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북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 탈북한 고영환.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최후를 생중계로 보며 ‘우리나라에도 저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될 텐데..’ 라고 말했다가 평소 그와 사이가 안 좋았던 직원이 이를 밀고했고, 평양에서 소환 명령이 내려지자 탈출했음. 


지인들을 통해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아프리카 친구가 ’지금 너에게 최선의 선택지는 남한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설득하여 대사관을 통해 탈북함. 원래 그는 남조선만큼은 절대 안 가겠다고 했다고 함. 




그는 평양외국어대학 불문과를 나왔고, 어느 날 김일성의 통역관이 감기에 걸려 급하게 대체인력으로 투입됨. 

그를 처음 본 김일성은 ’불어 하는 놈들은 왜 다 저렇게 말랐어?!’라고 핀잔을 주는 듯 했지만 그 다음날에 그에게 홍삼 열 뿌리를 선물로 주었다고 함. 

그리고 실제 첫 통역을 한 날, 김일성이 그에게 ‘동무는 프랑스에서 유학했는가?’라고 물었고 ‘아닙니다. 평양외국어대학 나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함. 

이를 들은 김일성은 ‘국산이구만 기래’ 하곤, 김영남 외무상에게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도 이렇게 외국어를 잘 하는데, 왜 동무는 매번 외교관들 유학보내게 달러를 주라고 하는거야?‘ 라며 혼냈다고 함;;


그리고는 ’고영환 동지는 국내에서 공부했음에도 외국어를 잘합니다. 외교관들의 모범으로 삼도록 해야겠습니다‘라는 친필을 써 주었고,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고 하지. 






서울에 온 후에도 계속 뻣뻣하게 굴던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안기부 요원은 남산타워나 서울 백화점 등을 구경시켜 주었음. 

그러나 해외 각국을 다니고, 파리 샹제리제의 백화점도 가 본 그에게 서울의 풍경이나 백화점은 흥미가 없었지. 



그는 ’됐고, 신림동 달동네 가봅시다‘라고 말했음. 

상경민들이 몰려 비참하다고 들었던 신림동에서 한국의 민낯을 보려고 한 것이지.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에 홀로 앉아 있는 할머니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가난한 집에 냉장고나 컬러 텔레비전이 있어서 놀랐다고 함. 그는 ’할머니 댁이 북한 안전부장(경찰서장) 집보다 살림이 더 좋네요‘라고 하니 할머니가 재미있어하며 상을 차려 주었는데, 쌀밥 먹고 반찬도 괜찮아서 놀랐다고…





안기부 요원은 이제 63빌딩을 가자고 했는데, 그는 동두천을 가자고 함. 


그러나 ‘미군의 식민도시‘로 알고 있던 동두천은 생각보다 멀쩡했음. 

그는 안기부 요원에게 ‘미군 구두를 닦는 소녀나,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아이들에 없다’라고 하니 안기부 요원은 어이없어하며 한참 옛날의 이야기라고 답했음. 




고영환은 이제 청계천에 가보자고 함.  

북한에서 청계천은 판잣집과 거지들의 빈민촌으로 유명했음. 


그러나 생각보다 멀쩡했고, 안기부 요원은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냐’며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고 함ㅋㅋㅋㅋㅋ





이때부터 그는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음. 

그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고 함. 나중에 수소문한 결과 그의 어머니는 수용소에 끌려가던 중 사망했다고… 

외교관이 되었던 날, 본인 아들이 외교관이 됐다며 기뻐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켠이 아프다고 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