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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밌는 논문이 있어서 가져와봤음.


영국사학회에서 "영국연구(The Korean journal of British studies)" 학술지로 Vol.0 No.41 [2019] 에 나온 논문




당대 이래 20세기 중기까지 일반적으로 산업화 이후 노동자들의 삶의 질 적 수준이 분명히 저하되었음을 인정하는 연구결과로 일단락되었으나, 21세기에 이르러 1770년대~1818년 시기 그리고 1818년~1848년 시기의 실질임금 분석을 통해 실질임금이 오히려 상승했다는 연구의 등장으로 삶의 수준 논쟁이 다시 점화되었다.


최근에는 도시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였다. 관련연구들 은 도시화로 증대된 도시인구들에 대한 식량공급을 다룬 연구들과 빅토리아 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연구, 빅토리아시기 영국 식단과 식사 법의 변화에 대한 연구,4) 공공보건에 영향을 끼친 음식변조에 대한 연구그리고 영제국주의 전개이후 영국 식문화로 유입되었던 외국 음식 에 대한 연구6) 등으로 다방면으로 이루어져 왔다. 산업화이후 노동자들의 의식주 상태가 너무나 열악하였다는 전통적인 입장의 연구들은 도시민 노동자들의 식생활 또한 많이 열악하였으 며, 1840년대 ‘대기근(1845-1849)’동안 노동자들의 식생활은 더욱 어려 움이 많았으나, 19세기 후반 즉 1870년대 이후부터 점차 개선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식단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들은 19세기 빅토리아시기 노동자들의 식생활의 내용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1870년대 이후부터 방부제와 색상 첨가제를 이용 한 통조림 음식 등의 보급으로 오히려 식생활의 질이 나빠졌다는 연구 결과를 선보이고 있다. 노동자들의 식생활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본고의 주제인 19세기 도시민 노동자들에게 애용 되었던 길거리 음식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거의 부재한 실정이다.



그리하여 빅토리아 중기 이후 런던 시는 도시민들의 식량 공급을 대 체로 소매 점포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었다. 당시 런던에는 곡물판매로 식량을 공급하는 이외에도 식사자체를 제공하는 다양한 시설들이 운영되 었다. 가정집이 아닌 시설로서, 호텔 혹은 여인숙에 딸린 식당들 그리고 특정 계층들이 이용하는 클럽들, 펍들 그리고 chop-house, eating-house로 불리는 다소 허름한 분위기의 저렴한 식당들과 커피하우스, 와인과 맥주 를 판매하는 술집들, 허가증을 갖춘 소매 점포들이 그 시설들이었다. 그런데 출입자들의 신분별로 구분되었던 음식점들 이외에 런던의 많은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먹거리를 감당하였던 것은 바로 길거리 행상들과 노점상들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도 서술하였듯이, 런던을 비롯한 맨체스터, 리즈, 리버풀과 같은 대도시들에서 노동자들의 하우징상태는 너무나 열악하였다. 슬럼가일지라도, 자신의 집이 있었던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주(weekly)단위로 집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개별 노동자들은 하루 밤 숙박을 위해 침대만을 제공해주는 집단별 숙박업소 들에서 떠돌이 숙박을 해야 했다. 그런데 숙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식사였다.



