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어?”


그가 자신이 쥔 총을 보았다.

 

새까만 총이었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에 의해

부서진 것처럼 커다란 균열이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흘러나오는 마력은, 마치

루비의 빛처럼 찬란했다.

 

꿈틀, 총의 손잡이 부분에 눈알이 생겼다.

 

“왜 그러지? 기뻐해도 좋다, 필멸자여.”
“뭐, 뭔가…….”
“뭔가?”
“기분 나빠!”


휙! 그가 마총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총이 활활 타오르며 떨렸다.

 

“기, 기분 나쁘다니!? 네가 지금 누굴

상대하는지 모르는 것이냐!”

“어……누군데?”
“나는 마총 이리스볼드! 나의 주인, 세상의 

파멸자를 기다리며 암흑 속에 잠든 마총!”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모르는 거냐?”
“애초에 총이 뭔데?”
“세상 말세로군! 요즘 것들이란!”

 

이리스볼드는 이 소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총을 쥐고서 놓았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신을 손에 쥔 순간,

강력한 힘에 이성을 빼앗겨 폭주했을 것이다.

 

‘대체 뭐지, 이 녀석은?’

 

꿈틀, 이리스볼드의 손잡이에 달린 진홍색

눈알이 소년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근육, 별로 없고. 금발 금안, 나이는 10살 정도.

종족은 인간― 재능은 느껴지지 않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촌놈일 뿐.

 

‘하필이면 이런 놈이 날 찾아내다니.’

 

이리스볼드, 그녀가 봉인된 신전은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어도, 이 봉인의 숲에

들어와 신전을 찾고 봉인을 푸는 것은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날 어떻게 찾았지?”

“그냥 길을 헤매다가―”
“그럼 내 봉인은?”

“봉인?”


설마 봉인이 풀려있었던 건가?
게다가 그냥 길을 헤매다가 찾아냈다니,

그녀는 이 소년이 행운아인지 아니면 지독히

운 나쁜 얼간이인지 헷갈렸다.

 

“이름이 뭐지, 필멸자?”

“노마! 내 이름은 노마야!”
“노마? 이름조차 하찮군.”


하지만 뭐, 상관없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일 순위였다.

 

‘숲만 빠져나가면, 이런 애송이는 바로

버리고 주인이 될 멍청이를 찾아야겠지.’

 

주인이라고 해봤자 실상 생명력과 마나를

빨아먹기 위한 숙주에 불과하다.

이런 애송이는, 빨아먹을 것도 없겠지.

 

“좋다, 애송이. 힘을 원하느냐?”

 

그녀가 계산을 끝내고 말했다.

힘을 준다고 하면 거절할 사람은 없다.

누구나 강력한 힘을, 압도적인 무력을 바란다.

그러니 이 애송이도 마찬가지―

 

“아, 아니. 그런 힘까진 굳이.”
“뭐라고?”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이리스볼드가 하나뿐인 눈을 찌푸렸다.

 

“그럼 왜 나를 깨운 거지? 뭘 바라느냐?”
“그게, 실은 사정이 좀 있어서.”


노마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 제 고향 마을이 도적한테 습격당했거든.

다들 인질로 잡혀서―”

“아하, 그래서 내 힘으로 그 하찮은 무리를

모조리 도살하고 영웅이 되겠다는 거로군?”

“도, 도살이라니! 그런 무서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냥 겁만 주고 쫓아낼 거라고!”

 

이 녀석, 바보인가?
이리스볼드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였다.

 

마총 이리스볼드, 그녀의 힘은 동네 촌놈도

한 순간에 최고의 영웅들과 최악의 괴물들에게

맞설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준다.

 

설령 이런 애송이라도 도적 따윈 길가의

벌레를 짓밟듯 죽일 힘을 줄 수 있다.

그런 총을, 고작 도적들 협박할 때 쓴다고?

 

멍청이다.

이 녀석은 진실로, 진실로 어리석은 놈이다.

 

“후우, 뭐 좋다.”


