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전편: https://arca.live/b/yandere/9752089


계속해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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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 시점-


여행 15일 차.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불편한 건 여전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입소 후 훈련소에서 한달을 버텨야만 했던 전례가 힘들지않게 만들어 주었다.


일과가 전투 후 휴식 혹은 이동이라는 게 전부일 뿐, 게다가 노가다에는 익숙해져 있었기에 별 문제는 없다.


처음엔 식겁하게 만들었던 마물들의 공격도 이제는 아기들의 재롱이나 다름 없었으니,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 여행을 하다보니 어느덧 인간과 마족들의 경계까지 오고야 말았다.


"용사님, 지금부터는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물들은 지능이 낮아 상대하기 편했겠지만 마족들은 지능이 뛰어난 강적입니다."


지능이 있다는 건 그들도 전략이나 함정같은 걸 사용해서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


앞으로의 전투는 까다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이리나는 마족들과 전투해본 적 있어?"


"예? 네, 꽤 있는 편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언 해줄 생각이야?"


지능이 있다면 이전처럼 구두로 조언해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들의 귀에 조언이 같이 들어가면 이를 대처하려고 할 것이고,


또한 은신해있던 그녀의 위치까지 발각되어 버리며 그녀 본인도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내 걱정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그녀는 덤덤하게 해결 방안을 제시해왔다.


'이건 의식 전달 마법입니다, 제 생각을 용사님의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마법에 정통한 마족이라면........"


'현재 이 의식 마법은 제 독자적인 힘으로 강화해 놓았습니다, 마왕이 아니고서야 간섭 또는 감지조차 할 수 없을 것 입니다.'


뭐야, 그게? 그 정도면 사기 아닌가?


가끔 드는 생각하는 거지만 내 조력자의 능력이 너무 밸런스 붕괴급이다.


조언이면 조언, 전투면 전투, 무엇 하나 빈틈 하나 없는 그녀의 실력을 보고나면 그녀 홀로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나 싶다.


굳이 용사를 소환해서 싸우는 것보다도 그녀를 필두로 군대를 만들어 전쟁을 하는 게 마왕 토벌 가능성이 더 농후해보였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왕국 녀석들이 빡대가리이거나 마왕이 압도적으로 강하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


후자라고 한다면 마왕을 이길 수 없을 거 같아서 걱정되기는 하다만 지금 당장은 무리일지 몰라도 미래에는 가능하게 될 터, 


든든한 조력자가 나의 잠재력을 보증해 주었으니, 조급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용사님, 마경으로 가게 되면 마왕성까지는 쭉 야영이 될 것이니 오늘은 이 마을에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쭉 야영이라... 듣기만해도 심신이 벌써 지치는 기분이다.


그러고보니 여지껏 익숙하게 받아들인 탓에 이상하다고 생각못한 게 있었다.


"이리나, 여태까지 왜 불침번 혼자만 섰어?"


지금까지 불의의 습격에서 나를 지켜주느라 제대로된 잠도 못잤을텐데 낮에도 그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다니고 있었다.


"그야, 용사님의 자는 얼굴......이 아니라 용사님이 낮동안 쾌적한 상태로 전투에 임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도에 말을 흘렸던 것 같았으나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그러면 네 수면 시간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잖아? 앞으로는 쭉 야영만 해야하는데."


"괜찮습니다, 마법과 단련으로 강화된 제 정신은 한달동안 잠을 청하지 않아도 멀쩡합니다."


솔직히 그녀의 능력이 무섭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현대에서도 야근할 때 저런 능력이 있었으면 편했을려나?


"아무리 자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나 그래선 안돼, 이제부터 나도 불침번 같이 설테니까 교대로 취침하자."


"괜찮습니다 용사님, 제 편의보다도 용사님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불편해진단 말이지."


"용사님은 평화로운 세계에서 이곳까지 친히 와주신 분, 불침번 같은 건 해본 적 없지 않습니까?"


