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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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 났어요."





초등학교 5학년의 여름.


시골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얀붕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됐다."





얀붕이의 아버지의 단답을 끝으로 차 안에는 오직 차창을 오르내리는 와이퍼 소리만이 맴돌았다.




얀붕이가 어머니의 장례를 끝마치고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돌아가신 얀붕이 어머니의 사인은 병이었지만,


처를 잃은 얀붕이의 아버지와 장인어른 댁의 사이는 퍽 어색해졌다.




얀붕이가 이토록 반강제로 시골에 내려가고 있는 것 역시 관계 유지의 윤활제 역할이었다.





"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어라.


심심할 테니까 너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휴대 전화나, 뭐가 됐든."




얀붕이의 아버지가 눈짓으로 조수석 앞의 캐비닛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내 얀붕이가 캐비닛에서 아버지의 카드를 꺼내어 들었다.




인터넷 결제를 위해서는 카드 비밀번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 옆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알고 있을까.




그야 아버지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최신형 휴대폰 개통도 인터넷 결제도, 열 두 살의 어린 아이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얀붕이는 이를 구태여 지적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자의 사이가 그러했다.





재미 없는 시골도,


어머니의 장례 이후 처음으로 마주쳐야 할 외가 친척도,


자신을 두고 일을 핑계 삼아 서울로 올라가 버릴 아버지까지도.




얀붕이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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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오- 휘휘오- 휘이---





대청마루에 큰 대자로 누운 얀붕이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며칠째 절부조였다.





시골의 외가는 낡은 한옥집이었다.


크기만 컸지, 한여름의 뙤약볕을 상쇄해줄 에어컨 따위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했다.





생을 마감하기 일보직전인 선풍기만이 얀붕이의 발치에서 덜덜대었으나,


척 봐도 제 출력을 내고 있지는 않은 듯 보였다.




그마저도 원래는 창고에 박혀있던 물건일 터였다.




손자가 왔다며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외할머니가 창고에서 꺼내어주신 선풍기.




끝이 해진 행주로 정성스레 선풍기 날개를 닦고 있던 외할머니의 뒷모습은 왜 자꾸 떠오르는지,


누워있는 얀붕이의 마음 한 구석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죽은 마을.


얀붕이의 눈에 이 곳은 죽은 마을이었다.


마치 얀붕이의 발치에 놓인 낡은 선풍기처럼, 움직이고 있으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마을.




시골집 대청마루 너머로 보이는 눈부신 녹음은 타고 남은 숯빛으로 화(化)하여, 어린 얀붕이의 동공에 담겼다.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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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조기 고등어 갈치 오징어--- 세일---"








시골에 내려온지 나흘째 되는 날.


얀붕이는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파란색 트럭이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 걷자, 시장이나 읍내라고 생각될만 한 거리가 나왔다.




시장에서는 비료 냄새와 생선 비린내 따위가 섞여 코를 찔렀지만,


그럼에도 얀붕이에게 있어 시간이 멈춘 듯한 외가에 비하면 퍽 나았다.





주머니에 있는 아버지의 카드로 뭐라도 사 먹어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시장 한 구석의 광경이 얀붕이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꼬질꼬질한 여자 아이와 그 앞에서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어른.




저보다 두어 살은 적어 보이는 소녀의 갈색빛 볼을 타고 눈물이 방울지며 떨어졌다.






'다솜이네 청과물'



청과물집 자식일까.






단순히 자식 교육이 엄한 것치고, 어째서인지 소리치고 있는 아줌마보다 자식 쪽이 더 꼬질꼬질했다.








"40만원 돈이야. 넉 달이 넘었어!!


너네 집 찾아가서 할머니 외상 받으러 왔어요, 하면 아프다고 모르쇠!


치매 어르신이라고 다 떼어먹고 그러면 난 어디서 돈을 받아야 쓴다니-!!"






'저 집 딸은 아닌가 보다.'




그제서야 안붕이가 대강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들려오는 말을 듣자하니 여자 아이 집의 외상이 오래도록 이어졌고, 이를 갚지 못한 듯했다.




'시골에는 외상이라는 게 진짜 있구나.'








"죄송합니다... 흐윽... 다음달에 할머니 통장 들고 올게요..."




"저번에도 그 소리! 오천원 만원 든 통장 들고 오면 동네에선 내가 나쁜 년이야!! 도대체 언제 받냐구, 언제!!!"




청과물집 아주머니가 답답한 양 연신 가슴을 내리쳤고,




소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제 신발 끄트머리에서 눈물로 흐려진 시선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거 얽혀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얀붕이는 조용히 소녀를 지나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얀붕이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짧은 읍내는 어느새 끝나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죽은 마을.




  '카드 되나요?'




           스피오-휘휘오-




'카드 되나요?'