참자, 그녀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일단 이 녀석을 구슬려서 여길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그 뒤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날 여기서 내보내주면, 널 도와주겠다.

그 정도면 공평한 거래겠지?”

“아, 응! 그거면 되는 거야?”
“물론. 걱정마라, 난 약속은 확실히 지키니.”

 

그 다음엔 바로 버릴 테지만.

이런 애송이 손에 잡혀있을 순 없다.

더 강한 인간이, 욕망에 충실한 바보가 필요하다.

 

그녀가 속으로 웃었다.

 

이 촌놈에겐 안 된 일이지만,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 나를 네 마을로 데려가라!”

“아, 으응!”


노마가 마총을 힘껏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가 앞으로 비틀거렸다.

 

“무― 무거워……!”

“무겁다니?! 고작 이것도 못 드는 거냐!?”

“나는 약골이라서…….”

“이런 맙소사.”


힘도 약해, 기개도 없어, 심지어 심성마저

나약해보였다. 

 

‘이런 놈을 잠시나마 주인으로 삼아야하다니.’

 

언젠간, 언젠간 자신의 진짜 주인을 찾을 것이다.

자신의 힘에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를.

 

“자, 가라!”

“끄으응……!”


그때까지만 참는다.

이리스볼드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마을로 가는 길은 스산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나무는 모두 말라

비틀어졌고 땅에는 낙엽이 가득했다.

은색 하늘은, 옛날과 똑같았다.

 

‘변한 게 없군, 세상은.’

 

봉인되고 몇 년이나 지났을까?

100년? 200년? 그녀는 봉인되어 있는 동안

아주 잠깐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이봐, 너.”

“응!”
“지금이 몇 년도지? 지금 왕은 누구고?”
“어……나는 잘 몰라.”

 

하이고 맙소사.

자기 왕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금이

몇 시대 몇 년인지도 모르는 멍청이라니.

 

‘보나마나 촌구석에서 나온 적도 없겠지.’

 

대부분의 농노들은 그렇게 살다 죽는다.

고향에서 태어나, 일하다가, 결혼하고,

애를 낳고, 그러다가 늙어 죽는다.

아는 것이라곤 없고, 무지몽매하며 나약하다.

 

“뭐, 좋아. 그보다 슬슬 배가 고프군.”

“아, 뭔가 줄까? 밥 먹을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고 보니 너, 입이 없네…….”

 

마총 이리스볼드의 에너지원은 마나다.

그리고 그녀가 마나를 수급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피를 바쳐라, 필멸자.”
“피? 정말 그거면 돼?”

“하지만 한 두 방울로는 안 돼.”

 

오랫동안 봉인된 탓에, 그녀는 과거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였다.


지금 이 상태에선 ‘권총’ 정도나 가능할 터.

하지만 피만 마시면, 본래의 힘을 되찾는 건

시간문제―

 

“자, 여기 피!”
“오오, 잘 마시겠다.”


피를 가지고 다녔나? 이리스볼드가 눈을 감았다.

쪼로록― 액체가 그녀의 위로 쏟아졌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이건 우유잖아.”
“응, 우유야!”
“장난치냐!? 피를 달라고 했지 누가 우유나

마시겠다고 했냐고?! 이 얼간아!”

“어, 하지만…….”


노마가 눈을 껌뻑이며 우유병을 보여줬다.

 

“우유는 말이지, 사실 소의 피거든!”
“뭐야?”
“엄마가 가르쳐준 거야, 대단하지?”


……진짜 마나가 흡수되긴 하네.

양은 적지만 분명 마나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론 부족해.”
“어, 정말? 한 통이나 줬는데?”
“적어도 사람 한 명분의 피는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 애송이, 노마의 피를 다 빨아들여선

안 됐다. 이런 인적도 없는 곳에서 그를

죽였다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저기, 저 새가 보여?”
“아아, 저거?”

 

하늘 위로 철세 무리가 날고 있었다.

크기도 제법 크고, 사람 하나 정도의 양은

안 되어도 당장은 저거면 됐다.

 

“내 힘을 살짝 보여주지, 필멸자여.”


