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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자친구는 흡혈귀였다.

 

흡혈귀가 인간과 다니는 광경이 이상한 장면은 아니었다.

 

가학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흡혈귀들은 노예를 두기 좋아했기에 오히려 인간을 밑에 두지 않는 흡혈귀가 더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그녀의 관계는 조금 달랐다.

 

처음으로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전하던 날

 

그녀는 떨리는 눈을 가다듬고 붉은 홍조를 얌전히 피운 뒤 복받치는 감정을 목소리로 전달했다.

 

손톱을 들이대지도, 이빨을 드러내지도, 전하는 말 사이 노예나 권속이라는 단어를 섞지도 않았다.

 

평범하기 까지한 고백을 마친 후엔 가만히 그의 선택을 기다렸고

 

긍정적인 화답을 들은 순간 환한 미소를 띄고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을 끌어안은 그녀의 등에 팔을 휘감았다.

 

결코 두려움에 억지로 뱉어낸 말이나 행동이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전하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전했을 마음이었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흡혈귀와 인간은 사랑을 서로에게 쏟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는 이 관계에 조금씩 의구심이 들었다.

 

사귄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수시로 사랑한다는 듣고싶어했고 또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없이 전달했지만

 

정작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로 자신을 연인으로 보는지 의심되었다.

 

길거리에서 뜬끔없이 엉덩이를 콱 쥐는 우악스러운 스킨십을 퍼붓고

 

툭하면 손톱으로 피부를 긁으며 상처난 몸이 예쁘다는 식의 가학적인 말을 쏟아냈고

 

가끔은 의식이 잠시 날아갈 정도로 피를 세게 빨아대고는 혼미한 자신을 붙잡고 깔깔 웃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런 뒤엔 받쳐 안고 많이 아팠냐고 다정히 묻긴 했지만

 

잔뜩 힘들게 해놓고 말로만 괜찮냐는 식으로 나오는건 물건을 험하게 다루고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나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연인으로 만나는게 아닌 곁에두고 괴롭히며 피나 빨아먹는 노예로 보는건가 싶기도 했다.

 

당연히 흡혈귀인 이상 가학심은 있을 수 밖에 없는걸 잘 알고 있었고

 

그녀와 사귀기로 한 순간부터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 그였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장난과 거친 손짓에 몸과 마음이 조금씩 지쳐갔다.

 

하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인간 따위는 벌레처럼 찢어 죽일 수 있는 흡혈귀라 불평을 토로하기엔 심리적으로 버거웠고

 

또 의문이 심하게 든 날 여자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차가운 태도를 보이면

 

그녀는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오기라도 한건지 더 없이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로 자신을 달래주었고 그 순간 기분이 풀렸다.

 

불만도 조금 있을지언정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컸기에 그녀의 장점을 볼때마다 쌓았던 불만을 금방 잊어버리는 탓이었다.

 

그럴때 마다 그까짓거 내가 좀만 참으면 되지. 사랑하는 사이에 이정도도 못 양보하냐는 생각으로

 

여자친구는 그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다소 과한 장난을 치는것 뿐이라 여기기로 하며 불만을 가슴 깊이 접은 후

 

며칠 후엔 다시 여자친구의 심해진 장난에 골머리를 썩는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음~ 공기 좋다. 그치?”

 

“그러게, 산책하게 딱 좋은 날이네”

 

어느때와 같은 날이었다.

 

몇번이나 해왔던 데이트

 

길을 거닐기 좋아하는 그녀와 손을 잡고 공원을 걷고 있었다.

 

“아, 밥 먹고 나니까 입이 좀 심심한데…“

 

하지만 몇걸음 채 걷기도 전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뜻인지 잘 아는 그는 주변을 살짝 살피곤 셔츠 단추를 풀어 하얀 어깨를 드러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건 질렸어”

 

하지만 그녀는 걷어진 셔츠를 도로 올려 그의 어깨를 덮었다. 

