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는 증기를 내뿜으며 역에 도착했다.

런던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했다.

나는 정부의 명령을 받아 리버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감시하다

제임스의 전보를 받고 겸사겸사 휴식을 취할까 해서

휴가를 내고 런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3년 만인가...'

제임스 프리드먼. 그는 유대인 혈통으로 ,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버밍엄에서 살던 죽마고우이며

지옥같던 프랑스의 전쟁터에서도 서로 의지한 친구다.

지금은 런던의 캠든 타운에서 양조업을 하고 있는데,

내가 알기론 다른 불법적인 일도 하는 걸로 안다.


"모스 경위님 맞으십니까?"

열차에서 내리니 플랫폼에서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소만, 누구신지?"

"프리드먼 씨가 보낸 사람입니다. 올리버라고 합니다"

"그렇구만, 아서 모스라고 합니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딨소?"

"사무실에서 기다리십니다. 차로 가시죠"


제임스의 양조장은 리젠트 운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양조장 바깥에는 야적장이 있어 노동자들이 

물건들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기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취해버리겠는데"

"하하하. 사무실은 2층으로 올라가시면 바로 나옵니다"


"아서! 오랜만이구만, 샬롬!"

"잘 지냈나, 제임스?"

3년 만에 만난 제임스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항상 멀끔하게 정장을 입고 다녔던 사내는

작업복 차림에 얼룩이 묻어 더러운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사업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는 꽤나 헝클어져 있었으며

풍성한 수염은 관리도 하지 않아 보였다.

"꽤나 망가졌구만 그래?"

"뭐,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관리할 시간이 없긴 했지"

"하하하.. 그래서 무슨 일로 전보까지 보낸거야?"

"음, 사실은 사업 문제 때문에 네가 필요해서 말이야"

"나? 내가 자네 사업에 무슨 일로?"

"이번에 BSA에서 엔진을 런던으로 보낼 예정인데 말이야...

그 엔진 상자 속에 위스키 500병을 숨겨서 같이 보낼거야"

"위스키?"

"최고급 스카치 위스키지. 한 잔 마셔보겠나?"

"아니, 괜찮아. 그래서... 그 화물들은 어디로 가는데?"

"미국하고 캐나다로"

"금주법이 있는 나라들이구만?"

"큰 수익을 낼 기회지. 문제는 안 들키고 보내야되는데..."

"그래서 날 부른거고"

"내가 경찰들하고 좀 사이가 안 좋아서 말이야..."

"좋아, 친구 좋다는게 뭐야. 내가 방법을 찾아보지"

"고맙구만! 역시 자네밖에 없어!"

"고마우면 저녁이나 좀 주게. 리버풀서부터 아무것도 못먹었어"

"좀 만 기다려. 기가 막힌 레스토랑을 하나 알고 있지"


"여기 괜찮지, 아서?"

"나쁘지 않구만"

"이 동네도 꽤나 괜찮은 가게들이 많이 생겼지"

"이번 임무가 끝나면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야겠구만"

"그래서.. 3년 동안 별일은 없었고?"

"사실은 아까 말 못한게 있었는데"

"뭔데 그래?"

이 얘기를 제임스에게 해야되나 굉장히 고민됐다.

"내가 감시 중인 공장 노조 말이야"

"노조가 왜?"

"... 거기 노조위원장이 앨리스더라고"

'앨리스'라는 이름을 듣자 제임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래. 어떻게 앨리스를 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제임스가 이렇게 된 것도 그 때부터 였을 것이다.

"그래... 앨리스가 왜 리버풀까지 가있는거지?"

"알아보니까 공산주의자 써클에 가입한 모양이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노조들을 결속 시키고 있어"

"흐음... 어쨌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제임스는 무덤덤해보였지만 나는 그의 손이 마치 분노를 참는듯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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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일어나! 드디어 버밍엄에 도착했어!"

제임스가 잠에 든 나를 흔들어 깨웠다.

기차가 어느새 도착한 모양이다.

잠에서 막 깨어난 나는 기지개를 쭉 폈다.

