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바닥 없는 심해로 침식되어 사라지듯 공허한 울림 속에서 잠들었던 나날들.


하염없이 침전하는 느낌이 점차 사라지자 그동안의 기억이 그 틈을 비춘다.


“그렇게 불안정해 보이면서 우리의 실험에 참여하겠다고?”


“미셸, 만약 너가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말로 꼬드긴다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정말 있기나 해?”


너무나 일방적인 윽박지름에도 미셸은 차마 아무말도 하지못했다.


이윽고 그 기나긴 침묵을 깨뜨리고 미셸을 감싸주던 사람은 선배 연구원인 카르멘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 아인, 어린 나이에도 이곳에 들어온 게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는거야?”


이곳에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미셸 또한 카르멘을 좋아했다. 그것만큼은 가식이 아니었다, 그럴만큼 영악하지도 않았다.


허나 그렇게 모두가 아끼고, 아름답고 밝은 웃음으로 그들을 이끌던 카르멘이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미셸은 다시끔 이때 일어난 악몽을 꾸었다,


욕조가 카르멘의 피로 채워지고 바닥 역시 흥건하게 젖은 그날 이후 모든것이 잘못되었다.


비윤리적인 실험이 반복되고 그 끝에 미셸은 차마 그걸 보지 못하고 이 사실을 바깥에 밀고했다.


그리고 죄책감에 못이긴 그녀의 소식이 전해졌을때 분을 참지 못한 아인은 신문기사를 찢고 구겨버렸다.


그 기억과 더불어 수백개의 일들이 회상되었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내 꿈처럼 이지러졌다.


“내가 그때 생각을 바꾸고 끝까지 저들을 믿고 도왔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머리속에 각종 질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침대에서 깨어났다.


사서로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난 지금, 그녀가 알 수 있는것 하나는 이제 이곳 도서관의 층 하나를 관할하게 되었다는 것 뿐.


보이는 것은 바닥에 넓부러진 각종 책들과 별빛 마냥 수 놓아져 있는 전구들, 그 위엔 화려한 황금빛의 샹들리에가 천장을 비추고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도서관이라 했었지? 상황은 복잡하지만, 이 옷은 정말 예쁜것같네.”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을 상징하는 층 다웠다. 공간 내부는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에 있는 부드러운 분위기의 카페와 느낌이 흡사했다.


이곳의 광원은 전부 주홍빛을 비추는 전구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녀가 이곳을 둘러보며 망설이던 사이, 이곳으로 오고있는 짙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학이라... 도시와는 이렇게 안 어울리는 분야는 없을 것 같은데.”


처음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이윽고 잠들어 있던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알수없는 연유로 이곳에 들어오게 된 사람.’


호드는 그 검은 양복의 사내에게 차분히 인사를 건냈다.


“반가워요. 문학의 층을 담당하게 된 지정사서 호드예요.”


“그래, 난 롤랑이야. 도서관장을 여러가지로 돕게 됐지.”


실수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 분 역시 도서관을 만들게 된 원흉과 협력하게 된 사람이었다. 


이 일과는 무관했지만 새롭게 엮이게 된 낯선 외부인.


하지만 이미 끝나게 된 일, 거래를 했기 때문에라도 그를 도와야했다.


“...그렇군요.” 


이 작은 기류를 눈치챈 것 때문일까, 그 덕에 눈치 조금 보던 롤랑이 먼저 호드에게 각종 질문을 던지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너도 앤젤라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지? 언젠가 이거 풀릴 수 있긴 한 거야?”


호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적어도 지금의 분위기를 봐선 이곳의 사서들 모두 예전에 있었던 일 탓인지 경직된 듯 했다.


“대체, 녀석은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야?”


“…용서받지 못할 일을 했죠. 예전의 저와 같이 말이에요.”


롤랑은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쓰다 한숨을 내쉬고선 생각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아도 결국엔 잘 풀리겠지.’ 와 같은 생각을 자잘한 생각을 해대며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 이 도서관과 사서들 전부 뭔가 단단히 꼬여있다는 거 말이야.”


“...”


도서관장인 앤젤라 역시 그다지 마음을 열지않고 방관만 하는 분위기를 생각한 호드는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호의적이라곤 절대 말하지 못하겠죠. 그리고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보게 될 거예요. 이 거래에는 명확한 끝이 있으니까요.”


“이 거래에는 명확한 계획이 있고 그 길을 롤랑씨가 끝까지 함께 간다면 알 수 있겠죠.”


롤랑은 마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보다 힘이 빠졌는지 책상에 걸터앉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벌써부터 막막하다. 막막해... 적어도 도서관 내에서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안될까?”


