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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왔어요.”

 “실례합니다.”

 살며시 노크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와 본 VIP 병실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을 만큼 넓었다. 안에서는 얀순이 어머니가 사과를 깎고 계셨다. 얀순이는 내 얼굴을 보고 작게 손을 흔들다가, 얀진이를 보고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머, 얀붕이랑 얀붕이 친구니?”

 “안녕하세요. 저는 얀붕 선배님과 같은 학교인 1학년 김얀진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다.”

 얀진이는 평소 모습과는 달리 공손한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명문가의 규수처럼 정돈된 몸짓이었다. 나는 아주머니께 다가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주머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응. 어쩌면 얀순이가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잖니.”

 병문안을 하러 같이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내 연락을 듣고, 아주머니는 흔쾌히 얀진이의 방문을 허락해 주셨다. 아주머니가 거절하셨다면 몰라도 이미 허락을 내리신 이상, 더 이상 내게는 얀진이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저기…….”

 겁먹은 토끼처럼 가만히 있던 얀순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선배님. 선배님은 원래 절 모르셨으니, 편하게 대하셔도 돼요.”

 “아……응.”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얀순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은 미리 말해놓은 뒤였다. 하지만 나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말해봤자 피곤한 일만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깐 둘이서 사과 좀 먹고 있으렴. 얀붕아, 잠깐 괜찮니?”

 “아, 네.”

 아주머니가 할 얘기가 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둘만을 남겨놓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지만, 병실에 들어온 얀진이의 모습을 보고 과도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을 뿐, 기본적으론 착한 아이 같았다.

 “천천히 얘기하고 오세요.”

 얀진이가 싱긋 웃으며 나와 아주머니를 배웅했다. 의심했던 내가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한 표정이었다.



 “그래, 얀붕아. 요즘 학교생활은 어떠니?”

 “별일 없죠, 뭐. 하하…….”

 우리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나서, 적당하게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안부를 묻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지신 것 같았다. 얀순이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분명했다.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네.”

 아주머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씁쓸하게 웃으셨다. 불편한 침묵이 조금 흐르고, 마침내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정말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싶구나.”

 “왜, 왜 이러세요!”

 갑자기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얀순이가 어제보다 정말 많이 안정됐어. 다 네 덕분이란다.”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럴 리가 있니. 옛날부터 넌, 항상 얀순이를 지켜 줬어.”

 아주머니는 회상에 잠기신 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뇌리에 어린 얀순이가 우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다 옛날 일이에요.”

 아버지의 불륜, 그리고 이혼.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했던 그녀에게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사건이었다. 떠나가던 아버지를 붙잡던 얀순이의 절박한 모습은, 나에게도 꽤 씁쓸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부탁이 있단다.”

 “전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주머니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천천히 입을 여셨다.

 “부담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얀순이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렴. 너 말고는 다 싫다고 하는구나.”

 혹시나 하고 매니저와 아이돌 동료들, 그녀와 조금이라도 가까웠던 사람은 모조리 연락해 봤지만, 결국 그녀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 역시 나밖에 없었다. 즉, 나에게 막중한 책임이 부여된 셈이었다.

 “어서 우리 딸이, 나를 다시 떠올려 줬으면 좋겠어.”

 “아주머니…….”

 “소중한 딸이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더구나…….”

 나는 어제 병실에 들어서기 전에 했던 걱정을 떠올렸다.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잊히는 아픔. 감히 그 아픔의 크기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울 텐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조용한 대기실에는 시계의 초침 소리와 아주머니의 흐느끼는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아주머니는 내게 얀순이를 맡긴 후, 저녁에 다시 오겠다며 집으로 잠시 돌아가셨다. 나는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린 후, 다시 얀순이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앗, 선배. 오셨네요.”

 다시 병실로 돌아오자, 얀진이가 능글맞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가려고?”

 “네. 제가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정말 순수하게 병문안을 위해서였나?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 했던 것은 모두 귀여운 장난이었을까? 여전히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속 편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래, 조심히 가.”

 “네, 선배. 내일 봐요. 얀순 선배님도, 몸조리 잘하세요.”

 “……”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는 얀진이를 얀순이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따로 얀순이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얀진이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넓은 병실에는 또다시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학교는 잘 다녀왔어?”

 “응? 어, 어. 점심은 먹었어?”

 “응. 맛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먹긴 먹었어.”

