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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좆됐다."


징집영장을 움켜쥐면서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진짜로 존나 가기 싫은데."


나는 도무지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통지서를 다시 펼쳐 상세히 읽어 보았다.



제국군 현역병 군역이행통지서


성명: 박유민 / 주민등록번호: 990718-9182421

세대주성명: 박유민 / 관계: 본인

주소: 황해도 남포시 용강구 태왕동 92

입영부대: 제국육군훈련소 입영심사대

입영일시: 해당 통지서 착신으로부터 3개월 이내


[제국군령]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현역병으로서 군역을 이행할 것을 명하노라.

강청 5년 3월 1일(건국 628년 3월 1일)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

관인생략



"아 씨발..."


진짜로 좆됐다. 심사숙고할 필요도 없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는 진짜로 X발 개 좆됐다. 하필이면 국경분쟁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군에 입영하라니.


한참 생각하던 나는 동봉되어 있던 다른 서류를 꺼내서 읽어 보았다.



[군역 이행 불능 사유]



음? 나는 눈이 번쩍 뜨여 그 서류를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지금쯤 과거급제했을 거다.



<군역 이행 불능 사유>


* 병역판정검사에서 정(丁) 등급 이하로 판정된 이가 해당 서류를 통보받았을 경우, 인근의 관아에 거행하여 서류를 반납하도록 하라. 이하의 내용은 병역판정겁사에서 갑(甲), 을(乙), 병(丙) 등급으로 판정된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1.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 혹은 병조판서 등 군역에 있어 그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자에게 군역면제를 통보받은 자


2. 병역판정검사의 시행과 해당 통지서를 수령한 기간의 공백기에 경제적 여건을 갖춘 후견인이 사망하여 가정을 부양할 필요가 있는 자


3. 병역판정검사의 시행과 해당 통지서를 수령한 기간의 공백기에 사고 등으로 인해 재검을 필요로 하는 자


4. 군역특례지역(함경도, 간도, 몽강도)으로 실거주지와 군적상거주지를 옮긴 자(단, 10년 안에 타 지역으로 다시 이사를 거행할 경우 기피로 보고 군령으로 다스림)


4. 기타 다른 이유로 군역을 질 수 없는 자



음, 나는 4번으로 "너무너무 군대를 가기 싫어서 군역을 질 수 없는 자"로서 군역 이행 불능 사유가 될 수 없나?


그 밑에 다른 대목도 있었다. 무슨 놈의 대목이 그렇게 많은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데 나만 아니다.



<노역을 통한 병역의 대체이행>


* 상술된 군역면제의 사유는 아니나 여타의 곤란한 이유로 인하여 군역을 질 수 없는 자들은 이하의 조항에 따라 군역을 노역으로 바꾸어 질 수 있다.


1. 2년 6개월간 국가의 토목공사 및 건설에 무상으로 나와 노역할 자(단, 노역 중 사고로 인해 상해를 입어도 제국조정은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아니함)


2. 사액서원에 귀속된 선비군으로서 사대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이행, 향토예비군 겸 신속대응군으로 활동하는 자(이는 19세가 아닌 15세부터 활동하며, 해당 서원의 선비군 군적에 명확하게 자신의 이름을 올려야 함)


3. [여성지원법 15조에 의거한 시범규정]황해도 남포, 연천도 연군 등에 그 본적지를 둔 자에 한정하여, 2세 미만의 나이 차이가 나는 여성에게 2년 6개월간 노비로 들어가는 자(단, 해당 규정에 의거하여 노비가 된 자는 일반노비와 달리 생사여탈권 및 투표권을 상전에게 위임함)



1번은 원래 괜찮은 방식이었는데 최근 국경분쟁이 격해지면서 사실상 승인되지 않고 있다. 병력이 더 많이 필요했으니까.


2번은 19세가 되기 전에 황제가 직접 승인한 1년 예산 1,000억 냥(1조 원) 이상을 소비하는 사액서원에 한정하여 선비군으로서 복무를 하는 이들에게 군역을 빼 주는 것인데, 뭐... 선비병들은 현역병보다 더 혹독하게 훈련받으며, 모든 전쟁에서 신속대응군으로 투입되기에 죽을 가능성이 현역병보다 훨씬 높다.


근데 3번은 좀 구미가 당긴다... 최근에 여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시범운행되는 규정인 모양인데, 황해도 남포와 연천도 연군 등에 거주하는 남성들에 한정하여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에게 2년 6개월간 노비로 들어가면 군역 면제라고 한다.


상당히 불공평한 처사지만 뭐 어쩌겠는가. 조정에 있는 높으신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잠시 생각하던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메신저를 열었다.


[잠깐 볼 수 있냐?]















"왜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해? 요즘 내가 얼마나 바쁜지 몰라?"


바쁘긴 뭐가 바빠. 향교(국립대) 휴학하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주제에.


테니스 치마에 가디건을 걸친 지빈이가 내 앞에 앉았다. 초등학당과 중등학당, 고등학당까지 같이 나온 소꿉친구다. 한참 생각하던 내가 서류 한 장을 보여 줬다. 지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드디어 너도 나라가 부르냐? 이야~ 황제 폐하도 참으로 성군이시지. 너같은 쪼끄만 남자애 끌고 가서 나라 지키신다니 이 얼마나 현명하시고 뛰어난 판단이시냐?"


그 기집애가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내가 정지빈의 손목을 잡아서 비틀었다. 그 기집애가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아아아! 아파!"


"웃지 마라. 나 심각하다."