 

의아해진 그가 아니면 이곳을 먹고 싶은 거냐며 다른 부위들을 말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묘한 미소만 흘렸고

 

야릇한 웃음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는 불길함에 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를 먹고 싶은거야?”

 

“여기”

 

쿡,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를 찔렀다. 

 

다름 아닌 그의 왼쪽 가슴. 즉 심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여기라면…”

 

“네 피가 한가득 담긴 심장을… 그대로 꺼내 먹고싶어”

 

어떤 반응을 해줘야 하는거지? 심장을 꺼내먹고 싶다니 그건 죽이겠단 뜻인데 아무리 가학욕이 심하다지만 진심으로 그런 짓을 할리가

 

살벌한 농담을 태연히 받아칠 순간을 잃은 그는 그저 헛웃음으로 무마하려 고개를 들었다.

 

“하하…무슨 농담도…”

 

눈에 비친건 항상 봐 온 표정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피부에 번지듯이 피어난 홍조와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입술을 치켜올려 지은 요염한 미소

 

끈적한 눈빛을 새어보내며 입맛을 다시는 특유의 표정

 

그녀가 자신의 피를 먹기 전 항상 보내는 눈빛이었고 어김없이 짓던 미소였다.

 

‘어…?’

 

평소처럼 농담을 건넬 때의 능청스럽고 장난기 서린 표정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엔 서슬퍼런 손톱이 날을 세우고 있다.

 

가늘게 휘어진 눈꺼풀 사이로 붉은 안광이 왼쪽 가슴을 노리고 있다.

 

입술을 흠뻑 적시고도 여전히 흥건한 혀가 살을 탐하고 있다.

 

‘진…진짜야?’

 

뇌수가 굳어가는 기분이었다. 지금 여자친구가 보이는 태도는 아무래도 진심같았다.

 

손톱으로 가슴을 찢고 심장을 꺼내 베어물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손짓과 표정.

 

그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농담을 순진하게 믿었느냐며 환히 웃는 여자친구가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마음속으로 1. 2. 3. 을 천천히 세어 꼭 감았던 눈을 다시 뜬 후에도 여자친구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의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린 표정 그대로 부드럽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전부터 생각했어, 나를 향한 사랑이 잔뜩 녹아든 너의 달콤한 피를 마실 때 마다

 

‘피 몇모금 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데 향기로운 피가 샘솟아나는 심장을 씹으면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할까?‘ 하고 말이야

 

그동안은 널 생각해서 최대한 참고 견디려 했는데… 이젠 한계인것 같아. 이리와“

 

도망쳐야된다는 생각을 실천하기 보다 그녀의 손이 어깨를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흡혈귀인 그녀의 손에 붙잡힌 이상 물리적으론 결코 그녀를 떨쳐낼 수 없다는걸 아는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비참하기 그지 없었지만 생존이 걸린 이상 도리가 없다.

 

“무, 무슨 소릴 하는거…그럼 나는 죽는거잖아? 너 내가 죽길 바라는…그거 아니지? 설마…”

 

“아 그거? 걱정마 내 권속 흡혈귀로 되살려 내면 그만이니까. 좋지 않아? 나랑 같이 평생을 살 수 있는거야”

 

지나치게 당황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게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난 흡혈귀가 돼서 영원히 살 생각은 없어 그러니 멈춰줘‘ 라는 말을 뱉으려 했으나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헛기침만이 입 안을 감돌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여자친구는 자신의 손톱을 치켜들고 기다란 혀로 천천히 핥았다.

 

말이 좋아 손톱이지 그 강도는 철문도 가볍게 자를 정도였기에 그의 눈에 비친 모습은 도축하기 전 칼을 가는 백정과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침으로 코팅된 붉은 손톱이 번들거리는걸 본 그녀는 만족스러운듯 씩 웃고 그의 왼쪽 가슴을 겨냥했다.

 

“최대한 안아프게 해줄테니까 넌 잠깐 눈만 감았다 뜨면 돼… 이따 다시 보자. 알겠지?”