“...롤랑씨가 가져다주는 책에서 저는 도시의 문학에 대해서 분류해 갈 거에요, 책이 쌓여가다 보면 궁금해 하시는 것을 알 수도 있겠죠.”


“그래 이렇게 된 거, 내가 파헤쳐 봐야겠지... 혹시 도와줄 수 있어?”


롤랑은 결과를 볼 수 있다 확신하는 호드의 말에 조금은 냉소적인 투로 부탁했다. 하지만 미약했는지 호드는 알아차리진 못했다.


“음, 일단은 제가 아는 것까진 최대한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같이 힘내봐요! 롤랑씨.”


“음... 아가씨, 나중에 종종 부탁해도 될까?”


롤랑의 조금 능글맞고 유한 태도 덕분일까, 어느덧 호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저 남자에게 일말의 궁금증이 생겨났다.


“네!... 얼마든지 편하게 부탁하셔도 되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마치 마음의 짐을 더는 듯 한 다정한 말씨에 롤랑 역시 거리감이 줄어든 듯 했다. 


호드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울렸다.


ㅡ ㅡ ㅡ


롤랑이 떠나고 정리하는것에 조금 많은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일까. 호드는 도서관의 빛의 힘을 이용해 갓 구운 크루아상과 달콤한 코코아 하나를 빼와 가볍게 식사를 마쳤다.


홀로 앉아서 여유롭게 마시는 코코아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 속의 장면과도 같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들어 생각이 정리되는듯 했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늘 상 이렇게 음식이 적힌 책을 가까이 두고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산책이라도 해보면서 생각이라도 정리해보는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걸어보니 수많은 책들이 꽃혀있는 책장 위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것이 마치 이 창대한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이 책들이 계단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각 층을 이어주는 복도는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했다, 이것 외에도 인과를 무시하는 마법같은 현상이 도서관 내부에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가리는 수많은 계단 뒤로는 한 사람이 움직이는것이 눈에 띄였다. 방금까지 만나서 대화까지 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아까의 궁금증을 차마 놓지 못하고 그에게 향했다.


“롤랑씨? 난간에 서서 뭐하고 계신가요?”


찬찬히 두리번거리던 중 근처에서 들려온 호드의 목소리와 그리고 갑작스런 빠른 재회에 놀랐던 롤랑은 이내 차분히 답했다.


“아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어, 내가 어쩌다 이런곳까지 오게된껄까 하고.”


방금도 분위기가 살작 가라앉아 있었지만, 푸념을 늘어놓는 롤랑의 표정은 호드가 보기엔 어둡게 내려앉았다. 


롤랑은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호드의 눈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세라도 고쳐잡는듯보여 왜인지 모르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저... 롤랑씨의 구체적인 사정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게 롤랑씨의 탓과 잘못은 아닌 거 아시죠? 부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말아주세요.”


“...아가씨와 비슷한 말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되게 묘한 기분이네.”


이윽고 잠시 굳어버린 표정은 금새 씁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롤랑씨. 그 분도 아마 당신의 행복을 바랄거에요, 앞을 보고 나아가란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거죠. 그러니 저희 같이 기운 내보도록 해요.”


똘망똘망한 아름다운 눈웃음을 머금고 나긋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래... 우선 나중에 보자고.”


“롤랑씨, 고민이 좀 해소되면 언제든 편히 와주세요.”


기품있는 맑은 목소리가 서러움이 깃든 남성을 잠시 붙잡았다. 봄바람과 같은 부드러운 기류가 분위기를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롤랑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답변도 하지 않은 채 처음과는 달리 말없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역시 단기간에 시답지 않은 잡담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가 되기엔 아무래도 무리겠지...’


호드 역시 나중일을 기약하며 그저 인사를 건낼 수 밖에 없었다.


ㅡ ㅡ ㅡ


실내는 포근한 느낌을 내는 촛불과도 같이 따스한 조명을 비추었다.


도서관 내에는 소소하지만 욕실도 있기에 나는 아까의 조금 부끄러운 감정을 억누르고자 황급히 따뜻한 물을 틀었고.


따뜻한 욕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끝내자 졸음이 몽실몽실 밀려오기 시작하니, 호드는 나지막히 하품이 나왔다.


수건이 부드러워선지 아니면 책을 하나하나 정리하는것에 오랜시간을 쏟은탓인지 나는 잠에서 깨길 위해 커피하나를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아직은 이렇게 사는게 어색하네..”


거울을 보아도 예전부터 겁쟁이었던 과거의 모습인 미셸과는 달리 지금의 단아한 귀족 아가씨처럼 치장된 호드의 모습을 봐도 되려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어린시절 둥지에 있는 저택에 차가운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호드는 마음이 답답해 창밖을 망연히 바라봤다.


“미셸, 내 앞으로 와 보거라.”


