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얼추 봐도 값비싼 물건들로 도배되어 있는 방.


일부러 보란 듯이 전시된 것만 같다.


돈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몸을 움직여 보려 하지만 앉아있는 의자와 손발이 수갑으로 이어져 있었다.


누가 꾸민 짓이지?


오사장인가?


아니면 그때 그 건달 놈들?


직업상 원수를 만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쓸데없는 추측은 포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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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5년 전부터 갑자기 나타나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체불명의 도둑.


그 사람이 훔친 현금만 하더라도 섬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그 섬에 작은 도시를 지을 정도라고 한다.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엔 누군가가 청소라도 한 듯 작은 먼지 한 톨조차 없었고 그 어떠한 경비 장치도 그 사람의 범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의 모습.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가난과 폭력에 시달려 죽음의 문턱 코앞을 서성이던 나는 지나가던 신사가 던져준 만 원짜리 지폐에 구원을 받았고 그때부터 돈과 명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


남들이 공부를 하며 친구들과 추억을 쌓아갈 때 나는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훔친 물건을 품에 안고 밤을 새우는 인생을 살아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은 쌓여가고 기술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버텨왔으며 그 밑바닥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빗물이 새는 반지하를 구입하였고 그때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점점 더 대범해져 갔고 나의 범죄에서 실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성인이 되던 해에는 세계를 돌며 보석과 보물들을 훔쳤고 언론에서는 나를 J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미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돈을 손에 쥐고 있던 나는 이제 명예를 원했다.


개미 새끼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은행을 털고 최고의 경비를 자랑하는 박물관의 작품들을 훼손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나는 세계 최고의 보석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켓츠아이알렉산드라나이트.


이것만 있으면 나는 역사상 최고의 도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만 뒤룩뒤룩 찐 부자, 오사장의 집에서 손쉽게 보석을 훔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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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잠시 후 내 눈앞에 문이 열린다.


이중으로 된 문이구나.


저 문으로 탈출할 수는 없겠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끝이 없는 어둠 속을 바라보는 듯한 짙은 검은색을 띠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쭉 뻗은 다리와 잘록한 허리의 매혹적인 모습


김얀순 형사.


고작 보잘것없는 경찰에게 잡히다니, 그것도 저 녀석한테.


꽤나 오래전부터 알게 된 신입 경찰.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지만, 백치 같은 모습을 보이며 매번 실수투성이인 어리바리 신입.


경찰들에겐 골칫덩어리였겠지만 나에겐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정체를 숨기고 다가가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줬다.


서로의 관계가 두터워지자 그녀는 나에게 고민거리들을 상담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 나는 경찰들의 정보를 빼 올 수 있었다.


내에겐 그저 애완 앵무새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그녀가 나를 잡았다니, 분명 크나큰 실수를 남긴 게 분명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그녀.



"자기야, 드디어 일어났구나. 너무 오래 쓰러져 있어서 혹시 잘못된 건 아닌가 걱정했어."



다짜고짜 의자에 묶인 나를 껴안는다.



"쓰러져있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음식 가지고 올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문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녀.


그사이 나는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도저히 탈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금 만난 그녀의 반응을 보니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진 않는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라니?


그녀와 나는 그렇게 달콤한 관계가 아닌데.


뭐,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그녀를 잘 구슬리면 탈출할 수 있을 거 같아.


곧이어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오는 그녀.



"미안해 자기야.. 지금은 이런 거밖에 없다.."



그녀가 들고 온 접시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가 들어있었다.



"후~ 후~ 자, 자기야 아 해."



나는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순순히 받아먹었다.



"아이 착해. 어때 맛있어 자기야?"



"응, 엄청 맛있어.."



"아.. 귀여워~"



나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짜증 나는 년, 여기만 탈출하면 두고 보자.



"그런데 얀순아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음.. 그건 비밀! 아, 나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보석은 어디다 숨겼어 자기?"



"어?"



역시 이미 다 알고 있구나, 원하는 건 보석인 거 같고.



"그건 왜? 그 보석이 갖고 싶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왜 보석의 위치가 알고 싶어?"



"그 보석 때문에 오사장이 난리가 났어. 죽는 날까지 자기를 찾으려고 귀찮게 굴 거야."



"괜찮아. 절대 안 잡힐 자신 있어."



"내가 싫어. 자기랑 나랑 결혼해서 알콩달콩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자꾸 벌레들이 방해할 게 분명해!"



이건 또 뭔소리야.



"그럼 내가 보석을 원래 장소에 되돌려 놓을 테니 어서 풀어줘."



"안돼. 자기는 거짓말을 잘하니깐."



자꾸만 제자리걸음을 하고있는 대화 내용에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날 풀어줄 거야?"



"내가 보석을 받고 경찰에게 넘긴 후 돌아와서 결혼을 전제로 뜨겁고 찐한 키스를 해주면 풀어줄게."



"그럼 지금 날 풀어줘. 만족할 때까지 키스해 줄게."



"보석을 받은 후에."



"절대 안 잡힐 자신 있다니깐. 왜 훔친 걸 다시 돌려줘?"



"그니깐 아까 말했잖아 자기야. 왜냐하면..."



"아이 시발."



결국에는 폭발해버린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자기 자기.. 결국에 보석을 받으면 냅다 튈 거잖아. 역겨우니깐 그냥 솔직하게 말해."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 진다.



"아.. 그렇구나.. 역시 말로는 진심이 전해지지 않아.."



그녀가 내 무릎 위에 앉아 나를 마주 본다.


도망가지 못하게 내 목을 두 팔로 감싸 안는 그녀.



"뭐 하는..."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혀.


그녀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내 입술을 넘겨줘야 했다.