모드 변환.

그러자 마총 이리스볼드가 착착 접히며,

한 자루의 권총으로 변했다.

 

“우왓!? 모습이 변했네!”
“권총 모드다. 제일 약하지만 이거라면

너도 다룰 수 있겠지.”

“와! 그런데, 권총이 뭐야?”

 

……아.

생각해보니 이 문명에는 총이 없었다.

아직도 만들지 못한 건가, 그녀는 이 미개한

종족에게 애잔함마저 느꼈다.

 

“이 구멍 신기하네, 뭐야?”
“흐갸아으아아그각!?”


하마터면 쏠 뻔했다!

이리스볼드가 눈을 부릅떴다.

 

“구멍에 손가락 넣지 마, 얼간아!!”
“으왓!? 왜, 왜?!”
“손가락 날아가고 싶어!? 그리고 여자의

구멍에 손가락을 막 집어넣는 변태가

세상에 어디 있는데?!”

“어, 너 여자였어!?”
“그래!!”


후우, 침착하자.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얼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차근차근 가르쳐줘야 한다.

 

“총이라는 건 말이지, 화약의 힘으로

금속 탄환을 날리는 원거리 무기다.”

“활이랑 비슷해?”
“활 따위랑 비교하지 마라. 심지어 나는

화약이 아니라 마나로 총탄을 쏘지.”

 

그 위력은 화약총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 같지만.’

“그렇구나, 어떻게 쏘면 돼?”

“우선, 손잡이를 감싸듯이 쥐고, 구멍 쪽을

저 새가 있는 쪽으로 조준해. 그리고 여기

쇳조각이 달려있지? 그걸 당기는 거다.”

“오오.”


노마가 권총을 엉거주춤 들고 조준했다.

너무 같잖은 폼이어서, 이리스볼드는

또 다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다리는 양쪽으로 벌려, 어깨에 힘 빼고!

눈은 둘 다 떠라. 팔은 앞으로 쭉 뻗고,

손잡이는 있는 힘껏 쥐어!”

“어, 어려워.”
“호흡은 편하게 해. 그러다가 숨을 딱

멈추고 쏘는 거야, 할 수 있겠지?”

 

노마가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방아쇠를―

 

“나, 난 못해!”
“뭐?”

 

그가 권총을 내려놓으며 훌쩍였다.

 

“새가, 새가 불쌍해…….”
“이런 맙소사.”


상상 이상으로 나약한 놈이다.

고작 새 하나 죽이지 못하다니, 고작 새를!

이리스볼드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이, 노마. 노마! 나를 봐, 나를 보라고!”
“으우…….”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애새끼인 너한테,

나 이리스볼드가 진리를 가르쳐주마.”

“진리?”
“그래, 진리다.”


이 세상의 진리.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단 하나의 진리.

 

“잘 들어……세상은 말이지,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야. 죽이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선택은 불가능해. 먹거나 먹히거나, 이기거나

지거나, 살거나 죽거나. 오직 둘뿐이라고.”

 

그 진리를 모르는 생물은 없다.


인간, 괴물, 하다못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조차 약육강식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물은, 생명은 그런 식으로 순환한다.

 

“죽이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알겠어?

그건 당연한 거라고. 살기 위해서는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해. 이해했어, 노마?”

“하지만……나는……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아.”
“허.”


어쩌다 이런 머저리 손에 들어가게 된 거지?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총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왜 이 녀석이 폭주하지 않은 건지 알겠군.’

 

너무 약하다, 너무 순수하다.

너무나도 상냥한 성격 탓에, 폭력성과 힘에

대한 욕망이 억눌리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남을 상처 입히는 걸 싫어하는 인간도

있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됐다, 됐어.”


한심하고 나약한 것.

더는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네 마을에나 빨리 가라. 다 죽기 전에.”
“아, 으응!”


노마가 발걸음을 옮겼다.

 

‘얼른 버리고 갈아타야지.’

“아, 이리스. 그래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리스? 이, 이리스라고?”

“응! 이리스볼드니까, 이리스!”


