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생각나서 연락해봤어 - 1
철없던 20대 초반의 시기에, 나는 철없다는 말로는 포장할 수 없는 탈선을 겪었어. 막 성인이 된 나이에 갑작스럽게 겪은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끔찍한 하루하루를 보냈지.
가장 역겨운 건 나 뿐만 아니라 네 삶까지 망가뜨렸다는 점이야. 너는 혼자 남은 내가 걱정된다며 집을 옮기고 동거하며 집안일을 모두 해주고 생활비까지 벌어서 보태줬지만, 정신이 나가버린 나는 네 헌신마저 값싼 동정으로 취급했지. 꼴보기 싫으니 꺼지라고 내뱉은 폭언에도 너는 상처받은 내색 않고 자리를 피해줬고, 이미 질렸으니 헤어지자는 말에도 애써 웃으며 진정이 되면 다시 얘기해보자고 말해줬지.
나는 네 타들어가는 속을 외면하고 내 불행만 한탄하고 있었어.
여느 때와 다를게 없는 날이었어. 가끔은 밖에 나가자는 널 무시하고, 오빠한테 잘 어울릴것 같다며 네가 사온 옷을 밖에 던져버리고 하루종일 술병을 비웠지. 역겹게도 네가 차려주는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먹으면서.
너는 쥐어짜듯 걱정하는 목소리로 오빠가 이러면 안된다고, 계속 이러면 부모님도 많이 걱정하실 거라고 말했어. 화가 치밀어 올라 손찌검을 하자, 충격받은 듯 멍한 얼굴로 한참동안 가만있던 네가 생각나.
그 날 드디어 질려버린 네가 나를 떠날 줄 알았어. 한참동안 울던 너는, 내게 다가와 활짝 웃으면서 이걸로 내 기분이 풀린다면 좋다며 배시시 웃었지.
그날 밤 편지를 쓰고 조용히 나왔어. 이런식으로 이별을 통보해서 미안해. 더 이상 네 곁에 있을 수 없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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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나와서 길거리를 떠돌았어. 숙식이 되는 노동을 찾아봤고, 운이 좋게 야간 물류일을 얻게됬어.
밤낮이 바뀐 생활은 힘들었지만, 더 이상 부끄러운 인간이 되기 싫어 이악물고 버텼어. 잔업이나 특근도 가리지 않고 지원하니 조금씩 돈이 모였어.
망가진 몸도 조금씩 재활을 시작했어. 몇 분 달리는 것도 힘들어 헉헉대며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심장이 터질것 같아도 계속 했지. 그간 추하게 쪘던 살도 조금씩 빠지더라.
모르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 꺼내기 힘들었지만,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밝게 인사하며 다녔어.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아주던 사람들은, 몇달이나 계속하자 활짝 웃으며 인사말을 받아줬어.
조금씩 미래를 위해서 공부를 하기로 했어. 밤낮 바뀐 생활과 노동으로 지친 몸이지만 억지로 집중했어. 충실한 나날을 보낼때마다 죄책감을 조금씩 잊을 수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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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 공시 붙었다며? 축하한다 야. 출근은 이번달 까지만 하는거야?"
"사실 오늘까지만 하고 관두려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간 덕분에 분위기 좋았는데 조금 섭섭하네. 자주 연락해라."
"그럼요 형."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제대로 기능하는 모양이야. 그럭저럭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일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왔어. 자연스럽게 술자리까지 이어졌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그간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해봤어. 몇몇은 반가워 해주고, 몇몇은 다음에 보자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너에게만은 아직 연락하지 못했어.
이제와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까? 네게는 끔찍한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어쩌면 내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기억이 되살아나 기분 상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그간 연락을 피해왔지만, 3년도 넘게 지난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 이기적인 생각으로 너에게 전화를 걸었어.
"여보세요? 얀순이 번호 맞나요?"
당황한 숨소리만 들렸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라는 걸 알 수 있겠더라.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맞다는 대답이 나왔어.
"얀순이 맞아? 얀붕이 기억하지? 이상한 얘기하려는건 아니고...그냥 오랜만에 생각나서 연락해봤어."
"아직도 거기 살아? 괜찮으면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볼래?"
...
가까운 술집에서 너를 다시 만났어. 기억이 맞다면 살이 약간 빠진 것 같은데, 거의 변하지 않은 얼굴이더라. 멋쩍게 웃으며 그동안 고생을 많이해서 좀 늙었지? 라고 물어보자 너는 절대 안 그렇다며 고개를 붕붕 휘저었어. 그대로 남아있는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더라.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니, 요즘은 뭐하고 지내느니, 애인은 없느니. 그런 실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술잔을 비웠지. 넌 술이 많이 약했으니까 천천히 마시도록 배려해줬어. 싫다는 너에게 억지로 술을 먹인적도 있었지, 그 시절 일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쁜 기억은 사라지지 않나봐. 처음엔 잔뜩 긴장한 것 같던 너도 술이 좀 들어가자 많이 편해진 것 같아서 어렵게 입을 열었어.
그냥 옛날 이야기나 하러 온 건 아냐. 내가 저질렀던 잘못을 하나하나 전부 사과하고 싶었어.
"그때 정말 미안했어.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아무 대답 없는 네게 숨김없이 내 잘못을 낱낱히 말했어. 짜증난다며 너에게 폭언을 내뱉은 일, 네가 벌어다준 생활비를 탕진하고 협박한 일, 날 걱정해준 네게 손찌검을 하고 편지로 이별 통보를 했던 일, 그런 이야기 모두.
묵묵히 들어주던 너는 다 잊었으니까 진짜 괜찮다고, 오빠도 더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얘기해줬어.
오랫동안 마음속에 들러붙은 무거운 짐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고개를 숙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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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절부절 못하던 네가 위로해준답시고 정신없이 술잔을 비웠더니, 애써 멀쩡한 척 하던 네가 갑자기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더라.
예전에 살던 집에 그대로 산다고 했으니, 비밀번호도 아니까 데려다주고 올 생각으로 널 업고 집에갔어. 침대에 널 눕혀주려고 불을 켰는데, 얘기하기 힘들지만...솔직히 좀...많이 놀랐어.
벽에 한가득 내 사진이 붙어있더라. 탁자에는 좋았던 시기에 내가 써준 손편지들이 빼곡히 차있었고. 심지어 내가 입던 옷이나 칫솔까지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했지.
외로움을 많이 타던 너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헤어진지 벌써 3년도 더 된 일이니까 많이 혼란스럽더라. 내가 좀 많이 취해서 헛 것을 보고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 뒤쪽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려서, 돌아보자 잠에서 깬 듯 네가 당황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더라.
"어...얀순아, 이건 대체.."
추궁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기 힘든 상황이라 네개 캐물었어. 술때문에 새빨개진 얼굴로 멍하니 네가 말했지.
그 때 정말 헤어지기 싫었지만 오빠의 생각이 그렇다면 보내주기로 했다고. 헤어진 사이라도 잊기 힘들어서 그랬다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고 얘기하자, 오빠에게 피해를 주는것도 아닌데 나 혼자 추억하는게 뭐가 나쁘냐며 드물게 화난 모습이었어.
빨개진 얼굴로 씩씩대는 널 보면서, 드디어 네게 진 빚을 갚을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게 말했지.
"너만 괜찮으면...우리 다시 만날래?"
"어..?"
"이번엔 정말 잘해줄게. 저번에 못해준 만큼 사랑할게. 이번엔..."
하고싶은 말이 많이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서 말을 끝내지 못했어. 진짜 밤새도록 펑펑 울더라.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새근새근 잠든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이런 모습을 좋아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