그녀와 내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거친 키스에 호흡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푸하! 어때? 이제 내 진심이 전해졌어?"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나는 재빨리 폐 속에 산소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순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니까."



마치 소중한 인형을 대하듯 살포시 나를 안아온다.



"하아.. 하아.."



"사랑해, 얀붕아."



희미한 의식 속에서 들린 뚜렷한 한마디.


김얀붕.


내 이름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내 이름을 말해준 기억이 없다.


여태껏 가명을 사용해 왔기에 그 누구도 모르는 나의 진짜 이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어떻게 알아낸 거야..!"



"간단해. 스토킹했거든."



"거.. 거짓말하지 마. 내가 고작 스토킹 하나 못 따돌릴 사람 같아?"



"하아, 자기는 내가 아직도 의욕만 넘치는 무능한 경찰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한숨을 내쉰다.



"뭐..?"



"자기는 이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희대의 괴도이고."



무슨 소리야.


지금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있는거지?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내가 언제까지 어리바리나 까는 신입일 리가 없잖아.


이제 나도 꽤 주위에서 우러러보는 위치까지 올라왔어. 그런데 자기는? 그동안 뭔가 발전한 게 있어?


내가 없는 자기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기가 왜 여태껏 경찰에게 잡히지 않았을 거 같아?"



"증거가.. 없으니까.."



"그래 맞아! 그럼 사건이 일어나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제일 먼저 달려오는 게 누구지?"



"경찰.."



"딩동댕! 그럼 마지막으로 경찰인 내가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와서 하는 짓이 뭐게?"



말문이 막혔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여자한테 놀아나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외국까지 나가서 도둑질을 할 줄은 몰랐어.. 거기서도 뒷수습을 하느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그럼.. 그럼 왜 처음부터 날 잡지 않은 거야..?"



"응?"



"내 정체를 안 날. 왜 그날 당장 날 잡아가지 않은 거냐고."



"당연하잖아. 좋아하니깐, 사랑해서 미칠 것 같으니깐. 자기를 감옥 같은 더러운 곳에 집어넣긴 싫었어.


그래서 내가 빨리 힘을 키워 높은 직위를 얻게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지. 새로운 팀을 꾸려서 자기를 잡아 해외로 도주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상황이 조금 귀찮게 됐어.


오사장이 사람을 풀었거든 이젠 내 힘으론 수습하기가 힘들어졌어. 그러니 빨리 보석의 위치를 알려줘.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할게."



"싫어."



역대 최고의 괴도로 남을 이 몸이 이런 치욕을 듣다니.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나는 머릿속이 추잡해지기 시작했다.



"너는 나를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죽는 꼴은 보기 싫겠지, 그렇다면 나를 도와. 어서 여기서 내보내 주고 내가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협력해."



나는 지금 저 녀석에게 나라는 존재의 인질을 잡고 있다.


유리한 쪽은 나야.



"자기는 지금 이 상황이 무섭지 않은가 보네? 이렇게 묶인 채로 위협당하는 상황이 익숙한 건가? 누굴까, 질투 나게."



그녀가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내려다보고 있다.



"얼른 선택해. 나를 도울래, 죽게 내버려 둘래?"



"흐응, 알았어. 자기가 절대 잡히지 않도록 도울게."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가는 그녀.



됐다.


여기서 풀려나자마자 그 목을 꺾어 주마.



시간이 지나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열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



불안감을 느낀 나는 저항을 해보려 했지만, 손발이 묶인 채로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주사기에 들어 있는 액체를 전부 주입 당한 나는 그녀의 찢어질 듯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다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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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오늘만 몇 번째 쓰러지는 거지?


하도 많이 의식을 잃다 보니 손과 발에 힘도 안 들어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와는 달라진 장소.


이번엔 그냥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하지만 방을 나누는 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모난 공간 안에 상당히 크기가 큰 침대를 중심으로 화장실, 욕실, 주방, 거실이 주변에 배치되어있다.


아무런 구속이 되어있지 않은 것은 확인한 나는 서둘러 탈출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손과 발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손발을 쳐다봤고, 붕대가 감겨있는 내 몸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이불에서 고개만 내밀며 나타나는 그녀.



"일어났어? 어때,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너..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자기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힘줄 끊어놨어."



"너.. 너 이 개새..."



속옷만 입은 채로 나를 강하게 껴안는 그녀.



"하아, 좋다.. 예전부터 계속 이러고 싶었어."



"너.. 너 나를 도와준다면서..!"



"그래, 맞아. 여긴 그 누구도 찾아올 수 없을 거야. 이 장소는 나만 알고 있어. 이제 자기는 절~대 잡히지 않을 거야."



정신 나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는 그녀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자기는 가만히 있어도 돼. 내가 다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줄게. 당분간은 조금 불편하겠지만, 내가 많이 노력할게.


분명 자기도 만족할 수 있을 거야!"



돈, 명예.


심지어 희망까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와.. 자기는 우는 모습도 예뻐."



그녀는 내 눈물을 맛있다는 듯 핥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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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는 J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여기 이렇게 누워있는데, 저것도 그녀가 꾸며 놓은 짓인가 보다.


누군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연다.



"자기야,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나가지고.. 배고프겠다. 금방 밥해줄게!"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시작한다.


금세 요리를 끝마친 그녀가 내 앞으로 음식을 가져온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볶음밥에 케첩으로 커다란 하트를 그려놨다.



"그럼 먹기 전에..."



그녀가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음.. 좋아! 그저께부터 상처가 늘어나지 않고 있네. 기특해 자기야!"



나의 품에 들어와 내 가슴에 얼굴을 문지른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미는 그녀.


나는 생기란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댄다.



"사랑해 자기야."



"나도 사랑해."



나는 그녀에게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