길거리 음식들은 언제부터 등장했으며, 어떤 음식들이 있었을까? 사실 길거리 음식은 고대시대로부터 판매되어왔으나,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유입된 많은 노동자들과 집 떠나온 상인들, 피난 이주민들 등으로 인해 19세기 런던의 길거리 음식은 그 어느 때 보다 다양한 종류로 판매되었 고 소비되었다. 일반적으로 길거리 음식이라면 가정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들 보다, 저질 음식이거나 불량식품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그렇다면 빅토리아 시기 유행하였던 런던의 길거리 음식들은 어떤 음 식들이 있었으며, 음식의 질과 영양이 과연 형편없었던 것이었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빅토리아 시기 길거리 음식들은 크게, 식사대용 메뉴와 디저트 류, 따뜻한 음료, 냉 음료, 알코올 등으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 다. 먼저 든든한 식사대용 메뉴로는 따뜻하게 조리된 장어, 절인 쇠고둥, 생선 튀김, 굴, 장어 젤리, 장어 파이, 양 족발 등이 있었는데, 이들 음 식들은 영양학적으로는 질 좋은 단백질을 제공해주는 메뉴들이다. 그리 하여 이런 음식들은 몸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즉 공장 노동자들, 힘을 많이 쓰는 부두 노동자, 짐마차 마부, 건설 노동자들 등 남성 노동자들에 게 고단백질 에너지원을 공급해주는 음식으로서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 (12-16세)에게 인기가 있었다. 매일 점심을 길거리에서 사 먹는 노동자들 도 있었다. 고정적으로 매일 길거리 음식을 사먹는 사람들은 디저트보 다는 실제적으로 식사가 되는 음식을 좋아하였다. 여성들의 경우엔 완두 콩 수프를 애용하였다. 특히 비오고, 쌀쌀한 날에는 따뜻한 수프가 많이 애용되었다.




실제로는 이러지 않았음 ㄹㅇ



뜨거운 장어와 완두콩 수프는 짝을 이루는 메뉴로서 장어 한 컵 당 1/2페니, 완두콩 수프 약 0.3리터에 1/2페니 가격이었으므로, 사람들은 1 페니 가격에 두 개 메뉴를 한 번에 먹을 수 있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급여를 받는 토요일 저녁에 한 소년은 장어를 6.5펜스의 돈을 쓰며, 컵 가득히 장어를 연달아 먹기도 했고, 노동자 성인 남성은 서서 한번에 16 컵(8펜스)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20) 절인 쇠고둥은 주로 술안주로 애용되 었는데,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페니에 쇠고둥 2-8마리를 담아주었 다. 양족발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비쌌는데, 족발 하나당 1/2페니였으며, 런던의 한 길모퉁이 양 족발 노점상은 1주일에 20,000개의 족발을 판매 하였다고 한다. 이런 메뉴들은 노동자들이 주로 점심때나 밤늦게 즐겼던 식사였다  한편 구운 감자, 다진 고기로 만든 파이, 햄 샌드위치, 완두콩 수프, 플럼 푸딩, 타르트 종류-건포도, 구즈베리, 체리, 애플, 크랜베리, 자두 파이, 머핀, 부드러운 크럼펫 머핀, 번(bun)과 케이크 등의 메뉴는 디저트 메뉴이긴 했지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탄수화물 에너지원을 공급해 주 는 메뉴로서 남녀노소들이 모두 즐겼던 메뉴였다. 특히 어린이들은 파이 나 푸딩 등을 많이 애용하였다. 버터와 소금으로 구운 감자는 겨울에 잘 팔렸는데, 겨울의 구운 감자는 주머니 속의 손 보온용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축시장으로서 육류고기를 주로 판매하였던 런던 동부의 Smithfield의 한 마켓에서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루에 1,000개의 구운 감 자를 파는 행상인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23) 행상들은 영국산 감자 보 다 프랑스에서 수입되었던 감자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감자크기가 훨씬 컸으므로, 한 번에 280-300개정도(1cwt)의 감자를 사서 구워서 팔았다. 햄 샌드위치는 주로 저녁에 극장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시민들에게 많이 팔렸으며, 행상인에 따라 1/2페니~1페니로 팔리기도 했다. 커피 노 점상들은 반 페니~1페니 가격에 커피나 홍차를 머핀이나 햄 샌드위치, 삶은 달걀, 버터 빵과 세트 메뉴처럼 팔았으며, 노동자들은 그것을 한 끼 식사이나 야식으로 삼았다.