자길 애칭으로 불렀어?
과거, 온 세상 영웅들마저 두려워 한 자신을?

 

“흐.”


그래도 뭐, 재미는 있으니 다행인가.

그녀가 눈을 감으며 작게 웃었다.

 

 

 

 

 

“저기, 이리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나? 

마나가 부족하니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다. 

 

“아, 일어났다.”
“하암, 잘 잤군.”

 

눈을 뜨니 먼저 모닥불이 보였다.

야영 중이었나, 그녀가 눈을 껌뻑였다.

 

“며칠이나 지났지?”
“이, 이틀.”
“그래……마을까진 얼마나 남았어?”

“이제 곧 도착해! 하루만 더 가면 돼!”

 

하루, 인가.

이 머저리하고 같이 다니는 것도 곧 끝난다.

 

‘다음엔 또 누가 주인이 될까…….’

 

수백 명이 그녀의 주인이 되었다가, 죽었다.

대부분은 이리스볼드를 잡자마자 폭주하여,

생명력을 모조리 쓸 때까지 날뛰었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애송이뿐인가……나를 잡고도

미치지 않은 건…….’

 

그나마 몇 달 정도 미치지 않고, 이리스볼드를

다루던 사람은 몇 명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엔 이리스볼드에게 너무

의존하게 됐고, 그 결과 폭주하여 죽었다.

 

주인을 반드시 죽이는 총.

그래서 그녀는 마총(魔銃)이라 불렸다.

 

“이리스?”
“핫.”

 

잠깐 정신이 팔렸다.

이리스볼드가 눈알을 굴려 그를 보았다.

 

“생각을 좀 했다.”
“그렇구나, 고향 생각이라도 했어?”

 

고향이라.

그녀가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래 전, 나의 문명은 폭주하고 있었다.”
“으, 으응?”
“그들은 강력한 무구를 만드는데 집착했지.

그 결과, 나와 비슷한 무기들을 만들었다.

영혼을……무기에 담았지. 그 뒤로 벌써

몇 천 년이나 지났고…….”

 

그 결과, 이리스볼드는 수천 년 동안 살았다.

대부분은 잠들어 있었으니 실제 체감 시간은

훨씬 짧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뭐, 이젠 다 지난 일이지만.”
“그럼……이리스도 친구가 없어?”
“허어?”

 

노마가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들었다.

 

“뭐, 뭐냐?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사실 나도 친구가 없었거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이리스볼드는 도무지 이 꼬맹이의 정신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은, 나……마을에서 따돌림 당했어.”
“어째서지?”
“나는 약하니까…….”

 

아, 그런 거로군.

 

어린 아이어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

믿어도 되는 자를 구별할 줄 안다.


그리고 노마는, 이토록 유약하니 분명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했을 터였다.

 

“있지, 이리스! 그럼 말이야, 우리 친구하자!”
“친구? 나하고 친구가 되겠다는 거냐?”
“응! 어, 혹시 안 되는 건가?”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존재인가.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위험천만한 무기인지도 모르다니.

 

‘상관없나……어차피 곧 헤어질 테니.’

“이리스?”
“그래, 친구. 좋군. 마음에 든다.”

“그럼 우린 친구인 거지!?”


이리스가 눈만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읏?! 뭐, 뭐하는 거야?”
“포옹! 오늘부터는 친구니까!”
“별 시답잖은 짓을 하는군.”

“에헤헤.”


……그래도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친구. 이런 몸이 되기 전에도 그런 건 없었다.

 

‘곧, 헤어지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까.

 

어차피, 이 순간 또한 잊어버릴 테니까.

 

 

 

 

 

“……다 왔다.”
“드디어 도착했다 이거로군.”

 

마을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벌써 대낮이건만, 마을 외곽에 있는 밭에도

입구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적들은, 아마 아직 여기 남아있을 터.

 

“내가……할 수 있을까?”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나? 당연하지.”

 

내가 있으니 패배할 리 없다.

고작해야 도적 몇 놈이다, 권총 모드에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녀가 생각했다.

