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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니까 역사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현실의 세계, 실제의 역사에서 설정을 빌려와 가상의 세계에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장점은?

 
 "일정한 현실성을 얻게 된다. 판타지를 쓰다 보면 제멋대로 하기가 쉽다. 마법이 특히 그렇다. 내 작품에서는 주류 판타지에 비해 마법의 강도가 낮다. 그런 면에서 난 톨킨의 예를 따르고 있다. 반지의 군주를 보면 중간계는 아주 마법적인 세계이며 경이롭고 신비한 세계지만, 정작 마법은 별로 안 나온다. 간달프가 주문을 외우거나 파이어볼을 던지거나, 그런 건 나오지 않는다. 싸움이 나면 간달프는 검을 뽑는다. 그의 마법은 불꽃놀이를 하거나 지팡이가 빛나거나 하는 사소한 데에 쓰인다. 마법 반지들도 그렇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반지라면서 정작 하는 건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것 뿐이다. 아무리 지배력이 큰 물건이라지만, 프로도가 반지를 끼면 나즈굴에게 명령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마법은 그 실체를 알기 어려워서 신비한 것이다. 그런 마법이 좋은 거 같다. 

 

삼류 판타지 소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마법을 너무 강력하게 설정한다는 것이다. 군대 전체를 몰살시켜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와 마녀와 마도사가 있는데, 거기다 또 군대를 만들어놓는다! 말도 안 된다. 만 명 병력을 눈깜짝할 새에 죽일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누가 만 명을 모으려 하겠나. 

 

이런 작가들은 결과를 감안하지 않는다. 이런 강력한 마법사들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또 왕과 영주들을 만들어놓는다. 당연히 마법사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까? 힘이 있다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역사와 도무지 맞지 않는 것들에도 대답하고 싶었다. 가령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정략 결혼이 항상 나오는데, 항상 정략 결혼이 있고 소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구간 소년과 도망치고... 현실에선 그딴 거 없었다. 중세 천 년 간 귀족들 사이에 수천 수만 수십만 건의 정략 결혼이 있었고 다들 그렇게 살아 갔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뭐 딴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마구간 소년과 도망치진 않았다. 

 

또 판타지에 대해 내가 항상 가진 불만은, 무능한 작가들은 중세의 계급사회를 차용한다. 왕족이 있고 귀족이 있고, 상인 계층과 평민이 있고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당돌한 평민 소녀가 잘생긴 왕자를 혼내는, 그런 장면을 넣는다. (현실이라면) 잘생긴 왕자는 당돌한 평민 소녀를 강간해 버리거나 창고에 가둬 사람들이 오물을 던지도록 했을 것이다. 계급구조는 강력한 위력이 있다. 계급제는 그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 주제를 알고 자기 계층의 의무와 혜택을 알도록 교육받는다. 누군가가 구조에서 벗어나려 하면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걸 반영하고 싶었다."




판타지 세계관에서 중세 고증을 따를 필요는 당연히 없음

하지만 중세의 사회 구조, 생활 양식은 그대로 따왔으면서 그에 상반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거임


중세 고증을 철저히 따지는 건 엄밀히 말하면 중세의 세계관을 따왔으니까 그 세계관에 어울리는(흔히 말하는 핍진성이 있는) 일들만 일어나야 한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