 

“제, 제발 그런 소리 하지말고 그만…”

 

뒤늦게 터진 아우성은 손톱보다 느렸다.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이미 그녀의 손은 그의 가슴 근처에 다다라 있었고

 

그 모습을 똑똑히 본 그는 그대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손이 닿았다.

 

손톱이 아닌 손 끝이 닿았다.

 

시퍼런 손톱이 아닌 길고 하얀 손가락이 가슴을 덮었다.

 

심장을 쥐긴 커녕 피 한방울 조차 안묻은 손바닥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풉…푸하핫…푸하하하하하!”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소리

 

뻣뻣하게 굳은 몸을 때리는 불규칙적인 음파

 

재만 남은 머릿속을 짓밟듯이 채우는 그녀의 표정

 

“허억…헉…허어…하...하하…하아…하하…하…”

 

몰아쉬는 숨 사이 헛웃음이 자꾸 섞였다.

 

기어코 자신을 또 속였다는 고양에 한껏 취한 그녀를 두고 그는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풉, 귀엽기는’

 

입꼬리가 자꾸 치솟았다.

 

흡혈귀인 자기 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린 채 부들거리는 남자친구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기겁할만한 장난으로 잔뜩 겁준 후 사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제스쳐를 취해주면

 

그는 정말로 큰일이 날 줄 안듯이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런 남자친구를 끌어안으면 더 없는 행복감이 느껴졌다.

 

차게 식은 피부위로 다시금 올라오기 시작한 체온, 품을 두드리는 살의 떨림, 목위에 뿌려지는 거친 숨은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같았고

 

그가 품에서 점차 안정을 취해가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보낸 사랑을 받아들여 우리가 정말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인걸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유난히 놀란거 같네? 후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보자 벌써부터 흥분감이 올라왔다. 몸이 벌벌 떨리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고 입은 옷은 식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저걸 보고 어떻게 안 끌어안고 배길 수 있을까, 입술을 한번 더 핥은 그녀는 반지 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을 잡아준다면 그대로 끌어올린 후 있는 힘껏 끌어안을 생각이었다.

 

울먹거리면 눈물을 닦아줄것이며 몸을 떤다면 품으로 막아줄것이다.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속삭이고 몸을 쓰다듬을 것이다.

 

이윽고 그의 손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을 향했다. 여전히 떨리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비틀거리며 다가온다.

 

‘잡아줘, 얼른’

 

입술을 핥는 그녀의 얼굴이 연기를 할 때 보다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짝-

 

그녀는 언제 자신이 손을 오른쪽으로 꺾은건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자신의 손이 꺾인건 무언가에 맞고 방향이 바뀐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을 때린건

 

“어?”

 

바로 그의 손이었다.

 

자신의 손을 잡는게 아니라 손으로 때린거라니, 단 한번도 이런일이 없었고 단 한번도 그럴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품을 열면 안겨들고 손을 내밀면 붙잡아주던 그였다. 

 

무서웠다며 어리광을 부리고, 너가 그럴리 없는데 괜히 놀랐다며 조용히 웃어주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말 없이 일어났다. 

 

일어난 그는 뒤돌아 선 채 걸어갔다.

 

등을 내어 보이며 혼자 공원을 떠나고 있었다.

 

“자, 잠깐. 어디가!”

 

그녀는 빠르게 쫓아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래, 장난이라니까?”

 

“…놔”

 

“설마 내가 진짜 그럴거라 생각하는거야? 그럴리가 없ㅈ…”

 

“놓으라고…”

 

그는 소리치지도 않았고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린 채 나즈막히 읊조린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녀는 더 없는 충격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고 손은 힘없이 어깨 위에서 흘러내렸다.

 

“어…너...너…”

 

돌아선 그의 표정은 사색이었다.

 

떨리는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볼을 가르고 내려와 입술에 닿은 순간

 

“자, 장난…? 장난…이라고…?”

 

설움으로 흠집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어떻게…그럴 수 있어…? 사랑… 한다면서… 죽이니 마니 하는게… 장난거리야…?

 

원망과 슬픔으로 흥건히 적셔진 말이 새어나왔다.