 

“우리 엄마랑 누나도 잡혀있어. 신중해야 해.”
“잠입해서 대장을 암살하는 게 좋겠군.”
“마을 중심으로 가는 길을 알아.”

“좋아, 이제 움직여.”

 

노마가 살금살금, 조심스레 움직였다.

마을 구석진 곳, 그곳에 있는 배수로를 따라

마을 중앙을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을 중앙, 촌장의

집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좋아, 다 챙겼냐?”
“챙겼어, 챙겼어. 자자, 움직여!”


도적들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이제 슬슬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들이

짐을 꾸려 말 위에 싣고 있었다. 

 

“저기 있다. 저놈이 대장이야.”
“그래 보이는군.”

 

보통 도적들이란, 제일 잔인하고 강한 놈이

두목이기 마련이다.

 

이리스볼드도 도적들에게 소리치고 있는

거한을 발견하고선 모습을 바꿨다.

 

“이번엔 쏠 수 있겠지? 저놈만 처리하면

나머진 별거 없을 거다. 이 거리에서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어.”

“으, 으응.”


노마가 권총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
‘이번엔 쏠 수 있겠지.’

 

언젠가 한 번은 넘어야 할 고비다.

결국, 누구나 사경 앞에선 선을 넘어야한다.

그러니, 쏴라.

 

너도 똑같다는 걸 증명해.

 

타앙―!!

 

그 순간, 이리스볼드는 경악했다.

총을, 하늘을 향해 쐈다.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다!”

“이 얼간이가.”

 

갑작스런 총성에 도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고, 노마를 노려보았다.

 

“뭐야, 저 새끼는?”
“아! 저 녀석, 저번에 도망쳤던 놈이다.”

“도망쳤으면 친 거지 왜 돌아온 거야?”

“으, 으으으……!”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쏘지 못했다, 사람을 죽일 각오가 없었다.

 

“나, 나한테는 총이 있어! 당장 우리 마을

사람들을 풀어주고 여기서 사라져!”

“총? 그게 뭐냐?”
“몰라. 무슨 무기인가?”

“비켜, 멍청이들아.”


그때, 도적 두목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노마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었다.

 

“애새끼가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와선……

총? 그게 뭔지는 아는데, 쏠 수 있는 거냐?”

“뭐?”
“날 쏠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가 노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너 같은 애새끼야 뻔하지. 적당히 겁만

주면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냐? 응?

도적이,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우, 으으윽……!”

 

노마가 총을 들어 그를 겨눴다.

그러자, 도적 두목이 크게 웃었다.

 

“봐라, 그 떨리는 손을. 사람 죽여본 적

없지? 그랬겠지. 이렇게 평온한 곳에선

사람은커녕 개새끼 하나 죽일 일 없으니.”

 

열 발자국. 그가 더 가까워졌다.

 

쏴야 한다.

 

하지만, 노마는 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데 필요한 건 힘이 아니야.

각오다. 살인자가 될 각오, 그리고 그 낙인을

평생 짊어질 각오……너한테는 있는 거냐?”

“어서 쏴라, 노마. 더 가까워지면 위험하다.”

“나, 나는……나는!”


그 순간, 노마는 보았다.

 

―시체더미. 마을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담벼락 밑에, 누나와 엄마가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 썩어가는 시체가.

 

“엄마―”

“아, 저거? 잘 썼어. 촌년들치고는 제법

먹을 만하더라?”

 

죽여.

 

죽여야 해, 지금 당장.

 

끼익, 노마가 손가락에 힘을 줬다.

 

“나, 나는……나는!!”
“노마, 당장 쏴! 얼른!”

“애새끼가, 쏠 수 있을 리가 없지.”

 

푹!

 

노마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았다.

어느새 단검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컥.”
“봐라, 못 쏘지?”


풀썩, 노마가 무릎을 꿇었다.

이상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몸에는 힘이 안 들어갔고, 눈 앞이 흐렸다.

 

“쯧쯧, 한심한 놈.”

 

두목이 노마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다.