     '오천원, 만원. 사십만원 돈.'




    '조기고등어갈치오징어-'




        죽은 마을.






죽은 선풍기.












할머니 통장. 죽은 엄마.




















"에이씨..."








얀붕이가 제 뒷머리를 거칠게 휘적이고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점점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의 고무신이 문제였을까.


얼마 안 가 얀붕이는 꼴 사납게 철푸덕 넘어졌다.




축축하고 더러운 시장 바닥에 손을 짚어 찝찝했지만, 다시 일어나서 내달렸다.




그러지 않으면 더 쪽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우리도 이렇게 여기저기 떼먹히면 힘들어. 경찰서로...-












뛰면 뛸수록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청과물 아주머니의 소리가 얀붕이에게 가까이 들려왔다.




모르긴 몰라도, 바로 앞에서 듣는 입장에서는

길거리에서 넘어진 것은 따위로 보일 정도로 쪽팔리지 않을까.


아니면, 소녀는 진즉에 쪽팔린 것을 따위로 생각하고 있을까.




뭔가 소리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일부러 얀붕이는 더 크게 발을 구르며 달렸다.








시장 사람들의 시선이 얀붕이에게로 몰렸다.




그렇게 얀붕이가 기어코 온갖 시선을 받으면서 청과물 집 앞에 멈춰섰다.








그렇게 청과물 아주머니의 시선조차 멈춰선 얀붕이에게 고정되고,

유일하게 소녀의 시선만이 아직 바닥을 향하고 있을 때.


얀붕이가 말했다.





막상 멈춰서서 입을 열자니 달려오느라 숨이 찼던 나머지, 썩 멋진 모양새는 아니게 되었다.









"헉... 허억, 헉... 카드도... 되나요..."







"..."








얀붕이가 숨을 고르며 제 이마에 묻은 땀을 손으로 훑었다.





그리고는 시장 바닥의 검댕이 묻은 얼굴로


약간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사... 사십만원?"














그제서야 소녀도 얼굴을 들어 얀붕이를 보았다.






미안하게 됐다.


백마 탄 기사가 있다면 이토록 거지꼴이길 바라진 않았을텐데.


얼굴에는 검댕이 잔뜩 묻었고, 시장 바닥의 진흙 따위에 쓸리며 까진 무릎.


제 앞의 소녀가 나중에야 알게될 지는 모르지만, 갚아줄 돈도 내 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가 보기에 시골 촌동네에서 이 정도면 퍽 유쾌한 날이 되었다 싶어, 얀붕이가 얀순이를 향해 웃어보였다.










소녀는 그렇게 얀붕이를 만났다.





어느 가게 앞이었는지, 소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제 손을 잡아 이리저리 이끌던,

또 다른 작고 늠름한 손의 온기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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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크으으응-!!"




소녀가 제 콧물을 얀붕이의 옷소매에 문질렀다.





청과물 집에서 외상을 갚고 이동할 때만 해도 얀붕이가 소녀를 이끌었을 터인데,


달아놓은 외상을 전부 결제하고 난 지금은 소녀가 얀붕이의 옷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모양새가 되었다.





얀붕이는 소녀가 꼭 잡고 놓지 않고 있는 제 소매를 한번 흘깃 내려다 보고 난 후에야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걸로 다 갚았지?"



"크으읍-- 응..."



"후아아..."





시장 밖 논밭이 즐비한 거리에 멈추어선 얀붕이가 날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얀순. 정얀순..."




장부에 달아놓기라도 하는 줄 아는 것일까. 어깨를 움츠리며 답하는 소녀를 보며, 얀붕이가 쓰게 웃었다.




"정얀순... 그럼 얀순이는 몇 살이야?"



"열 살."



"난 김얀붕이고, 열 두 살이야. 내가 두 살 오빠네."




이른 만남치고는 다소 늦게서야 듣게 된 정보에 얀붕이도 뒤늦게 제 소개를 했다.




예상대로 제 나이가 더 많다는 생각에 우쭐해지려던 얀붕이였지만,


곧 생판 남의 외상값을 갚아주느라 백 만원도 넘는 금액을 썼다는 사실이 다시금 얀붕이의 입꼬리를 내리게 만들었다.




"좋은게 좋은거지."




어차피 아버지의 돈으로 해결을 본 내용.


얀붕이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보다는 지금까지도 얀순이가 제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얀붕이는 이 어색한 관계의 개선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아까 들었는데, 할머니랑 살아?"



"응."



"부모님은..."




이 화제는 꺼내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어버린 후였다.




"-안 계시겠구나."





꼬옥-


얀붕이의 소맷자락을 쥔 얀순이의 손에 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얀붕이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도 그래. 한두 달 전에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셨어.