생선 튀김요리 즉 대구, 청어, 민어, 가자미, 고등어 등의 생선을 튀김 으로 조리한 메뉴들은 단백질뿐만 아니라 지방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식 사대용 메뉴로서, 또한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이 많이 즐기는 메뉴였다. 사람들은 튀김생선과 함께 빵 한 조각을 세트 메뉴처럼 1페니에 사 먹었 다.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로 알려진 생선튀김과 감자와의 조합은 1865년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 일터로 나가면서 혹 은 일터에서 귀가하면서 탄수화물과 단백질 등 자신에게 필요한 에너지 를 길거리 음식으로 보충했다. Mayhew는, 젠틀맨의 서번트였던 한 남성 이 서번트를 그만두고 생선 튀김 판매 장수로 전업을 하여, 50%의 이익 을 남기며, 매일 밤 7s-10s까지 매상을 올렸으며, 잘 팔리는 날에는 120 피스까지 팔기도 하였으므로, 아내에게도 생선튀김 판매 스톨을 마련해 주며 장사하게 했다는 한 남성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전한다. 런던 북 동쪽 비숍게이트(Bishopsgate)와 런던 브리지 근처 지역은 특별히 생선이 많이 취급되는 구역이라 불릴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생선튀김 메뉴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메뉴로서 런던뿐만 아니라 랭카셔, 요크셔와 같은 산업지역들로 확산되었다.



한편 간식이나 야식으로 인기 있었던 길거리 음식은 고기나 생선으로 만든 각종 파이와 구즈베리, 체리, 애플, 크랜베리, 자두 등 제철 과일로 만들어진 과일 파이들이었다. 19세기 초에 런던 길거리에 처음 등장한 식품으로는 브라질너트, 오이, 파인애플, 진저-비어 등이 있었는데, 노동 자들은 새로운 수입 과일들과 견과류보다 계절 따라 수확되었던 흔하고 값싼 제철과일들을 섭취함으로써 비타민을 보충하였다. 그리고 커피, 홍 차, 코코아, 레모네이드 등과 같은 따뜻한 음료, 아이스크림, 페르시안 샤 벳과 같은 냉 음료, 와인, 맥주, 진과 같은 주류 등이 있었다.


 헨리 메이휴에 따르면, 1850년 당시 런던에는 41,000여명의 길거리 상 인들이 있었고, 그 수치는 250만 런던 인구 중 63명 당 1명꼴에 해당하 는 수치였다. 41,000명 중 30,000여명이 과일과 야채, 생선 등을 파는 길 거리 행상인들이었으며,29) 약 5,000여명이 공산품 판매자들, 완성된 길거 리 음식을 판매하는 행상인들은 약 6,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 다.30)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당시 수프와 장어 판매 행상(약 500여명), 절 인 쇠고둥 판매 행상(약 300여명), 생선튀김 노점상(약 350여명), 양 족발 노점상(약 300여명), 구운 감자 판매 행상(약 300여명), 햄 샌드위치 판매 행상(약 70여명), 고기·생선 판매, 파이 판매 행상(약 70여명) 그리고 디 저트 류 판매 행상인들(케이크, 타르트, 진저 브레드 행상-약 300여명), 머핀 행상(약 500여명) 아이스크림판매 행상(약 20여명), tea-coffee노점상 (약 300여명), 진저맥주 판매 행상(약 1500여명)인들이 활동한 것으로 나 타난다. 