 “아, 그랬구나. 잘했네.”

 “……”

 “……”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소개팅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녀처럼 어색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네…….’

 처음에는 서먹해진 이후로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 생긴 어색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억을 잃은 뒤의 얀순이는 내가 알던 얀순이와는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소꿉친구 특유의 익숙함은 사라지고 묘한 감정만 남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를 대하는 것이 유난히 긴장되었다.

 “혹시 너 자신에 대해 더 생각난 건 없어?”

 “아니. 어제부터 계속, 너에 대한 생각뿐이야.”

 “그, 그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에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그녀의 진실한 표정과 합쳐져 그 파괴력은 배가 되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네가 아이돌이었다는 건 기억나?”

 “……응.”

 “그럼, 왜 아이돌이 됐는지는 기억나?”

 그녀가 과거 했던 생각들을 천천히 되짚어본다면,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해본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상상 이상의 대답을 내놓았다.

 “너.”

 “응?”

 “네가, 아이돌이 좋다고 해서였어.”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언제?

 “어릴 때, 네가 말했잖아. 아이돌이 좋다고.”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사고를 당하고 없던 기억이 생겼……을리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특출날 정도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단지 다른 아이들이 좋아했던 만큼만 좋아했을 뿐인데.

 ‘겨우 내 말 한마디 때문에, 그렇게 노력했다고……?’

 물론 타고 난 외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아이돌이라는 것은 보통 노력 없이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그나마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 없이,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옛날에 내뱉었던 한 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았다니.

 ……도대체 왜?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여자랑은 어떻게 친해졌어?”

 내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로부터 조금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를 데려온 것이 알게 모르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아, 얀진이? 딱히 친하지도 않아. 그냥 같은 학원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야.”

 “그래? 정말이야?”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내가 알던 예전의 얀순이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알잖아, 나 거짓말에 약한 거.”

 “하하, 그랬었지.”

 그녀는 옛 추억을 떠올린 듯 쿡쿡 웃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오랜만이어서였는지, 내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마치 어린 시절로,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왜?”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된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나름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그녀의 속마음에 대해 무지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너, 요즘 들어서 계속 날 피했잖아. 맞지?”

 “윽…….”

 하긴 대놓고 피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지금의 그녀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은 말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역시 나는 거짓말에 약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진짜 이유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내가 예전에 너한테 고……백 했었잖아? 기, 기억나지?”

 “아, 응…….”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불완전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차였던 사실을 확인 사살해야만 한다니. 간신히 아물어 가던 상처를 후벼파는 기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나도 그 이후로 많이 생각했어. 고백해버린 이상, 내 존재가 혹시 너한테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나 역시 그녀와 멀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니까.

 “그래서 조금 거리를 두려고 그랬던 거야. 그리고 괜히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너한테도 민폐고.”

 그래서 길고 가늘게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설령 잠시 서먹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네가 싫었던 적은……한 번도 없어. 정말이야.”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모두 꺼내고 나자,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그녀를 좋아했던 마음을 마침내 놓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해.”

 “응?”

 그녀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수긍이 아닌 사과였다.

 “두려워서 그랬어.”

 자그마한 두 손을 꼭 쥔 얀순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해 보였다.

 “만약 우리가 사귀다가……그러다가 혹시라도, 싸우거나, 멀어지게 되면.”

 “……”

 “그러면 네가 날 떠날까 봐……그래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봐……엄마 아빠처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까 봐…….”

 나는 흠칫했다. 역시 그때의 아픔은, 얀순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그게 너무 무서웠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짊어졌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똑같이 서로를 잃는 게 겁이 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떤 또 다른 사실을 시사했다.

 ‘그러면, 얀순이도, 조금은 나한테 마음이……?’

 “미안해. 그치만, 그치만…….”

 실낱같은 가능성을 의식하게 된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너랑 멀어지는 게 싫어. 네가 다른 여자애랑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싫어. 혼자서 너를 생각하면서 끙끙 앓는 것도 싫어.”

 그녀의 본심이 담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내 마음에 마구잡이로 꽂혔다.

 “그러니까, 제멋대로인 말이지만, 너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말하고 싶어.”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고동이 붙잡은 손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벅차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내게 속삭였다.

 “좋아해, 얀붕아.”

 그녀의 긴 머리칼이, 빛나는 눈동자가, 수줍은 얼굴이, 따스한 노을에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