"있는데?"


"예......?"


쳐들어오는 적도 없는데도 무조건 경계 근무를 서야만 했던 2년이란 비운의 세월을 내 조국의 남성들은 겪어야만 했다.


나라를 위해 경계 서라고 한다면 중지 손가락을 올리겠지만 미모의 여기사를 위해 서라고 한다면.......


솔직히 거부할 남성들이 없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안됩니다! 제 해피 타이...... 용사님의 단련해야할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용사님은 푹 주무셔야 됩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단련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처음으로 이리나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끊임없이 타협한 결과, 딱 한시간만 내가 불침번 서기로 했다.


솔직히 1시간이면 있으나 마나 할 정도였지만, 그녀가 전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용사라는 이유로 이토록 편의를 봐주는 세상이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판타지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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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0일 차.


처음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마왕성으로 가기위해서 필수적으로 지나가야하는 관문을 지키는 수호자 골렘 때문이다.


이 망할 것은 물리 공격이든 마법 공격이든 전부 통하지 소용없다는 위엄을 내비쳤다.


게다가 한방 한방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격을 지치지도 않고 날려 주변 지형을 바꿔버릴 정도,


그나마 속도가 매우 느려 피하기는 쉬웠지만 서로 유효타를 넣을 수 없는 상태라면 체력 소모가 있는 내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나마 내가 믿을만한 희망이라면 이리나의 조언밖에 없겠지만.......문제는 지금 그녀는 도와주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힐긋 쳐다본 이리나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겉으로 보면 평소와 다름없다고 하겠지만 20일 동안 그녀와 함께 여행하며 같은 시간을 보내왔기에,


표정 속에 가려진 그녀의 감정을 얼추 알아낼 수 있었다.


어째서 지금 그녀가 조언하기를 고민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려니 했다.


돌이켜보면 여태까지 그녀의 조언에 너무 의지해온 경향이 없지 않나 싶다.


심지어 내 앞에 있는 골렘은 마왕에게 있어서 정원에 있는 개집이나 지키는 문지기가 아닌가?


조언 하나 없다고 문지기 하나때문에 이리도 쩔쩔매고 있어야 한다니,


이래서는 나 홀로 넘어뜨려야 하는 마왕은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잡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조력자의 도움없이 상대해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한 나는 골렘을 향해 뛰어든다. 


정 모르겠으면 부딪쳐 보라는 말도 있었으니까.


..........


[그워어어어어어!!]


"하아......! 하아.....! 징글징글한 놈."


골렘 하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근 3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싸워야만 하다니.


아무리 노가다나 야근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관문의 수호자는 끈질긴 생명력은 나를 미치고 날뛰게 만들었다.


덕분에 내 몸은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어있었고 힘은 전투로 인해 전부 소모되버리며 몸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쳐버렸다.


"이 앞에 이런 적이 널리고 널린 건가."


불현듯 원래 세상에서 했었던 게임 하나가 떠올랐다.


잡몹들의 공격 한방에 체력의 절반 가까이 깎이고 보스급들에게는 한대만 맞아도 골로 가버리는 게임.


무지막지한 하드코어 난이도때문에 나도 하다가 포기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만,


이 게임에서는 적어도 일시적인 무적 상태가 되는 기술이라도 있었지, 이 세계에서는 그딴 건 존재하지 않았다.


게임보다 하드코어한 난이도를 느끼게 되면서 정말로 나는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이리나의 조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용사님."


"응, 그나저나 이번에는 너도 잘 모르는 적이었나 봐?"


"그게 사실은......."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저 녀석의 약점같은 정보 전부."


"예,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도움을 주지 않아 죄송합니다."


"그래? 그러면 됐어."


"예?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저에게 화내시지 않는 겁니까?"


"내가 왜?"


옛날의 나였다면 당연히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엄연히 다르다.


이미 그녀에게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버렸는데 탓해봤자 뭐하리.


