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재현한 고려 후기 개경의 모습.


개경은 고려의 수도로, 중간에 강화도로 잠깐 수도를 옮겼던 기간을 제외하면 400년 넘게 고려의 수도로서 기능했습니다. 고려는 화려한 문화와 국제 무역으로 명성을 떨쳤던 국가고, 당연히 개경 또한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개경이 마냥 기와집과 높은 건물이 즐비한 도시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 대도시가 대부분 그랬듯, 빛과 어둠이 모두 공존했습니다.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개경을 방문합니다. 서긍은 고려를 떠난 후 개경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그림과 글로 남기는데, 이를 《선화봉사고려도경》,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그림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글들은 남아있는데, 현재 개경의 과거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수도 개경을 원시적인 민가가 가득한 어지러운 도시로 묘사했습니다.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여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성읍조 민가

서긍에 의하면 개경 일반 서민들은 벌집과 개미 구멍 같은 작은 원시적인 주거지에서 낙후된 생활을 했습니다. 서긍이 묘사한 개경의 민가들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는 언급으로 보아 흔히 움집이라 불리는 수혈식 주거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수혈식 주거는 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그 위를 풀이나 초가로 덮은 움집 형태의 집입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원시적이라는 단점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움집, 즉 수혈식 주거를 찍은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museum.go.kr)


       

안성 만정유적공원에 조성된 고려시대 수혈주거유적의 모습. 보다시피 땅과 구멍을 파고, 구멍에 기둥을 설치한 후 그 위에 풀이나 초가를 얹었다. 벽과 칸이 없는 반지하 초가집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편하다. 저 조그만 공간에 일가족이 다 살았다. 사진 출처


이만배에서 〈우리 건축 이야기〉를 연재중인 작가가 트위터에 올린 초가집과 수혈식 움집 비교 그림. 출처


개경에 이렇게 수혈식 주거가 많아진 이유는 좁은 지형과 난개발,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인구입니다. 개경은 후대의 조선 한양보다 면적 자체는 컸지만, 평지의 면적이 좁아 대도시를 꾸리기에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경에는 인구가 너무 많았습니다. 개경의 원래 인구, 지방에서 상경한 인구, 그리고 멸망한 발해의 유민까지 유입되어 수용 가능한 인구를 한참 초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 예로, 명종 8년인 1178년 개경 원주민들과 청주 출신 개경민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청주 출신 사망자의 수가 1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지방에서 상경한 개경 인구가 상당히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 개경의 지도. 성 내에 구릉이 많고 평지의 면적이 좁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고려 개경의 그래픽 복원도. 북쪽의 송악산과 사방을 둘러싼 산지 사이의 평야 지대가 좁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고려개경지리정보'에서 재공하는 일제강점기 개경 지도와 성곽 표시. 형성된 시가지의 범위가 좁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개경은 거주지로 쓸만한, 즉 시가지로 조성 가능한 평지의 면적이 좁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인구가 많아진다면 도시가 포화 상태에 이를 수 밖에 없는 태생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세 개경의 인구는 최소 10만에서 많게는 50만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개경 땅으로 수용 가능한 인구수를 초과한 수치입니다. 어찌나 인구가 많은지, 고려사 권128 열전 권제 41 반역 정중부 이광정 조를 보면 어떤 사람이 길가에 집을 짓자 정존실이 길이 좁아진다는 이유로 그 집을 철거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개경은 집을 지을 곳이 없어 길가에 집을 지어야 할 정도로 인구 밀도가 빽빽했습니다. 


집의 수요는 많은데 땅은 좁다면, 당연히 그 땅에 지어지는 집값은 폭등하게 됩니다. 고려 개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벼슬살이를 하는 관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고려사 권121 열전 권제 34 효우 문충에는 충숙왕 때 문충이라는 사람의 일화가 실려있습니다. 그는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영통사 근처에 살았는데, 모친의 봉양을 위해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30리를 현대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11㎞ 정도 되는데, 실제로 개경 동북쪽에 있는 개성성균관을 기준으로 영통사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면 9.7㎞ 정도가 나옵니다. 문충은 이 거리를 걸어서 왕복했습니다.



구글 지도로 계산을 하면, 개성성균관에서 영통사까지는 차로 13분, 도보로 2시간 9분이 걸린다고 나옵니다. 문충이 개경에 머물지 않고 본래 집에서 출퇴근을 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추측컨대 돈이 없어 개경에 집을 구하지 못한 탓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이 남긴 기록 또한 개경의 집값이 굉장히 비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로 쓰입니다.