이들 길거리 행상인들의 수치는 런던 도시민들이 얼마나 길거리 음식들을 보편적으로 많이 애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 다. 19세기 길거리 음식을 패스트푸드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는데,일반 적으로 패스트푸드는 산업화 사회에서 맞벌이 가정생활로 바빠진 생활 리듬에 부합하는 외식 산업의 분야로서, 20세기 중엽에 우리 사회에 등 장할 때 초기의 패스트푸드는 샌드위치, 햄버그, 피자, 치킨 그리고 다양 한 종류의 케이크 등 서구 식품들이 주를 이루며, 다소 건강을 해치는 정크 푸드로 간주되어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인식되는 패스트푸 드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체인사업으로 운영되는 특징을 지닌다. 영국의 산업화 이후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진 길거리 음식은 미리 만들어져서 노동자들이 원하면 바로 사 먹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패스 트푸드로 볼 수 있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건강을 해치는 정크 푸드라기 보다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의 에너지 를 나름대로 제공해 주는 에너지원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왜 그렇게 길거리 음식들을 애용하였을까? 빅토 리아 중기 노동자들의 식단을 분석하여 그들 식생활의 영양함양 정도를 파악하고자 했던 폴 클레이톤과 주디스 로보담은, 산업화 이후 노동자들 의 삶의 수준이 대단히 열악하였다는 비관적 입장이 노동자들의 식생활 마저도 빈약하고 영양적 측면에서 형편없었다는 입장을 주장한 것에 대 해 빅토리아 중기 노동자들이 섭취했던 식품들을 열거하며 그렇지 않았 음을 주장하였다. 즉 노동자들의 식생활에서 가장 기본 품목은 빵과 수 프와 감자, 베이컨, 차 정도였으며, 이외 노동자들이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던 채소과 과일들의 섭취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빅토리아 초·중기 노동자들은 너무 값싸고, 언제나 구할 수 있어 그들이 하찮게 여겼던 양 파, 양배추, 부추, 비트, 물 냉이(1-4월), 완두콩(6-7월), 여름철의 순무와 브로콜리, 돼지감자(9월-3월) 등과 같은 제철 야채들과 가을-봄까지 사과 (8-3월), 봄-여름 동안엔 체리(5-7월), 구즈베리와 자두(9월 하순), 말린 과 일 등 값싼 제철 과일들을 섭취하였다. 노동자들과 길거리 음식 장사들은 아몬드나 브라질너트, 코코넛과 같은 수입 견과류 대신 연중 입수 가 능한 콩이나 개암나무와 흔한 열매들을 사용하여 음식들을 만들었다. 이런 채소와 과일들은 오늘날 건강에 유익한 식품들로 알려진 품목들이 었다.


빅토리아 시기 가장 인기 있었던 생선은 청어, 붉은 청어. 말린 청어, 절인 청어, 조개류, 홍합, 굴, 쇠고둥 등이었으며, 어부들이 주말에는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흠 있는 생선들을 사서 월요일 저녁부터 주중에 먹었다. 그들은 대개 머리와 내장, 간, 신장들 을 포함한 다소 부패한 생선들을 섭취하였으며, 육류로는 돼지고기를 흔 하게 섭취하였다. 당시 노동자 가정들이 가장 쉽게 단백질을 섭취하는 방법은 닭을 키워서 달걀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도시민들의 거주 지역 런던 이스트 엔드의 노동자 가정들은 대부분 암탉을 2마리 이상 키 워 매일 생산되는 달걀로 필요 단백질을 섭취하였다. 폴 클레이톤과 주디스 로보담은 이처럼 빅토리아 시기 노동자들이 섭 취했던 식품들의 내용들을 분석하여, 영양적으로 노동자들의 식생활의 질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하루 일과 중 오랜 시간(13-14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야했기 때문에 조리하는 식생활을 매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한다. 그것이 바로 노 동자들이 길거리 음식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이유였다. 노동자들의 식생활에서 길거리 음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이유들은 무엇 이었을까? 노동자들이 길거리 음식을 애용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산업화 이후 달라진 노동자들의 라이프 스타일 때문이었다. 즉 가정주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 대부분이 새벽 5-6시부터 일하러 나갔다가, 저녁 7-8시 혹은 더 늦은 밤에 돌아왔으므로, 가정주부들은 요 리할 시간이 없었고, 몸이 피곤하여 음식을 만들 여력이 없었던 삶의 패 턴 때문이었다. 농촌사회의 일반 가정들은 그들이 수확했던 농산물로 식사를 자급할 수 있었으나, 도시의 산업역군으로 유입된 사람들은 매일 의 필요 식량을 모두 구입해야만 했다. 노동자들의 식생활의 가장 기본 품목은 빵과 수프, 감자 그리고 푸딩과 파이, 차 혹은 커피 등이었는데, 가정주부들은 이런 음식들을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 미리 만들어 파는 장사들에게서 사먹는 것이 시간절약과 환경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이 었던 것이다.