애초에 이리나의 조언도 없이 여행했다면 초반부터 이런 난관들과 끝도 없이 마주하며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그녀의 도움에 감사해서 절을 해도 모자를 지경이다.


"나를 돕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망설였던 거잖아?" 


"어떻게 제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건가요?"


"오랜 기간동안 같이 지내왔으니까 모르고 싶어도 알 수 밖에 없을 걸."


"그...그런가요."


그렇다, 얼굴까지 붉히면서 속으로 기뻐하는 이리나의 얼굴이 매우 귀엽다는 것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녀 본인은 아직도 자신이 무표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안하지만 나 좀 일으켜 세워줄래? 자력으로는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


"용사님......?"


찰나의 순간, 몸이 뚫리는 격통이 엄습해오면서 심장 부근의 뜨거운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무...무슨?"


"용사님!!"


뭔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심장이 들어있는 왼쪽 가슴을 바라보자,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내 심장을 꿰뚫고 있었으니,


원인을 깨닫자마자 목을 타고 역류한 피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며 바닥을 빨갛게 물들여갔다.


"하...하하......"


이렇게 어이없게 죽은 줄은 상상치도 못해 피를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강적을 쓰러뜨리고 지쳐있는 나를 노리는 게 적의 입장에선 당연했는데 내가 안일했던 나머지, 허무하게 당해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로 끝이구나."


점차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나의 인생을 주마등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회색빛 인생.


그나마 평범하지 않은 세계에서 평범하지 않은 여성과 여행하면서 특별해지나 싶었는데, 전부 부질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마지막 여행 덕분에 그리 썩 나쁘지 않은 인생이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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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생의 1일 차.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차린 내가 처음으로 본 풍경은 비교적 최근에 본 적 있었던 방의 천장이었으며,


푹신함이 부족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의 옆, 작은 숨소리를 내는 은발의 여성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용사님......."


원래라면 그녀를 깨워서 상황을 파악해야겠지만 새근새근 잘 자고있는 여성을 굳이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이리나의 찰랑거리며 윤기도 흐르는 은발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으니,


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살며시 그녀의 은발을 만지며 쓸어내려 보기도 했다.


"으응......용사님?"


그 때문일까? 굳게 닫혀있는 성문같았던 이리나의 눈이 천천히 개문되며 그 안에 들어있던 청아한 청색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용사님?"


설마 깨버릴 줄은 몰랐는데.


"조...좋은 아침?"


뭐라고 변명해야 허락도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던 걸 용서해줄까?


"몸은 괜찮으신가요!"


"어? 으응, 괜찮을 거야, 아마도?"


내 대답에 확신이 차지 않은 것인지 이리나는 내게 달라붙어 왼쪽 가슴을 이리저리 더듬었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자 그제야 내게서 떨어져 안심하더니 어느새 조금씩 눈물을 흘리는 중 이었다.


"다행이다......!"


이리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반면, 나는 매우 혼란스러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겠다.


여행 초창기부터 항상 무표정했었던 과거는 없었다는 듯이 현재의 이리나의 표정이나 행동들에서 그녀의 감정을 여실없이 전부 들어내고 있었으니,


사실 내 앞에 있는 여성은 이리나와 닮은 쌍둥이 동생이 아닐까 의심하게될 정도로 그녀의 뚜렷한 감정 표현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호...혹시 이리나가 아닌 다른 사람 인가요?"


이리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차!


처음보는 광경에 그만 나는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던 그녀에게 실례되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빠르게 사과를 해야겠지만 지금같이 여성이 울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사과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으음...말로 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하는 편이 나을려나?


하여 나는 그녀의 몸을 내 쪽으로 땡겨서 끌어 안아주며 지금도 바들바들 떨고있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용사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시 당황한 이리나도 이내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내 품에 몸을 기대어 왔다.