平生借屋稀黔突 / 평생 남의 집 빌려 살아 굴뚝 검은 적 드물어

衰老還鄕欲掛冠 / 노쇠하매 벼슬 버리고 고향엘 가고 싶구나

— 《목은집》 목은시고 제11권

前若貧居後富居 / 전에 가난했던 사람은 뒤에 부자가 된다

人言此語定非虛 / 사람들의 이 말은 정히 허언이 아니거니

莫嫌借屋頻移徙 / 남의 집 빌려 자주 이사하는 걸 꺼려 말라

— 《목은집》 목은시고 제19권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지배계층의 일부였던 이색조차 자기 집을 개경에 소유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남의 집을 빌려 자주 이사다닐 것을 권유하기까지 했습니다. 문충과 이색의 사례는 당시 지배계층이나 관리들 중에서도 비싼 개경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당시 개경의 집값은 상상 이상으로 비쌌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려 명종 때의 사람 노극청의 아내는 형편이 어려워 은 12근에 집을 팔았습니다. 무신정권 집권기 정존실은 붉은 허리띠를 만드는 장인 언광의 집을 은 35근의 값을 주고 사려고 했습니다. 충선왕은 은 50근으로 안향의 집을 구매한 다음 이를 권준에게 주었습니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고려시대 개경의 집들은 은으로 거래되었는데, 이는 지배계층과 부유층에게는 아무 부담이 되지 않았겠으나 일반 서민이나 가난한 관리들에게는 부담이 컸을 겁니다. 이처럼 개경의 집값이 비쌌던 것은 땅은 좁은데 인구는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지인 개경 시가지에는 더 이상 집을 지을 공간이 없고, 그렇다고 기존의 집을 사자니 돈은 없고. 결국 개경의 일반 서민들은 시가지에서 사실상 쫓겨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려 중기 문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그 산기슭에 잇달아 지은 천문(千門)·만호(萬戶)의 집들은 마치 고기 비늘이 겹친 듯 즐비하구나"라는 구절이 등장해 당시 개경 산기슭까지 민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지에서 구릉과 산기슭으로 내몰렸으니 당연히 주거의 형태는 단순하고 원시적으로 변해갔을 겁니다. 서긍이 본 개경의 원시적인 민가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로 형성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1920년의 개성시 전경.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참고로 이 당시 개성의 인구는 약 4만 6천명이었다. 고려시대 개경의 인구는 '최소' 10만으로 추측된다. 4만 6천명으로도 시가지가 이토록 꽉 차는데, 10만이 거주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처럼 개경의 인구 밀도가 빽빽하고 산기슭에까지 낙후된 주거지가 마구 형성되고 있는데도, 고려의 지배계층은 도시를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주거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시 고려도경의 기록으로 돌아가면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廣化門)에서 봉선고(奉先庫)까지에 긴 행랑집 수백 칸을 만들었다. 이것은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려서 사람들에게 누추함을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성읍조 국성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ㆍ'광덕(廣德)'ㆍ'흥선(興善)'ㆍ'통상(通商)'ㆍ'존신(存信)'ㆍ'자양(資養)'ㆍ'효의(孝義)'ㆍ'행손(行遜)'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시장 거리나 민가는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뿐이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성읍조 방시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일반 서민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한 것을 가리기 위해 긴 행랑집 수백 칸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외국인의 기록이라 100%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서긍이 언급한 경시사에서 흥국사 다리까지는 당시 개경의 시전들이 밀집한 번화가였습니다. 당연히 이곳에 조성된 행랑집들은 장사를 목적으로 개설된 시장일 수 밖에 없고요.  따라서 서긍은 개경의 시장 행랑을 보고 백성들의 누추한 주거지를 가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시설물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려사》는 개경의 시전행랑들을 장랑(長廊)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구글에 長廊을 검색하면 위와 같은 이미지들이 뜬다. 당시 개경은 시전 거리를 따라 위와 같은 긴 시전행랑들이 길게 좌우로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종로에 복원된 조선시대 한양 시전행랑의 일부. 출처


그럼에도 서긍의 해당 기록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번화한 시장의 행랑들을 조금만 벗어나도 바로 낙후된 주거지나 황폐한 빈터가 보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려 정부가 개경 중심부를 벗어난 곳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행랑 바로 너머에 방치된 낙후 주거지를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서긍은 경시사에서 흥국사 다리까지 민중들의 누추한 주거지를 가리기 위해 긴 행랑집 수백칸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지도 속 노란색 원이 경시사가 있던 곳이고, 분홍색 원이 흥국사가 있던 곳이다.