 

“고작해야 사람 하나 못 죽여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비참하구먼. 으응? 안 그래?”

“쿨럭, 케흑…….”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피가 쏟아져 내렸다.

아프다. 아파서, 말조차 할 수 없다.

 

“힘이 있어도 쓸 각오가 없으면 끝이지.

뭐……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니까.”

 

어느새 그는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모든 게 느렸다. 그리고 추웠다.

 

이렇게 죽는 건가?

고작,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리스…….”
“왜?”

 

다시 눈을 떴을 때, 노마는 새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끝도 시작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 서 있었다.

 

“한심하긴, 내가 그렇게나 충고했는데.”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노마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조소했다.

 

“가족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망설였어.

왜? 사람을 죽이는 게 무서워서?”

“아니야.”


노마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무서운 것보다도, 싫었어.”
“뭐가?”
“나도 똑같아 진다는 게.”

 

그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이면, 나도 똑같아진다.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 어떤 이유가 있든, 살인은 그저 살인이므로.

 

“어째서야?”


노마가 울부짖듯 토해낸 말.

원망이었고, 절망이었고, 실망이었다.

 

이 세상의 진리가 원망스러웠다.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데 절망했고.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실망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말했잖아? 죽거나 죽이거나. 약육강식.

너는 그 남자보다 약했고, 그래서 죽었어.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지.”

 

이리스볼드가 그에게 다가갔다.

 

―아름답고, 무서웠다.

 

노마는 한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무표정한 소녀한테, 저주받은 무기에게.

이런 순간에도 반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말해봐, 이유가 뭔데?”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어!!”

 

노마가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어째서야? 왜 죽여야 하는 거야? 왜 죽어야

하는 건데?!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잖아!

아무도 죽지 않는 결말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왜 내가 죽여야만 하는 건데!?”

 

노마는 줄곧 이해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마을 사람들은 노마를 겁쟁이라고 불렀다.

고작 벌레 하나도 죽이기 미안하다며,

참새 하나조차 죽이지 못하는 겁쟁이라고.

 

너무나도 상냥하다.

이런 잔혹한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나 다정하기에,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

그걸 이해하기엔 그는 너무나도 어렸다.

 

“죽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럼 기회를 줄게. 내 손을 잡아.”


그녀가 노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까지나 변덕에 불과했다.

얼간이에 머저리지만, 또 겁쟁이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노마를 버릴 수 없었다.

―이유는 그녀 스스로도 몰랐다.

 

“힘을 줄게, 세상을 부술 정도로 강한 힘을.

목숨을 줄게, 세상이 죽이지 못할 목숨을.

오늘부터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거야.

자, 나의 주인이 되어줘. 겁쟁이 꼬마야.”

 

노마가 손을 보았다.

 

손을 잡으면, 전부 되찾을 수 있다.

힘도, 목숨도.

 

“나―”
“뭐해? 어서 잡아.”
“나는― 잡지 않을 거야.”

 

그 대답을 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었다.

 

아니.

 

어리석은 게 아니다.

 

“과연, 신념이라.”

 

이리도 어린 나이에, 이토록 강한 마음이라.

그녀는 어째서 노마가 폭주하지 않았는지

진정으로 이해했다.

 

단순히 상냥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겁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사람을 죽일 각오가 있다면.

사람을 죽이지 않을 각오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말이야, 넌 착각을 하고 있어.”

덥석! 이리스볼드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선택권은 강자한테 있는 거야. 약한 놈은

선택할 권리조차 없어, 그래. 죽이지 않을

권리를 선택할 권리도 없는 거지.”

“싫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다.

실로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야말로, 악마의 얼굴이었다.

 

“너는 나랑 끝까지 가는 거야.”


―――――――

 

눈을 뜨자,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실에 묶인 꼭두각시처럼, 부자연스럽게

몸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아아― 육신을 가지는 게 얼마만인지.”

“뭐야? 분명 죽었을 텐―”
“모드 전환.”

 

이리스볼드의 총이 새로운 형태를 갖췄다.

긴 총열 여섯 개가 둥글게 묶여있는 총.