길거리 음식 애용의 두 번째 이유는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별노동자들 혹은 노동자 가정들의 거주지의 상태가 너무나 궁핍하거나 열악 하여, 조리할 만한 도구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즉 런던을 비롯 한 대도시 노동자들은 함께 공동 주택에 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개별 오븐이나 레인지 등의 조리도구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초반 런던에서 중산층들의 주방에는 대체로 철제 레인지나 따뜻한 음식 을 보존하는 플레이트 등의 요리 도구들을 갖추었지만, 노동자들 대다수는 그러한 조리도구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으며, 주거 공간도 협소하여 조리 시설을 배치할 공간적 여유는 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불을 피워 조리할 경우, 부담해야 하는 연료비 걱정과 냉장시설이 부재했던 사정 때문에, 노동자 가정들은 길거리 음식을 이용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즉 당시 노동 자 가정들이 음식을 조리하는 패턴을 보면, 노동자 가정은 대개 토요일 오후에 주급을 받으면, 일요일 낮 식사 때 긴 시간을 들여 베이컨, 감자, 생선 혹은 육류고기 등을 굽거나, 묽은 수프나 스튜 혹은 푸딩을 만들어 먹거나 차를 마시는 등으로 주중 식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풍성한 식사 를 누리는 경향이었다. 그렇게 다소 넉넉한 식사를 한 후에, 남은 음 식을 보관할 냉장 시설이나 플레이트를 데우는 도구들이 없었던 가정들의 경우, 연료비용을 감안하면,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보다, 저렴한 길거리 음식을 사먹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은 길거리 음식들을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이 길거리 음식을 애용한 또 다른 이유로는 당시 노동자들을 고용했던 공장들 대부분이 노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 에,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기 식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리하여 새벽 일찍 오전 5:30분 혹은 6:00시에 일터로 나가면서 노동자들은 차갑고 어두운 새벽 거리에 희미한 빛을 밝혀주는 길거리 노점이나 행상인에게서 빵이 나 장어 파이, 완두콩 수프와 버터 바른 빵, 스튜 등을 사서 식사로 삼고, 몸을 데울 수 있는 따뜻한 커피나 차를 사 마셨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식생활 패튼을 살펴보면, 노동자 가정들은 급여 를 받는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낮 주말에 불을 사용하여 수프와 스튜 와 육류 고기 음식을 조리하여 먹었고, 그 때 남은 찬 음식을 주중에 먹 는 날들이 많았다. 그들은 오트밀 죽을 매일 만들지는 않았고, 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 한 번에 충분한 양을 만들어 두었다가, 주중에 나누 어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경제력이 상위권이었던 노동자들도 햄 샌드위치와 수프, 푸딩과 커피, 차 등의 길거리 음식을 사먹었다. 하위권 가정에서도 최소한의 기본 요리를 할 수 있는 개방형 화로를 보유 하였지만, 상·중위권 가정보다 불을 피우는 시간은 더 짧았던 것으로 보 인다. 그리하여 길거리 음식을 더 자주 애용한 사람들은 가족들 주급 총 액 £1이하인 하위권 노동자들 가정과 숙박할 곳도 없이 침대를 찾아 다 녀야했던 빈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급을 수령하였던 토요일 저녁이면 노동자들은 런던 시 곳곳의 노점상과 행상인들로부터 청어 어란을 올린 토스트나 치즈 토스트 등의 맛있는 야식들을 사먹었다. 그 러나 주급 수입의 차이와 노동자 가정들의 주방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과 빈민은 공통적으로 길거리 음식을 사서 먹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음으로, 길거리 음식은 노동자들의 식생활과 뗄 수 없었 던 밀착된 생활 음식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식품변조의 역사는 이미 고대로부터 계속 전승되어왔지만,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말기부터 1860년대까지 식품변조행위가 절정에 달했던 것 으로 보인다. 영국에서는 과학자들과 논 설가들에 의해 식품변조의 심 각한 실태가 세상에 드러났는데, 그들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19세기 초기 부터 시작하여 1850년대에 식품변조의 실상이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추 정된다.