반면 귀족들은 사치와 호화를 누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화려한 고려의 귀족·불교 문화는 대부분 지배계층이 향유하던 것입니다. 개경의 인구 밀도가 빽빽하여 서민들의 주거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귀족들은 거대한 저택을 지었습니다. 다시 고려도경의 기록으로 돌아가실까요.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양쪽과 국상(國相),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성읍조 누관

해당 기록에 등장하는 누관은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든 누각 형태의 건축물을 뜻합니다. 서긍은 중국인이니 중국에 존재하는 누관들과 고려 개경의 건물이 비슷하게 생겼기에 누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겁니다. 참고로 중국에 존재했던 누관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고려 개경에 이와 똑같은 모습의 건축물이 있었을 확률은 적지만, 서긍의 눈에 고려 개경의 건물 일부가 자기 나라의 누관과 비슷하게 생겼기에 그대로 누관이라는 단어를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하간, 저런 건물과 비슷한 건물이 개경에 많았다는 뜻입니다.


서긍은 당시 세계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송나라 사람입니다. 그런 송나라 사람의 눈에도 지배계층, 부자들이 건설한 개경의 '누관'들은 사치스러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서민들이 구릉과 산기슭으로 내몰리고, 한쪽에서는 귀족들이 누관을 건설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개경에는 거대 사찰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러한 절들과 지배계층의 저택들이 당시 고려 개경의 한구석을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보이게 만들었을 겁니다.


서긍은 선의문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관이 하나씩 세워져있다고 기록했다. 서긍이 통과한 선의문은 지도 속 주황색 지점, 즉 황성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황성에는 황궁과 정승들의 거주지가 있어 기와집이 많고 화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빨간색 점은 개경의 시전들이 모여 번화한 상업거리가 형성된 개경의 중심지 중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중성의 남쪽 문인 남대문이 세워졌다.


책 《한국생활사박물관》 7권에 실린 고려 개경의 상상화. 서긍이 '누관'이라고 표현한 2층 누각 건물과 사찰의 탑 및 복층 기와집 건물들이 눈에 띄인다.


이만배에서 〈우리 건축 이야기〉를 연재중인 작가가 트위터에 올린 12세기 중엽 고려 개경의 서민 거주지역 상상화. 아래에는 서긍의 표현대로라면 민가 거주지를 가린 행랑들이 있고, 그 너머로 산기슭과 구릉에 원시적 형태의 수혈식 주거와 초가집들이 난립해있다.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7권에 실린 개경 그림과 〈우리 건축 이야기〉를 연재 중인 작가가 올린 개경의 민가 그림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전세계의 여느 중세 도시와 마찬가지로, 개경에는 지배계층의 화려한 주택과 궁궐, 사찰이 가득했고,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좁은 개경 시가지에 집을 얻지 못하고 구릉과 산기슭으로 쫓겨난 서민들의 수혈식 주거 밀집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무신정권기를 거치며 더 심해집니다.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은 궁궐보다 거대한 호화 주택을 짓기 위해 개경 백성들의 민가를 폭압적으로 철거하고 빼앗았습니다.  고려사와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을 보면, 후대의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배계층의 호화스러움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최충헌이 일찍이 활동(闊洞) 집을 지으면서 다른 사람의 집 100여 채를 부순 뒤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데 힘써, 그 집터의 길이와 폭이 몇 리가 되어 대궐과 비슷하였다. 또 북쪽으로 시전(市廛)과 마주하는 곳에 별당을 짓고 십자각(十字閣)이라고 불렀다.

— 《고려사》 제129권, 열전 제42권, 반역열전 최충헌

최이가 인근의 가옥 100여 구(區)를 점탈하여 구장(毬場)을 세웠는데, 동서로 100여 보(步)나 되고 평탄하기가 바둑판과 같았다. 격구를 할 때마다 반드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물을 뿌려 먼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후에 또 인가를 허물어서 구장을 넓히었는데, 앞뒤로 점탈한 것이 무려 수백 집이나 되었다. 