 

공포, 원망, 혐오를 담은 그늘진 낯빛은 평소 장난을 당한 후 짓던 표정이 아니었다.

 

“그…그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언제나와 같이 잠깐 놀랄 뿐 곧 안정을 되찾을 줄 알았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장난이라 여겼다.

 

패닉에 빠진 그녀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반면에 그는 울먹거림을 참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흡혈귀들에게 인간은… 그냥 간식거리니까… 길거리에 널린 간식이니까…

 

난 네게 있어… 주머니 속 초콜릿 같은거지?

 

그저 곁에 두다가… 심심 하면 꺼내먹는… 그런거지?

 

사랑이니 뭐니 다 거짓말이잖아… 넌 그냥 말 잘 듣고… 원할 때 피를 내어주는… 노예가 필요했던 거잖아…“

 

“아니… 아니야… 난…”

 

“난 기뻤어… 널 다시 만났을 때도… 너가 먼저 고백했을 때도… 너와 있으면 행복했고… 네가 날 사랑 한다고 생각했어…

 

피를 내어준 다음날 빈혈로 고생해도… 내 몸에 너의 손톱에 긁힌 상처가 늘어도… 사랑하니까…사랑받는줄 알았으니까…괜찮았어…

 

근데 아니었어… 나만 사랑한거였어… 내가 받은 건 고백이 아니라 명령이었는데… 착각한거야…“

 

‘그렇지 않아… 난 정말로 너를…’

 

이젠 목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으나 맹세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남자친구 없이 세상을 살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가 원한다면, 자신을 사랑한다면 모든걸 내어줄 각오도 있다.

 

그래서 다른 흡혈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노예를 부리며 피를 갈취하고 사랑없이 복종을 요구하는 쓰레기가 아닐거라고

 

나와 그는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정한 관계를 맺고있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애정표현이라 생각한 짓에 그가 깎여나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흡혈귀들과 다름없이 그저 스스로의 욕망에 휘둘려 그를 갈취한것이다.

 

‘말도…안돼…내가…그럴…리 없….’

 

부정하려 들수록 죄책감이 기어올라왔다.

 

망가진 그가 있는데

 

공허한 눈으로 벌벌떠는 그가 있는데

 

자신을 두려워 하고 원망하는 그가 있는데

 

그가 손을 들었다.

 

왼손, 자신이 선물한 반지를 낀 손이었다.

 

그리고 오른손이 그 반지를 향하고 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는동안 그는 반지를 빼 오른손에 쥐었다.

 

안그래도 새하얗던 그녀의 얼굴이 갓 꺼낸 백골에 가깝게 창백해졌다.

 

‘아…아…그…그건…’

 

“이제 날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해… 니가 말한 대로 흡혈귀로 삼든지… 평생 노예로 부리며 피만 빨아먹든지

 

말 뿐인 사랑놀이에 필요한건 그냥 몸뚱이 일테니까 이것도 이젠“

 

“그만… 그만… 그만해!”

 

 

 

 


 

반지를 빼자마자 그녀가 달려오더니 대뜸 가슴에 안겨왔다.

 

하지만 그는 무시하고 반지를 내던지려했다.

 

이미 사랑이 사라진 관계에 이까짓게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손이 멈칫했다.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뭐?”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미끄러지듯이 품에서 빠져나갔다.

 

등을 감싸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 발목에서 멈췄고

 

가슴에서 멀어진 얼굴은 땅으로 향했다.

 

바닥에서 쿵 소리가 나 시선을 내리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은 그녀가 발 밑에 있었다.

 

흡혈귀들은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해 결코 잘못을 인정하거나 먼저 사과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장난섞인 사과말고 진심으로 사과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고있다.

 

발목을 부여잡고 흐느끼며 잘못을 인정하고있다.

 

차마 믿기 어려운 광경에 그의 눈이 찌푸려졌다.