―미니건이다.

 

“미니건!!”

 

드르르르륵―!!

피와 육편이 사방에 튀었다.

 

도적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으깨졌다.

 

“흐아아아악!?”
“뭐야, 무슨 일이야!?”
“모드 전환, 산탄총!”

 

철컥! 다시 이리스볼드의 형태가 바뀌었다.

 

마총, 이리스볼드.

 

그 총에는 탄환이 없다.

순수한 마나를 총탄 삼아, 다시 마나를

불태워 발생한 폭발력으로 탄환을 쏜다.

 

그 파괴력은 평범한 총과 비교할 수 없다.

또한, 마나를 재료로 삼기에 마나 수급만

되면 얼마든지 쏘고 또 쏠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총탄, 그리고 학살.

이것이 바로 마총 이리스볼드의 힘.

 

“아하하하하―!! 죽어버려라, 벌레들아!!”
“끄아아악! 히익, 으히이이익!?”
“도망쳐, 도망치라고! 까악!?”

 

퍼억, 퍽! 남자의 몸뚱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이어서 그녀가 손을 뻗어 촉수를

날렸다. 

 

꿈틀, 꿈틀― 검은 촉수가 시체에서 피를

빨아, 마나를 흡수했다.

 

“모드 전환, 화염방사기!”

 

푸슈우우욱―! 새까만 불꽃이 사방에 뒤덮였다.

도적들은 몸에 들러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뒹굴고 온갖 발악을 했다.

 

“끄아아아아―”
“모, 못 이겨! 못 이긴다고, 저런 건!”
“흐걱, 흐어억.”


빠직! 그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도적의

머리를 짓밟고, 또 피를 흡수했다.

 

“아아, 즐거워―”

 

이 맛이다. 이게 그리웠다.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유린하는 이 쾌락.

살인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희열.

그녀는 진정으로, 살인을 사랑했다.

 

“모드 전환, 돌격 소총.”

 

드르르륵! 타타타타타―! 

그녀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쏴 갈겼다.

 

도적들은 이미 그 시점에서 모두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체에 총알을 갈기며,

튀어 오르는 피를 행복한 표정으로 핥았다.

 

“으음, 이거야. 이래야 제맛이지.”

“끄억, 흐그억―”
“어머, 아직 살아있었네?”


그녀가 피를 토하고 있던 두목에게 다가갔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너― 너 뭐야? 왜 살아있는 거야?”
“시시한 유언이네. 빵!”

 

퍼억! 두목의 머리가 터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맛을 보았다.

역시나, 그 어떤 꿀보다도 달콤하다.

 

“노마, 노마, 노마― 보여? 이게 바로 힘이야.

이게 바로 살인이야. 이게, 바로 약육강식이야.”

 

그녀가 불타오르는 마을을 향해 팔을 펼쳤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 순간, 노마의 몸이 돌아왔다.

그는 그제야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고,

이어서 사방에 펼쳐진 지옥을 보았다.

 

“아니야―”

 

그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단지, 조금 겁을 주고 싶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뿐이다.

다시 한 번 가족들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아아아아아아아아……!!”

 

노마가 바닥에 엎드려 절규했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비명을 토했다.

 

“싫어, 싫어, 싫어……!!”

 

살인을 저질렀다.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결국, 똑같아지고 말았다.

 

“싫어!!”

 

이리스볼드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웃음밖에 안 나왔다. 너무나도 즐거웠다.

 

축제는, 지금부터다.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으니,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챈 자들이 그들을 쫓을 것이다.

 

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펼쳐질 것이고.

이번에야말로, 전부 죽여 버릴 것이다.

 

“기대되네, 우후후.”

결국 노마도 깨닫게 되리라.

 

이 세상은, 죽거나 죽이거나라는 것을.

 

 

 

 

 

 

 

 

 

 

가끔은 판타지에도 총이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순수한 주인공이 망가져가는 이야기가 좋아...

요즘 마검이니 마창이니 너무 착해서 마음에 안 들어...

자고로 마의 무기란 사악한 것이 국룰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