아빠는 외할머니한테 나 맡기고 도시로 올라갔고."




형성할 수 있는 공감대의 주제로는 좀 부적절한가 싶어, 얀붕이는 괜히 발끝으로 시골길의 모래를 긁었다.





"오빠도... 엄마 없어...?"


"그래, 이제 우리 똑같지?"





일전의 선행이 아예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물어오는 얀순이에게 얀붕이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응."




저도 모르게 얀순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심심하니까, 이제 뭐든 좀 하자!"




얀붕이는 제 소매를 잡고 있던 얀순이의 손을 빼내어서 깍지를 끼고 마주 잡았다.


그리고는 목적지도 없이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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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왔어요---"




얀붕이는 이제 얀순이네 집을 제 집 드나들 듯 하였다.





어떤 때는 혼자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뒷바라지를 하는 얀순이를 도왔고,


함께 장을 보거나 또 시간이 날 때면 함께 계곡에 가서 물장구를 쳤다.




처음에는 얀붕이의 눈치를 보던 얀순이도 어느샌가 또래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다스러워졌다.




얀붕이가 오면 가장 먼저 도도도 달려와서는 얀붕이의 품에 안겼고,


함께 있을 때에는 한시도 얀붕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져 얀붕이가 돌아갈 때면 울상을 짓고는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내일 또 올게. 내일은 된장찌개 끓이는 법 알려줘. 그 전에 같이 장도 보고 오면 되겠다."



"웅..."




그럴 때면 얀붕이는 이런 식으로,

얀순이가 오늘의 헤어짐보다는 내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얀붕이 역시도 말 잘 듣고 착한, 귀여운 동생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오늘 헤어져도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제 마음을 달래었다.





서로의 어머니처럼, 혹은 부모님처럼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얀붕이는 포장이 덜 된 모래길을 걸으며 다시금 제 외할머니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고무신 틈에 밟히는 시골길의 모래가 처음 왔을 때보다 조금은 덜 거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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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가 돌아가고 나면, 얀순이의 집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불을 꺼놓았음에도 고장난 구식 형광등만이 이따금씩 탁탁 소리를 내거나,


쌔액쌔액 할머니의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두 살 터울의 오빠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의 부재로 하여금 매일 얀순이에게 상실의 아픔을 남겼다.





낡은 집의 어둠이 저를 좀먹으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얀순이는 할머니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곤 했으나,


어느샌가 유일한 쉴 곳이었던 할머니의 품에서도 얀순이의 빈 자리는 채워지지 않게 되었다.





얀순이는 조용히 할머니의 이불에서 나와


얀붕이가 앉아 있던 대청마루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이미 얀붕이의 온기는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이렇게 하면 조금은 오빠가 함께 있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얀순이는 얀붕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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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비가 심하게 오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었다.




"놀러 왔어요---"




탁탁 우산을 털며 얀순이네에 찾아온 얀붕이에게 여지없이 얀순이가 뛰어 왔다.




"얀순아. 오빠 잠깐 물 좀 털고-"






푹 젖은 우비를 벗으며 얀붕이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 때.


콰당 하는 소리를 내며 얀순이가 넘어졌다.



"야! 얘는 그러니까 왜 뛰어서..."




황급히 우비를 벗고 얀순이에게 다가가려던 얀붕이가 잠깐 주저했다.


어딘가 쎄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보니, 바닥에 엎어진 얀순이의 얼굴이 새빨갰다.





"어... 야, 얀순아."





바닥에 넘어진 채로, 저를 부르는 얀붕이의 목소리에 얀순이는 엉금엉금 기어 얀붕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 빠다... 얀붕오빠아..."



"잠깐, 잠깐 가만히 있어봐. 잠깐."





얀붕이는 우산을 내던지고 급히 얀순이에게 다가가 이마를 만져 보았다.




얀붕이는 흔히들 만화나 소설 등의 매체에서 사람 몸이 불덩이 같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야속하게도 지금에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체온계 없이도 얼핏 알 수 있을 정도로 얀순이의 몸이 뜨거웠다.




제 몸이 지금 어떤 꼴인지는 알고 있는 건지,


얀순이는 제 이마에 닿은 얀붕이의 손의 감촉이 무척이나 좋은 듯이 이마를 비벼대고 있었다.



"하아... 하아... 가만히 있어... 오빠가, 오빠가 어떻게든 할게...!"



'119... 119에 전화하면...'





얀붕이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빗방울이 잔뜩 묻은 손으로 119에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도무지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얀튜브가, 인터넷이 안될 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깡촌 시골이라 기지국까지 전파가 닿질 않았다.





"오빠 손... 시원해... 가지마아..."





얀순이가 돌연 스마트폰을 만지던 얀붕이의 손을 낚아채서 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볼까지 뜨거웠다.