식품 변조 비행은 어떻게 저질러졌던가? 음식의 재료비와 단가를 낮추어 이윤을 많이 남기려는 상인들의 수중에서 자행되었던 만 큼, 길거리 음식 장사들이 많이 가담했을 것으로 예상 되겠지만, 식품변 조의 문제는 사실상 일반 소매 점포, 식당들, 길거리 노점상들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쿰은 1798년 이래 20년 이상 식품 변조 비행을 분석하여 제빵, 양조, 와인, 제 과류 제조에 사용되었던 ‘화학기술 조항들’을 책으로 발간 했다. 그에 따르면, 고래로부터 사용되었던 변조기술이 후대에 계속 전승되었는데, 예를 들면, 빵을 구울 때 런던의 빵 제조업자들은 질이 낮 은 2등급 밀가루를 희게 만들기 위해 알루미늄을 첨가하였다. 소량의 알루미늄을(240파운드 부대 자루에 약 4온스 정도의 알루미늄) 섞어 넣 으면, 제빵업자들은 값싼 빵 한 덩이를 값 비싼 1등급 밀가루로 만든 빵 으로 둔갑시켜 비싸게 팔 수 있었다.52) 또한 제빵업자들은 무게를 늘이 기 위해 값싼 감자를 추가하기도 했고, 상한 밀가루로 제빵을 할 때는 암모니아-탄산염을 섞어 이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최상급 흰 밀가루는 제과업자들과 패스트리를 만드는 요리사들에게 우선적으로 팔렸기 때문 에, 제빵업자들은 주로 상한 수입 밀가루를 구입하여 다른 곡물과 혼합 하는 변조를 일삼았다. 또한 흰 빵을 선호하였던 당시 사람들의 취향을 충족시키고자 공업용 성분 카바이드(carbide-탄화칼슘)나 뼈 가루를 섞어 넣기도 했다.