그녀가 좋게 받아들여줘서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야 애매했던 가설 한가지가 확신하게 되면서 떨떠름해졌다.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그녀가 드러내고 있는 행동으로 인해 느낄 수 있었던 점,


바로 이리나의 연심이었다.


항상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더욱 신경써주고 있었으며


들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꾸준히 뒤에서도 몰래 나를 도와주었다는 게 연심의 근거였다.


그나마 내가 용사라는 지위였으니까 이란 반박의 여지도 있었지만 이리나의 눈물에 의해 그 여지도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왕궁에서 떠났을 때부터 나는 모든 이가 나에게 일말의 기대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이 세계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그녀 빼고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기쁘다, 나에게 터무니 없이 아까운 여성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분명 기쁜 일 이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지?"


"아..... 네,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하는 몸, 기쁘긴 해도 이리나의 연심을 받아줄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마음이 더 커져가기 전에 이리나의 몸을 내게서 떼어내며 선을 긋자 그녀는 매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에 맞이할 이별의 순간 때 둘 다 받아들이기 힘들어질 테니까.


"괜찮아, 그것보다도 설명좀 해줄래? 분명 심장을 직격 당한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있는지 궁금해서."


부활시켜주는 주문이라던가 아이템같은 게 있는 걸까?


"혈마법이에요, 용사님이 흘린 피와 제 피를 매개체로 사용해 손상된 심장 부위를 매꾸고 다시 재구축 시켰어요."


부활시키는 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어마무시한 마법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날 기습한 적은?"


방심하고 있었던 틈을 정확히 노린 적이 나를 살리고자한 이리나를 가만히 냅둘 리가 없었다.


"용사님은 기습한 녀석은 고위 마족이였고 제 손으로 직접 존재 자체를 없애버렸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살기가 가득 담겨져있는 이리나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며 내 피부까지 짜릿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분노한 그녀의 손에 처리된 적,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상상조차 못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구나, 내 복수도 대신 해주고 살려주기까지 해주다니 고마워서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네."


버릇처럼 내 손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를 뻗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내 손을 멈춰 세웠다.


그녀와 선을 긋자고 결심했음에도 또 다시 실수를 범하려고 하다니, 계속 신경쓰고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용사님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실 수 있나요?"


"응, 내가 가능한 선 한해서 뭐든지 들어줄게."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않고."


"잠...잠깐?!"


이리나는 허공에 멈춰 서있던 오른손을 끌어 당기며 자신의 볼에 갖다 댄다.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마치 내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맹세합니다, 앞으로 저는 용사님의 뒤가 아닌 곁에서 용사님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맹세를 부디 받아주세요."


멋대로 내 손을 갖다 쓰지를 않나, 멋대로 맹세를 하지 않나, 내 허락도 없이 그녀는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은은한 미소와 굳은 의지가 담겨져있는 청색 눈동자가 그녀를 괘씸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들고 있었으니,


참으로 더럽게 치사한 방법이었다.


"이러면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게 되잖아......"


애석하게도 내 머릿속에 마왕 타도라는 난제 외에도 또 다른 난제가 추가되고 말았다.


마왕을 타도한 뒤에 이뤄질 그녀와의 이별, 어떻게 하면 서로 좋게 끝낼 수 있을까?


아직 전제 조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는데도 벌써부터 고민하게 되니 골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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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 차.


더 이상 몇 일이 지났는지 세지 않기로 했다, 드디어 라스트 보스가 있는 문 앞에 도착했으니까.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였는지 헤아릴 수 없었으나, 1년도 채 지나지 않고 빨리 도착했다고 자부할 수는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내 곁에 든든하게 서있는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나가 없었으면 1년은 고사하고 10년이 지나도 이곳에 도달하기는 커녕 마왕성의 외벽조차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관문 넘어에는 수많은 마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싸워서 이겨내야만 전진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족들에게 있어서 내 힘은 미숙도 아닌 거의 무능의 수준에 가까웠기에, 이리나가 무능한 나 대신에 마족들을 처치해야만 했고.