미셸의 아버지께서는 졸곧 미약하게만 보이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뒷골목과 외곽은 어떤 곳이지? 그동안 배운걸 앞에서 말해보거라.”


“아주 무섭고 흉측한 곳이요.”


“뒷골목과 외곽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의 말에 미셸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위압감이 넘치는 목소리에 미셸의 마음 속에선 수 많은 말들이 머리속에서 뒤죽박죽 섞여가는듯 했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해요...”


“그래, 잘했구나 미셸. 뒷골목과 외곽에 사는 벌래들이 되지 않으려면 착한 아이가 되어야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미셸은 이때부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마 아버지껜 저들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물을순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못미더웠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집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할 늦은 시간까지 아버지께 배운것들을 미셸은 가정 교사에게 배우며 계속 작은 목소리로 되뇌여야만 했다.


“그러니까.. 아까 그 페이지는 둥지에서 일어난 사건의 분기점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서...”


“하... 그게 아니라요 아가씨, 그 사건에서 일어난 핵심적인 일을 말해주셔야죠.”


미셸은 몇시간째 지속된 연이은 설명에 억울한 감정과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둥지에 사는 이들은 사교예절과 예법을 중시했고 그렇기에 주변인들은 열심히 따라오려던 미셸에게 눈초리를 줄 뿐이었다.


그 때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는지 거울을 보며 이따금씩 호드는 살짝 사서복 치마 양 끝을 벌리며, 인사 연습을 해보았다.


호드의 귀에는 아직도 불만을 품은듯한 아버지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쪽에서 다시끔 들려오는듯 했다.


“...그렇게 사니 만족스럽느냐?”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면 연구소에 발을 들이지 않았겠지, 호드는 그 목소리에게 슬며시 답을 했다.


“제가 선택한 결과이니 책임져야죠.”


어느덧 해가 이미 저물은 도시의 저녁 도서관에도 짙은 어둠이 깔렸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는지 큰 뇌우의 소리에 나의 등이 떨려왔다.


호드는 마침 깨어있는 걸 틈타 책을 읽으며 정리하러 공동 서고쪽을 향했다.


“이런 시간에 올만한 사람이 있었나?”


계단쪽에서 수군거리는 듯 한 소리에 호드는 호기심에 그쪽을 문득 바라봤다.


“아! 너구나, 반가워 호드.”


“정말 오랜만이에요, 호드씨. 당연하겠지만 깨어나고 처음 보는거니까요.”


그곳엔 역사의 층의 지정사서 말쿠트와 보조사서 제레미가 짙은 어둠속을 등진채 랜턴을 키고 책을 정리하고 있다.


말쿠트와 제레미는 호드를 반기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 호드씨, 혹시 저 책들 좀 들어주실수 있나요?”


“아 당연하지!”


사다리를 탄 채로 위에서 부탁하는 제레미는 몸만은 고정시킨채로 날 바라봤다.


호드는 여기에 온김에 거들자 생각해 흔쾌히 책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데 여기는 무슨일이야?”


어째서 이런 시간까지 책을 정리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호드는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도서관장이신 앤젤라님이 해코지 할까봐죠.”


“음, 그것도 있고 생각도 정리할 겸 우리는 산책하다 어느샌가 지금처럼 책을 보고있게된거지 아마?”


잠이 안와서 정리하려는 호드와는 사뭇 다른 이유였다.


작게 웃으며 책을 건내려던 그 순간, 호드는 순간적인 두통에 머리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도 생각보다 잦은 두통에 시달리던 탓일까, 너무 계단과 가까웠던 탓에 그녀는 그곳에서 굴러 떨어졌다.


“어어? 안 돼!”


말쿠트의 목에서 절박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호드가 계단에서 떨어지고 있던것을 붙잡으려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호드는 그 순간까지 이상하기만 했다. 왜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왜 아프지 않았을까? 


그건 롤랑이 호드를 밑에서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아가씨 조심하셨어야죠.”


순식간에 상당히 부끄러운 자세가 되어버린 바람에 호드는 위험했다는 것도 거의 잊은채 급히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놀라서 급히 내려온 제레미와 말쿠트도 그 광경에 차마 입을 다무지 못했다.


“저 롤랑씨... 고맙긴한데.. 이제 내려주실래요?..”


그렇게 이번일은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 나올법한 장면을 만들어버린 듯 한 헤프닝으로 끝났다.


ㅡ ㅡ ㅡ






라오루 한창 즐겁게하고있을때 적었던 소설인데 고심끝에 올려보았음, 소재는 호드랑 롤랑의 대화에서 둘이 꽤. 어울린다 싶어서 적어본 로맨스고 재미있고 반응좋다면 다음편들도 적어보겠음