정지빈. 평소엔 그렇게 얄밉지만 이번엔 내가 네 덕 좀 봐야겠다. 내가 다음 서류를 꺼내서 지빈이 앞에 내밀었다.


"뭐야?"


지빈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얄미운 기집애가 서류를 흘겨보다가 말했다.


"노역을 통한... 군역 대체이행?"


"뭔지 알아? 최근에 조정에서 여성권익 상향이네 뭐네 하면서 신설한 조항 있잖아."


내가 4번 항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남포나 연군에 사는 사람은 위아래로 두 살 차이나는 여자한테 2년 6개월간 노비로 들어가면 군역 면제래. 현역병은 물론이고 예비역에 민방위까지."


그러자 얄미운 기집애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러니까 지금 너는 '나 좀 노비로 받아 주슈~'하는 주제에, 그 와중에 편하게 노비생활 해보겠다고 소꿉친구 불러낸 거냐? 진짜 존나 미친놈이네 ㅋㅋㅋㅋ 이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면 진짜 볼 만 하겠다."


무안해진 내가 지빈이의 이마에 딱밤을 놓고 말했다.


"그만 좀 웃어! 난 진짜 심각하단 말이야."


"아야! 너 지금 나 때렸냐?"


얄미운 기집애가 삐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며 말했다.


"흥! 현역으로 가. 기분 잡쳐서 안 받아줄 거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좀 친구 덕 좀 보자. 너 나한테 여자 소개시켜 준 것도 몽땅 네 손으로 파탄 냈잖아."


지빈이가 잔뜩 볼을 부풀리고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너 내 노비로 들어오면 뭐 할 건데?"


"노비면 시키는 일 해야겠지? 2년 6개월이니까 뭐..."


나는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꺼냈다. 관아에서 발급받은 노비문서였다. 이미 들고 올 때 내 이름을 적는 칸에는 서명해뒀다. 지빈이가 다시 폭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하하하하하! 너 진짜 작정하고 준비해 왔다?"


"웃지 말고 밑에 서명해. 2년 6개월 동안 월 10만 냥(1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으면서 나를 노비로 부릴 권리가 거기 들어 있어."


그러자 지빈이가 씨익 웃으면서 날 올려다봤다.


"그것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래, 뭐. 신체에 대한 권리나 생사여탈권도 너한테 넘어가는데, 네가 무슨 신장병 걸려서 내 신장을 떼다 쓸 거냐, 아니면 날 죽이기라도 할 거냐? 일 시켜 봐야 걸레질이나 설거지밖에 더 시킬 거냐?"


"내보내서 한 3곳 알바 취직시켜가지고 하루 24시간씩 일 시키고 월급 모조리 나한테 상납시켜야지. 너 각오해라."


내가 기겁한 표정을 짓자 지빈이가 다시 깔깔대고 웃었다.


"뭐, 왜? 시키는 거 다 한다며!"


"아니, 나 친구 덕 좀 보자고..."


"걱정 붙들어 매라. 너 원래부터 내 노비같이 살았으면서 뭔 걱정은 걱정이야."


지빈이가 서류 밑에 서명했다. 그 얄미운 기집애가 서류 밑을 보고 말했다.


"뭐야, 관인까지 찍어 왔어?"


"여자 서명은 나중에 받겠다고 했더니 관인 그냥 찍어 주던데. 알잖아, 우리나라 구실아치(하급 공무원)들 게으른 거."


"그럼 다시 관아 가져갈 거 없이 계약 끝난 거네?"


지빈이가 서류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어서 종이 봉투에 집어넣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내가 살다 살다 네 덕도 다 보고..."


지빈이의 표정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약간 무서워져서 의자를 뒤로 당기며 말했다.


"뭐, 뭐야. 왜 그래."


지빈이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내 멱살을 덥석 잡더니, 왼손을 바지 사이로 가져갔다.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바둥거리며 외쳤다.


"지, 지빈아! 갑자기 왜 이래!"


"뭐?"


지빈이가 내 허리띠를 한 손으로 당겨 풀면서 무서운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지빈이? 야, 말 똑바로 안 해?"


나는 잔뜩 겁에 질려서 다리를 움츠렸다. 지빈이가 내 멱살을 꽉 잡고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명령했다.


"나, 지금부터 네 주인이야. 그럼 말 어떻게 해야 되겠어?"


"...?"


"말 어떻게 해야 되겠어!"


지빈이가 무섭게 호통쳤다. 덜덜 떨면서 지빈이를 올려다봤다가, 갑자기 오른쪽 뺨을 세게 맞았다.


"어딜 올려다봐!"


나는 겁에 질려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 주, 주인님."


"가만히 있어. 2년 6개월간은 내가 네 목숨까지 가지고 있는 거 알지?"


지빈이가 내 멱살을 움켜잡고 귀를 자기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반항하면... 죽여버릴 거야."


지빈이가 이렇게 무서운 애였나? 그보다 얘가 나한테 갑자기 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딱밤 때려서? 그게 이렇게 화낼 일이야? 아니, 그리고 바지는 왜 벗겨? 이거 성추행이야...


지빈이가 내 귀에 대고 다시 한마디 했다.


"사실대로 말해줄게. 여자 소개 다 파토낸 거... 일부러 그런 거였어."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름끼치게 웃어 보이면서 덧붙였다.


"너도 진짜 재수 지지리도 없다... 취향 고약한 주인 만나서."





그리고 주인님의 차가운 뱀 같은 왼손이 거침없이 바지 속으로 흘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