그때마다 나는 이리나에게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매번 사과했다.


물론, 그녀는 그렇지 않다며 내가 없었으면 힘든 싸움이 되었을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힘으로 보나 마음가짐으로 보나 용사는 내가 아니라 그녀이지 않을까?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다.


"이 문 넘어에 있는 거네, 마왕."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대로라면 마왕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건 용사밖에 없다고 하는데,


나 자신도 못 믿는 내 실력으로 마왕을 쓰러뜨린다니 웃음밖에 안나오는 지금, 그녀는 어떤 심정일까?


아니나 다를까, 이리나도 걱정과 비장감이 섞여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직접 마족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자신만만해하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진 것이리라.


"괜찮을 거야."


나는 살포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기껏 최종장에 돌입했는데 이런 분위기로는 될 수 있는 것도 안될 것만 같았으니.


"지금까지 둘이서 잘 헤쳐왔잖아? 마왕도 우리 둘이서 힘을 합치면 문제 없을지도 몰라."


"용사님... 그렇네요, 분명 잘 되겠죠?"


"응."


시작하기도 전에 절망하는 것보다는 희망을 갖는 게 낫겠지.


아이들에게 산타가 없다고 현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있다며 믿게 해주는 편이 좋으니까.


"가볼까?"


"용사님, 잠시만요!"


"응?"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용사님은 낙담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마지막으로 용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재확인하는 건가?


"응,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담하지 않을 거야."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가보도록 하죠."


"그래."


이리나의 미소를 되찾게된 지금, 나는 확신했다.


마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이든 간에, 내 옆에 그녀가 있는 이상 질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나는 문을 열고 최후의 결전 장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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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스산한 마왕의 방.


넓은 공간과 상당히 길게 이어져있는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며, 계단 끝에는 웅장해보이는 단 하나의 왕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왕좌에 앉아 고고하며 위엄있는 분위기를 뿜어내는 마왕은........


"없어?"


최종 장소답게 처음엔 웅장한 광경을 자랑하는 방이었지만 그 안은 텅텅 비어있다보니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마왕의 부재,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용사의 등장에 도주해버린 것인가.


이 세계로 오고나서 이토록 당황스러웠던 건 이번이 처음 아닐까 싶다.


나도 이 지경인데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비장한 말들을 잔뜩 내뱉었던 내 조력자는 또 어떤 기분일까?


"응?"


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이리나가 나를 지나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리나?"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내 부름에도 아무 말도 없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리나? 뭐하려는 거야....어라?"


이상하다, 언제 그녀의 갑옷 뒤에 붉은 망토가 달려있었던 걸까?


그러고보니 성스럽게 보였던 백금의 갑옷은 어디가고 언제 저런 고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거지?


"음...??"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면 갈수록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간다.


그녀의 머리에 단단하고 커다란 뿔이 생겼으며 그녀의 엉덩이에는 끝 부분이 하트 모양인 꼬리가 달려있었다.


"잠깐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젠장, 이건 환각 마법이다.


역시 최종 보스답게 우리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우리에게 환각 마법을 건 것이리라.


어떻게 환각 마법을 파훼하면 좋은 것일까, 여지껏 한번도 상태 이상에 걸려본 적 없어서 대처법을 모르겠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나 상태 이상 면역........


"그렇다면...?"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보자 어느새 이리나는 처음부터 제 자리였다는 듯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몸이 격하게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닫고 있었던 눈을 뜨자, 그곳엔 청아하던 사파이어는 없었고 매혹적인 루비 같은 눈동자가 대신 자리잡고 있었다.


"윽!"


항상 곁에 있었던 여기사의 정체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마족 그 자체였으며,


여태 봐왔던 그 어떠한 마족보다도 상위의 존재, 지고한 존재이자 나의 목표인 마왕임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소개하도록 하죠, 여는....아니, 저는 역대 최강의 마왕이라고 불리는 이리나 델 프란츠벨크 입니다."