— 《고려사》 제129권, 열전 제42권, 반역열전 최충헌조 최이

누각 위는 손님 1천 명을 앉힐 수 있고 누각 아래는 수레 1백 대를 나란히 놓을 만하다. 그것은 새가 날아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릴 만큼 크다. 푸른 구슬로 꾸민 기둥에 옥신[玉舃]으로 밑을 받쳤으며, 양각(陽刻)한 말[馬]이 마룻대를 등에 짊어지고 머리를 치켜들어 끌어당긴다.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이 나무로 조각되어 그 자세를 나타내는 것은 건축이 생긴 이래로 아직까지 없었던 일이다. (중략) 누각 남쪽에는 격구장(擊毬場)을 설치하였는데, 길이가 무려 4백여 보나 되고 평탄하기가 숫돌 같으며, 주위에 담을 둘러쌓았는데 수 리에 뻗쳤다.

— 《동국이상국집》 제24권, 최 승제의 대루기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최충헌은 황궁인 만월대에 버금가는 거대 호화 저택을 짓고, 개경의 한복판인 시전에 십자각이라 불리는 별당을 지었습니다. 후대의 최이는 1천 명을 수용 가능한 누각을 짓고, 길이가 무려 4백여 보에 이르는 거대한 격구장을 지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개경의 민가 수백채를 허물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의 화려했던 귀족 문화는 이처럼 지배계급의 폭주가 불러운 결과물이었으며, 집을 뺏긴 서민들은 가뜩이나 좁은 개경 시가에서 쫓겨나 산기슭과 구릉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십자각의 형태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완주 송광사 종루. 위에서 봤을때의 모습이 열 십(十)과 같다 하여 십자각이라 불렀다. 최충헌이 지은 십자각은 이보다 훨씬 거대하고 화려했을 것이다.


2012 MBC 드라마 <무신>에서 재현한 고려 개경의 격구장. 최이가 지은 격구장은 민가를 헐어 증축하고 길이가 수백 보에 이른다는 언급으로 보아 이보다 훨씬 길고 컸을 것이다.



2012 <무신> 촬영을 위해 MBC가 용인대장금파크에 조성한 '최우사택'. 실제 고려 지배계층의 저택들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서긍이 목격한 개경의 낙후된 민가 거주지가 조성된 이유를 두고 '인구 폭증', 집값 상승', '지배계층의 폭주'라고 분명하게 명시한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정된 땅에 인구는 많고, 그 상황에서 지배계층은 가뜩이나 좁은 땅에 거대한 저택들을 연이어 지어대니 갈 곳 없어진 일반 서민들이 구릉과 산기슭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런 현상은 고려 개경에서만 발견되는게 아닙니다. 훨씬 후대인 일제강점기 때 각 도시의 인구가 폭증하자 집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토막이라 불리는 수혈식 주거를 짓고 '토막촌'을 형성했습니다. 


대한제국 혹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토막촌의 사진.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1910년대 수혈 주거의 모습. 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개경에 난립했던 수혈식 주거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고려 개경이 과연 언제까지 이처럼 어지럽고 낙후된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시기의 도시 개발 관련 기록은 지극히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하나 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시죠.


왕이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선의문(宣義門) 안의 빈 땅[閑地]에 길을 따라 기와집을 지으라고 하였다. 또한 5부(五部)의 민가는 모두 기와를 덮으라고 하고 개인이 사사로이 기와 굽는 것을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 《고려사》 제33권, 충선왕 원년(1309년) 8월 신해(1일)

이때가 되면 개경에 산재한 원시적 수혈식 주거는 다수 사라지고, 기와집의 비중이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개경의 인구는 여몽전쟁을 거치고 나서도 여전히 많았고, 주거 환경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 차원에서 각 도시에 기와를 보급하고 가옥의 크기를 규제한 것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글 출처: https://blog.naver.com/jurassicgump/222953533314



원글 내용에서 지적했듯이, 이전 왕조인 신라의 서라벌이나 이후 왕조인 조선의 한성에 비해서 개경의 평지 면적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 같음. 인구는 계속 불어만 가는데 민가를 지을 땅이나 돈은 없으니, 백성들은 산기슭으로 쫓겨나 움집이나 지으며 살아야 했던 거임... 고려시대의 건축이 조선시대보다 크고 화려했다는 얘기는 상류층이 주로 살았던 시가지에나 해당할 뿐이지, 평민들의 주거 환경은 그나마 제대로 된 초가집에서 살 수 있었던 조선시대가 훨씬 나았다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