 

설마 이것마저 장난인건가

 

“너 이게 뭐하는…”

 

“저, 정말로… 잘못했어… 네 맘도 모르고 내 멋대로 군것도… 심한 장난으로 마음 아프게 한 것도…

 

난 그저 네가 좋아서…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애정표현으로 그런건데… 네가 그렇게 받을줄은 몰랐…

 

…아아아아니, 아니야… 그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네 잘못 아니야 내 잘못이야전부내가잘못한거야…..컥…커헉…흐끅….하아…

 

진짜 미안해… 널 사랑한다 말하면서… 흐윽…. 어, 어떻게 표현할줄 몰랐어… 흐끅… 어떻게 사랑할지, 어떻게 아껴줄지, 전혀 몰랐어…

 

그래서 멋대로 굴어버렸어… 네 맘도 모르고… 흐으윽… 지, 진짜…미안…미안해…

 

네가 괴로웠던 만큼 욕해도 돼…

 

네가 아팠던 만큼 때려도 돼…

 

가만히 듣고…

 

가만히 맞을게…

 

네 분이 풀릴 때 까지…

 

더 심한 것도 괜찮아… 얌전히…흐끅…야, 얌전히….”

 

이마를 연신 바닥에 내려찍어 쿵쿵 소리를 내며 그녀는 사과를 했다.

 

밀려오는 거친 숨에 말문이 막히면서까지 그녀는 사과를 했다.

 

그 처량한 모습을 보고 얼어붙은 그를 깨트린 순간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제,제발…제발 떠나진 말아줘… 내가 네 옆에 있을 수 있게만 해줘… 버리지만은 말아줘… 하아..하으읏…커헉…컥…”

 

고개를 든 얼굴엔 흥건한 피가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얼굴을 가르고 옷을 적시고 바닥에 고이는 피였다.

 

그 얼굴로 빌고 있었다.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잘못을 빌었다.

 

스스로를 뉘우치며 용서를 바라고 있었다.

 

‘너…’

 

처참함에 짓밟힌 여자친구를 본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랑을 맹세하며 선물했던 반지였다.

 

‘이건 분명…’

 

여자친구의 이빨로 만든 반지

 

일생에 두 번밖에 나지 않는 송곳니를 자신을 위해 뽑았고

 

같은 무게의 다이아몬드보다 수십배는 귀한 뱀파이어 투스를 미련없이 반지로 만들었다.

 

어차피 흡혈귀의 이빨은 이렇게 쓰는거라고

 

사랑하는 마음은 가장 귀중한 것에 담을 때 의미 있는 거라며 자신에게 선물했다.

 

‘맞아, 그랬어’

 

반지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등 뒤로 넘어가는 노을이 보였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었음을 알리는 신호

 

그 순간 잊고있던 사실 하나가 또 떠올랐다.

 

자신과 그녀는 항상 낮에 만났다.

 

야행성인 흡혈귀 임에도 자신을 위해 밤낮을 바꿔 살았다.

 

밤에 데이트를 해도 좋다 말할 땐 자신을 말렸다.

 

햇빛을 받고 빛나는 자신의 얼굴이 좋다면서

 

밝은 대낮에 함께 걸어다니며 이렇게 멋진 연인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다면서

 

‘날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는데…’

 

그런데 자신은 방금 무어라 했는가

 

희생하며 사랑을 내어준 그녀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쏘아붙였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녀가 아낌없이 내비친 사랑은 잊어버리고 더 큰 사랑을 안내준다며 투정했다.

 

고작 피 좀 빨리는게 어떻다고, 고작 장난 좀 친게 어떻다고

 

스스로를 바꾸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그녀에게 뭘 얼마나 더 원하는건가

 

구역질이 밀려왔지만 가만히 자기혐오에 빠져있을 순 없다.

 

지금 눈 앞엔 그녀가 있다.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이는 그녀가 있다.

 

피에 젖은 눈으로 애타게 자신을 바라는 그녀가 있다.

 

“아…안 돼… 지금 오지마…피…피 묻어…”

 

“괜찮아”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팔을 밀어내는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옷이 젖는게 느껴졌지만 더 젖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끌어안았다.