"하...하하하하....말도 안돼."


함께 해오면서 그녀의 힘이 어느 수준인지 잘 알고 있는게 나인데 그녀를 쓰러뜨리라고?


무리, 나와 똑같은 사람이 100명 있어도 절대 무리였다.


"용사님, 많이 당황하셨나요?"


"지금 상황을 보고도 당황 안할 인간은 아예 없을 걸."


"후훗, 그렇네요."


"싸워봤자 내가 질 게 뻔하니까 질문이나 하자, 언제부터야?"


"어떤 걸 말하시는 건가요?"


"언제부터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냐고!"


"용사님과 처음 만났을 때 부터에요."


미치고 환장하겠네, 최종 보스가 처음부터 조력자 행세하면서 뉴비에게 따라붙다니 살다살다 이런 세계는 처음이다.


"용사를 없애기 위해서 왕국을 속이고 기사로서 스파이짓하면서 해왔던 거야? 마왕이 직접?"


"아쉽지만 방금 전 용사님이 하신 예측은 전부 반대에요."


"뭐?"


"용사님을 소환한 왕국은 이미 500년 전에 제가 수중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그러니 사실상 그들은 저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중이었어요."


미친, 그녀의 말에 의하면 처음부터 나의 여행은 마왕에 의해 계획된 연극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같잖은 연극때문에 강제로 끌려온 내 인생은?


"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나를 소환한 거야? 마지막에 이런 반전으로 내 절망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서야?"


"진정하세요, 그런 하찮은 의도로 용사님을 소환하지는 않아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그럼 어디 들어보자, 대체 무슨 대단하신 의도를 갖고 있기에 소환한 거야?"


"제가 용사님을 소환한 이유, 저를 죽여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뭐.......?"


"말 그대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왕에게 죽음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은 용사님 외에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번거롭게 할 거 없이 소환하자마자 죽여달라고 하면 되었던 거 아니야?"


이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이전 용사님은 홀로 골렘과 싸우셨죠? 저를 죽이려면 그 골렘에게 가한 공격보다도 100배는 더 강한 공격을 날려야 제게 상처를 입힐 수 있어요."


"그렇다면 죽기 위해서 같이 여행하며 나를 성장 시키려고 한 거야?"


"네."


내 여행에 숨겨진 의도가 있을 줄 몰랐는데 의도한 내용도 참 상상 이상이었다.


마왕이 자살하기 위해서 직접 초보 용사를 키운다라, 경악을 넘어서 감탄밖에 안나오는 설정이다.


"그러면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계획된 거였어?"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에 심장이 꿰뚫리는 고통, 영원히 잊지못할 고통도 그녀의 계획이였다면 나는 그녀를 원망해야만 했다.


"아니요, 마족과는 어떤 계획도 짜지 않았어요, 제가 죽고싶다고 밝히면 그들은 용사님을 암살해서라도 만류하려 들었을 테니까요."


"대단한 충성심이네, 그런데 괜찮아? 그런 충성심 높은 마족들을 직접 죽여온 거 아니야?"


"괜찮아요, 아첨밖에 할 줄 모르는 자들보다도 제 목적이 더 중요하니까요."


역시 이 여성은 미쳤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느 왕이 자살하고 싶다고 백성들을 모조리 다 학살하겠는가?


"이젠 아무래도 좋아, 아무튼 이제 네가 널 죽이면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안타깝지만 용사님의 바램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네요."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이리나의 표정이 나를 도발해왔다.


"어째서?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았다거나 그런 변심은 아니겠지?"


"맞아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처음부터 죽을 맘이 없었다고 하던가!"


"처음에는 정말로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용사님과 여행하면서 점점 다른 마음을 품게 되더라구요."