"끄으으- 2년만에 온 고향이구만"

"빨리 가자고, 꾸물대면 택시도 못잡을거야"


"그래서 어디부터 가볼까?"

"일단 집에 들러서 짐 좀 풀고 가족들이랑 만나고 나서 바로 

앨리스한테 가야지"

택시 안에서 제임스는 손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프랑스에서부터 앨리스 앨리스 아주 노래를 부르는군"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 아니겠어?"

"하하하... 그럼 집에 들렀다가 다시 만나자. 나도 오랜만에 앨리스 보고 싶긴 하네"

"그러지, 아! 기사님 여기서 내려주시면 됩니다"


"장미꽃으로 사가는게 좋겠지?"

꽃집 앞에서 제임스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냥 아무거나 사가..."

"그건 안되지. 아무거나 사갈 순 없어, 친구 (mate)"


"아, 여기 오랜만에 와보네"

앨리스가 살고있는 포위시 거리는 우리가 징집되기 전과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 굳이 달라진 점을 뽑자면...

저기 맞은편에 식료품점이 하나 생겼네.

"앨리스네 집도 그대로야"

앨리스가 사는 집은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테라스 하우스로

주변의 다른 집과는 달리 혼자서만 검은 벽돌로 지어져있었다.

"제임스, 여기 정문이 열려있는데?"

"앨리스 녀석 정신을 어디다 팔아둔거야? 나 참"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두고 어디로 간거야?"

"아하하하!"

1층 거실을 둘러보던 그 때, 2층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2층에 있었나보네. 뭐가 그리 즐거운걸까"

"어서 올라가보자, 아서"

2층에 올라가니 앨리스의 방 쪽에서 소리가 났다.


여자의 웃음 소리

남자의 웃음 소리

무언가 삐걱 거리는 소리


그리고 약간의 신음 소리


"제임스... 이거..."

"....."

제임스가 방문을 확 열어재꼈다.

침대 위에는 앨리스와 한 남자가 부둥켜 안고 있었다.

"어맛!"

우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앨리스는 크게 당황한 모습이였다.

"너네들 누구야 갑자기!"

앨리스와 몸을 섞던 사내가 소리쳤다.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인데, 당신은 누구요?"

"이 여자의 애인이요, 당신들 이거 무단침입인거 알어?"

비쩍 마른 사내는 속옷을 허둥지둥 치켜 올려 입었다.

'애인이라니...? 분명 앨리스와 약혼한건 제임스인데?"

나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제임스는 어떠하겠는가?

그는 마치 끔찍한 것이라도 본 마냥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

"이게 대체..." 라는 말만 반복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제임스... 이건..."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는 앨리스가 말을 걸려고 했다.

제임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가져온 꽃다발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문 밖으로 나섰다.

"잠깐...!"

하고 앨리스가 외쳤지만 그는 이미 밖으로 나가 뛰어가 버렸다.


"벌써 떠나려고? 우리 여기 온지 이제 이틀 밖에 안됐잖아"

"아니,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이유도 없어"

제임스는 트렁크에 옷가지들을 우겨넣고 있었다.

"가족들한테 얘기는 해놨고?"

"취직이 앞당겨졌다고 얘기하니까 다들 이해해주더군"

"너 설마 그 일 때문이라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의 뚜껑이 세게 닫혔다.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고"

제임스가 굳은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

"그 개같은 년만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느낌이니까"

그 날 이후 제임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에게서 더 이상 착하고 순수한 청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루 아침만에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배신을 당한 사람은 이렇게 되는걸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 같이 가자. 역까지 배웅해줄게"


"드디어 복귀했구만, 모스 경사"

"네. 전쟁은 끝났으니까요"

"허, 하지만 여기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테리 경위는 파이프를 물고 서류 몇 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서류에는 몇 명의 남자들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혀있었다.

"1년 전 러시아에서 벌어진 혁명이 이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지"

"공산주의자들 말씀이십니까?"

"BSA 공장 노동조합 구성원 중 몇명이 공산주의자라는 첩보가 들어와있어. 자네가 그들의 감시 임무를 맡아줘야겠네"

"흐음, 알겠습니다. 뭐 다른 추가 정보는 없습니까?"