 

“내가 더 미안해…”

 

“아, 아니야… 너 잘못 한거 없어… 내가… 내가 잘 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동안 더 없이 나에게 잘 해줬어

 

정말 미안해

 

어떤 말로도 표현못할 너의 마음을 잊었고

 

너의 사랑을 잔뜩 만끽하면서도 얼마나 가치있는지 의심했어

 

다신 잊지도, 의심하지도 않을게

 

비록 너에 비하면 보잘것 없지만

 

너와 달리 스스로를 잘라 줄 용기도 없는 한심한 나지만

 

마음만큼은 변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게

 

사랑해, 정말로“

 

말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품에 그녀를 두었다.

 

그녀는 말 없이 그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흘렸다.

 

그 품이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떠나지 않음을 확인한 그녀가 팔을 그의 등에 감았다.

 

“흐윽… 고, 고마워…나, 날 받아줘서허흐흑…다, 다신…다신 안그럴게…미안해…사랑해… 진짜… 진짜잘할게……”

 

그는 가만히 품을 열어 그녀가 파고들게 냅두었다.

 

토해낸 울음이 자리할 곳을 마련해 주는 것

 

가슴에 쏟아내는 설움을 온전히 받아 내는 것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엔 울림을 이어받은 그의 눈시울마저 젖어들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결코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너 안불편해? 가죽장갑을 끼고”

 

“아니 괜찮아. 나 원래 손 따뜻한거 좋아해”

 

‘지금 여름인데…‘

 

평소엔 답답하다며 절대로 끼지 않던 두꺼운 장갑을 끼고다녀 손톱이 스치는 일도 없게 만들었고

 

“너 지금 빈혈끼 도는거 같은데… 피 먹어야 되는거 아니야?”

 

“저, 정말? 피, 피…먹어도 돼…?”

 

“얼른 먹어, 너 그러다 쓰러지겠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될 때 까지도 먼저 피를 먹고싶단 소리를 하지 않았고

 

“나 잠시만…”

 

“어, 어디…어디가는거야? 나, 나 버리고 어디… 호,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아, 안돼 제발… 그러지 말…”

 

“아니…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의 말이나 행동에 지나칠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후우…’

 

소변을 해결하고자 화장실에 왔지만 그는 소변기가 아닌 대변기 칸으로 들어가 앉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들어갔어?-

 

-얼마나 걸릴 것 같애?-

 

-나 문 앞에 기다리고 있어-

 

-왜안보는거야얼른답해줘

 

-너혹시나버리고각ㄴ거야니니?그런거아니지/어디야어디야어디야엉읻이ㅑ엉디야-

 

-미않해방금ㄷ르러ㅘㅆ어-

 

-미안해 방금 들어왔어-

 

마른 장작에 떨어진 불씨처럼 순식간에 쌓여가는 메세지에 황급히 답을 던져 진정시킨 후에야 볼일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잠시라도 못보면 쉼없이 톡을 보내오는 탓에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중에도 톡을 나눠야만 했다.

 

물론 볼일을 다 본다 한들 그녀와의 톡이 끝나진 않았기에 5분정도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휴대폰을 두드렸다.

 

‘후우…’

 

간신히 얘기를 마친 후에야 그는 세면대로 올 수 있었다. 물론 이나마도 긴 여유시간은 아니었다. 30초만 넘어가도 휴대폰은 진동 마사지기가 되리라

 

그렇게 비눗기조차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나왔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허리를 붙잡는 손과 가슴을 파고드는 얼굴에 시달려야했다.

 

“흐윽…나…너 답도 없고…나오지도 않길래…호, 혹시 무슨 일 생긴건지…아니면…못본 사이 사라진건지… 거,걱정했…어…흑…”

 

화장실 앞에서 애타게 사람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는 광경은 뭇 행인들의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시선이 느껴진다 한들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더 큰 움켜쥠이 도사릴테니까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뜻을 최대한 길게 설명한 후에야 간신히 가슴은 자유로워졌다.