다음으로 맥주와 같은 주류 변조사례를 보면, 힘든 몸 노동을 하는 노 동자들에게는 알코올이 인기음료였다. 아쿰이 밝혀낸 사례는 에일 맥주 와 포트 주의 변조였다. 양조업자나 약제업자들은 황산철, 고추 성분, 강 장제, 수사슴 뿔, 오렌지 파우더, 미나리과 씨앗, 생강과 고수와 같은 식 품들을 맥아나 맥주의 값싼 대체물로 이용했다고 한다.53) 양조과정에서 변조하는 방법은 주로 맥주와 포트, 진 등의 술을 묽게 변조하는 것이었 다. 그리하여 변조되었던 맥주는 바클레이 社(Barclay’s), 한버리 社 (Hanbury’s)와 같은 정상적인 양조업체들이 생산했던 것 보다 알코올 도 수가 약하였다. 런던 항구의 짐꾼들에게 판매되었던 술들의 알코올 도수가 5.25%였던 것에 비교해서 변조 제조를 거친 맥주들은 그 보다 묽은 평균 4.5% 의 맥주로서 대중음식점들로 많이 공급되었던 것이다. 양조업자들은 왜 변조방법을 택하였던가? 당시 런던 항구 짐꾼들에게 인기 있었던 맥주는 숙성이 잘 된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맥주였지만, 그러 한 맥주는 12개월~18개월 기간까지 양조 공장의 큰 술통에서 숙성되어 야 했기 때문에, 양조업자들은 값비싼 저장고를 장만할 생각이 없었고, 수요가 많았던 술을 신속하게 공급해야 했으므로, 긴 숙성과정도 회피하 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다 쉬운 방법으로서 유황 산을 이용하여,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맥주를 생산하여 빨리 많이 유통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변조의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또한 술만큼이나 광범위하게 변조되었던 사례가 차와 커피 제조 부분 이었다. 아편전쟁(1840-1842/1856-1860)의 원인이 되었을 정도로 19세기의 영국인들의 차음용은 전 국민적인 식생활 문화였다. 1846-1861년 기간에 tea에 대한 소비세는 1파운드 양에 대해 2실링 1펜스(25d)였던 것에 비교 해서, 후일 1890년대에는 1파운드 양에 대해 소비세가 단지 4펜스(4d)에 불과하였던 것55)을 비교하면, 19세기 초·중기에 차 소비는 엄청나게 비 싼 것이었다. 그러한 차와 커피는 전량 수입되었기 때문에 변조가 성행 하였던 것이다. 차는 어떻게 변조되었을까? 상인들은 외국산 차 잎이 아닌 영국 산천 에서 재배된 잎 말이 병에 걸린 물푸레나무 잎들과 벚나무 과(科) 잎들 을 헐값에 구하여, 구리 접시 위에서 말리고 유독 염료로 염색하여 변조 하였다. 이렇게 변조된 저질의 tea는 매해 4,000,000 파운드 가량 변조되 어 거래되었다. 당시 동인도 회사에 의해 수입되었던 진품 차의 양이 6,000,000파운드 가량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난 변조 행각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조가 적발되어 처벌된 사례는 1818년 3월-7월까지 단 11건만이 유죄선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중략)


그런데 19세기 성행했던 식품변조는 길거리음식 뿐만 아니라 런던을 비롯한 전국의 대도시들의 일반 소매 점포나 식당, 펍 들에서 흔하게 자 행되었던 현상이었으므로, 식품 변조의 피해는 하층민 노동자들뿐만 아 니라 중상층 빅토리아인 대부분에게 적용되는 문제였다. 상인들이 식품 변조과정에 음식에 첨가했던 납, 수은이나 아황산가스, 아황산구리 등의 성분은 사람들의 몸 안에 장기간 축적되었을 때 특정 질병을 유발시키는 성분들이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빅토리아시기 도시민 대부분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긴 세월 을 내다보며 식생활을 할 만큼 여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거리 음식과 밀착되었던 하층민 노동자들의 식생활과 식품변조의 악영향을 연계시켜 보면 노동자들의 기본 생필품이었던 빵과 차와 커피 와 우유 소비 과정에서 그리고 밀가루, 우유와 버터를 재료로 만들어지 는 머핀이나 각종 파이들 그리고 맥주나 진, 와인과 같은 주류 구입과정 에서, 노동자들은 변조된 식품들을 소비할 가능성도 많았다. 그러나 장어 나 돼지족발, 양 족발, 생선튀김, 각종 과일 파이나 고기 파이와 같은 식 사대용 길거리 음식들의 경우, 그 내용물이 다른 생선이나 육류로 대체 될 수 있었을지라도, 유해 성분이 첨가 되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문 넘 길어서 좀 잘라냈는데, 결론적으로 생각보다 길거리 음식의 종류는 다양했고, 급격한 도시화로 인하여 부족한 집과 취사시설, 그리고 그당시에는 구내식당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길거리 음식이 주요 노동자들의 열량 보급원이였다 라고 봐야할듯. 그리고 지금처럼 철저한 식품 검열도 없다보니까 별에별 이상한 식품위변조가 흔히 이뤄졌다도 맞고.


그리고 차도 생각보다 비싸서 마시기는 마시는데, 그 삼시세끼 차만 마신다거나 그런건 아니였다고 함. 차가 그정도로 싸질려면 립톤이 20세기쯤 들어와서 대량으로 공급해야하는 시기가 와야함. 



원문 읽어보면 더 재밌으니까 읽어보는 데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