얀순이가 제 손을 낚아채 간 탓에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얀붕이는 이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데도 안 가. 오빠 여기 있어..."






얀붕이는 급하게 얀순이를 어깨에 들쳐 업고는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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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






굵은 빗줄기가 얀붕이의 얼굴을 연신 두들겼다.



우산은 등에 업힌 얀순이에게 씌워주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얀붕이에게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거의 막아주지 못했다.








"도와주세요---!!! 누구 없어요---!!!!"








얀붕이는 빗속을 뚫고 달려가며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악을 질렀지만,


폭풍우 치는 시골길에는 사람 한 명 다니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얀붕이는 문득 얼마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얀붕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지워냈다.





"얀순아. 오빠 여깄어. 자면 안 돼?


오빠가 한 계란말이 먹어야지... 오빠 이제 계란말이 잘 해..."




얀붕이는 빗속을 달리면서도,


한 번이라도 대답이 들려오기를 바라며 미친듯이 등에 업힌 얀순이에게 말을 걸었다.





천둥번개 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얀붕이의 귓가에 시익-시익- 등에 업힌 얀순이의 숨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그렇게 제 귓가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의지하며, 얀붕이가 빗속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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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하면 안 오려고 했다."




"..."





응급 병동임에도, 시골 병원의 복도는 적막했다.


얀붕이는 팔에 링거를 꼽은 채로 병동 복도에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렇게나 오래 비를 쫄딱 맞고 뛰었으면 없던 열도 오르는게 정상이지.


네가 아프다니 안 올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근데."






얀붕이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라도 내 보려는 듯 눈을 찡그리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





결국에는 분을 삭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친구 외상값을 내준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으마.


친구 할머니의 수술비? 현실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보냐."






"아버지는 변호사잖아요. 돈도 잘 벌잖아요."





얀붕이는 감정을 죽이려 애쓰며, 쥐어 짜내듯 말했다.







"너랑 네 친구 봐주신 의사 선생님께 들었다.


네 친구 할머니, 어차피 올해를 넘기시긴 어려울 거라고."






얀붕이가 제 입술을 짓씹었다.


수술이 필요한 상황조차 아닐 거라고, 얀붕이도 내심 알고 있었다.





얀순이네 할머니는 하루의 태반을 이불에 누워 지내셨고, 말수도 거의 없었다.




용변을 보러 갈 때마저 얀순이의 도움을 받았고,

식사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이 용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마지막 남은 가족을 보내야 할 얀순이에게 얀붕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얀순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럼, 그럼 어떡해요. 얀순이... 부모님이 안 계셔요. 할머니만 계신데, 돌아가시면 진짜로 얀순이 혼자 남는단 말이에요."





얀붕이의 팔에 이어진 링거줄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떨렸다.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다. 상속을 받아서 살든, 국가의 지원금을 받아서 살든 할 일이야. 거기에..."






얀붕이의 아버지가 뒷말을 삼켰다.



정확히는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적막한 응급 병동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익숙한 목소리, 얀붕이가 재빨리 링거를 끌고 얀순이의 병실 방향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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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사랑하는 다섯살배기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절규가 이러할까.


고통으로 말미암은 비명이라기보다 제 정신이 현실에 온존함을 원망하는 비명이었다.





얀붕이의 발걸음이 얀순이의 병실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할지, 소녀의 절규는 얀붕이의 모습이 그 눈동자에 담김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멈췄다.





얀붕이는 한 번 한숨을 내쉬고, 얀순이에게 달려가서는 그저 괜찮다고 읊조렸다.





"괜찮아. 오빠 여기 있어. 괜찮아..."



"응. 오빠. 오빠. 어디 갔었어? 오빠."


"오빠 아파? 주사. 이거."


"헤헤... 나한테도 오빠랑 똑같은 거 있다. 오빠오빠."




얀순이는 얀붕이의 모습을 눈에 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명을 멈추고

제 꼴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링거가 꽂힌 얀붕이의 팔을 어루만지며 재잘댔다.




그러면서도 저를 안아주는 얀붕이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드는 듯 얀붕이에게 안겼다.




재잘대던 얀순이의 말수가 적어지고, 둘 사이의 대화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얀순이의 손이 서서히 얀붕이의 등을 타고 기어 올라오더니, 기어코는 얀붕이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 오빠."






얀순이는 제 신체의 모든 부분을 얀붕이에게 밀착시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러 줄기의 전류가 차례차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얀순이가 얀붕이를 온 몸으로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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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의 아버지가 병실 밖에서 탄식을 뱉었다.


아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종류의 덫에 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들을 안고 있던 소녀의 눈빛은 그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바로 얼마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가 이러했을진대.





지독히도 그치지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얀붕이의 아버지가 제 눈가를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