 

“이제 나가자, 영화나 보러갈까?”

 

“응…”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순 없었다.

 

느릿하게 천천히 걷는 남자와

 

그의 손을 잡고 등 뒤에서 더 느릿하게 걷는 그보다 훨씬 체격이 큰 여자

 

이 조합마저도 흔한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 그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가 지나친 장난이나 위협적인 말을 조금은 자제하길 바란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피폐하고 순종적인 사람이 되길 바란건 절대 아니었다.

 

길다란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멈춰 선 순간엔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자신의 어깨엔 그녀의 팔을 두르며 시선 따위 상관없다는 듯 사랑을 확인하고

 

하늘이 어두워지면 뒷골목에 들어가 옷을 슬그머니 걷고는 눈 앞에서 올라가는 입술을 마주하며

 

머릿속이 띵해져오는 순간 몸을 받쳐주는 손길에 의지해 내리쬐는 눈웃음을 별이라도 되는 양 멍하니 바라본 후

 

입술이 포개진 순간 영원히 깨지지 않는 사랑을 소원으로 빌던

 

매일이 같은 하루

 

그래서 모든 날이 소중하던 일상

 

그 일상마저 없애버리고 싶은게 아니었다.

 

‘의미가 있는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진 그녀를 사랑하는 의미가 있을까

 

처음 자신이 마음을 뺏긴 이유가 사라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과연 사랑을 해야할까

 

머릿속에 떠오른 확실한 결론과 동시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가, 갑자기 왜…그, 그래?”

 

갑자기 남자친구가 멈춰서자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답을 들려주는 대신

 

“어…어?”

 

꼭 쥐고있던 손을 그대로 턱 놓았고

 

그대로 그의 발이 움직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떨어졌다.

 

 

 

 


 

“장갑 벗어”

 

“어…?”

 

“장갑 벗어줘”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친구가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눈과 다정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중이었다.

 

그제야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옴을 느낀 그녀도 목소리를 내었다.

 

“아… 안돼… 버, 벗으면 너가…”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 따위엔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와서는 그대로 손을 잡고 장갑을 벗겨버렸다.

 

“난 네 손을 잡고 싶은거지 장갑을 잡고싶은게 아니란 말이야”

 

땀이 차서 축축해진 손가락이 해방감을 느끼기도 전 작고 여린 손가락이 그 사이를 메꿔버린 순간 그녀의 눈이 휘동그레졌다.

 

“옆에서 같이 걷자. 옆에 네가 없으니까 너무 허전해“

 

어느새 그는 그녀 왼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동그레진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포근한 눈빛, 다정히 그려진 입꼬리, 결코 빠지지 않을 듯 꽉 맞물린 두 손

 

“으…응”

 

만면에 번진 미소와 함께 그의 발이 움직였다. 그녀 역시 그 발의 박자에 맞춰 조심히 바닥을 디뎠다.

 

‘당연하지’

 

물론 사랑할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변하던 상관없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멀어지지 않으려고, 사랑을 나누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난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태도로 나오든 받아줄 것이다.

 

나 역시 마음을 열어 깊게 품은 사랑을 얼마든지 확인시켜 줄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서

 

지나갈 시간에서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그녀와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거니까.

 

왼손을 꽉 쥐고

 

이빨의 화답을 느끼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피 한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왼손에서 흘러나온 피 한방울이

 

멀어지는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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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번에 ‘가학적이던 흡혈귀의 의존형 얀데레화 되는게 보고싶다’라는 써줘를 대충 갈겼었는데


그게 무려 개추 160개를 넘어가서 내심 기분이 좋았음


근데 이틀 뒤에 어떤 똥닌겐상이 지웠더라… 비번을 1234로 했더니 그만


그 반응이 다시 보고싶긴 했지만 써줘를 그대로 재업하는건 양심 뒤진거 같아서


마침 대회도 열렸겠다 부랴부랴 글 써서 가져왔음. 


봐주신 분들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바치며


글에대한 피드백도 얼마든지 환영합니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