"추후에 정보가 들어오는대로 바로 알려주겠네"


"아서!"

경찰서에 막 나오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아... 앨리스..."

평소 같았으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겠지만

며칠 전에 겪었던 일이 생각나서 그녀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무슨 일인데"

"사과 하고 싶어서. 너도 그 꼴을 봤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내 일도 아닌데 나한테 무슨 사과를 한다는거야"

"그게... 너희가 전쟁터로 떠나고 나서 2년이나 됐었잖아..."

"너무 외로웠어..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을 만나게되서.."

"아, 됐다. 넌 지금 그게 변명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니?"

"....."

앨리스는 고개를 땅으로 푹 숙였다.

"그 때 들키지 않았으면 영원히 제임스를 속일 생각이였겠지"

"그건..."

"하아... 넌 씨발 그냥 제임스를 배신한거야"

"제임스는 어디에 있어? 집에 없던데..."

"크흠.. 더 이상 버밍엄에 없지. 어제 떠나버렸으니까"

"뭐? 어디로 갔"

"그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

"....."

"아무튼 간에... 나도 이번에 너한테 실망 많이 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앞으로 마주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그럼..."

제임스가 버밍엄을 떠났다는 것과 내가 절교 선언을 한 탓일까.

나중에 경찰서 정문 앞에서 경비를 서던 순경에게 듣기론

앨리스는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몇 분이나 서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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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랑 상관 없는 일이지..."

제임스는 식사 자리 내내 이런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서... 런던엔 얼마나 머물 예정이지?"

"한 일주일 정도. 그 사이에 자네 화물 문제도 처리해야되고"

"음, 숙소는?"

"동생 집에서 있을거야. 

"그럼 해결됐구만. 자,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구"

"그러지"

"여기 있는 동안은 언제든지 내 사무실로 놀러와도 돼"

"그래. 조만간 방법을 찾아서 방문할게"

나와 제임스는 악수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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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악!!"

늦은 밤, 버밍엄에 있는 BSA 공장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애,앨리스.. 도대체 나한테 왜..."

"전부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어도 지금 이렇게 되진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제발 날 풀어줘... 우리 그래도 예전엔"

"닥쳐!"

앨리스는 비쩍 마른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의자의 묶여있던 남자는 충격으로 인해 옆으로 넘어졌다.

"끄어어...."

"앨리스 양. 저희 왔습니다"

남자 두 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아, 여기입니다"

앨리스가 쓰러져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이 자는 BSA의 회계 담당자로, 지난 2년 간 장부를 조작하여

공장 노동자들의 월급 일부를 몰래 자기 주머니로 넣었습니다"

말을 마친 앨리스가 가방에서 두툼한 노트 하나를 꺼내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노트를 건네받은 중년의 남성은 안의 내용을 찬찬히 읽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구만. 이 자는 죽어야 마땅해"

"잠, 잠시만요! 저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증거가 이렇게 뻔히 있는데 거짓말로 얼버무리려 하다니!"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중년의 남성에게 물었다.

"대충 석탄 더미에다가 묻어버리면 돼, 그럼 앨리스 양. 일이 끝마쳐지면 다시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두 남자는 다시 공장 밖으로 나갔다.

남자들이 나가자마자 앨리스는 단도 하나를 꺼내들었다.

"야이 썅년아! 네가 그런거지! 네가 조작한거..."

비쩍 마른 사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칼날이 목에 푹 박혔다.

앨리스는 목에 박힌 칼을 옆으로 계속 죽죽 그어나갔다.

칼질을 할 때마다 피가 사방으로 팍 튀어나갔다.

칼날이 지나간 틈 사이로는 피가 끓는 소리가 나왔다.

"꼬로로록-"

사내가 점점 정신을 잃어갈때 앨리스가 사내의 귀에 속삭였다.

"맞아... 내가 장부를 조작했어..."

"근데 이렇게 안하면... 내가 널 죽일 명분이 없잖아?"

"널 죽여야 내가 그에게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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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는 언제 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