여행 도중 이리나의 마음이 바뀐 거라고는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기습 당하고 다시 눈을 뜬 그 날, 그 이후부터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걸 그만두고 내게 호의를 보여왔다.


"서...설마 그런 이유로 변심한 거라고?!"


"네! 용사님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면서 제 목표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답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어떻게해서든 돌아가야겠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녀를 쓰러뜨리기 위해 나는 검을 꺼내들어 이리나에게 겨누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향한 야릇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용사님~♡ 제 손으로 마족들을 없애기 시작했을 때부터 용사님의 성장은 멈춰졌어요, 그러니 용사님은 저를 죽일 수 없어요."


"젠장......."


하지만 아직 내게 마지막 희망은 있었다, 나를 소환한 왕국에서 역소환 마법을 준비해주고 있을 터.......


"용사님? 잊으신 것 같은데 용사님의 의식과 저의 의식은 공유하고 있는 중이라구요?"


"뭣?!"


"그러면 어디 한번 확인 볼까요?"


이리나가 손가락 한번 튕기자 그녀의 머리 위에 영상 하나가 띄워진다.


영상 안에는 내가 이 세계에 오자마자 처음 봤던 왕국의 알현실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역소환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들은 보이지 않았고 왕과 신하들 밖에 없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 알현실 안에서는 나의 처분에 관해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으며 이내 그들의 방침 정해졌다.


마왕을 쓰러뜨리면 왕국은 마왕의 지배에서 해방이니 용사를 처형하고 마족들의 영토를 차지하자는 미친 결론.


"시발, 이런 거지 같은.......!"


"가엾은 우리 용사님♡ 제가 용사님 대신에 그들에게 벌을 내려드릴까요?"


다시 한번 이리나의 손가락에서 딱소리가 나자 영상 속의 왕국이 폭발하며 알현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지하기도 전에 절멸하고 말았다.


"아아...!!"


최강의 마왕이라는 별명은 허사가 아니였다, 이리나는 원한다면 내가 세상에 어디있든 찾아낼 수 있으며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없어지고 내 목숨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상, 나에게 남은 선택지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용사님."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자하는 욕망과 이를 위해 선을 긋고자 했던 의도까지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이 두 가지를 전부 의미없게 만들기 위해서 참아왔던 것이다.


"이제 저와 영원히 살면 돼요♡ 저희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요소들은 이젠 없어졌으니까요!"


왕좌에서 내려온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끌어 안는다.


예전과는 다르게 두려워진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듯이 내 몸에 강력한 전류가 흘러 들어와 마비 시켰다.


"그러면 안돼요~♡ 얌전히 있으셔야 제가 영원히 지켜드릴 수 있잖아요?"


실제로 용사의 상태이상 면역은 마왕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 동안 힘든 여행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용사님♡"


수마가 덮쳐오며 고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어 갔다.


상태 이상이 통한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그녀가 수면 마법을 쓴 것이리라.


저항할 수 없다.


어찌하여 나는 이런 세계에 오게 된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녀의 도움없이 성장해서 그녀를 쓰러뜨리고 국왕을 협박하여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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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기서 끝 아니고 마지막 후편도 있음.

이리나의 과거와 자살하고자 했던 이유, 그리고 얀붕이를 좋아하게된 이유까지 다 후편에서 서술할 거임


참고로 제목인 OOO에 들어가는 단어는 여마왕이고,

전편에서 그녀의 정체에 대한 떡밥도 조금이나마 던져놨으니 눈치 빠른 얀붕이는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함.


그리고 원래 일찍 써야했는데 이리저리 약속도 많고 일도 많았고 중간에 한번 소설 날려먹으며 멘탈 깨진 탓에

올리는게 많이 늦어지고 표현도 매끄럽지 않게된 점 사과하며 후편은 최대한 빨리 써보도록 할게.

마지막으로 후편에는 아주 오래간만에 야한 장면도 넣을 수 있으면 넣어보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