아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완전히 이별했다고 생각했는데너는 아직도 나같은 애를 잊지 않았구나.

 

 [참 바보같지서로 좋아하는데 짝사랑만 하고 말이야.]

 

 [늦지 않게 돌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줘.]

 

 기다흐끅기다릴.”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네가 웃으면 좋겠다고 해서 억지로 울음을 참아봤는데나는 바보같이 또 울고 있었다.

 

 [오오시후 군이 많이 좋아하나 보네요.]

 [네에시후쨩맨날 그 애랑 찍은 사진만 봐요!]

 [그극그 얘기를 왜.]

 

 너는 이시카와 씨의 말에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울다가 웃어버린 탓에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바보같은 웃음이었지만나는 드디어 웃을 수 있었다.

 

 

 #9. 재회.

 

 

 많은 시간이 흘렀고또 많은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꽤나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운 일도 많았다.

 

 무대에 서면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정상에 선 아이돌의 기분이 이런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시후쨩잘 도착했어?]

 

 오랜만에 한국에 오니까 뭔가 신기하네요.”

 

 [그러면 잘 쉬었다 와!]

 

 대장님도 쉬세요.”

 

 전화를 끊고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택시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밴드의 음악을 감상하고창밖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짧은 감상을 툭 내뱉었다.

 

 일본이랑 딱히 다를 것도 없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그곳에 네가 없었지만 이곳엔 네가 있다는 점 정도일까.

 

 으응학생 일본에서 왔어요?”

 .”

 일본에서 엄청 유명한 밴드 있죠거기 보컬이 한국인이라던데 노래 좋더라고요.”

 그거 접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하는 기사님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

 

 잠시 뒤 택시에서 내려느긋한 걸음으로 익숙한 거리를 거닐었다.

 

 예전에 비하면 완전히 바뀐 곳도 있었고전혀 변하지 않은 곳도 보였다그리고 너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은 그때 그대로였다.

 

 조금 더 걸어네가 엄청나게 울었던 그 자리에 도착했다.

 

 너와의 이별을 얘기했던 곳이었다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는 장소였다.

 

 그렇게 잠시 상념에 빠져있으니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어느새 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후드를 입은 네가 있었다.

 

 수희야.”

 .”

 오랜만이네.”

 

 거의 2년 만인가오랜만에 보는 너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마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내가 오늘 도착하는걸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저기그 저기.”

 잘 지냈어?”

 !”

 

 우물쭈물하는 너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때부터계속 기다렸어.”

 고마워.”

 

 살며시 양팔을 벌렸고네가 천천히 다가와 품에 안겼다.

 

 일본엔 언제 돌아가?”

 아마도한 달 정도는 있다가 갈 거 같은데.”

 헤헤더 있으면 좋겠다.”

 뭣하면 같이 가면 되지.”

 

 서로 철없는 말을 주고받으며우리는 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행복이 있기를.

 

 

 참 지독한 인연이었다.

 

 우연히 친해지고우연히 멀어지고우연히 헤어지고그러다 우연히 다시 만나고.

 

 말 그대로우리는 우연히 운명이 되었다.

 

 많은 우연들을 거쳐 운명으로 맺어진 우리에게자그마한 행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